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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5.18 광주에서 5일간 느꼈던 점 -광주사태의 본질과 요점

超我 2009. 10. 17. 21:27
[조갑제] 5.18 광주에서 5일간 느꼈던 점 -광주사태의 본질과 요점
 
상당히 客觀的이고 冷靜한 觀點에서 본 趙甲濟기자의 5.18광주사태 현장취재기인것 같다.
이시점에서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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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5일간 느꼈던 점

 기자는 1980년 5월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에서 그 유혈사태를 취재했고, 그 뒤에도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그 현장에서 기자가 본 광주사태의 본질과 요점은 이러했다.
 
 경상도 출신인 기자는 그곳에서 취재를 하는 데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지역감정이 광주사태의 중요한 원인은 아니란 느낌이 왔다. 계엄당국이 광주사태의 본질을 지역감정 쪽으로 돌린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난 것은 공수부대원들의 과격한 진압에 대한 거의 동물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어찌 인간이 이럴 수가』하는 분노가 정의감으로 승화된 것이다.
 신군부에 의한 金大中씨의 연행도 한 촉발요인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金大中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는 다른 구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리가 낮았다(최근 검찰조사에서도 金大中씨가 광주사태를 조종했다는 說은 부정되었다).
 
 『全斗煥 타도!』란 구호 뒤에는 『金日成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따랐다. 시민들이 간첩으로 의심가는 시위자를 붙들어 계엄당국에 넘겨 주기도 했다. 광주사태의 기본이념은 反共·민주화였다.
 이른바 「시민군」은 軍紀를 비교적 엄정히 잡아 시민들에 대한 피해는 최소화되었다.
 20사단의 광주 재진입작전은 희생자를 최소화한, 효율적인 것이었다.
 
 기자는 5월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탈환된 직후, 구경나온 시민들 중에서 경상도 말을 하는 청년을 한 사람 알게 되었다. 그는 전남도청 2기동대 소속 전투경찰관(상경)인 南모씨였다. 경북대학교 정외과 2학년에 다니다가 입대했다고 했다. 그는 5월21일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달아났다. 다행이 고마운 아저씨 집에 숨어들어 7일간 지냈다는 것이었다. 南상경을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부동산업을 한다는 50代 초반의 광주 아저씨는 아내와 함께 기자를 맞아들이더니 푸짐한 점심대접을 해주면서 『제발 지역감정 치원에서 이 사태를 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南상경도 『공수부대원들이 몽땅 경상도 군인들이란 얘기도 틀렸고, 광주시민이 경상도가 밉다고 일어났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고 역설하면서 과잉진압의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기자는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부산에 돌아와 광주시민들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때 부산의 일부 지역에선 경상도 사람들이 광주에서 당했다고 전라도 사람이 갖고 있는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군경(軍警)사망자 27명의 문제
 
 1985년 7월초 月刊朝鮮은 광주사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 南상경을 찾아내 다시 만났는데 대우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다. 南씨는 『지금도 저를 살려주신 그분을 찾아 뵙고 있다』면서 「광주 아버님」이란 표현을 했다. 그때 취재차 다시 광주에 내려가 보니 광주사태 사망자 유족들과 부상자들에 대한 정보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응어리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月刊朝鮮은 이 특집에서 취재기자 좌담회 기사를 실었다. 그 때 月刊朝鮮部에서는 기자 이외에도 吳 효鎭, 趙南俊 기자가 광주사태 취재경험자였다. 당시는 안기부의 언론탄압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공수부대」라는 말 대신에 「계엄군」이란 표현을 써야 했다.
 
