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문화권 국가의 漢字수용 양태에 관한 비교연구
漢字문화권 국가의 漢字수용 양태에 관한 비교연구
目次
1.序論
2.삼국의 漢字수용시기
1)한국 2)일본 3)월남
3.吏讀,萬葉假名,字喃의 漢字 운용
1)吏讀
2)萬葉假名
3)字喃
4.삼국의 수용양태의 비교연구
1)漢字의 도입시기와 지리적인 문제
2)언어의 차이에 의한 漢字의 용법차이
5.結論
1.序論
세계 4대 문명국가중 하나인 중국은 그 선진 문화를 주변국가에게 전파하여 찬란한 동아시아 문화를 꽃피웠다. 그 중에서도 漢字는 문화의 매개체로서 뿐만 아니라 漢字자체로 주변국가의 말을 기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국은 漢 四郡이후, 삼국시대에 본격적으로 漢字를 수용하였다, 그 중 신라는 특히 자기의 말을 표현하는 ‘吏讀’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일본은 대략 4-5세기에 처음으로 漢字를 수용하여, 8세기에는 ‘萬葉假名’이라는 오늘날 일본 문자의 원형을 만들었으며, 월남은 秦이후 13세기에 字喃(쯔놈)이라는 漢字를 변형시킨 자기들의 漢字를 만들었다.
이 세나라는 각기 자기의 문화언어환경에 맞추어 漢字를 변형하여 잘 수용하였으며, 이는 자국의 문화생활에 매우 큰 影響을 미쳤다.
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세계는 국경 없는 이웃으로 점점 다가간다. 그 중 언어와 문자의 통일은 정보화를 이끄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어의 중요성은 새삼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漢字문화권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은 漢字라는 동아시아의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다. 중국을 포함해서 약 13-14억이 사용하고 있는 漢字는 앞으로 영어 이외에 매우 중요한 정보화의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현재 각국이 사용하고 있는 漢字는 서로 그 음과 형태에 있어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통일하여야 하는 것이 앞으로 중요한 과제이고 또 현재 일부에서는 코드의 통일이 시도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통일의 前단계에서 먼저 각국의 漢字의 전래 시기와 ,말과 문화배경이 서로 다른 三國(韓國, 日本, 越南)의 수용양태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데 목표를 둔다.
2.三國의 漢字 수용시기
漢字는 주지하다 시피 形(형태), 音(음운) ,義(의미)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이중 形과 義는 역사적으로 거의 변화가 없다. 그러나 音은 각 시대마다 변화되고 또한 지금도 변화되고 있다. 이러한 음의 변화에 따라 각국이 사용하고 있는 漢字音으로 일차적으로 中國의 어느 시기에 도입되었는지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한자가 고정된 시기이지 도입이 시작된 시기는 아니다. 따라서 수용시기를 살펴보는 데는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그럼 三國의 한자도입의 시기를 살펴보자.
1)韓國
한국과 중국은 아주 이른 이래로 접촉은 지속되어 된 것은 틀림없다. 《史記․宋微子世家》에 기록된 箕子朝鮮이 사실여부를 떠나, 그 당시에는 이미 중국과 내왕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에서 최초의 漢字 사용기록은《史記․朝鮮列傳》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기록을 보면.
朝鮮王滿者,古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元封
二年漢使涉何譙諭,右渠終不肯奉詔.
여기서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眞番郡옆의 衆國(三韓을 지칭함)이 편지를 보내 천자를 만나려 한다.)는 이미 당시에 漢字를 사용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衛滿朝鮮이후 漢나라는 朝鮮半島 북부와 중국 東北지방에 漢四郡을 설치하게 되는데(기원전 108년 ), 이러한 직접적인 접촉은 漢字를 보다 더 광범위하게 수용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三國時代정립 이전에 漢字는 최소한 지배계급에서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각국은 중국과 각기 교류를 가지고 또한 중국의 세계질서속에 들어오게 되어 漢字의 사용은 더욱 빈번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서기 372년 중국식 관학교육인 太學의 설치, 신라의 서기 682년의 國學의 설치 등으로 漢字는 체계적으로 교육되어졌다. 백제는 비록 문헌에 교육기관의 설치 기록이 없지만, 일본에 건너간 百濟渡來人이 일본에서 大學寮制度를 설치한 점으로 볼 때 백제에도 교육기관이 설치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漢字가 쓰여진 유물로는 평남 龍岡에서 발견된 秥蟬神詞碑(서기85년), 中國吉林省輯安에서 발견된 廣開土王碑(서기414년), 慶南에서 발견된 蔚州川前里書石(서기563년)등등 많은 碑銘文에서 유려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삼국시대에는 이미 漢字를 마음대로 운용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현재는 전하지 않지만 《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의 《國史》(서기545년)百濟의《百濟記》,《百濟本記》,高句麗의《留記》(600年)등과 같은 史書가 있었다는 것은 漢字가 당시에는 광범위하게 실제 생활에 이용되었다는 것은 말해준다.
