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관 : 김대중의 대북 인적정보망 파괴 [참깨방송]
배성관 : 김대중의 대북 인적정보망 파괴 [참깨방송] 사이버뉴스24 http://www.cybernews24.com/ 2013년 07월 16일 PM 10: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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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관 멸공산악회 회장은 7월 12일 참깨방송과 가진 토크쇼에서 김대중씨를 부관참시 해야 할 반역자로 규탄했다. 배 회장은 “1.21사태 시 생포한 북한의 특공조 2명을 대공기관에서 살려 보내면서 북한에서 최대한 출세할 것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그 후 이들 중 임태영은 경보병여단(우리의 특전사에 해당) 교도지도국장으로, 우명훈은 총참모부 교육훈련국장(정규군 교육훈련 최고책임자)으로 북한군 요직에 진출하게 되는데, 1998년 초에 김대중씨가 북한에 밀고함으로써 이들이 당․정․군 요직에 포섭해 놓은 25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그 가족들도 정치범 수용소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배 회장은 결정적 시기에 북한해방의 리더가 될 수 있는 이들을 밀고하여 잃은 것은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이며 국가가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오히려 대통령이 배신한 것은 세계첩보사에서 유례없는 반역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긴트(SIGINT: signal intelligence), 이민트(IMINT: imagery intelligence), 휴민트(HUMINT: human intelligence)를 간략히 설명한 후, 손자병법 용간편을 인용하면서 전쟁에 천금(千金)이 든다면 용간에 백금(百金)을 투입해야 할 정도로 휴민트 구축을 위한 공작원의 양성은 중요한데, 1968년부터 1998년까지 30년 동안 구축해놓았던 첩보사상 최고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휴민트 자산을 구축한 선배 정보요원 분들의 신속정확한 판단과 장기적 안목에 찬사를 표하면서, 김대중 정권이 이러한 대북 휴민트를 붕괴시킨 것만은 우리 안보에 절대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 반역이라고 지적하였다. 더구나, 용간에 있어서 현지에서 가짜인생으로 위장하기 위한 조작된 과거(Cover Story)의 숙지가 필수적인데, 사람인 이상 그 Cover Story의 유지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Cover Story가 필요 없는 현지 출신의 고정요원의 경우 그 가치가 가히 천금으로도 헤아리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북한 같은 폐쇄사회의 경우 신분획득이 곤란하기 때문에 현지인으로 구성된 휴민트를 재구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하였다. 서독의 브란트 총리 시절 총리실에 근무했던 동독간첩 귄트 욤 같은 고위층에 잠입한 간첩의 가치와 함께 유태인을 활용한 이스라엘 모사드(‘기관’이라는 뜻, 즉 명칭이 없다는 뜻임)의 예를 들면서 현지 에이전트의 중요성도 설명하였고, 이대용 주월공사를 구출하기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일일보고체계에서 보여준 애국자에 대한 노심초사를 언급하면서 250명의 대북 휴민트를 밀고한 김대중의 파렴치성을 역설하였고, U2기 사건 때의 포로 맞교환을 예로 들면서 국군포로 한명도 송환하지 않은 채 미전향장기수 64명만 공짜로 북송한 사실과 대비하며 신랄히 비판하였다. 또 배 회장은 한명의 공작원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일을 해내었는지를 조르게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다음은 조르게 사건의 요약이다. ............................................................................................ 리하르트 조르게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고, 현재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근처인 사분치에서 1895년 10월 4일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인 유전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아버지는 코카서스 석유회사에 고용된 기술자였으나, 계약이 해지되어 독일의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리하르트의 친조부의 형제였던 프리드리히 조르게는 공산주의 이론가인 마르크스의 동지였다. 1914년 10월 조르게는 제1차 세계대전에 학도자원병으로 참전하였다. 그는 서부전선에 파견되어 크게 부상당했는데, 손가락 세 개를 잃고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는 상병으로 승진해 철십자 훈장을 받았지만, 이러한 부상 때문에 제대를 했다. 그는 부상회복 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나머지 전쟁기간 중에 베를린, 키일, 함부르크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농업과 포병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 조르게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사로 일하면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활동 때문에 직업을 잃고,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의 요원이 되었다. 조르게는 소련에 의해 첩보요원으로 선발되어 신문기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독일에서 머물렀는데 1921년 그는 옛 스승 알베르트 게어라흐의 아내였던 크리스티네와 결혼을 했다. 이후 여러 공작에 가담하였고, 1924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소련의 첩보기관인 국가정치부에서 정보분석자로 일했다. 그는 일 때문에 가정을 돌보지 않아서 이혼하고 말았다. 1929년 조르게는 소련군의 제4국(GRU, 군사정보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이 부서의 요원으로 일했다. 그는 이해 영국에 파견되어 정보를 수집하였다. 다시 독일로 가� 좌익활동에 연루되지 말고 나치당에 가입하라는 지령을 받고 이에 따랐다. 그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농업신문인 도이체 게트라이드 차이퉁(Deutsche Getreide-Zeitung)에 기자로 취직하였다. 1930년 조르게는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정보수집과 혁명공작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한 독일의 통신사의 편집인과 프랑크푸르트 차이퉁의 특파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났고, 그녀와 잠시 사귀었으며, 그녀는 조르게에게 일본기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기자 오자키 호츠미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았다. 