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문> 답답(沓沓)해서 못살겠다.....!!! 全基督敎人 漢字使用 聖經읽기 運動
정말 가슴에 묻어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계에 넘치는 무지함과 몽매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한글 전용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한글은 그 우수한 문자체계와 과학성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언어다. 세종대왕께서 만든 아주 멋진 문자이긴 하다.
그리고, 우리 것으로서 이 처럼 자랑 스러운 것도 없다. 또한 모든 소리를 예를 들면 새소리나 동물 소리를 문자로써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특수한 장점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한글은 표음문자라는 점이다. 영어의 알파벳도 표음 문자이지만, 영어는 알파벳의 하나 하나가 합쳐져서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혼란될 일은 전혀 없다. 그러나, 한글은 모음과 자음이 결합해서 발성효과를 낼 뿐이지 뜻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음에 그 예를 들고자 한다.
"I saw a lion."하면 나는 사자를 보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글로 "나는 사자를 보았다."라고 써보자. 여기서 우리는 사자가 사자(獅子, lion)인지, 使者(missionary), 四者(four men), 思者(thinker), 死者(dead man)......등등 인지를 알 수 없다. 사자라는 한글 단어 속에는 십여가지나 되는 뜻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나는 사자를 보았다는 말이 진짜 동물 사자를 보았는지, 죽은 사람을 보았는지, 왕이 보내는 사신을 보았는지, 생각하는 사람을 보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글만으로 표기한 문장에는 이러한 혼란이 있다. 따라서 언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뜻을 전달하는 방면에 있어서 한글은 가장 낙후된 문자이다.
한글 학자들은 이해 못하는 단어나 문장은 그 문장이 놓여진 환경이나 문맥에서 확인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무수히 많다.
자, 내가 이렇게 한글의 단점을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매일 읽고 있고, 공예배에서 쓰고 있는 성경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은 백년전 구한말 개화기때 번역된 것이다. 그당시의 기독교 인들은 모두 국한 혼용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성경도 국한 혼용의 정신 위에 번역되었으며, 성경의 90%이상이 모두 어려운 한자어이다.
며칠 전에 출애굽기를 읽다가 '유월절'이란 말이 나왔다. 아무도 그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혹자는 유월달에 있는 절기가 아니냐고 해서 웃음을 자아냈다.
여기서 유는 넘을 유자이고 월은 넘을 월자이다. 절은 절기 절자...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탈출해서 넘어간 날을 기념해 만든 절기다.
애급은 뭐고 이집트는 뭔가? 애급은 이집트를 한자음으로 쓴 것이다. 애급(埃及)이라 해서 티끌 애, 미칠 급 즉 아무 뜻이 없이 그냥 음만 빌려서 표현한 것이다.
전에 목사님이 설교하시다가 출애급기를 봉독 했는데, 지금 그것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출애급기 22장 7절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의 집에서 봉적하였는데 그 도적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라는 문장이었다.
자 여기서 '봉적'이 뭔가? 한글로 뜻을 알아내려면 백년이 걸려도 못알아 낸다.
'봉적'은 바로 만날 봉자에 도적 적자로써 도적을 만나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뜻이다.
한글로만 그냥 읽으면 무슨 문장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냥 넘어간다.
믿음이 좋은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 믿음이 너무 좋은 탓에 어설픈 한글로 해석한 성경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수가 생긴다. 그러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좋은 믿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곡해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한자를 거의 모른다.
찬송을 할때 우리가 쓰는 말로 "주여 보좌로 임하사 능력을 드러내시고 역사하소서" 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 말뜻을 제대로 알고 쓰는 청년이 과연 몇이나 될까?
보좌는 보물 보자에 자리 좌자다. 하나님이 앉으시는 보배롭고 귀중한 좌석이 보좌다.
역사는 뭔가? 역사에는 역사(history)도 있고, 힘센 사람이란 뜻의 역사도 있고, 일을 한다는 뜻의 역사도 있고, 토목 건축을 위한 큰일이란 뜻도 있고, 차에 깔려 죽는다는 뜻도 있고, 외국 가사를 번역한다는 말도 있다. 그럼 어느 역사가 진짜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일까?
