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文鑑賞

이대근 - 한글專用과 出版포퓰리즘

超我 2009. 7. 3. 16:04
이대근 - 한글專用과 出版포퓰리즘
李 大 根
成均館大學校 敎授 / 本聯合會 指導委員


政治學에 “포퓰리즘(populism)”이란 말이 있다. 文字 그대로 ‘人民主義’란 번역이 제격이겠지만, 그 외에 ‘民衆主義’, ‘大衆追隨主義’, ‘人氣迎合主義’ 등으로도 번역된다.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그 語源을 따지자면 일찍이 1890년대 美國의 共和-民主 兩黨構造下에서 勞動組合이나 農民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人民黨(populist party)’이란 제3의 政黨이 출현되면서부터라고 하지만, 아무튼 그 본래적 意味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共同利益을 저버리고 大衆의 무분별한 慾求나 또는 일부 集團的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원칙 없는 政治理念 내지 行爲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또한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과정으로 소급해 볼 수 있다. 맑시즘에 따르면, 社會主義는 고도로 발달한 資本主義 다음 단계에 도래한다는 것인데,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農奴制社會나 다름없었다. 그런 단계에서 사회주의 革命을 수행하자니 자연히 主體세력간에 이념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 인민대중인 農民층이 원하는 방향으로 革命을 끌고 가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프롤레타리아 前衛黨이 人民을 추동하면서 혁명을 앞장서 끌어가야 한다는 입장간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레닌 등의 혁명주체세력은 前者를 ‘人民追隨主義’란 이름으로 잘못된 노선으로 규정하고, 後者의 길을 택하여 혁명을 이끌어갔다.
戰後 제3세계 후진국에서의 포퓰리즘은 南美의 아르헨티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의 穀倉이요 세계 7대 富國에 들던 아르헨티나가 어떻게 하여 오늘날 經濟가 저 모양으로 되었는가. 여러 가지 理由를 들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1940년대 후반에 등장하는 후안 도밍고 페론政權의 책임, 곧 그의 오랜 포퓰리즘政策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國庫를 풀어 대중의 人氣에 迎合하는 무원칙한 善心政策의 결과라는 것이다. 오늘날 포퓰리즘 하면 곧장 ‘페론니즘’을 상기할 정도로까지 된 것이 바로 그를 말해준다.  

韓國의 경우는 어떠한가. 1990년대 들어 소위 민주화정권이라는 金泳三-金大中政府를 지나고 지금의 盧武鉉정권에 이르면서, 政府가 하는 일이 갈수록 國家의 根本을 흔들면서 大衆的 요구와 그들의 人氣에만 영합하게 되면서 포퓰리즘이란 用語가 人口에 膾炙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과격한 노동자파업에 휘말려 전체 國民經濟 이익을 도외시한 채 무조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든가, 農民層의 이해관계에 얽혀 ‘韓-칠레 FTA’ 國會批准을 지체시키게 된 일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大衆的 人氣迎合政策은 이들 노동자, 농민의 요구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각종 시민운동단체(NGO)의 반대로 ‘새만금사업’이나 ‘위도 核폐기시설’ 등 국가적 사업이 중단된다든가, 심지어 사회적 弱者라 하여 女性의 權益 옹호를 앞세운 갖가지 ‘女性포퓰리즘’ 현상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으로 파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사회 도처에 포퓰리즘的 현상이 만연되고 있는 가운데, 필자는 우리의 語文生活에서 漢字를 추방하고 한글만을 專用하게 된 것도 일종의 이 포퓰리즘적 産物로 보고 싶다.
돌이켜 보면, 1968년 朴正熙 대통령이 한글전용정책을 펼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한글만으로 글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누구나 자기 專攻이나 글의 성격에 따라 필요한 만큼 漢字를 混用코자 하였다. 그리고 新聞이나 雜誌 등에서도 쉽사리 한글전용을 받아드리지 않고 필요한 만큼 漢字를 함께 써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들어 정치적으로 소위 民主化 熱風이 불면서 사정은 돌변하였다. 全斗煥정권의 등장과 함께 社會主義 理念書籍에 대한 통제가 풀리면서 우리의 出版文化에는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많은 사람들이 出版業에 뛰어들었고, 그들은 처음부터 일반서적의 出版은 眼中에 없고 오로지 사회과학 관련의 ‘理念書籍’ 출판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들은 당연히 책의 독자층을 學生이나 노동자, 농민 등 일반대중으로 삼았고, 또한 그들에게 책을 많이 읽히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읽기 쉽게 ‘한글’로만 책을 써야했다. 따라서 1980년대 한국 출판계에서의 ‘한글專用主義’는 이처럼 출판업을 통한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1980년대 이러한 이념서적을 만들어 보급한 운동권 出版人이나, 그 후 出版社 收支관계로 漢字 사용을 극력 기피해 온 出版業界의 영리적 動機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책을 집필하는 사람, 곧 著者의 執筆姿勢이다.
무슨 책이든 책을 집필하는 사람은 일단 知識人일 터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책이 한글專用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출판사측의 한글專用 요구에 그렇게 순순히 넘어갔는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漢字를 사용하는 조건이라면 책을 내주지 않겠다든가, 漢字를 섞으면 책이 덜 팔려 印稅수입에 영향을 미친다는 등의 출판사측의 주장에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면, 그들 역시 출판업계 이상으로 오늘의 이 잘못된 한글전용 出版文化에 무거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漢字를 섞으면 책이 안 팔린다, 讀者의 수준에 맞춰 책을 써야 한다는 등 수준 낮은 독자에 영합코자 하는 韓國 출판업계의 태도,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出版포퓰리즘’이 아니고 그 무엇인가. 또한 이러한 出版업계의 이러한 포퓰리즘적 요구에 쉽게 타협해준 지식인층(책의 著者)도 한글전용을 가져오게 한 共犯이 아니겠는가. 만의 하나 그들이 자기 책을 못내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그러한 '더러운 타협'(dirty negotiations)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잘못된 한글專用 출판문화가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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