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종래의 言語學說에 대한 先入觀은 時間과 더불어 민간 迷信처럼 頑固해진다. 부룸필드/美
사람은 누구나 言語에 대한 기초지식을 학교에서 받는다. 이것으로 言語觀이 형성된다. 언어관은 곧 世界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학교는 언어를 誠實하고 精確하게 옳게 가르쳐야 한다.
言語學이 아직 언어 현상의 핵심에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에 있으며 수많은 비과학적인 俗說이 定說처럼 버티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사회적 문화적 背景이 아주 다른 西歐語 중심의 이론을 무조건 따라서도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대단히 위태롭게 가르치고 있다. 특히 한글전용을 찬양하기 위한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으니 한심하다.
국어지식의 기준이 되고 있는 고등학교 文法 교과서가 문법을 벗어난 特異한 주장 밑에 편찬되어 있다. 첫머리에 [문법은 흔히 ‘문장을 구성하는 법칙’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책에서는 ‘언어를 운용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원리’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여러 가지 원리가 무엇인가 보았더니 漢字廢止를 정당화하는 설명이 대부분이었다. 迷信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확신을 학생들에게 가득 심고 있다. 다른 교과서도 일반 시중에서 판매하는 관련 서적도 대개 이 잘못된 언어관 위에 세워져 있다. 대표적인 迷信 중 우선 두 가지를 설명하겠다.
미신 1. 文字는 언어를 표현하지 않는다. ← 누가 믿나.
미신 제1호는 文字가 언어의 表現과 認識에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문법 교과서가 이렇게 시작되고, 이 기초 위에서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1장 첫 줄 ‘길잡이’에 [언어는 내용과 형식을 갖춘 하나의 기호이며 규칙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하나의 체계이다](p.10)라 했고 곧 이은 本文에 다음 설명이 있다.
[모든 기호에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고 그것을 실어 나르는 ‘형식’이 있다. 언어의 경우, 내용은 ‘의미’이며 형식은 ‘말소리’이다. 이 의미와 말소리의 관계는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언어로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언어 기호의 말소리와 의미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p.13).
6장 ‘의미’에서도 비슷한 설명을 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말소리와 의미로 이루어져 있다. 말소리는 언어의 형식이며 의미는 언어의 내용이다. 그러나 말소리와 달리 의미는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이 ‘길잡이’에 이어 本文 첫마디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말소리와 의미로 이루어져 있다. 말소리는 언어의 형식이며 意味는 언어의 내용이 된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없다면 그것은 이미 언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이 의미라는 것은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자마다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다.](p.196).
이상의 설명을 고등학교 학생이 어떻게 이해할까? 敎師는 또 어떻게 알아서 어떻게 설명할까? [선생님, 왜 문자가 필요 없어요], [형식과 내용이 어떻게 동전의 앞뒤처럼 같이 있습니까]. [동전의 앞뒤와 같다고 하면서 서로 필연적 관계가 없다고 했는데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또 [무엇을 언어라고 합니까.] 등등 질문 할 것이다.
敎科書를 편찬한 사람들은 專門家 중 專門家이고 많은 토의를 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결론을 맺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漢字를 없애는 理論으로서 適合했을지는 몰라도 한글도 함께 없앤 이론이 되고 만 것이다.
위와 같은 質問에 대하여 어떻게 解明할 것인가? 핵심 질문인 문자의 존재를 否認하는 데 따른 證明이나 合理的 이유 설명을 아무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언어에 대한 槪論書에서도 대개 앞 부문에서 言語를 記號의 일부라고 단정하고는 그 다음 일반적 설명에서는 記號學的으로 설명한 것이 거의 없다.
著名한 전문가의 책 첫머리에 이렇게 나와 있다. [言語는 일정한 意味를 어떤 發音으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인 意味와 형식인 發音은 일련의 약속과 규칙으로 맺어졌으며, 그 意味나 發音이 결여된 言語는 성립할 수 없다](國語意味論, 金敏洙, p.2).
중학교 2-1 ‘생활 국어’에도 있다. [언어는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지하철 전동차의 소리와는 달리 뜻이 있는 말소리이다(p.68).]
언어의 표현수단을 말소리 하나로 限定한 것은 다음의 ‘미신 2’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西毆語의 記號學的 설명에서 나온 특수사정이 빚어낸 것으로서 인류의 普遍的 기준이 아니며 西歐語의 현실로서도 받아드릴 수 없는 생각이다.
言語를 記號의 일부다 ―라고 해서 언어를 설명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기호가 언어다― 라고 해서 기호가 설명되지도 않는다. 더욱이 意味와 音聲이 함께 있음으로써 文字가 필요 없다는 근거가 전혀 없는 설명을 한국 언어학의 定說이 되게 한 사태가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어찌 되었건 文字 없이 언어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문자의 존재를 否認하는 미신을 더 이상 교과서에 박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신 2. 文字는 音聲을 적기 위해 있다 ← 아니다. 문자와 음성은 相互 補完한다.
