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평탄하고 유복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인지 모르나 좌절과 실의 속에 살아온 사람일수록
지난 과거는 아쉬움으로 찬다..
개인사가 그럴 진데 국가라고 그 범주를 벗어나라는 법은 없지 않나 생각한다.
지난 시절 김대중 노무현을 극복하기 위해 로마史를 천착하며 공상적 卓上革命을 몽상하였듯이 60년 분단사를
생각하면 더욱 역사의 가정이 내 머리를 지배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래 오랜 시간 참아왔던 또 하나의 몽상을 그려본다,
만약, 일본이 한 달 아니 한 주 만 일찍 항복하였더라면 韓半島
分斷이란 비극은 없었으리라!
그런 전제에서 나는 긴 세월 假定의 歷史에서 방황해 왔다.
그런 나를 몽유병자라 비웃어도 굳이 거부할 뜻이 없다.
*假定의 歷史는 이렇게 시작된다
東京에서 천 2백 킬로 비행기로는 지근거리의 硫黃島(이오우 지마)가 美海兵隊에 함락된 이듬해
1945년 正月 초하루 0시 5분 도쿄일원에 부~ 부~ 사이렌이 울렸다. 경계경보였다.
한참 뒤 새벽 3시경 부 부 부 다급하게 적기내습경보가 울리고 도쿄만 연안 쪽 일대에 소이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도쿄 시민들이 새벽잠 자다 당한 이례적 공습이었다.
소이탄은 도쿄시 변두리에 모조리 투하되고 불길은 중심부로 번져갔다. 거의 도쿄 전역이 불바다로 변했다.
일본에 대한 조기 항복을 압박하는 예고탄이었다.
이에 앞서 사이판島로부터 발진한 B-29에 의한 도쿄공습이 시작된 것은 1944년 11월 1일이었다.
유황도전투가 게속되는 동안 美合參은 대책마련으로 유럽전선에서 독일공습작전에 대활약을 한 커티스 르메이 중장을
西태평양 마리아나群島(괌 사이판 테니안 島 등) 지구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 르메이 중장은 야간 저공비행에 의한 소이탄공격을 구상했다.
일본의 가옥은 대부분 목조인 점에 착안한 항복 압박전술이었던 것이다.
1945년 2월 4일부터 8일간 우크라이나의 얄타에서는 美英蘇 정성회담이 열렸고, 조만간 독일이 항복을 하면
소련이 對日戰에 참전하기로 3거두가 합의한 바 있다.
독일의 항복 후 3개월의 준비기간을 두고 소련이 극동전선에 참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탈리아는 벌써 2년 전에 항복하였고 독일의 항복이 5월 7일이며 소련이 일본에 공격을 개시한 것이
8월 9일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약속은 지켜진 셈이다.
바로 이것, 일본의 항복 6일 전에 소련이 약속대로 대일전에 참전을 했다는 사실이 한반도 운명에 치명타가 되어
우리는 이 숙명적 아이러니를 안은 채 신음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假定, 만약, if라는 접속사가 웅변을 해야 한다.
1945년 4월 1일 미 극동군 대부대가 전함 천 3백 척, 항모 함재기 천 727 대, 상륙군 18만이 일거에
오키나와(沖繩) 섬 상륙에 성공하고 일본 본토 상륙을 누 앞에 둔 가운데 物心 공히 피페 해진 일본은 전의를 상실해 갔다.
무너져 나간 주전파 도죠(東條)내각에 이어 고이소(小磯)내각까지 해산, 천황의 終戰 의지를 받들어 전후처리담당으로
스즈키(鈴木)내각이 들어섰으나 외형상으로는 本土決戰에 임하고 있었다.
1945년 4월에는 13일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병사하고, 28일에는 이탈리아의 무소리니가 국민들에 의해 거꾸로
매달려 총살되고, 소련군과 베를린市街戰이 벌어지는 속에 30일에는 지하벙커에서 총성과 함께 히틀러가 자결을 하는
등 교전국 거물들의 연쇄 사망사건이 잇달았다.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州 알라모고드에서는 인류 최초의 原爆實驗이 성공했다.
TNT 2만 톤에 해당하는 파괴력을 가진 5톤짜리 원자폭탄이 단숨에 폭발하는 순간 이를 지켜본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 박사는
말했다.
<전쟁은 이것으로 끝이다>
당초 아인시타인 박사가 루즈벨트 대통령에 권유해 20억 달러를 투입, 진주만기습 즉시 원폭개발에
착수하여 4년 만에 그 성공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한편 루즈베엘트 서거에 따라 대통령에 취임한 트루만과 처칠 스탈린이 7월 17일 포츠담에서 3거두화담을 갖고
26일에 이른바 일본에 항복을 권고하는 포츠담宣言을 발표한다.