統一新羅時代에 이르러서 중국당나라의 영향은 더욱더 강력히 한반도에 미치게 된다. 법흥왕7년(520년)의 律令의 반포, 22년(535년)의 불교의 공인, 그리고 神文王2년(682년)의 國學의 설치와 유학의 강의, 元聖王4年(788年)의 讀書三品科의 설치로 五經、三史(《史記》,《漢書》,《後漢書》) 과 諸子百家로서 관리를 등용하는 등 의 일련의 조치들은 당시의 중국漢字를 유래 없이 대대적으로 신라에 수입하게 한다.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唐나라 初期(약6-7세기)의 중국음운과 한국漢字의 음이 제일 유사한데서 한국의 漢字가 이 당시에 들어와 고착된 것으로 보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또한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이 통일신라시대의 漢字音은 현재까지 많은 차이가 없이 중국 당나라의 漢字音과 유사하다.
따라서 거의 고조선시대로부터 전래되기 시작한 한국의 漢字는 漢四郡시대에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어 통일신라시대에 고착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日本
일본과 중국간 최초의 접촉은 漢나라 光武帝建中2년(서기57년)에 당시 倭國에서 사절을 중국으로 보내 朝貢을 바친 기록이 있다. 이 후에도 漢安帝元年(서기 107년)에도 조공의 기록이 있다. 또한 《三國志․魏志․倭人傳》이나《宋書․蠻夷傳》둥의 중국사서에 조금씩 접촉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때까지의 단편적인 기록은 문자의 전래에 대하여 언급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일본이 아직 문자를 받아들일 문화의 역량이 조금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일본의 漢字가 전래된 시기를 약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이는 일본의 최초 역사서인 《日本書紀》(서기712년) 에 百濟의 阿直岐와 王仁등에 의해서 서적이 전파되어 倭太子의 스승이 되었다는 기록에 의거한다. 특히 百濟는 일본의 초기 문화에 결정적인 문화의 전파자 역활을 하는데,《日本書紀》에 있는 백제와의 접촉기록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應神紀十五年(서기366년)-百濟王遣阿直伎.…阿直岐亦能讀經典.
應神紀十六年(367년)-王仁來之。…習諸典籍於王仁,莫不通達.
應神紀二十年(371년)-倭漢直阿知使主,其子都加使主,並率己之黨類十七懸,
而來歸焉.
繼本紀七年(513년)-百濟遣姐彌文貴將軍、洲利卽爾將軍、副穗積臣押山,貢五
經博士段楊爾.
欽明紀十三年(552년)-百濟聖明王…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
干卷.
敏達紀六年(577년)-百濟國王付還使大別王等、獻經論若干卷,幷律師、禪師、
比丘尼、咒禁 師、造佛工六人.
