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文鑑賞

문화창조 최선의 방책은 한자교육-李熙昇

超我 2009. 9. 30. 11:21
 

문화창조 최선의 방책은 한자교육-李熙昇


李熙昇


個人으로서의 人生의 目的은 새 文化를 創造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데, 民族이나 國家 全體로서도 그 目的은 亦是 새로운 文化를 이룩하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여기에 文化라 함은 科學․藝術․政治․經濟 등 무릇 인간생활에 관한 모든 일을 總括․包含시켜서 하는 말이니 요사이 흔히 유행어 모양으로 많이 쓰이는 <歷史를 創造하자>라는 말도 結局 <새 文化를 이룩하자>라는 것과 同義語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 地球上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國家와 民族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새로운 문화를 創造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實情이다.


그러면 이러한 環境 속에 처하여 있는 우리 民族은 文化的으로 果然 어떠한 段階에 서 있는 것일까. 아무리 두남을 두어 생각하더라도, 최고수준에 올랐다고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경지에 놓여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보다 뒤쳐져 있는 國家․民族들도 여간 많은 것이 아니지만, 그 反面에 우리보다 앞서 있는 國家․民族이 적지 않다는 것도 앙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우리보다 文化的으로 앞선 民族과 어깨를 나란히 겨눌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하여야 다시 그들보다 한 걸음 앞설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가장 適切한 對答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교육을 잘하는 데 달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成人들도 最先을 다하여 배우기에 努力을 傾注하여야 하겠지만, 우리가 앞으로 가장 큰 囑望과 期待를 걸어 놓을 수 있는 데는 아직 被敎育者로서의 身分을 지니고 있는 靑少年層이 아닐 수 없다. 우리 將來의 國家․民族의 運命이 온전히 그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앞으로 國家․民族의 棟樑이 될 만한 人材를 養成하기 위하여는 敎育에 依存하지 않을 수가 없고, 敎育은 - 特히 學校敎育은 全的으로 語文(言語와 文字)을 通하여 遂行되는 것임은 모를 사람이 없을 만큼 常識化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愼重히 생각하여야 할 問題는, 敎育의 手段으로 不可缺의 要素가 되는 言語와 文字에 대하여 어떠한 政策을 세워야, 科學的으로, 또 冷徹히 硏究․檢討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氣分上으로는 우리 二世 敎育에 우리 國字인 한글만을 專用하는 것이 좋을 듯이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民族的 感情에서 流露되는 執念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울 民族의 文化창조 乃至 文化生活의 歷史的 過程과 現實的 狀況을 洞察하고, 또 國內的으로 對外的으로 文化活動과 文化交流를 가장 活潑히 展開하기 爲하여는, 무엇보다도 言語學的 文字學的 原理와 法則이 提示하는 方法에 따라 이에 順應하는 것이 새 文化創造를 促進하는 가장 效果的인 最先의 方策이라는 것을 銘心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方途란 다름 아닌 適當한 數의 漢字를 한글과 混用하여 二世를 교육하고 또 온 國民의 日常生活에 利用하는 것이 가장 賢命한 길이라는 것을 强調하여 마지않는다.

普通敎育에서 1,800字 가량의 漢字를 배운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勿論, 全然 안 배우는 것보다는 그만한 努力을 必要로 하는 것만은 事實이다. 그러나, 過半數의 語彙가 漢字語로 된 國語에 있어서는, 同音異議語가 너무 많으므로, 이것을 순 한글로만 記錄한 文章을 읽을 적에, 그 難澁의 程度는 國民 누구나가 다 날마다 經驗하는 바이므로, 이것을 누누이 說明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글 專用者는 文脈을 通하여 理解할 수 있다는 答辯이나, 이런 難澁한 境遇는 하루도 수없이 겪는 일이요, 一生동안을 합계한다면, 또 全國民 各個人의 境遇를 總集合한다면, 참으로 天文學的 數字에 이를 能率低下라 하겠다.


이러한 不便에 浪費되는 時間과 努力에 比하여, 어려서 基礎漢字 1,800字를 學習하는 努力이란 말할 수 없이 수월한 代價를 치르기만 하면 될 것이요, 따라서 文章 解讀의 能力은 엄청난 高性能을 發揮하게 된다. 이것이 國民活動과 새 文化創造에 있어서 얼마나 效率的이겠는가는 自明한 事實이라 斷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되고 보면, 한글專用만이 愛國的이겠는가, 國漢字倂用이 愛國的이겠는가. 그 解答도 저절로 내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文化創造에 있어 能率의 高揚이 愛國的이겠는가, 그 遲鈍이 애국적이겠는가. 再考․三思의 餘地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漢字는 表意文字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瞬間에 그 意味를 直覺的으로 把握할 수 있는 長點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同音異議語의 區別이 一目瞭然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것이 반드시 外國文字라고 排擊할 것이 아니라, 西歐 여러 民族에 있어서 羅馬字가 公用文字로 되어 있는 것처럼, 漢字는 東洋 여러 나라의 公用文字로 되어 있다는 것을 再認識할 必要가 있다.


이번에 우리 文敎當局이 晩時의 歎은 있으나마, 普通敎育에 있어서 國漢자를 倂用하는 勇斷을 내린 것은, 앞으로 우리 民族文化의 創造와 發展을 위하여, 또는 다른 文化民族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아가서는 先導的 役割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點에, 雙手를 들어 贊成하는 바이며, 國民學校敎育에까지 그 範圍를 擴充․强化할 것을 懇望하여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