기독교의 절기 중에 대강절이란게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대강절을 모든 일들을 대강대강 하는 날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여기서 대는 기다릴 대자이고, 강은 내릴 강이다. 즉 대강절에는 성령의 강림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내포되 있다. 그런데 한글 만으로는 그 뜻을 어림도 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무수한 한자어들이 나온다. 속건제, 소제, 관제, 강퍅, 전제, 요제, 궤휼, 체휼, 긍휼, 구속, 대속 등등 이 모든 말들의 뜻을 한자가 아니면 제대로 파악할 수 조차 없다. 심지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잠잠케 하신적이 있는데,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물결이 잔잔해지더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잔잔하다의 잔잔조차 한자다.
무수한 한자어들을 우리는 한글로만 배우고 있다. 우리가 한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까지 한자인 경우는 더 많다. 답답하다라는 말도 답답이 한자라는 사실을 알면 아마 놀랄 것이다.
기독교계는 한글 전용의 선봉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미혹케 하고, 우리의 지혜와 총명을 막으려고 부린 술수다.
예수께서는 악한데는 어린애 같고 지혜에는 뱀같아라고 하셨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롭기 보다는 미련한 곰탱이 같이 어리석다. 기독교인이 한자를 모르고 성령이 뭔지, 성결이 뭔지, 성신이 뭔지, 신성이 뭔지, 신령이 뭔지, 영력이 뭔지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닐까?
기독교인들이 이제부터라도 각성하고 한자공부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성경을 한글로만 읽어서 이해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은 지나쳐버릴게 아니라 국한 혼용으로 읽어서 제대로 알아야 될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국한 혼용에 앞장설 것을 나는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http://cafe.daum.net/sence001/GBc/5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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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독교카페에서 공지로 올라온 글...
정말 심각합니다..
아래도 이와 관련된 어느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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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일천번제
솔로몬의 일천번제(一千燔祭)를 솔로몬이 번제를 천 번 드렸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일천번제는 한자로 一千番祭가 아니라 一千燔祭이다.
즉, 번제를 천 번 드린 것이 아니라, 일천 개의 번제물을 드렸다는 뜻이다.
대하 1:5b,6
...솔로몬이 회중과 함께 그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 곧,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에, 곧 ,회중의 성막 옆에 있는 놋 제단에 이르러,
그 위에 번제 헌물 천개(a thousand burnt offerings)를 드렸더라.
왕상 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번제(一千燔祭)를 드렸더라.
이래서 국한혼용성경을 보아야 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http://kepion.ohpy.com/opbbs/?control=View&branch=print_css&op_no=3449&bbs_no=144769&b_
no=2&nocache=0.661415195077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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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한글전용에 따른 문제입니다..
수천년간 이어져온 언어생활속의 한자어를 한글로만 표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문제였지요.
수천년의 언어생활이 수십년만에 바뀔수도 없고 쉽게 바뀌어서도 안되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한글전용을 강제한다는 것은 불합리하지요.
한글과 한자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수천년간 조상들이 써온 한자...그렇게 쉽게 순식간에 버리면 안됩니다.
그리고 한자문맹...자랑이 아닙니다.
나중에 큰코 다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은 국한자혼용, 국한문혼용으로 번역된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아래는 국한자혼용, 국한문혼용으로 번역된 성경파일(한글파일)입니다.
필요하신분들은 다운받아서 보세요.