이상의 여러 기록들은 백제의 선진문물중 특히 서적의 전파의 기록을 뽑은 것이다. 이러한 서적의 전파는 당연히 漢字와 연계되어 漢字를 도입하게 된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은 주로 백제에서 漢字를 도입하게 되었는데 그 것은 일본이 지리적으로 중국보다는 백제에 가깝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의 백제문화 영향이후에 일본은 隋,唐에 이르러 직접 중국으로 부터 문물을 수입하게 되는데, 바로 遣隋使와 遣唐使이다. 특히 遣唐使는 唐代280여년 간 모두 25차례를 파견하게 되는데, 이는 평균 약 12년만에 한 번씩 파견하는 것으로 당시의 불편한 해운 교통을 감안한다면 이는 매우 빈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遣唐使는 일반적으로 2-4척의 배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인원은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600명이 출발하였다.遣唐使의 인원구성은 大使, 副使, 그리고 유학생(留學僧), 기술공예사등이 있었고, 이들은 당시 각 方面에서 뛰어난 인재들로 일본에 돌아와서 선전문물을 사용하고 전파하는데 견인차 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들 중에 특히 留學僧들은 불교의 경전과 漢字를 전파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런데, 遣唐使들이 唐수도인 長安에서 습득한 당시의 漢字音이 唐이전에 습득한 漢字音과 다르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음을 吳音이라하고 遣唐使들이 가지고 들어온 새로운 漢字音을 漢音이라고 구별하게 되었다. 吳音은 遣唐使들이 중국에 들어가지 전에 유교경전을 주로 수입하여 읽어서 유교경전에 사용되고, 漢音은 遣唐使들 중에 많은 승려들이 당시 長安音을 수입하여 주로 불교경전의 誦讀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吳音과 漢音을 漢字에 병용하게 되었고, 또한 唐이후 宋대에 들어온 漢字音을 唐音이라하고 또한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음을 慣用音이라 하여 현재의 日本漢字音은 한 漢字에 여러音이 있는 것이 특징이 되었다. 이는 한 글자에 한가지 漢字音만 있는 한국과 월남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일본漢字音 만의 특징이 되었다. 이는 아마도 지리적으로 중국과 연결되어 있는 이 두 나라와 바다로 떨어져 있는 일본과의 차이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지속적인 문화의 접촉이 있는 한국과 월남은 실제적으로 지속적으로 중국漢字를 받아들여 중국漢字音을 각 시기마다 개정하여 사용하여서 음운의 변화를 감지하기 힘들었고, 반대로 간헐적인 접촉을 한 일본은 중국의 각 시기마다의 변화된 음운의 상태를 감지하여 여러 가지 음을 동시에 사용한다고 불 수 있다. 이러한 사용법은 일본에서 많은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3.越南
월남도 한국이나 일본과 같이 漢字를 매개로 하여 문자생활을 영위하였고 또한 유교나 도교 등과 같이 중국적인 문화가 현재까지도 월남을 지배하고 있다. 월남과 중국은 육로로 서로 연결되어있어, 역사 이래로 밀접한 왕래가 있었고 월남의 북부는 기원전 214년 秦始皇이 월남북부에 象郡을 설치한 이래 거의 1,000년간 중국의 지배에 놓여있었다. 월남의 史家들은 월남의 북부가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시기를 「北屬時代」라고 하는데, 이는 漢武帝 元鼎6년(기원전111년)부터 唐이 멸망하고 五代(서기939년)가 시작될 즈음까지를 말한다. 월남은 이 北屬時代에 중국의 문물과 문자가 들어왔고 유학과 시험의 等制 등이 도입되었다. 이어서 東漢시대에 交趾太守로 임명된 士燮이 이 지역에 정치, 경제, 문화등 다방면에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특히 士燮이 《左傳》,《尙書》와 같은 책을 깊이 연구한 사실은, 최소한 지배층에 漢字가 이미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東漢말년에 와서는, 중국에 세 나라로 분할되어 어지러울 때 많은 漢族들이 월남북부 交趾로 피난 와서 중국의 선진문물과 漢字를 전파하였고 특히 학교를 세워 儒學을 전파하였다.
