戰爭나면 우리가 이길거 같은가?
우리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퍼져있는 左翼 간첩, 프락치들이 가만히 있을거 같은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戰爭은 안된다. 平和를 원한다. 같은 동족끼리 총쏘지 말자. 한국정부가 문제다. 군대가 뭐가 문제다. 넌 나쁜 놈이고 난 좋은 놈이다................" 별의별 생트집을 잡으면서..온 社會를 분탕질 쳐 놓을텐데...軍隊 내부도 마찬가지로 같은 영향을 받아 混亂에 빠질테고...
우리가 軍事力, 經濟力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北韓보다 앞서니까..
一方的으로 우리가 이길 수 있을거 같은가? 과연 그럴까?
우리 軍隊와 政府는 우리가 믿고 있듯이 健康할거 같은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말씀이다...
우리사회에 빨갱이새끼들이 얼마나 있을까 ? 궁금허지??
http://interok.tistory.com/1768
戰爭이 나거나 非常時에는 그들이 本色을 드러내서 구분이 가능하니까 다 잡을 수 있을거 같지?
천만에...지금이나 그때나 그들 行態는 별반 차이 없을 것이다?
지금도 이미 다 本色을 드러내 놓고 대 놓고 활개치고 있는데...뭘..아무런 制止도 없이 게거품물고 빨짓하는 자들은 다 진보니 민주니 하면서 모두 民主鬪士가 되어 있는데...뭘...
지금 이 상태에서의 戰爭은 과연 勝算이 있을까..
朴正熙나 全斗煥 前 대통령같이 憂國衷情이 확고한 右翼이 革命的 執權을 하지 않는 이상 과연 勝算이 있을까..
아래 같이 수 많은 사람이 죽고 나거나,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판이 끝나봐야 정확히 알게 되겠지...
과연 얼마나 많은 뻘갱이들이 분탕질을 쳤던건지...
이것이 다 무엇때문인것 같은가! ...
한심하고 멍청한 사이비 右派들과 함께 프락치, 뻘갱이들의 멍청한 合作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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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獨의 첩자들·越盟의 프락치들 |
written by. 정준 <juunjuly@hanmail.net> |
이철우(李哲禹) 의원의 조선노동당 가입 논란이 여야간의 전면전으로 치닫을 기세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과도 맞물려 있어 자칫 당의 정체성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진실 게임'과 '색깔 공방'은 앞으로도 한동안 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독일과 월남은 한반도와 함께 과거 냉전시대의 표징으로 남아있던 분단지역 이었다. 이들 국가의 과거 정보활동과 첩자 또는 프락치전술이 '통일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독일과 월남이 겪은 '과거'는 탈(脫)냉전시대에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에게 거울이 될 것이다.
독일 통일 이전 동독(東獨)에는 슈타지(=Stasi·Staatssicherheit: 국가안전부)라는 정보기관이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에 대한 정보공작을 위해 별도로 HVA(중앙정보본부)라는 담당기구를 두고 있었다. HVA는 서독의 정치인을 매수하여 서독의 주요 정책을 동독에 유리하게 이끌고 재계와 노동계 학계 종교계 학생운동세력 등에 효과적으로 침투하여 그 영역을 확대 또는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해왔다.
통독 후 슈타지의 비밀문서를 분석한 결과는 놀라웠다. 서독(西獨)에서 활동한 동독의 고정간첩은 약 2만∼3만명으로 추산됐으며, 이들의 활약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서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였다. 통독 이전의 과거청산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서독 총리 브란트의 보좌관으로 들어가 암약했던 위장간첩 기욤은 동독의 현역 육군 대위였다. 그는 서독으로 탈출한 것처럼 가장한 후 장기간의 잠복기를 거쳐 당국의 감시망을 벗어난 후 관계에 진출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빌리 브란트는 서독총리직을 도중하차했다. 74년 4월의 일이다.
브란트가 동서독 정상회담을 갖고 양독(兩獨)관계의 물꼬를 튼 지 4년만의 일이었다. 그는 서독역사상 동독정권에 가장 호의적인 지도자였는데도 동독은 그의 최측근에 간첩을 심어두고 있었다. 당시 서독 내 동독 첩자는 약 1만1천명이었다. 브란트는 동독의 배신에 뒤늦게 치를 떨어야 했다.
독일 의회에는 한때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의원들이 슈타지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 정치인들의 나치 전력(前歷) 축첩(蓄妾) 부정축재 등에 연루된 약점을 잡아 협박하거나 매수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프락치로 만들었다.
문제는 슈타지의 활약상- 그 자체보다 이 같은 활동이 가능했던 서독 사회의 전체적 분위기에도 있었다. 당시 서독 지식인사회는 동독 편을 들어주고 동독을 인정해야만 '진보적인 인사' 또는 '진보적인 사고'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독일은 1969년부터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에 대해 '접근을 통한 변화'를 목표로 동방(東邦)정책을 채택해왔었다. 우리의 '햇볕정책' 모델이 바로 이 정책이었을 것이다. 이 동방정책으로 동독에 대한 경계가 풀려나면서 동독은 서독의 관계와 산업계 전반에 프락치를 침투시켜 폭넓은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슈타지'(Stasi)는 94,000명의 직원 외에 174,000명의 비밀 첩보원들을 거느리고서 6백만명을 사찰해온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체였다. '슈타지'가 도청한 전임 독일수상 콜에 대한 전화통화 기록(집무실 및 사적공간 포함)만도 7천 페이지에 달했음이 이를 잘 말해준다.
월맹(越盟)에 패망하기 이전의 월남(越南)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월남전 당시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여론을 자극한 명연설이 있었다.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前)해인 1967년 9월3일 월남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11명의 입후보자 가운데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그 명연설의 주인공이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는 선거유세에서 이렇데 외쳤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 메시지인가. 미국 내 반전(反戰)운동의 불을 지핀 것은 이 연설이었다. 그가 월맹측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 등 수많은 정치인·관료들도 같은 프락치였다.
호치민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공산당 프락치들을 월남 곳곳에 심어나갔다. 이들 프락치는 호치민의 베트남 공산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에 의해 1962년 1월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월남공화국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 각 기관과 군 최고사령부 및 일선 전투단위 부대에까지 베트콩의 조직과 정보망이 거미줄같이 구성되어 국가최고기밀까지 베트콩과 하노이정권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월남정부의 정치 외교 군사전략은 이들 프락치에 의해 허점이 찔리면서 결국 베트콩과 월맹군의 대공세로 이어졌던 것이다.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때마다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다시피 했다. 그 여파로 대공(對共)전문가들이 대거 쫓겨나고 말아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물론,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도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통독 이전 서독 사회 도처에 동독의 첩자들이 침투하여 정책결정을 오도했고, 월남 역시 결국 외적(外敵)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내부의 갈등과 반란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바로 이 대목이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이다. (konas)
정 준 (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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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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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90%를 정부가 지배했지만…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 국토 44개 성(省) 중 12개 성의 곳곳에만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 지역, 그리고 4.5%는 공산측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내(內)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그들은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월맹 경제 원조도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전 국토를 휩쓸었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 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결국이 선거가 최후의 자유선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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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南(베트남)敗亡을 쌍둥이처럼 똑같이 따라가는 21세기 大韓民國의 亡國스토리! 눈이 있으면 읽어보라! 똑같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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