국한혼용성경.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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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는 자들
얼핏 보편적인 주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으나,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적이 성경이다. 그러면 성경의 한글전용은 어떤 혼동을 주는가 알아보기로 한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필자는 某處에서 어떤 사람이 그 구절을 읽고 "하나님의 신발짝이..."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물론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는 제외하고, 우리가 '신'이 '神'을 뜻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우리는 神의 뜻을 통상 「God」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神' 하면 '하나님에게 또 무슨 神이 있나?' 하며 의아해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마음을 뜻할 때 쓰는 「精神」에서 精은 妖精, 精靈 등에서와 같이 작은 마음을 뜻하는 것이고 神은 어떤 統一性이 있는 '큰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神'이라는 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적절한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神'이라는 漢字의 뜻을 평소에 정확히 새기고 있지 못한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영(靈)은...'으로 번역한 성경이 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번역자가 '국어운동가'가 아닌 성직자라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무책임한 처사라고 보겠다. 한글로만 쓸 때 불편하다고 해서 굳이 동물에도 쓰이는 보편적인 의미의 '靈'으로 바꿔 써야만 했는가. 성경구절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열심히 가르쳐 그들의 정신을 향상시켜줄 생각은 안하고 그 의미를 임의로 바꾸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 (마태복음 1:1)
여기서 '세계'가 무슨 뜻인가 물어보면 열이면 아홉은 '世界'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족보의 나열을 보면 일부 눈치 있고 논리적인 사람은 '世系'라는 의미임을 짐작할 수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은 다소 無理가 있다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世界'라고 간주하고 넘어간다.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요한계시록 14:14)
'이한'이 어떤 듯인지 여기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利한'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현대의 우리는 쉽게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지금은 쓰이지 않는 古語인양 오해를 당하게 되는데,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인 '예리하다'의 漢字를 안다면 이 말의 뜻도 알 수 있다. '예리하다'는 결국 비슷한 의미의 '銳'와 '利'가 합쳐진 말이다. 利子, 利益 등에서 보듯이 본래의 것에서 삐져나온 날카로운 것을 말하니 '利한 낫'하면 날카로운 낫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리하다'라고 한글로 쓰면 되지 않느냐고 된다고 하기도 하겠지만 무생물인 낫을 말할 때 굳이 '銳'를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날카로운'과도 조금 다른 어감이 있다.
이외에도 사회에서 많이 쓰이는 '구속(拘束)'과 교회에서 많이 쓰이는 '구속(救贖)'을 혼동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나님이 나를 그릇된 길로 빠져나가기 못하도록 拘束하셨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물론 우리의 전통 관습에도, 呪文은 꼭 그 의미를 알아야만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나무아미타불을 수 만 번 외우면서도 꼭 그 뜻을 알고 해야만 道를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다면 노력하고 지혜를 키우는 것이 또한 가르침에 충실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돈의 단위)를 받은 자가 그것을 두배로 남기어 갖다 바치니 칭찬을 받고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그것에 불만을 품어 땅에 묻으니 징벌을 받는 이야기가 있다. 자기가 태어나서부터 능력을 많이 받았건 적게 받았건 간에, 힘써 노력하여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역할을 발휘하여 자기 생의 의미를 찾으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왕에 달란트를 적게 받았다면 몰라도, 충분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노력을 안하고 자기의 재능 즉 달란트를 묻어버린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정신력의 후퇴이고 주인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다. 그러니 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거나 두어 달란트만 갚는 자는 한 달란트를 땅에 묻는 자보다 더한 징벌을 받을 것이다.