唐代에 이르러서 중국의 封建王朝는 월남북부에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지방의 관리를 현지인으로 충당하고 심지어 중국에까지 가서 관직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新唐書》152권<姜公輔傳>에 “월남인 姜公輔가 進士에 합격하고 唐德宗년간에 宰相까지 역임하는”사실도 있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시행으로 당시 월남에는 많은 儒生과 士大夫들이 형성되게 되는데, 이들을 월남인들은 「儒士」라고 하였다. 이들은 漢字를 전파하는 선봉장으로 漢字사용인구를 지배층에서 피지배층으로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유학, 문물, 그리고 漢字의 도입으로, 월남어는 漢字語를 받아들여 자국의 고유언어에 흡수된 것도 이 時期의 일이다. 모든 中國音韻학자들이 越南漢字音과 中國唐末의 음운이 유사한 것을 들어 漢字의 사용이 고착된 시기를 唐末로 보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기 14세기경에 월남인들은 漢字의 造字의 방식에 따라 漢字를 기초로 월남어를 표현할 수 있는 쯔놈(字喃 chũ’ num)이라는 월남글자를 만들었다. 쯔놈의 ‘쯔’는 ‘글자’ 라는 뜻이고 ‘남’은 ‘通俗의’뜻이다. 이 것은 당시 漢字를 ‘儒字’라고 하는 것과 구별 짓기 위해서 이름을 이렇게 붙인 것이다. 쯔놈은 19세기 중엽까지 사용되다가 월남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漢字와 함께 사라지게 되는데, 거의 500년 동안 월남의 문자문화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것은 漢字를 가지고 자기 고유언어에 맞게 고쳐 사용한 한국의 吏讀나 일본의 假名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그 것은 言語類型學的으로 볼 때 한국어나 일본어는 多音節 膠着語이고 중국어와 월남어는 單音節 孤立語이다. 따라서 한국어와 일본어는 助詞의 사용에 많은 비중을 두고 사용했으나 월남어는 助詞가 없기 때문에 월남고유어를 표기하는 데 비중을 두어, 거의 모든 월남고유어를 쯔놈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쯔놈의 사용 또한 漢字와 마찬가지로, 거의 매 글자마다 하나의 音을 가진 독립된 글자를 만들어 사용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 따라서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후에,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로마자식 표기법을 개량하여 점차 사용하다가 1945년 정식으로 표음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월남도 한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매우 오랜 시간(거의2,000년)동안漢字를사용하였고, 월남 북부는 거의 1,000년 동안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중국문화의 영향은 한국과 일본에 비해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 하다. 따라서 모든 분야의 어휘가 漢字語로 구성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3.吏讀,萬葉假名,字喃의 漢字 운용
三國은 漢字를 도입하는 단계에서 처음에는 한자를 분명히 그대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허나 自國의 언어와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데에는 많은 불편이 있다. 이런 불편을 改進하는 방법으로 三國은 각기 吏讀, 만요우가나(萬葉假名), 쯔놈(字喃)을 발명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매우 지혜로운 방법으로, 단지 문자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보다 실용적이고 자주적이다. 다음은 三國이 어떻게 각자의 사정에 맞추어 한자를 실용적으로 사용하였는지 살펴보자.
1)吏讀
한국의 三國時代서부터 생기기 시작한 吏讀는 처음에는 漢字로 기록할 수 없는 지명과 인명에 사용되어 오다가 점차 漢字로 鄕札로 발전하게 된다. 즉 중국어에 없는 조사를 사용하게 된다. 예를 들면 ‘亦’,‘是’는 주격을, ‘肹’,‘乙’은 목적격을 ‘矣’,‘衣’는 소유격을 나타낸다. 麗末鮮初에 들어와서 이두는 口訣이라는 형태로 한문을 읽는데 필요한 어조사로 발전된다. 처소격을 나타내는 ‘에’는‘厓’로 ‘하니’는 ‘爲尼’로 漢字의 문장 옆에 기록하여 사용된다. 이에 따라 구결은 漢字를 생략하여 쓰는 형태로 발전된다. 예를 들면 ‘다’는‘多’에서‘夕’으로, ‘나’는‘那’에서 ‘’로, ‘은’은 ‘隱’에서 ‘⻏’으로 漢字의 일부분만 띄어서 쓰게 되었다. 이는 편리성과 漢字와의 구별을 위해 사용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吏讀를 이용한 실용적인 접목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이두의 사용은 소리말을 완전히 자유롭게 표현해 내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필경 漢字는 한국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의 소리 말과 따로 사용하여야 하는 불편이 있다. 이러한 불편은 조선초기 訓民正音의 창제로 이여 졌고, 이 또한 한자문화권의 다른 나라들이 성취하지 못한 한국만의 훌륭한 언어유산이라 할 수 있다.
吏讀의 사용은 일어와 매우 유사한 점을 들 수 있는데, 시기적으로 최초의 향가는 眞平王(579-613)때 融天師가 지은 彗星歌미여 일본의 萬葉集歌는 서기 759년에 지 大伴家持가 國廳에서 지은 賀宴의 노래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거의 비슷한 때 이러한 보조 문자가 나왔고, 형태적으로 한국은 고유명사표기의 토착화 과정을 거쳐 단계적으로 誓記體→吏讀 →鄕札로 발달하였으며, 일본의 경우에서도 삼국의 서기체와 같은 일본어어순 구문, 이두와 같은 宣明(senmjo)및 祝詞(norito), 향찰과 같은 萬葉假名 등으로 문장을 표기하는 등 양편의 漢字차용표기상의 동질적 병행성은 쉽게 확인된다.
