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文鑑賞

老人

超我 2010. 3. 10. 16:07
老 人
서세연 법무사(서울)

내 나이가 50대에 막 접어들어 설 때 절친한 친구와 같이 매주 일요일에는 거의 북한산 쪽으로만 등산을 했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쳐 스쳐지나간다. 그때 앞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이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늙은이 인 경우 그 친구가 하는 말 “야! 저기 20년 후의 너가 내려온다”고 하면서 웃겼던 일이 있었다.

미상불, 이제 내 나이가 그 친구가 우스개 소리로 했던 말처럼 그때 그 산에서 내려오던 노인처럼 들어가고 있다. 세월은 덧없어 아무리 잡아매어 두려 해도 저절로 흐르고 있어 어느새 冥府에 갈 날이 가까워지는 老齡의 길 위에 서 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지나가는 시간 속에 묻혀 사그라져가고 있는 육신의 변화를 난들 어떻게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水晶體는 얇아져 글씨가 안보이고, 멜라닌(melanin)은 감소되어 머리털이 파뿌리로 변해가고 척박해지는 두피에 毛根이 탈피되니 사막화가 되고, 메말라가는 얼굴피부에 세월이 쏟아지니 큰골 작은골이 수없이 패이고, 힘은 삶아 놓은 가지 꼴이라.

나이 먹음에 쇠퇴되어 감이 어찌 육신에서 뿐이랴. 늙어감에 피폐되어가는 정신적 증상을 보라. 그전 같으면 무심히 그냥 대범하게 넘겨버릴 상대방의 사소한 언행에도 쉽게 노여움을 타고 잘 토라진다.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은 촘촘히 기억하면서 엊그제 한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래서 약속 같은 것을 했을 때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증표를 별도로 만들어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어야 한다.

마음은 청춘
시들어가는 육신 속에 감추어져있는 마음은 시들지 않고 있다. 思惟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늙은 몸으로 청춘의 생각대로 움직인다면 인간사의 궤를 벗어나는 일, 늙은이는 오로지 나이에 맞는 처신을 하면서 후세에 모범이 되어야만 한다. 잘못했다가는 젊은이로부터 “나이 값을 하라”는 핀잔을 듣는다.

지공파
노인복지법에 따라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만65세 이상의 노인을 견유적(犬儒的-cynical)으로 일컫는 新造語이다. 그래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지하(전)철을 탈 때마다 승객들을 살펴보면 노인들이 항상 많이 타고 있다. 어디를 그리 나들이를 하는지-. 들은 말로는 직장 등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할일 없이 집에서 그냥 놀고 있자니 마누라눈치 며느리눈치가 보여 집을 나서 차비가 들지 않는 전철을 타고 거리가 먼 종점까지 몇 번 왕래를 하면 하루가 그럭저럭 지난다고 한다.
그런데 요사이 들리는 말로는 지하철 승차권 매표수입이 적으니 노인들의 무임승차제도를 없애고 그 대신 만60세 이상 생활보호대상이 되는 노인에 한하여 무임승차하게 한다고 한다. 혜택을 받아 오던 기득권(?)을 빼앗은 법개정에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할일 없는 노인들의 원성을 무슨 말로 달랠 것인가. 그들이 지하철을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면 매표수입이 오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수성논인
순수한 인간의 생명의 길이는 생물학적으로는 120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사람의 평균수명은 70~80세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더러 사람에 따라서는 100세가 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世波에 시달리고 攝生을 올바르게 하지 못한 탓으로 주어진 생명의 길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있다. 그러하면서도 사람은 長壽를 누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오래만 산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현대판고려장
어느 노인의 얘기다. 80세가 넘은 老母가 미국에 살고 있는 막내딸 집에 여행 보내준다는 큰아들내외의 말을 듣고 자식들 덕분에 생전처음으로 외국나들이를 하게됐다고 기뻐하며 아들이 태워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서 막내딸의 마중을 잘 받고 그 딸을 따라 안내되어 들어간 곳은 딸집이 아닌 어느 ‘시설’이었다. 그 노모는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어 어디에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연락도 두절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얘기는 그 곳에 면회 갔다가 그 사정을 알게 되었다는 어느 재미교포의 전언이다.

선화
사람은 늙어서 죽음 복을 타고 나야한다고 한다. 無病長壽하고 갈 때는 말없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은 채 조용히 사라지는 福을 가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디 세상만사가 사람의 뜻대로 이루어지는가. 보통은 병들어 본인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 까지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 부담을 주면서 수선을 떨다가 간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眞心으로 슬퍼할 때’ 생을 마감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 아닐까.


http://www.lawtimes.co.kr/LawEdit/Edit/EditContents.aspx?kind=ba06&serial=23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