漢字의 효율적인 학습에 國漢文 성경은 좋은 교재이다. 거의 모든 漢字語가 漢字로 적혀 있고 읽다가 막히면 곧바로 한글본을 대조하여 알 수가 있으니 '가르침'과 漢字를 동시에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공부를 하려 해도 漢字를 익히지 못할 만큼 본래 능력을 적게 부여받은 사람들이 있다해도, 국한문성경은 성경을 보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은 약간의 노력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백명 중의 한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할 정도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부여받은 잠재능력을 헛되이 死藏시키고 있는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도록 방치한 지도자들 또한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노력을 안하고 살도록 유혹하며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지혜를 향상시키기에 필요한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사고력을 저하시키려는 일이고 그것은 곧 인간영혼의 퇴보이다. 또한 영혼의 퇴보는 영혼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月刊朝鮮 2000년 11월호 李文烈의 '아가'는 '雅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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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전용 讀書記 - 안개 속에서 미로를 헤매다 - 정보화사회의 요구에 어긋나는 우리의 모호한 언어생활
中에서 |
http://www.chogabje.com/toron/toron2/view.asp?id=45402&cpage=1&no=41368
성경만은 세로쓰기를 지켜야 한다/全基督敎人 漢字使用 聖經읽기 運動 |
성경만은 세로쓰기를 지켜야 한다
금년 들어 그 동안 세로쓰기를 지켜왔던 이른바 보수언론 들도 모두 가로쓰기로 투항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일반 인쇄물 중에서는 세로쓰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두고 조선일보에서는 「막 내린 세로쓰기 시대」 운운하며 저네들이 세로쓰기의 종지부를 찍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엄연히 세로쓰기의 출판물은 존속되고 있다。 바로 우리의 성경인 것이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간혹 외래종교니 하며 우리 고유전통과 대립되는 것처럼 말하는 측도 있었지만, 오히려 우리 사회의 각종 사상, 이념의 혼란 속에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기댈 수 있는 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급격한 문화혁명 속에서도 성경만이 일제침략기 이전의 근세 우리 문체를 간직하고 국한혼용체와 세로쓰기를 보존하고 있다。 유교 및 전통문화 관련 책자도 모두 가로쓰기로 하고있고, 불교 경전에는 세로쓰기가 남아있지만 그 양이 얼마 안 된다。 현재에 이르러 우리 민족에게 세로쓰기로 쓰여진 긴 내용의 책은 성경이 거의 유일하다。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온다는 의미의 세로쓰기 관습을 우리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創世記에서도 세로로 일어서 걷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가로로 편안히 누워 다니는 뱀은 사탄의 화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얼른 보기에 편하다고 해서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성경마저 가로쓰기로 무작정 바꾸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글을 읽어 마음속에 새겨가면서 눈길을 상하로 끄덕이는 세로쓰기와 달리, 좌우로 흔드는 否定의 습관이 배일 듯한 가로쓰기는 우리사회의 뿌리를 근본부터 바꾸려는 세력에게 매력적이었다。 수천년의 문화 전통이 불과 몇 년 사이에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에 변변히 저항한 文人조차 없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로쓰기에 익숙한 기성세대도 가로쓰기 글을 읽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가로쓰기에만 익숙한 신세대는 세로쓰기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것은 두발로 걷는 인간은 네발 걷기를 흉내내기가 어렵지 않지만 네발로 기어다니는 짐승이 두발로 일어서기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젊은 세대에게 세로쓰기의 독서를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아이가 네발로 걸을 때 걸음마를 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같다。 사람의 두 눈은 가로로 보게 있다고 가로쓰기 옹호자들은 말하지만, 사람의 두 눈은 한 곳을 집중해서 보라고 되어있지 옆으로 넓게 보라고 되어있지 않다。 두 눈의 시선을 放漫하게 하여 넓게 보자는 것은 인간이 도마뱀, 도롱뇽 같은 동물을 본받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교육제도와 출판관행이, 보다 발전된 형태의 우리문화인 세로쓰기를 말살하고 下等한 형태의 가로쓰기로의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형편에서 무너져 내려가는 우리 민족의 <氣>를 되살리고 우리를 지구상의 다른 어느 민족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敎界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현재 가로쓰기, 세로쓰기의 성경이 混在해 있는 상황에서 선택을 평신도들의 자유의사에만 맡기면 자꾸 편한 쪽으로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세로쓰기의 성경이 더 성경 奉讀의 참 목적에 가까울 수 있다는 認識이 요구된다。 그리고 학생 등의 성경학습에서는 英文성경공부보다는 우리말을 완전히 알기 위해서 漢字혼용 성경의 공부를 우선해야 할 것이다。(월간 <신문고> 1999/9월호)