이것은 양국의 언어자체가 유사하고 교착어라는 동질성이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음절수(약2000개)가 많아, 이러한 보조 문자가 직접적으로 표음문자로 이어지지 못했고, 일본은 음절수(100여개)가 매우 적어 이러한 보조 문자가 직접적으로 표음문자의 부호로 사용될 수 있었다.
2)萬葉假名
일본어도 한국어나 월남어와 같이 중국어와 달라서 漢字를 빌려서 사용하는데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처음에 漢字로 그들의 말을 기록하는 대에는 漢字를 변화시켜, 자국의 소리 말에 적응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假名”(가나)이다.
“假”는 假借의 줄임으로 빌린다는 뜻이고, “名”은 글자의 뜻으로 합하여 “글자의 차용”이라는 뜻이 된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假名을 사용한 것은 『萬葉集』(759년)『古事記』(712년『日本書紀』(720년)에서 이다. 그 중에서 『萬葉集』의 이름을 따서 만요우까나(萬葉がな)라 한다. 당시 만요우까나는 두 가지의 차용 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漢字의 음을 빌리는 音假名이고, 또 하나는 漢字의 뜻을 빌리는 訓借名이다. 예를들면:
意味 音假名 訓假名
꽃(花) 波奈(pana) 葉名(pana)
소나무(松) 麻都(matu) 待(matu)
현재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음문자인 히라까나(ひらがな)와 가다까나(カタガナ)는 전부 만요우까나(萬葉がな)에서 발전하였다. 히나까나는 만요우까나를 초서체로 흘려쓴 소우까나(草假名)가 한층 변형되어서 된 것이고, 가다까나는 만요우까나의 字劃을 생략한 것으로 처음에는 불교경전의 정확한 읽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문의 行 사이에 써넣은 것으로서 平安朝 초기 奈良의 승려들 사이에서 생겨나 쓰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히나까나나 가다까나는 전부 긴 세월에 걸쳐 개량되고 또한 많은 異體가 있었으나, 明治33년(1900년) 小學校令施行規則에 의해 통일되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3)쯔놈(字喃 chũ’ num)
漢字는 주지하다 시피 六書(象形,會意,假借,形聲,指事,轉注)로 造字方式을 분류할 수 있다. 쯔놈(字喃 chũ’ num)은 이중에서 세 가지방식을 가지고 造字를 했다고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것은 假借,形聲,會意이다.
①假借
이러한 방식은 직접 漢字를 가지고 월남의 말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월남어의 bán은 ‘팔다(賣)’의 의미인데 漢字 ‘半’을 가지고 假借하고, 월남어의 chi는 ‘무엇’이라는 의미인데 ‘之’로 假借하며, 월남어의 tỗt은 ‘좋은’의 의미인데 ‘卒’로 假借한다. 이 假借 방식의 쯔놈은 아마 세 가지 방식 중에서 가장 초기의 방법으로 이는 吏讀와 만요우까나와 거의 비슷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②形聲
形聲에 의한 쯔놈의 造字는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漢字의 部首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다 월남어의 음에 상응한 漢字를 조합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월남어의 bạn은 ‘친구’의 의미인데 쯔놈은 ‘伴’을 사용한다. 이는 ‘人’의 部首에 소리 ‘半’을 조합한 것이고, 월남어의 ong은 ‘벌(蜂)’의 의미인데 쯔놈은 ‘螉’을 사용한다. 이는 ‘虫’의 部首에 ‘翁’의 소리를 조합한 것이다.
둘째는 漢字의 의미와 월남어의 소리를 결합한 방식이다. 예를 들면 월남어의 cong은 ‘굽은(曲)’의 의미인데 쯔놈은 ‘弓曲’을 사용한다. 이는 ‘굽은(曲)’의 의미에다 소리 ‘弓’을 결합한 것이고, 월남어의 dủới는 ‘아래(下)’를 뜻하는데 쯔놈은 ‘下帶’를 사용한다. 이는 ‘아래(下)’의 의미에다 소리‘帶’를 결합한 것이다.