 기자는 이 좌담회 기사에서 과잉진압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부측 통계를 나열했다.
 『 계엄사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1백44명의 시민측 사망자 가운데 18%인 26명이 타박상 두부손상 자상으로 숨진 것으로 돼 있고, 23.6%인 34명이 19세 이하라는 겁니다. 14세 이하 사망자도 5명이고, 65세 노인도 있습니다』이 좌담회에서 月刊朝鮮 기자들은 그때 쟁점이 돼 있던 사망자수에 대해서 2천명說을 배척하고 2백명說이 더 정확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대목으로 해서 月刊朝鮮은 다소 곤욕을 치렀으나 결국은 정확했음이 밝혀졌다. 광주사태 사망자 2천명說은 이 사태에 대한 과장이 5共 때 널리 퍼져 있었고 지금껏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광주사태를 목격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욱 과장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서울지검의 95년 7월 발표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사망자는 1백93명이다. 민간인은 1백66명, 군인23명, 경찰관 4명이다. 이 통계에서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부분은 군경 사망자 27명이다. 요사이 여권과 일부 언론은 「광주학살」이란 표현을 쓰는데 군경사망자 27명이란 숫자는 「학살」이란 단어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학살」이란 용어는 보통 非무장의 사람들을 무장집단이 일방적으로 죽이는 것을 가리키는 데 광주사태에선 <민간인 6 對 군경1>의 비율로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학살」 은 非과학적 표현이다. 군인 사망자 23명중 12명은 상호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자로서 시민측의 공격에 의한 순수 군경 사망자는 15명이다.
 
 1988년 민화위(民和委) 증언에서 소준열(蘇俊烈) 당시 全南北 계엄 분소장은 『민간인 사망자의 검시 결과 군인이 사용한 M16 총탄으로 죽은 시민은 45명이었다』고 말했었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민간인 사망자 45명 對 군경 사망자 15명」즉 3대1의 비율이 된다. 기자가 시민측 입장에서 바라보던 광주사태를 공수부대 입장에서 취재하기로 한 것은 1988년에 접어들어 민주화의 물결에 따라 언론자유가 만개하기 시작할 때였다. 광주사태 8년째가 되는 그 해 5월29일 오전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앞에는 30代 청년 다섯 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광주사태 부상자들이었다.
 
 20사단 출신 이명규(李明珪)씨는 5월27일 새벽 광주로 진입하다가 「시민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공수11여단 출신인 金東哲·경기만(慶箕萬)씨는 5월24일에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사격으로, 김은철(金殷鐵)·배동환(裵東煥)씨는 5월21일에 광주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동료들의 무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고 했다.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났다.1980년 중반까지는 특전사와 육본에서 신경을 써주고 화환도 보내주곤 했는데 그 뒤로는 참배객도 수백명에서 수십명으로, 다시 수명으로 줄러들었다. 그 열흘 전 광주 망월동 묘역에 모여들었던 수만 인파에 비해서 이곳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국가와 軍이 먼저 그들을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수부대원의 시각
 