全基督敎人 漢字使用 聖經읽기 運動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그것을 두 배로 남기어 갖다 바치니 칭찬을 받고,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불만을 품어 땅에 묻으니 징벌을 받는다。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많이 받았건 적게 받았건 간에, 우리는 힘써 노력하여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역할을 해야 한다。 기왕에 달란트를 적게 받았다면 몰라도, 만약 충분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노력을 안하고 자기의 재능 즉 달란트를 묻어버린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정신력의 후퇴이고 주인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다。 그러니 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거나 두어 달란트만 갚는 자는 한 달란트를 땅에 묻는 자보다 더한 징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사회 全般에 걸친 漢字의 말살로 인해 우리의 전통문화가 단절되고 국민의 知的수준이 저하된다는 것은 어제오늘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듯 한자말살의 문제는 우리사회 良識을 갖춘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우리사회는 어떤 획기적인 조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권할 때 以前보다 편한 것으로 권하기는 쉬워도 以前보다 어려운 것은 권하기 어렵다。 일어서 있던 사람을 누워도 좋다고 말해주기는, 인심도 얻으면서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지만 누워있던 사람을 다시 일어서라고 권하기는 어렵다。 결국 누워있기만 하면 살아가는데 지장이 있음을 깨우쳐 주어야만 설득력을 가진다。 물론 우리가 편하게 누워만 있으면, 즉 쉽고 편한 한글전용으로는 선진국 도약이 어렵다는 말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람이 굶는 지경은 아니라 구태여 귀찮은 개혁을 추구하지를 않았고 또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어려운 상황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문자생활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을 않았다。 또한 한글전용이 오십여년 계속되면서, 한글에 대한 信仰에 가까운 過讚에 바탕한 우리 사회문화의 不合理에 편승하여, 우리사회에는 이미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광범위한 기득권 층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지도층의 대다수가 漢字使用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우리 문화의 퇴보를 걱정한다 하더라도 정작 핵심적인 事案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避해가고 있다。 이미 국가 권력의 핵심에 근접한 수많은 인사들이 한자교육 강화의 의견표명을 하는 것이 숱하게 있었지만 아직도 교육과 문학은 搖之不動으로 한글전용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자처하는 세력에서도 동성동본 불혼제 등의 문제에는 강하게 투쟁했지만 정작 우리전통문화의 基盤인 漢字使用의 문제에는 투쟁하지 못했다。 본래 한글전용을 추구하는 측은 자기들의 뜻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강한 기질의 사람들이었는데 反하여 漢字使用을 지지하는 측은 대체로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고 安住하려는 기질의 사람들이라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노력을 안하고 살도록 유혹하며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지혜를 향상시키기에 필요한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사고력을 저하시키려는 일이고 그것은 곧 인간영혼의 퇴보이다。 또한 영혼의 퇴보는 영혼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 우리의 고질적인 어문생활 문제의 해결은, 속세에서의 營利에 얽매이지 않고 올바른 뜻을 관철할 意志가 있는 信仰人의 힘으로 관철할 때이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다。 신앙이란 인간의 思考와 논리적 판단을 且置하고, 보다 높은 절대적인 가치를 優位에 두고 거기에 우리의 뜻과 행동을 依支하는 것이다。 文字는 우리의 언어생활과 사고의 교류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목적에 부합하면 우리는 어떤 문자라도 使用할 자유가 있다。 이미 한글만으로는 우리의 언어와 사고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충분히 증명된 바 있음에도 '되도록 漢字를 배척하고 한글을 대접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또 다른 '신앙'과 마찬가지로서 일종의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當然한 國語로 씌어있는 漢字使用의 聖經이 읽혀져야 한다。 1956年刊 簡易國漢文 聖經은 모든 기독교인이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어야한다。 漢字使用의 聖經은 어떤 특별한 책이 아닌 우리 聖經의 正本이 되어야 한다。 국민의 사고수준을 떨어뜨리는 우리의 어문생활의 문제에 대해서 정부에서 계속 미온적이고 佛敎界, 儒林 등에서도 마찬가지일지라도, 우선은 千萬 기독교인이 漢字使用이 된 聖經을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우리의 독서능력을 선진국수준으로 높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또한 인간 영혼의 高揚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에 가까이 가는 길도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천사항으로는 漢字使用 聖經의 선물주기 운동을 하여 앞으로 二年 內에 전 기독교인의 절반이상이 漢字使用 聖經을 소유하도록 하고 읽을 수 있도록 한다。 漢字使用 聖經을 膳物 받은 사람은 다시 두 명 이상에게 漢字使用 聖經을 선물한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점차 漢字使用의 聖經으로 예배를 보며 漢字使用 聖經으로 聖經을 공부한다。 또한 漢字使用 聖經을 학습용으로도 널리 보급한다。 全 기독교인 漢字使用 聖經 읽기 운동은 救國의 길이며,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일이다。 (2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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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y 銀河天使 | 2004/03/30 12:41 | 論說評論 | 트랙백(1) | 덧글(8)
| http://www.chogabje.com/toron/toron2/view.asp?id=45403&cpage=1&no=41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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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國的인 한글전용 표기정책의 강제는 폐지되어야....
