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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獨의 첩자들·越盟의 프락치들

超我 2009. 9. 7. 12:14
東獨의 첩자들·越盟의 프락치들
written by. 정준 <juunjuly@hanmail.net>

이철우(李哲禹) 의원의 조선노동당 가입 논란이 여야간의 전면전으로 치닫을 기세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과도 맞물려 있어 자칫 당의 정체성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진실 게임'과 '색깔 공방'은 앞으로도 한동안 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독일과 월남은 한반도와 함께 과거 냉전시대의 표징으로 남아있던 분단지역 이었다. 이들 국가의 과거 정보활동과 첩자 또는 프락치전술이 '통일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독일과 월남이 겪은 '과거'는 탈(脫)냉전시대에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에게 거울이 될 것이다.

독일 통일 이전 동독(東獨)에는 슈타지(=Stasi·Staatssicherheit: 국가안전부)라는 정보기관이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에 대한 정보공작을 위해 별도로 HVA(중앙정보본부)라는 담당기구를 두고 있었다. HVA는 서독의 정치인을 매수하여 서독의 주요 정책을 동독에 유리하게 이끌고 재계와 노동계 학계 종교계 학생운동세력 등에 효과적으로 침투하여 그 영역을 확대 또는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해왔다.

통독 후 슈타지의 비밀문서를 분석한 결과는 놀라웠다. 서독(西獨)에서 활동한 동독의 고정간첩은 약 2만∼3만명으로 추산됐으며, 이들의 활약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서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였다. 통독 이전의 과거청산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서독 총리 브란트의 보좌관으로 들어가 암약했던 위장간첩 기욤은 동독의 현역 육군 대위였다. 그는 서독으로 탈출한 것처럼 가장한 후 장기간의 잠복기를 거쳐 당국의 감시망을 벗어난 후 관계에 진출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빌리 브란트는 서독총리직을 도중하차했다. 74년 4월의 일이다.

브란트가 동서독 정상회담을 갖고 양독(兩獨)관계의 물꼬를 튼 지 4년만의 일이었다. 그는 서독역사상 동독정권에 가장 호의적인 지도자였는데도 동독은 그의 최측근에 간첩을 심어두고 있었다. 당시 서독 내 동독 첩자는 약 1만1천명이었다. 브란트는 동독의 배신에 뒤늦게 치를 떨어야 했다. 

독일 의회에는 한때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의원들이 슈타지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 정치인들의 나치 전력(前歷) 축첩(蓄妾) 부정축재 등에 연루된 약점을 잡아 협박하거나 매수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프락치로 만들었다. 

문제는 슈타지의 활약상- 그 자체보다 이 같은 활동이 가능했던 서독 사회의 전체적 분위기에도 있었다. 당시 서독 지식인사회는 동독 편을 들어주고 동독을 인정해야만 '진보적인 인사' 또는 '진보적인 사고'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독일은 1969년부터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에 대해 '접근을 통한 변화'를 목표로 동방(東邦)정책을 채택해왔었다. 우리의 '햇볕정책' 모델이 바로 이 정책이었을 것이다. 이 동방정책으로 동독에 대한 경계가 풀려나면서 동독은 서독의 관계와 산업계 전반에 프락치를 침투시켜 폭넓은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슈타지'(Stasi)는 94,000명의 직원 외에 174,000명의 비밀 첩보원들을 거느리고서 6백만명을 사찰해온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체였다. '슈타지'가 도청한 전임 독일수상 콜에 대한  전화통화 기록(집무실 및 사적공간 포함)만도 7천 페이지에 달했음이 이를 잘 말해준다.

월맹(越盟)에 패망하기 이전의 월남(越南)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월남전 당시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여론을 자극한 명연설이 있었다.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前)해인 1967년 9월3일 월남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11명의 입후보자 가운데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그 명연설의 주인공이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는 선거유세에서 이렇데 외쳤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 메시지인가. 미국 내 반전(反戰)운동의 불을 지핀 것은 이 연설이었다. 그가 월맹측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 등 수많은 정치인·관료들도 같은 프락치였다.

호치민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공산당 프락치들을 월남 곳곳에 심어나갔다. 이들 프락치는 호치민의 베트남 공산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에 의해 1962년 1월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월남공화국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 각 기관과 군 최고사령부 및 일선 전투단위 부대에까지 베트콩의 조직과 정보망이 거미줄같이 구성되어 국가최고기밀까지 베트콩과 하노이정권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월남정부의 정치 외교 군사전략은 이들 프락치에 의해 허점이 찔리면서 결국 베트콩과 월맹군의 대공세로 이어졌던 것이다.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때마다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다시피 했다. 그 여파로 대공(對共)전문가들이 대거 쫓겨나고 말아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물론,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도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통독 이전 서독 사회 도처에 동독의 첩자들이 침투하여 정책결정을 오도했고, 월남 역시 결국 외적(外敵)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내부의 갈등과 반란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바로 이 대목이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이다. (konas)

정 준 (코나스 논설위원)


2004-12-16 오전 8:57:00 입력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5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