 기자는 광주사태 현장에선 저승사자같이 보였던 공수부대원들을 그 뒤 수십명 만났다. 악귀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그렇고 그런 한국인이었다. 평균적 한국인보다도 오히려 더 순진하고 우직한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서 취재한 결과는 1988년 7월호 月刊朝鮮에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란 제목의 기사로 실렸다. 공수부대의 시각으로 본 광주사태는 기자가 시민측 입장에서 경험했던 사태와는 크게 달랐다. 광주사태의 출발점이 된 공수7여단의 광주투입. 신우식(申佑植) 당시 여단장은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2개 대대를 31사단에 배속시키고는 지휘계통선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31사단장이 직접 우리 여단의 대대장을 지휘하게 되었다. 과잉진압 운운하는데 군인은 명령대로 하는 존재이고, 그때의 시위가 불법행동이었음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이희성(李熺性) 당시 계엄사령관은 民和委에서 『광주사태의 발단은 계엄군이 전국 31개 대학에 진주, 평정을 회복시켰는데 유독 전남대학교에서만 투석(投石)으로써 도전하였으므로 강경진압에 나서게 되었다』고 증언, 사태의 원천적 책임을 학생들의 「불법시위」로 돌렸다. 7여단 35대대 3중대장이었던 박병수(朴炳洙) 대위는 전북 김제 사람이었다. 기자가 취재차 만났을 때 그는 부평에서 한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이 가장 많았다』면서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갖고 놀러가는 심정으로 이동했다』 고 말했다. 시위진압 기구로는 사과탄과 진압봉이 전부였고, 방석모·방패·최루탄 발사기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학생이 돌을 던지니까. 우리도 강하게 나간 것입니다. 시위대가 군인이 나타났는데도 흩어지지 않으니 기분이 상합디다. 동료들이 돌을 맞아 다치니 부하들이 흥분했어요』충분한 시위진압 장비 없이 투석에 노출되자 공수부대는 더욱 가혹한 진압으로 나왔다. 이 과잉진압이 백주의 도심에서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 벌어지니 시민들도 흥분했다. 이런 감정의 상승작용이 광주의 비극으로 치닫게 된 원인이 됐다.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를 통해서 기자는 그때까지 견지해왔던 시각과 인식을 크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물을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느냐가 가치판단에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을 새삼 실감하였다. 공수부대도 시위대와 시민들에 대하여 대단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11여단의 副지역대장 김태룡(金泰龍)씨(1988년 당시 40세·회사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부상당해 한쪽 다리를 못쓰고 있다. 광주시민이나 우리나 같은 피해자다. 차라리 진상조사가 철저히 됐으면 좋겠다. 너무 군인들만 몰아붙이는데, 나는 내 부하가 시위대의 APC장갑차 돌진에 의해 치여 죽는 것을 목격했었다. 우리는 광주로 갈 때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어떤 선입견 없이 진압에 임했다. 공공건물을 불태우고, 군인에게 돌을 던지고, 동료가 다치니까, 아무리 부하를 말려도 강경 진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압봉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 진압하지 않으면 우리가 돌에 맞아 죽을 판인데…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지리에 밝아 더 열심히 진압에 나섰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현역대령은 『부하들이 군중 속에서 고립되어 실탄을 달라고 무전으로 수십 번 호소해왔다. 나는 참모장에게 실탄지급을 허용해 달라고 건의했는데 참모장이 선무에 주력하여 좀 참아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야 이 xx야, 네가 현장을 모르니까 그따위 소리하는 모양인데」라고 상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말했다.
 
 발포지시는 없었다
 
 발포는 상부 지시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1988년 7월호 月刊朝鮮의 기사를 일부 인용한다. <5월21일 오전 공수부대는 수십만으로 불어난 광주시민들에 의해 코너로 몰리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취재일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전 10시54분 : 땅을 파고 통곡하는 군인들의 모습 보임.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와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5월21일 오후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는 수십만의 시위군중과 약1천2백명의 7, 11여단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금남로를 맡은 11여단의 3개 대대 병력은 분수대 앞에 APC장갑차 한 대를 세워놓고 그 장갑차를 믿고서 횡대로 서 있었다. 시민과 공수부대원 사이의 거리는 10여m도 되지 않았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시민 측에서는 이날 새벽 아세아 자동차에서 빼앗은 장갑차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빼앗은 카빈·실탄 등으로 무장한 이들도 있었다. 도청앞 광장에서는 헬리콥터가 자주 내렸다가 떴다가 하면서 서류 등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팽팽한 대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장갑차 때문이었다.
 
 11여단 소속 통신병 우기만(慶箕萬)씨의 증언.
 『우리 등 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시민측 장갑차 한 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 명이 깔리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공수부대 대열의 뒤쪽에 있었던 전투경찰 南東成 상경은 이렇게 기억했다.
 『장갑차와 함께 버스가 돌진해 왔는데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이 버스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동료가 치여죽는 장면을 목격한 공수11여단의 한 하사관은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누구든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기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더라』고 실토했다>
 
 1988년까지는 정웅(鄭雄) 31사단장(88년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은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에 반대한 義人으로 알려져 있었다. 기자의 취재 결과 그는 과잉진압 부대인 공수부대 5개 대대를 자신의 지휘권 下로 배속받았으므로 지휘 책임을 모면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호용(鄭鎬溶)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내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鄭雄씨의 주장대로 공수부대에 대한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검찰이 밝힌 사실관계가 가장 정확
 
 95년 7월에 발표한 5·18사건 관련 수사 결론에서 서울지검은 기자의 이상 취재 결론과 거의 일치하는 판단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1995년 9월호 月刊朝鮮에 全文게재).
 