수백년 써온 한글과 수천년 써온 漢字 모두 우리말 우리글일진대,
한글만이 우리글이고 한자는 남의글 이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한글사랑만이 愛國이라는 아주 잘못된, 全國民의 愚民化라는 악마의 탈을 쓴 비극적인 한글전용 愚民化政策의 고집으로,
국민의 知的水準은 점점 退化, 下向平準化되고,
한글전용 표기만을 고집하여 한글만으로의 表記나 變換, 代替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무수한 專門用語에 대한 늘어나는 거부감으로,
세계최고수준의 문화국민인 우리민족이,
높은 수준의 서적에 대한 讀書보다는 小說類의 낮은 수준의 책만을 찾거나, 아예 독서를 기피하는 각 문화국 대비 세계최저의 독서율 기록을 유지한 채,
편안함만 찾다가.. 서서히..아주 서서히..
시원한 물에 담아 편안히 놀게 한 후, 불에 올려놓아 서서히 물이 데워져 끓는 물에 자신이 죽어가도, 죽는지 느끼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개구리와 같이,
짧게는 수십년, 길어야 수백년 후에는 中國과 日本의 높은 수준들을 따라가지 못해 민족과 국가가 공중분해되는 줄도 모르고 서서히 소멸되어가는,
우리민족의 悲劇이 오기 전에...
한글전용이라는 망국적 愚民化政策의 强制는 폐지하고 반드시 漢字混用政策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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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는 자들
다섯 달란트를 땅에 묻는 자들얼핏 보편적인 주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으나,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적이 성경이다. 그러면 성경의 한글전용은 어떤 혼동을 주는가 알아보기로 한다."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필.....more
지는 저 책에 나와있는 5천 韓字단어를 풀은 책을 몇년 전 탈고하였으나 아직 발간치 못하고 있어 마음이 씁쓸합니다.
소개처 http://studywell.bchome.co.kr
올해에는 꼭 발간하리라 다짐합니다. 銀河天使님 感謝합니다.
http://blog.empas.com/mumakr/1241256
나는 세로쓰기든 가로쓰기든 별로 불편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로쓰기가 더 편하다. 무슨 신의 말을 읽는데 힘들게 봐야 한다는 이유가 있나? 성서는 불편하게 봐야 한다는 것인가?
히브리어 원문 성경은 세로로 적혀있었나? 라틴어 성경은? 영어나 프랑스어 성경은?
그리고 언어는 계속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된 언어에 맞춰서 번역을 다시 해야 한다는것은 아주 당연한것 아닌가? 일제때의 한국어를 지금 다시 배워서 익히라는것인가? 좀 생각을 하면서 살아라.
그리고 국한문혼용이 편하다고 생각하는것인가? 정말 생각이 있는지 궁금하다. 한자가 필요하면 한자를 병기하면 된다.
미국은 한자를 몰라서 불편함을 느끼고 사고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차라리 원문을 최대한 제대로 읽을수 있게 히브리어 병기나 히브리어 혼용을 하라고 하지 그러냐?
의문나는 분은 여기 같은테마의글을더 찾아보시길권합니다.
그래도 한마디 하려면 수천년 조상을 바보로 둔사람이 아니면 조상의 것을 살리는것이 문화인으로서의 최선의길입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부터 읽게 되어 있어서 영문과 혼용할때 매우불편하죠. 그래도그들은 전혀 바꿀 생각도 안하죠. 그러기에 굳건히 민족이 살아남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