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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獨후 밝혀진 서독내 간첩 2만명 … 상상초월!!!!!!!!!
超我
2010. 4. 4. 20:26
統獨후 밝혀진 서독내 간첩 2만명 … 상상초월!!!
1989년 동독 共産정권이 무너지기 전 서독에서 활동한 동독의 비밀 정보원 수는 2만명이 넘었다. 1950년대 초 미국의 매카시 상원의원이 間諜으로 지목한 인물들은 대부분 실제 소련의 간첩이었다. 1967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는 공산화된 뒤 월맹의 고정간첩으로 드러났다.
냉전시대에 공산국가들이 자유 진영에 대규모로 간첩을 보내왔음을 입증하는 놀라운 실례들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386운동권 출신들이 연루된 간첩사건이 터져 뒤숭숭하다. 현대사에 기록된 간첩에 대해 살펴보자.
◆세계 最大 間諜團을 운용한 동독 슈타지
"비밀 정보원 수 2만~3만명. 첩자로 포섭된 서독 연방의원의 숫자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 총리 보좌관,여당 원내총무,통일부 장관도 간첩으로 포섭. 미남 공작원을 통해 서독 거물인사들의 여비서를 유혹해 정보 수집. 정계 재계 학계 종교계 언론계 학생운동권 등 사회 전반에 침투."
심지어 서독의 학생운동도 슈타지의 손아귀에 있었다. 서독 학생운동 조직 간부였던 볼프강 크라우스하르는 1998년 '共産主義者들에게 놀아난 우리들의 학창시절'이란 글을 발표해 큰 파장을 불러왔다. 동독이 서독 학생조직에 간첩을 침투시켜 반미시위와 반전운동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매카시가 지목한 대부분이 실제 間諜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공화당)은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이후 4년간 미국 조야를 떨게했던 매카시즘 선풍의 시작이었다. 매카시즘은 6·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 좌파들의 집요한 반격으로 매카시즘은 極右 반공주의의 광기를 드러낸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매카시가 지목한 사람들이 실제로 間諜이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1995년 '베노나 프로젝트'라는 미국의 극비문서가 공개되면서다. 이 문서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얄타회담에 참가한 국무부 고위 관료 엘저 히스,원자탄 기술을 소련에 넘긴 로젠버그 부부,브레튼우즈 협정을 탄생시킨 재무부 고위 관료 해리 화이트 등이 소련 간첩이었음이 밝혀졌다. 모두 매카시가 간첩이라고 지목한 사람들이었다.
로젠버그 부부 등은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음에도 미국 左派는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됐다고 선전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間諜은 스스로 간첩이라 하지 않는다
1967년 戰爭 와중에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11명의 후보 중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지도자 쭝딘쥬의 사례를 보자. 그는 민주 투사를 자처하며 유세 중 선동적인 연설로 반전 여론을 일으키고 월맹에 대한 유화정책을 주장했다. 越南이 공산화된 뒤에야 그가 월맹의 固定間諜이었음이 알려졌다.
공산국가 간첩들의 공통점은 건전한 民主化 운동가나 민족주의자,환경주의자들과 흡사한 주장을 펴면서 철저히 신분을 감춘다는 점이다. 슈타지의 경우 서독 양심세력들의 학생운동 평화운동 반전운동 등을 자신들에게 새로운 간첩을 공급하는 인력 창고로 여겼다. 북한 김정일 정권이 반전·반미·자주·통일을 외치며 남한의 평화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듯하지만 뒤로는 비밀리에 핵을 개발해 온 것과 마찬가지다.