셋째는 쯔놈으로 聲符를 삼는 방식이다. 월남어의 lời는 ‘말하다’의 뜻으로 쯔놈은 ‘口天上 ’이다. 여기서 ‘天上’은 쯔놈으로 ‘天’과 ‘上’으로 결합되어 ‘하늘’의 뜻이란 會意형식으로 造字된 쯔놈이다.
③會意
會意는 두 글자의 의미를 합쳐 하나의 개념으로 나타낸다. 예를 들면 ‘人’과 ‘上’의 두 의미를 합쳐 ‘首領’이라는 의미의 쯔놈 ‘人上 ’(trùm)을 사용한다. 이런 會意방식의 쯔놈은 단지 몇 자에 불과 하다.
이와 같이 월남의 쯔놈은 한국과 일본과 같이 漢字의 보조 문자라기 보다는 漢字의 造字방식을 가지고 자국의 소리 말을 기록하는 새로운 문자라 볼 수 있다. 실제 월남에는 매우 많은 문헌들을 완전한 쯔놈으로 적었다.
4.삼국의 수용양태의 비교연구
1)漢字의 도입시기와 지리적인 문제
한국의 漢字音은 대략 중국 唐대 초기음(7세기)을 反映한다. 일본 吳音은 중국의 약 南朝(4-5세기) 음을 반영하며, 漢音은 약 8세기의 唐代음을 反映한다. 그리고 월남漢字音은 唐代末期(10세기)의 음을 반영한다. 그렇다고 실제 漢字가 이 반영하는 시대에 도입되어 고착된 것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는 그러한 사실이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었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접촉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과 월남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중국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일본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漢字뿐만 아니고 문화의 모든 부분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가져다주게 되는데, 한국과 월남은 중국과의 지속적인 접촉이 있었고, 일본은 한반도를 통한 간접적이거나, 혹은 간헐적인 접촉밖에 할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은 처음에 漢字를 주로 백제를 통해 수입하다. 唐代에 와서 활발한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진다. 이런 까닭에 일본의 漢字音은 吳音(唐과이전音) 漢音(唐代音)의 두 가지 큰 類型에 唐音, 慣用音등 의 漢字音이 重複되어 存在 하게 된다. 이러한 重層性을 일본의 學者들은 일본 漢字의 한국과 월남漢字音과 大別되는 가장 큰 특색으로 삼는다.
한국과 월남도 其實은 이러한 重層性을 지니고 있다. 이 두 나라에 있어 漢字의 유입은 어느 한 時期 아닌 지속적인 도입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일본과 달리 간헐적인 접촉인 아닌 지속적인 접촉으로 인하여 그 분별성을 상실하게 된다. 월남의 경우 월남의 漢字音 이외에 古漢越語가 있다. 이는 한대 이전에 수입된 漢字로 오래 사용한 결과 글자는 남지 않고 단지 소리언어의 형태로만 남아있다. 한국도 월남과 마찬가지고 한대 이전에 이미 중국의 漢字를 도입하여 사용했으나 다른 층이 겹치자 글자는 사라지고 소리언어만 남았다. 중국학자들이 자주 예를 드는 ‘風’은 漢代이전에는 [pljəm]이라는 음으로 국어의 ‘바람’과 대응된다. 이 외에도 여러 예가 있고, 현재 많은 학자들이 이 분야로 계속연구 중이다. 이러한 연구는 상고시대 국어의 고유어 중에서 많은 부분이 중국과 공유를 나타내는 것을 말해주어, 국어의 알타이어계통론에서 비교언어학적으로 불명확한 부분의 단어를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2)언어의 차이에 의한 漢字의 용법차이
한국어와 일어는 공히 알타이어와 유사한 교착어이다. 이는 중국과 월남과 같이 단음절어와 많은 차이가 있다. 중국과 월남도 같은 단음절 언어이나 언어의 계통에는 차이가 많다. 월남어는 지금은 성조가 6개 있지만 프랑스학자 A.G.Haudricourt에 의해 원래 성조가 없는데서 성조가 발생했다고 증명되었다. 고유명사의 표기에 있어 이 세 나라는 漢字를 차용하는데 큰 차이가 없다, 차이는 중국어와 언어형태가 다른 한국어와 일본어의 부가성분인 助詞를 어떻게 漢字로 나타내는데 있어 나타난다. 즉 월남어는 이러한 부가성분이 없기 때문에 단지 漢字를 그대로 사용해도 큰 불편이 없다. 비록 쯔놈과 이두 혹은 만요우까나는 모두 자국의 소리글자를 漢字를 빌어 기록하는 글자이지만, 적어도 사용방식에 있어서는 차이를 두어야 한다. 쯔놈은 기실 漢字를 빌어 쓰다기 보다는 漢字의 근본적인 造字의 방법을 빌어 새로운 漢字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쯔놈은 월남식 漢字이지 이두나 만요우까나처럼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월남은 원래 漢字를 한 자도 쓰지 않고 쯔놈만으로 문학작품을 쓸 수 있고 또 그렇게 사용했었다.