 첫째, 검찰은 공수7여단의 광주투입은 정권장악에 필요한 유혈사태를 유발하기 위한 음모였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둘째, 발포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거나 광주시민들의 공분(公憤)을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發砲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將校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自衛 目的)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지휘권 二元化는 없었다. 일련의 부대운용에 관한 지휘를 31사단장(鄭雄)과 戰敎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되었다.
 
 넷째, 헬機 기초소사의 증거는 없다.
 
 다섯째, 全斗煥 합수본부장과 盧泰愚 수경사령관은 광주사태 진압작전에 직접 관여한 증거가 없다. 광주사태 진압은 보안사령부가 아닌 계엄사령부의 전권 하에서 이루어졌다.
 
 여섯째, 5월21일에 광주지역에 투입된 20사단은 광주가 무장시위대의 손에 넘어간 뒤 광주 재진압작전에 참여했을 뿐 문제의 과잉진압과는 무관하다.
 
 일곱째, 약 20명의 무고한 시민이 광주시 외곽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오인사격 및 보복사격을 당해 사망했다. 기자는 적어도 사실관계에 관한 한 검찰의 이 조사결과가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검찰이 밝힌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反論이 별로 없었다.
 
 광주사태에 대한 재수사가 실시되어도 검찰이 2백69명의 관련자를 조사, 이미 확정한 사실관계는 뒤집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무슨 죄명으로 기소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최근 언론과 여권은 광주사태의 책임을 全斗煥 당시 합수본부장에게 물으려고 하는데 직접적인 연결성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언론은 또 박준병(朴俊炳) 당시 20사단장을 광주사태 진압 책임자로서 구속할 것이라는 한 여권 소식통의 말을 검증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20사단의 2개 연대는 광주가 무장시민들에게 넘어간 뒤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광주 외곽에 도착했고, 27일 재진입작전 때 광주의 서구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는 작전을 했을 뿐이다. 과잉진압이나 학살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무장시민군과 교전한 것밖에는 없다. 그런 20사단의 사단장을 구속한다는 것은 무장시민군에 대한 무력진압 자체를 불법화하는 것을 뜻하며 군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아마도 朴의원이 金泳三 대통령의 직접 만류를 뿌리치고 자민련(自民聯)으로 옮겨간 데 대한 괘씸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기자들에게 흘린 것이 검증 없이 보도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사태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만 있어도 범하지 않을 실수를 저지른 기자들과 그런 미숙한 기자를 이용한 정치인들은 결과적으로 국가와 국군을 무력화시키려는 작당의 공범관계인 셈이다. 대통령의 결단을 전폭적인 응원이라 믿고 일부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벌이는 마구잡이식 보도와 선동, 그리고 음모는 그 자체가 또 다른 보복을 부를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자중자애(自重自愛)할 때이다.
[ 2003-07-16, 17:16 ] 조회수 : 486862

조갑제닷컴 전두환 구속은 정의를 구현하고 있나?(2) 中

http://www.natizen.com/board/view.asp?C_IDX=9760&C_CC=AC

全斗煥구속은 정의를 구현하고 있나? - 조갑제의 15년 취재기
 釜馬사태 10·26 12·12 5·17 광주사태 5共비리 사건 全斗煥 구속의 全과정 속에서 正義를 찾아 헤맨 月刊朝鮮의 記錄  
 < 1996년 1월호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