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文鑑賞

中國의 固有名詞는 漢字로 써야 한다

超我 2009. 9. 3. 17:52
中國의 固有名詞는 漢字로 써야 한다
 
宋在祿
仁荷大學校 名譽敎授 / 本聯合會 指導委員


中國의 人名 地名을 ‘선민쭝’, ‘짱꿰화’, ‘산시’省, ‘장짜’縣이라고 現地音 아닌 現地音으로 적으면 누구인지 어느 고장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漢字로 쓰지 않으면 그것을 引用하여 글을 쓰려고 해도 活用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산시’省이라고 하면 ‘山西’省인지 ‘陝西’省인지 區別할 수 없고, ‘짱꿰화’도 ‘張貴華’인지 ‘莊桂花’인지 아니면 ‘江’氏인지 ‘姜’씨인지 조차도 區別할 道理가 없다.


茶에 관한 情報를 얻기 위해 우리말로 된 資料를 뒤지다보니 “여러 문헌에는 몽정차에는 뇌명, 무종, 석화, 감로, 자설, 백호, 미아, 황아, 복백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런 情報는 아무짝에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中國에 가서 “뇌명, 무종, 석화…”해봐야 알아듣지 못하니 漢字를 알아야 對話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언제인가 TV에서 中國의 廣西省 地域의 長壽村을 소개하면서 그곳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茶를 자세하게 취재한 것이 있었다. 그 고장에서만 자라는 나뭇잎을 보리茶처럼 끓여서 마신다고 하는데, 그 나무 이름을 우리 漢字音으로 “利유”라고 소개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를 지켜보면서 漢字로 어떻게 쓰나 하고 주의를 기울였지만, 결국은 끝字가 버들柳라는 것만 確認하고 앞의 두 字는 알 수 없었다. 복숭아나무가 아닌데도 ‘夾竹桃’라고 하듯이 버드나무는 아닌데, 앞의 두 글자를 모르니까 確認할 길이 없다. TV프로에서 적어도 地名과 나무 이름을 字幕처리 하더라도 漢字로 紹介했더라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六何原則을 充足시키지 못한 어설픈 情報가 돼 버렸다.

中國의 固有名詞는 漢字로 써야 한다. 우리 나라의 固有名詞도 中國사람에게 紹介할 때는 亦是 漢字로 써야 確實하게 意味가 傳達되는데, 우리는 평소에 漢字를 안 쓰니까 ‘석관동’, ‘신사동’하면 어느 글자를 쓰는지 몰라 唐慌하게 된다.


한번은 中國사람이 ‘아리랑’이란 單語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對答을 못하니까, 오히려 그쪽이 고개를 꺄우뚱 한다. 뜻 글자인 漢字로된 單語는 이럴 수가 없다.

魯迅의 名作 『阿Q正傳』에서 無識한 阿Q는 뭐가 뭔지 영문도 모르면서 “革命이다” 소리치고 다니다가 잡혀간다. 調書를 꾸미고 나서 署名을 하라고 하니까, 얼굴을 붉히면서 唐慌한다. 낫 놓고 기역字도 모르는 文盲이니 署名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그라미라도 그리라고 하니까 平生처음 잡아보는 붓으로 한번 멋 떨어지게 그려 보자 한 것이 緊張하니까, 붓이 異常하게 빗 나가서 英文 알파벳의 ‘Q’字처럼 이그러졌다. 阿Q는 그것을 몹시 羞恥로 생각하고 속상해 한다. 글씨를 못 쓴다는 것은 時體말로 “쪽팔리는 일이다.”


韓ㆍ中ㆍ日 세나라의 젊은이들이 모이면 우리 學生들만 漢字를 모르니까 “왕따” 當하기가 쉽다. 名銜을 交換해도 읽을 줄 모르고, 그 나마 筆談도 할 수 없다. 여기에 漢字로 自己 이름도 못 쓴다면 너무 너무 쪽 팔린다. 漢字를 알면 最小限度의 커뮤니케이션은 되는데…. 참 딱하다.


身言書判이라고 하지 않는가! 고리타분한 옛 사람이 한 말이라고 外面하지 말고, 21세기를 짊어지고 갈 젊은이들도 이 네가지 條件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體貌, 言辯, 筆跡, 判斷力을 갖추어야 世界化해 가는 國際社會, 競爭社會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본다. 허우대가 멀쩡한 젊은이가 輕薄한 言行을 하고, 제 이름字도 제대로 못쓰고, 事理分別을 못한다면 어디에 쓰겠는가?


앞에서 말한 蒙頂茶의 “뇌명, 무종, 석화….” 중에서 甘露, 白豪는 斟酌이 가는데, 다른 것들은 모르겠다. 이것도 斟酌뿐이지 自信은 없다. 中國말로 된 資料를 찾아봐야지….
漢字로 썼으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한글로만 썼기 때문에 또 宿題가 하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