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사태는 당시 북한군이 시민군과 계엄군으로 각각 위장해서 시민들을 학살하고 군경을 공격해서 폭동을 유발시켜 광주를 해방구 삼아 남침해오는 북괴군과 연합전선을 형성을 남한을 적화 시키기 위해 발생했던 불행한 일로서 어쩔수 없이 진압할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후 6.10민주 항쟁당시 시민들에게 총한번 쏘지 않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던 군을 물리치면서까지 자진해 물러난 것을 보면 위인중에 위인이라고 본다. 오늘날 외국인 용병까지 고용해서 자국민을 학살하며 40년 권좌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아랍과 북한 중국 공산당에 비하면 전두환이 과연 권좌에 연연한 독재자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광주사태 당시 어떻게 4시간만에 전라도 전역의 무기고를 족집게 처럼 털수 있었을까?>
3) 5월21일, 4시간대에 17개 시군,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것은 간첩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첨부9, 100, 101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20-244쪽)
5.21일 아침 9시, 1시간 전인 오전 8시에 20사단으로부터 빼앗은 14대의 지휘차량 등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습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습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닙니다.
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무기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사람들은 오직 간첩이라는 것이 필자의 상식입니다. 시민들이라면 한 두 개의 무기고 위치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에 좌표를 찍어가지고 이러 저리 방황할 시간조차 없는 4시간대에 쏜살같이 17개 시군에 널려 있는 38개의 무기고로 달려간다는 것은 간첩으로 이루어진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불과 4시간 내에 38개 무기고가 피탈되었다는 것은 38개 팀 한팀 한팀 모두가 위치를 정확히 알고 떠났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특히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한 후,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한 자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자들이었습니다. (첨부9,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91-108쪽)
<광주사태를 정확히 예측하는 북한??>
다음은 광주사태 몇달전에 우리 정보부가 일본에서 입수한 정보이고 이 정보는 북한을 가장 잘 아는 중국이 흘린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 이 정보가 신빙성이 있다고 재차 언론에 보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이 정보에 의하면 광주사태 당시 북한은 마치 광주사태가 언재 발생해서 언재 최정점에 이를지 쪽집게 도사처럼 예언합니다. 그리고 마치 그들의 예언처럼 언재 어디로 번지로 모르는 시위는 북한이 예상했던 것처럼 15일에서 20일 최정점에 이름니다. 그런데 어떻게 북한은 신이 아닌데 이처럼 정확히 시위가 언재 발생해서 언재 최정점에 이를지 정확히 예측하고 있을까요? 제 생각에 이건 예측이 아님니다. 실제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고 그렇게 그들의 예측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북한의 명백한 개입 증거가 아니고 무었이겟습니까?
<한겨레 신문>
당시 중앙정보부가 일본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북한 남침제보의 내용은,북한은 한국정부가 80년 4월 중순경에 김재규를 처형할 것으로 예상하고, 김재규 처형시에는 항의 데모사태가 발생하여 남침을 위한 결정적 시기가 조성될 것으로 판단하여 남침시기를 4월 중순경으로 예정하였으나 김재규의 처형이 지연됨에 따라 이를 연기하여 오던 중, 80년'5월 들어 학생과 노동자의 소요사태가 격화됨에 따라 한국 내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80년 5월15일에서 '5월20일어간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었음.
<북한은 어떻게 4월말 5월초 시위가 사그라지고 있음에도 정확히 5월 20일 소요가 최정점에 이를 것이라 예상했는가? 놀라운 첩보부대의 상황분석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나?>
518당시에도 보면 80년 5월 당시 4월말 부터 5월초까지 서울과 부산에서, 격렬한 시위가 있엇다, 서울의 봄이라는 지금도 kbs홈페이지같은 곳에서 쉽게 찿아볼수 있는 다큐들을 보면, 국민직접참여선거를 통한 즉 참정권을 통한 정부의 구성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대규모로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벌어졌지만, 폭력시위는 없었다는 것이며, 실제 당시 계엄령이 전국에 내려지면서, 김영삼등 당시 박정희/최규하정부와 대립하던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연금에도 시위자제를 요청하고 정부의 대응과 대책을 보면서 시위의 방향을 정하자고 설득하면서 서울과 부산은 계엄령하에서 군인과 부딪치기 보다는 시위가 급격히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
근데 그때까지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광주에서 (실제 광주는 70년대 시위하고는 거리가 먼 지방 도시였다), 난데없는 경찰과 대치를 하는 급기야 경찰에게 단순 폭력을 넘어서 버스로 밀어붙이면서 첫 사망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급격히 폭력적인 시위형태로 바뀌어 갔다!
<남한상황을 가장 잘 아는 언론 시민 경찰 군인 정보부 누구도 4월말 5월초 시위가 사르라지고 있어 시위가 격화되서 20일 시위가 최정점에 이를 것이라 예상한 사람이 없었는데 설사 북한의 간첩이 남한 상황을 보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시위가 20일 최정점에 이를것이라 예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가? >
사실 광주에서의 극렬한 시위는 누구도 당시 예상치 못한 상황이였다, 특히나 계엄령이 내려지고, 서울부산의 대규모 시위가 소강상태로 시위대의 요구를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지 지켜보자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황당(?)한 것이였다. 그리고 가장 큰 의문가운데 하나가 당시 김대중과 호남정치인들의 대응이였다, 광주시위의 시작은 분명히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요구에서 시작된 것이였다! 가만있는 광주시민을 경찰이 마치 총격을 가해서 무고하게 학살하면서 시작된 것이 절대 아니란 것이다.
처음 시위는 단순히 전남대에서 계엄령하에서 학교로 들어갈려는 학생들과의 충돌, 투석전에 따른 투석자들에 대한 추격, 그리고 흥분한 시민들, 난데없이 버스를 몰고와서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민해산을 독려하던 광주출신 대위의 버스로 깔려 죽음(첫 사망자로 공식기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과 그 추종자들은 전혀 시위자제를 요청하지도, 갈수록 시위가 단순 격렬해지는 걸 넘어서 경찰서 습격 시위자들의 무장과 장갑차탈취, 심지어 교도소습격과 계엄군과의 총격전등으로 내란상태가 벌어짐에도 광주시민들의 폭력을 자제하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시위가 가세하도록 뒤에서 부축인 의구심을 받는 다.
[출처] 80년대 그 수많은 시위와 비교해볼때, 5.18이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하는 이유! (노노데모(구국 과격불법촛불시위반대 시민연대)) |작성자 가자힘찬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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