크나베는 동독 共産黨이 40여년간 장기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부분 서독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서독에서 활약한 간첩의 숫자나 범죄행위보다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했던 당시 서독 사회의 정치적·지적 분위기가 더 문제였다"고 밝혔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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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獨의 첩자들·越盟의 프락치들
이철우(李哲禹) 의원의 조선노동당 가입 논란이 여야간의 전면전으로 치닫을 기세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과도 맞물려 있어 자칫 당의 정체성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진실 게임'과 '색깔 공방'은 앞으로도 한동안 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독일과 월남은 한반도와 함께 과거 냉전시대의 표징으로 남아있던 분단지역 이었다. 이들 국가의 과거 정보활동과 첩자 또는 프락치전술이 '통일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독일과 월남이 겪은 '과거'는 탈(脫)냉전시대에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에게 거울이 될 것이다. 독일 통일 이전 동독(東獨)에는 슈타지(=Stasi·Staatssicherheit: 국가안전부)라는 정보기관이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에 대한 정보공작을 위해 별도로 HVA(중앙정보본부)라는 담당기구를 두고 있었다. HVA는 서독의 정치인을 매수하여 서독의 주요 정책을 동독에 유리하게 이끌고 재계와 노동계 학계 종교계 학생운동세력 등에 효과적으로 침투하여 그 영역을 확대 또는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해왔다. 통독 후 슈타지의 비밀문서를 분석한 결과는 놀라웠다. 서독(西獨)에서 활동한 동독의 고정간첩은 약 2만∼3만명으로 추산됐으며, 이들의 활약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서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였다. 통독 이전의 과거청산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서독 총리 브란트의 보좌관으로 들어가 암약했던 위장간첩 기욤은 동독의 현역 육군 대위였다. 그는 서독으로 탈출한 것처럼 가장한 후 장기간의 잠복기를 거쳐 당국의 감시망을 벗어난 후 관계에 진출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빌리 브란트는 서독총리직을 도중하차했다. 74년 4월의 일이다. 브란트가 동서독 정상회담을 갖고 양독(兩獨)관계의 물꼬를 튼 지 4년만의 일이었다. 그는 서독역사상 동독정권에 가장 호의적인 지도자였는데도 동독은 그의 최측근에 간첩을 심어두고 있었다. 당시 서독 내 동독 첩자는 약 1만1천명이었다. 브란트는 동독의 배신에 뒤늦게 치를 떨어야 했다. 독일 의회에는 한때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의원들이 슈타지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 정치인들의 나치 전력(前歷) 축첩(蓄妾) 부정축재 등에 연루된 약점을 잡아 협박하거나 매수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프락치로 만들었다. 문제는 슈타지의 활약상- 그 자체보다 이 같은 활동이 가능했던 서독 사회의 전체적 분위기에도 있었다. 당시 서독 지식인사회는 동독 편을 들어주고 동독을 인정해야만 '진보적인 인사' 또는 '진보적인 사고'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독일은 1969년부터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에 대해 '접근을 통한 변화'를 목표로 동방(東邦)정책을 채택해왔었다. 우리의 '햇볕정책' 모델이 바로 이 정책이었을 것이다. 이 동방정책으로 동독에 대한 경계가 풀려나면서 동독은 서독의 관계와 산업계 전반에 프락치를 침투시켜 폭넓은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슈타지'(Stasi)는 94,000명의 직원 외에 174,000명의 비밀 첩보원들을 거느리고서 6백만명을 사찰해온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체였다. '슈타지'가 도청한 전임 독일수상 콜에 대한 전화통화 기록(집무실 및 사적공간 포함)만도 7천 페이지에 달했음이 이를 잘 말해준다. 월맹(越盟)에 패망하기 이전의 월남(越南)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월남전 당시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여론을 자극한 명연설이 있었다.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前)해인 1967년 9월3일 월남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11명의 입후보자 가운데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그 명연설의 주인공이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는 선거유세에서 이렇데 외쳤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 메시지인가. 미국 내 반전(反戰)운동의 불을 지핀 것은 이 연설이었다. 그가 월맹측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 등 수많은 정치인·관료들도 같은 프락치였다. 호치민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공산당 프락치들을 월남 곳곳에 심어나갔다. 이들 프락치는 호치민의 베트남 공산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에 의해 1962년 1월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월남공화국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 각 기관과 군 최고사령부 및 일선 전투단위 부대에까지 베트콩의 조직과 정보망이 거미줄같이 구성되어 국가최고기밀까지 베트콩과 하노이정권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월남정부의 정치 외교 군사전략은 이들 프락치에 의해 허점이 찔리면서 결국 베트콩과 월맹군의 대공세로 이어졌던 것이다.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때마다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다시피 했다. 그 여파로 대공(對共)전문가들이 대거 쫓겨나고 말아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물론,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도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통독 이전 서독 사회 도처에 동독의 첩자들이 침투하여 정책결정을 오도했고, 월남 역시 결국 외적(外敵)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내부의 갈등과 반란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바로 이 대목이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이다. (konas) written by. 정준 <juunjuly@hanmail.net> (코나스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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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쯤에서 다시보는 越南(베트남) 패망의 亡國 스토리
http://interok.tistory.com/2153
우리사회에 빨갱이새끼들이 얼마나 있을까 ? ??????????? !!!!!!!!!!!
http://interok.tistory.com/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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