1) 相互 補完
두 번째 미신은 위의 문자의 완전 無視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文字가 있고 이것이 言語를 표현하기는 하되 직접 하지 못하고 음성을 대신 표기하는데 그친다는 것이다. 문자의 존재를 否認하는 것에 비하면 사실에 가깝지만 역시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말은 원래 음성으로 하는 것이다. 文字는 이를 기록하는 하나의 手段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漢字使用이 끼친 功績과 害惡”이라는 논술의 첫 마디다.(國語와 民族文化, 姜信沆, p.314)
[흔히 언어기호는 문자로 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文字는 음성을 시각적으로 적어 놓은 하나의 手段에 불과한 것이다. 世界에는 文字가 없는 言語가 얼마든지 있다. 어린이들은 文字를 모르고 훌륭하게 말을 한다. 文字는 언어에 있어서 부차적인 존재다.](言語와 生活, 南基心, p.76)
어떻게 이럴 수 있나? 文字가 音聲보다 아주 늦게 出現했으며 세계의 대다수 言語가 文字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 및 TV 등에 의한 音聲媒體의 확대 등으로 文字가 音聲에 從屬된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韓國語를 비롯한 大型 언어의 전체적 언어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일반적으로 눈의 식별능력이 귀의 식별능력보다 약 백배정도나 높다고 한다. 귀가 약 3백 정도를 구별하는데 비하여 눈은 3만 정도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사실은 音聲과 文字는 둘 다 뇌의 활동 결과인 언어를 각각 다르게 밖으로 表出하는데 表出되기 전 뇌에서 긴밀한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文書를 앞에 두고 “文字는 音聲을 적기만 한다”는 설명에 納得할 현대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2) ‘소쉬르’의 주장
현대 언어학의 기초를 세운 스위스의 ‘소쉬르(Saussure)’의 대표적 설명을 보자. [言語와 文字(쓰여진 형식)는 2개의 전혀 별개의 기호체계다. 後者가 존재하는 唯一한 이유는 前者를 표기하는 것이다. 언어학 연구의 대상은 文字로 쓰여진 語와 말로 표현한 語와의 결합이다--라고는 定義되어 있지 않다. 말로 표현된 語 만이 대상이다.(강의록p.24)]
이렇게 極端的 表現을 한 것은 그가 당시 西歐 言語學이 문자에 너무 집착하여 살아 있는 言語를 모두 돌보지 않는 데 반발해서라고 한다. 당시, 19세기 후반에 言語를 文字로부터 해방하고 살아 있는 모습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립되어 있었다. 희랍시대로부터의 논리적 文法學의 규범과 논리의 속박, 제약으로부터, 그 후의 文獻學에서 어려운 옛 碑石의 문자를 解讀하는데 열중하는 世態를 비판하고, 언어학의 대상은 고전적 문자가 아니라 실제 사용하고 있는, 살아 있는 언어라야 한다. 살아 있는 言語는 당연히 文字가 아니라 音聲이다. 音聲이 일단 文字로 쓰이고 나면, 文字는, 진정한 意味의 언어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의 과격한 주장이 언어학의 연구태도에 대한 불만에서 온 것이지 문자를 무시한 것은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현실은 엄연히 문자가 언어표현의 主役이며 知識社會로의 熟達이 높아 갈수록 그 비중이 커가고 있다. 인터넷도 문자, 문장의 往來가 중심이다. 더욱이 漢字로서 수 천년에 걸친 방대한 文化資産을 다루는 文字學을 ‘소쉬르’가 알고서도 그런 주장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을 오늘날 이 땅의 言語敎育에서 현실에 반대되는 것인 줄 알면서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
3) 音聲과 文字의 역할
음성과 문자는 분명히 다르며 대충 다음과 같이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Writing Systems, Coulmas, p.11)
音聲(Speech) |
文字(Writing) |
連續(continuous) |
不連續(discrete) |
發話때만 有效(bound to utterance time) |
시간 制約 없음(timeless) |
전후 상황에 左右됨(contextual) |
獨立적임(autonomous) |
곧 사라진다(evanescent) |
永久的으로 쓰인다(permanent) |
귀로 듣는다(audible) |
눈으로 본다(visible) |
소리로 만든다(produced by voice) |
손으로 만든다(produced by hand) |
*無意識 표현(unconscious) |
*意識的 표현(conscious) |
이 두 수단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文字가 음성을 대신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서로가 補完하여 언어의 표현을 슬기롭게 한다. 음성은 언어의 波動, 문자는 언어의 粒子라고 볼 수도 있다.
표에 있는 기능은 *표만 제외하고 모두 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언어학은 腦의 抽象的 개념체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이 표는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자가 음성에 從屬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다.
4) 한글맞춤법이 문자를 음성에 從屬시켰다
교과서가 “문자가 음성을 적기 위해서만 있다”고 잘못 굳힌 뿌리에 ‘한글맞춤법’이 있다. 한국어를 表記하는 방식을 정한 것이므로 [韓國語正書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國語正書法], [國語表記法] 또는 [國語綴字法] 등으로 부를 수도 있다. 왜 언어가 아니고 글자의 맞춤법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한글이 한국어의 별명이 될 수 없다. 한글은 글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글로 표기하는 법이라고 이름하였으니 한글이 한국어를 가리키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漢字/漢字語가 대상에서 源泉的으로 제외되고 말았다. 痛歎할 일이다.
문법에서 한글맞춤법(p.258) 설명을 이렇게 했다. [‘한글 맞춤법’이란 우리말을 ‘한글’로 적을 때 지켜야 할 기준을 정하여 놓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말”은 ‘말’ 즉 音聲이다. 그러니 우리말을 한글이란 표음문자로 표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것이 모든 국민의 言語觀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교과서도 음성인 것을 문자로 옮겼고, 法律도 음성인 것을 문자로 옮겼으며 신문, 서적 등 모든 文書가 음성을 직접 또는 녹음테이프를 통하여 옮겨진 것인가? 이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이 迷信을 추방해야 健全한 言語共同體가 된다. 국어 교과서에 속지 말자.
孫元日
高麗大學校 經濟學部, 동 大學院(경제정책전공)卒. 經濟企劃院 경제조사과장, 경제기획관. 대한항공 상무. 아시아나항공 상임고문. 액톤컴퓨터 창립사장. 저서 「시스팀 경영」「정보이야기」「정보화 사회의 길목에서(공저)」「새 世代 새 文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