그는 농업전문가로 행세하여 중국각지를 여행하면서 당시 장제스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서 지하로 숨어 있던 중국공산당의 당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1932년 그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싸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였고, 이해 12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소련 정보당국은 조르게에게 일본으로 가서 첩보망을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조르게는 일단 독일로 돌아가서 철저한 나치스로 위장하고, 새로운 신문사에 들어갔다. 특히 취중에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 1933년 9월 6일 조르게는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과 외국인, 그리고 사업가와 신문기자 등으로 구성된 첩보망을 조직하였다. 그의 요원들은 일본의 저명한 정치가들과 접촉하여 일본의 대외정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특히 오자키 호츠미는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정책보좌역이 되어 일본정부의 기밀문서를 빼내 조르게에게 넘겼다. 그는 공식적으로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로 위장했기 때문에 주일 독일대사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도 고급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 대사였던 오이겐 오토(Eugen Otto)와 매우 친밀했고, 오토의 아내와도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첩보활동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폭음하기 시작했다. 조르게는 이러한 첩보망을 통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독일-일본 협약,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1941년 일본주재 독일 무관에게서 정보를 빼내,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6월22일, 혹은 그보다 앞선 6월20일로 전달했다는 설도 있다)를 전달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무시하여 소련군의 대패를 초래하였다. 소련은 서쪽을 침공한 독일에 발맞추어 동맹국 일본도 아시아 쪽에서 협공할 것을 우려하였는데, 1941년 9월 14일 조르게는 이에 관련한 일본군의 동향을 전달하였다. 그것은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까지는 일본군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일본군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방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이 첩보에 근거하여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에 맞서 극동에 배치된 정예병력을 빼내 서부로 돌렸고, 이 병력은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되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처음으로 패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일본이 전시국면으로 치달을수록 조르게가 첩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의 방첩기관(특별고등경찰)은 이를 인지했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르게의 요원이었던 오자키는 1941년 10월 14일 먼저 체포되었고, 조르게는 10월 18일 도쿄에� 체포되었다. 독일대사인 오이겐 오토는 이를 듣고 놀랐다. 사실 조르게는 소련을 위한 첩보활동을 하면서 일부를 독일대사관 측에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는 조르게의 체포를 일본의 과민반응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일본은 조르게를 독일 국방군의 첩보기관인 아프베어(Abwehr)의 요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프베어는 이를 부인했다. 뿐만 아니라 조르게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연관을 부정했고, 소련도 조르게를 자국의 요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르게와 소련에서 붙잡힌 일본간첩과 교환하려고 하였으나, 소련은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조르게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44년 11월 7일에 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요원이었던 오자키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처형되었다. 조르게는 일단 스가모 형무소내의 묘원에 묻혔다가 도쿄의 타마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일본인 연인이었던 이시이 하나코는 그녀가 살아있던 2000년까지 계속 조르게의 묘를 찾았다. 1961년 조르게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 《Qui tes-vous, Monsieur Sorge》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요)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고, 영화를 관람한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쵸프는 첩보기관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KGB)에게 이 영화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고 물었다. 조르게가 실존 인물임을 확인한 흐루시쵸프는 1964년 조르게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했고, 조르게가 공식적으로 자국요원임을 인정하였다. 또한 조르게의 일본인 연인 이시이 하나코에게 연금을 주었다. 한편 주일본 소련 대사는 부임후 그의 묘소를 찾는 것이 관례였고, 현재는 러시아 대사도 마찬가지로 그의 묘소를 찾는다고 한다. .................................................................................................. 마지막으로 배성관 회장은 처형된 250명의 대북 휴민트와의 연계의혹으로 탈북한 김유송씨가 남한 내 북한간첩 김대중이 대통령 되어 북한에 자료를 넘겼다는 얘기를 고위자들로부터 들었다면서 북한에선 김대중을 고위고정간첩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언급을 인용하면서, 국가지도자의 마인드가 안보에 얼마나 중요한지 비근한 사례를 예로 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냉철한 자아성찰을 통한 절치부심을 강조함과 아울러 최근 발족하는 “6.15 폐기 5.18 규명 국민전선”에서 추진하는 “이승만․박정희 동상 건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끝. [참고기사] 이도형 : 5-18전야 북한군 10만 해주 집결 [참깨방송]
한국논단 발행인. 1980년 5월 당시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이도형 증언 1] 5-18 전야 북한군 10만 해주 집결 특종 검열삭제 [이도형 증언 2] 기사 나갔더라면 과격시위 자제했을 수도 [이도형 증언 3] 만악의 근원 김대중은 거물간첩, 노무현은 ? [이도형 증언 4] 이 나라 체제 호락호락 안 넘어 간다 [이도형 증언 5] 북한군 5-18개입 가능성 충분, 교활한 간계 드러난다 [이도형 증언 6] 6-15폐기- 5-18규명 추진단체 발족 준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