7월 27일 포츠담선언을 받아본 쇼와(昭和)천황은 <이것으로 전쟁을 그만둘 길이 열렸군. 원칙적으로
수락할 도리밖에 없잖나>하고 외상 도고(東鄕)에 분부했다.
한편 일본정부는 한 달 전 소련에 종전협상 중재를 의뢰하고 소련의 가부 회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명예로운 항복조건을 이끌어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국체 天皇制까지 폐하게 되는 무조건항복은 받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포스참선언 수락 거부의 참뜻이었다.
28일 스즈키 수상은 기자회견을 갖고 <그 공동성명은 카이로회담(1943년 11월,루즈벨트 처칠 장개석 三者회담)의
복사판으로서 정부는 아무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묵살해버린다. 우리는 전쟁완수에 매진할 따름이다>
고 발표했다.
해외방송망을 통해 세계에 전해지고 외국신문들은 <일본이 포츠단선언을 reject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포츠담선언이 나오기 전 7월 24일에 이미 그로브스 소장 기안에 마샬 참모총장이 승인하고 아놀드 대장이
서명해서 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 장군에 하달된 원폭 투하계획을 포츠담에 체류 중인 트루만 대통령 재가까지
받아놓은 상황이었다.
1945년 8월 3일 이후 육안으로 폭격실황을 관찰 할 수있는 날씨에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히로시마(廣島) 고구라(小倉)
니기다(新瀉) 나가사키(長琦) 중 택일 투하하라고 되어 있다. 소련의 참전 전에 원폭 투하를 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의 아침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무더웠다.
7시 9분에 경계경보가 울리고 B-29 3대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려 해제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약 40분 후 8시 15분 B-29 에뇰라 게이(조종사 어머니 이름을 명명)號로부터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폭탄은 지상 약 5백 70미터 상공 히로시마시 한복판에서 폭발했다.
직경 백 50미터의 화염이 시 상공을 덮고 爆心地로부터 반경 5백 미터 이내의 사람과 가옥은 3천도가 넘는 고열에 타버렸다.
종전 후 11월 시점에서 사망 7만 1천 150명, 행방불명 1만 3천 983명, 부상 3만 7천 425명으로 집게 되었다. 그
리고 이후 원폭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시달리다 죽은 자까지 포함하면 5톤짜리 원폭 하나에 희생된 인명만 수십만에 이른다.
이제부터 소련의 동향이 문제된다.
포츠담으로부터 모스크바에 돌아온 날 밤 깊은 잠에 떨어져 이튼날 아침에 일어난 스탈린은 히로시마의 원자탄
피폭 보고를 받고 <소비에트군은 8월 9일 만주 국경을 돌파하여 공격 개시하라>는 극비명령을 극동군에 내렸다.
소련군의 당초 만주침공계획은 8월 하순이었으나 미국의 원폭 제조 진전상황을 偵探하고 앞당겨 8월 15일로 세웠다가
다시 11일로 정정했다. 그러나 일본에 원폭투하 보고를 받는 즉시 서둘러 9일로 다시 앞당겼다. 일본의 항복 6일 전이다.
극동에서의 전승국 이득을 얻자는 속셈이었다.
그것이 바로 한반도 화근의 시작이다.
여기서 역사의 假定, 萬若, if가 역사의 실제 상황을 역전시켜 줘야하는 의무가 생긴다. 逆說인지 몽상인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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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죽었다면....
둘째, 일본이 7월 27일 포츠담선언을 수락, 무조건항복을 했다면....
세째. 미국이 7월 16일 원폭실험 성공 즉시 일본에 원폭 투하를 했다면....
네째, 소련의 대일참전 8월 9일 이전에 일본이 항복을 했다면....
다섯째, 대전 중 미국 지원 하에 광복군이 양성되어 먼저 한반도에 진주해
일본군 무장해제를 하고 즉시 정부 수립을 했다면....
더 많은 가정이 있을 수 있으나 위 다섯 가지 가정 중 하나만이라도 실제사가 되었다면 한반도 분단의 비극은 물론,
소련의 한반도 북반부 진주가 과연 허용 되었으며 더구나 소련 극동군 정찰부대 대위 金成柱를 金日成으로 둔갑시켜
청진항에 상륙해서 평양으로 데려 왔겠는가 등등 전혀 가당찮은 이야기들일 것이다.
60 여년 모진 시련을 극복하고 이만한 나라를 거두어 온 애국인들의 뜻을 짓밟고 요즘 되어가는 정치 꼬라지를 보면서
오죽하면 이런 궁상맞은 이야기를 지꺼리겠는가 의식 있는 자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왜 이런 글을 쓰는가?
이렇게 회고하고 가정이라도 하지않고서는 68년 체험의 현대사가 나를 용서치않기 때문이다.
진정 迷夢에 헤매는 愚衆은 깨어나라!
2013.8. 14. NK-Watcher 안중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