일본의 만요우까나는 후대에 가다까나와 히라까나로 발전하여 표음화가 된다. 이는 상당히 지혜로운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음절이 적은(약 백여개) 일어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실제음절수가 2,000개 가까이 되는 한국어나 3,000개가 넘는 월남에 있어서는 漢字의 부수나 편방을 가지고 표음화를 하는 것은 실제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이 음절수의 많고 적음이 漢字를 차용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음절의 수가 적고 ん(n/m/ng) 을 제외하곤 終聲이 없는 일어가 언뜻 보기에는 상당히 편리한 것처럼 보이나, 同音異義글자가 많은 일어는 세계에 유래가 없는 두 가지의 표음문자 시스템을 가지고 문자생활을 해야하고, 漢字 또한 병용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음절의 수가 늘어나지 않으면 일어는 漢字를 아마 영원히 버리기 힘들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월남어는 성조로서의 구별능력과 27개의 자음과 11개의 모음의 조합에서 생성되는 3,000여 개의 음절은 漢字를 안 쓰고 오직 표음문자로만 문자생활을 해도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실제 월남에서는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후에 로마자로 표기법을 개정하여 20세기에는 완전히 漢字를 문자생활에서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국어는 2000개 정도의 음절로서 현재는 漢字를 많이 사용하지 않아도 그렇게 큰 불편은 없다. 하지만 부분적인 同音異義는 우리의 언어습관 혹은 단어를 개정하거나 순수어를 만들어 잘 대체 한다면 월남과 같이 완전히 漢字를 사용하지 않아도 문자생활을 잘 영위해 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看過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위의 三國이 약 2000년 이상 漢字생활을 하였고, 漢字語로 된 어휘가 전부 50%전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漢字를 모르면 어휘의 뜻이나 파생어의 파생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하여 풍부한 언어생활을 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의 언어가 로마, 라틴어에 의해 풍부해 지고 또 어원관계에 있어 반드시 이 언어를 이해하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현재 漢字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화교들에 의해 약 14억이 사용하는 문자이다. 우리의 언어의 상당부분이 漢字語이고 이는 중국과 일본의 많은 어휘와 형태적으로 漢字라는 고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비록 단어가 약간의 차이가 있고 글자의 형태가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漢字라는 공통분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5.結論
이상에서 우리는 三國의 한자도입의 역사적인 사실과 함께 수용양태를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각국은 자국의 소리 말의 사정에 의해 한자를 변형하여 실용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서 월남은 漢字를 사용해서 독립적인 한자계통의 문자를 만들었고, 일본은 한자를 사용해서 표음문자로 발전시켰고, 한국은 한자를 사용하다 새로운 표음문자를 만들었다. 월남의 경우는 중국과 같은 단음절 언어이기 때문에 쯔놈은 이두나 만요우까나에 비해 조사의 성분이 필요없이 단독적으로 문자를 만들게 되었고, 일본은 적은 음절 수로 표음문자로의 진보가 가능했고, 한국은 음절 수가 월남과 일본에 비해 중간이므로 새로운 문자를 창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자의 도입은 한자의 문자 자체 뿐 만 아니라 어휘도 도입되어, 이들 세 나라의 언어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각국이 사용하고 있는 약 50%가 넘는 한자어휘의 비교연구와 실용적인 사용방안은 앞으로 한자문화권의 코뮤니케이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장래를 볼 때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의미의 소통만을 말 하는 것이지만, 한자라는 공통분모를 잘 활용하는 것은 불럭화 되어가는 요즈음 세계정세에 한자문화권의 동질적인 것을 찾는 하나의 촉매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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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漢字문화권 국가의 漢字수용 양태에 관한 비교연구 (마마후후) |작성자 푸우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