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망하지 않으면 한국이 망한다(1998/10)
제 목:月刊朝鮮10月號 "한글이 망하지.." 原文 [1563]
보낸이:박경범 (은하천사) 1998-09-19 17:44 조회:228
꼭 필요하지 않은 漢字
꼭 필요하지 않은 文學
- 소설의 한글전용은 과연 神聖불가침인가
朴京範 소설가
꼭 필요하지 않은 漢字
"그 의자는 허구헌날, 내 눈에 거슬렸던 것처럼 오늘도 거슬린다.
손으로 우단천을 결과 반대방향으로 쓸면 다 바랜 잿빛 속에서 밝은
녹두색이 살아난다." (朴婉緖, <그 가을의 사흘동안> 中)
日常주변의 한 광경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한 대목이다. 그런데
필자는 '결과'라는 글자를 접할 때 '갑자기 무슨 結果가 생겨났나?"하
고 어리둥절했다. 문장을 다 읽고 조금 생각한 후에 '결'이라는 것이
다른 뜻임을 알았다. 물론 '우단천'이란 낱말에 주목하지 못한 독자의
잘못도 있다. 인용구 앞에서도 우단의자가 놓여있다는 情況이 강조되
고 있다. 우단천은 털이 있어 '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
채지 못한 탓이다. 만약 '결'을 가진 주체가 나무였다면 필시 작가는
'나뭇결'이라고 써서 독자의 이해를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털결'이
라고 할 수는 없기에 누차 우단이 덮인 상황을 강조했고 문장의 앞뒤
에서 오해가 없도록 상당한 배려를 했으나 눈치 없는 독자는 가장 흔
히 쓰이는 '結果'라는 낱말이 우선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이렇듯 한자어의 한글표기는 같은 한자어끼리의 혼동보다도, 본래대
로라면 한글로 훌륭히 표기되었을 '아름다운 순우리말'의 위치를 훼손
하고 있다. 사례를 일일이 기록해 두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필자의 독
서 기억에서 특히 기억나는 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하지만 굳이 들
(擧)지 않아도 누구나 많은 경우를 겪었을 것이다.
필자의 세대는 어려서부터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문자라고 들
으며 지내왔다. 그것은 神이나 부모와 같은 절대권위였다. 우리는 한
글에 의한 우리말의 표현에 많은 불편을 겪으면서도 한글은 세계최고
의 완벽한 문자라는 권위에 눌려 비판의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글전
용은 우리의 문화가 도달해야 할 理想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그
실행에는, '시대와의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가올 신명나는 세상
으로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자 하는', 문학 특히 소설이 앞장섰다. 당
장에 漢字를 없앨 수는 없어 나온 타협안이 '꼭 필요할 경우에 한해
괄호 안에 첨부한다'였다.
그러나 문학은 그 자체가 사람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꼭 필요한'의 '꼭'도 '必要'에 들어있는 말이므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 꼭 필요한 경우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한자를 쓰지 말
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하 '한글전용'은 한자를 괄호안에 넣는 것
을 포함한다.)
문학, 예술에 있어서 고정관념을 깬다는 말은 너무도 흔하다. 그런
데 그 깨는 의미는 그 고정관념이 어떤 불변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라
는 전제 하에서 의미가 있다. 이를테면 사람의 머리가 팔다리보다 위
에 붙어있다는 것은 깨어야할 고정 관념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문학의 가장 큰 고정관념은 다름 아닌 한글전용이다. 이것은 우리 韓
國民의 정서와, 문학의 본질이 아니다.
학생과 디스코 추는 음대교수
음악도, 대중음악과 달리 인간의 情緖純化와 靈的高揚에 더 충실할
수 있으면서 상업성을 가지지 못하는 순수음악에 교육 및 기타 公的인
支援을 통해 一般에의 보급을 장려한다. 그런데 만약 음대교수들이 수
업시간에 학생들과 디스코춤을 춘다면 대중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까? 아마 中高生을 비롯한 상당수는 음대교수의 권위주의와 허세가 무
너졌다고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국민정서의 중심은 흐트러질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문학에서도 지금의 순수문학이 진정 '순수'의 목적을 따
르고 있느냐에 의문이 가는 것이다. 개개의 순수문학 작품의 작품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할 것이다. 그러나
대중음악과 순수음악이 그 하나 하나의 質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일
단 그 '틀'로 구분이 되고 있는 만큼, 문학 또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틀'로 구분을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순수문학'을 담고 있
는 틀은 대중문학과 마찬가지로, 한사람이라도 많은 독자를 잡기 위한
방향으로 되어 있지 창작표현의 내용을 제한 없이 풍부히 담는 방향으
로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괄호 同伴은 부끄러운 것
해방 후 우리 문학에서는 작가 張龍鶴 先生이 한자를 노출해 쓰기를
해 왔다. 또한 작가 朴常隆씨의 <七祖語論>이 있는데, 이 작품은 소설
의 일반형태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완전히 한자혼용소설을 시도했다고
는 하기 어렵다. 그 외에는 모두, 설령 한문 투의 문장이라도 철저히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 표기하고 있다.
작가 張龍鶴은 1963년 <세대>와의 대담에서 우리 소설이 한글전용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제하의 한글운동을 고찰할 때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것'을 찾으
려는 朝鮮主義와 '민중 속으로'라는 공산주의 구호가 우연히 일치되어
있었다는 시대적 배경을 놓쳐서는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
서 오늘날 중공이 시도하고 있는 한자폐지와 우리의 그것은 그 서있
는 世界觀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간 帝政 때는
共産主義者가 곧 民族主義者였고 해방 후 사사건건 우익과 좌익이 일
치된 것은 한글전용 문제뿐이었다는 것도 그런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있은 데다가 당시의 지식층은
일본글에 빼앗기고 우리소설을 읽는 사람은 대개 어폐가 있지만 무식
층이었습니다. 소설가들도 그런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창작활동을 해
야했으니 漢字를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또한, 그러면 한자를 굳이 쓰려면 괄호 안에 첨부하면 되지 않겠느
냐는 當時 기자의 물음에 작가는 "漢字를 사용하는 것보다 괄호를 의
무적으로 동반하는 문장 쪽이 더 부끄러운 것이라"며,
"하나는 빌려쓰는 것이지만 하나는 병신이란 말이 되니까요. 남의
글자를 사용하는 민족은 많아도 괄호를 거의 원칙이 되게끔 지녀야하
는 문장을 갖고 있는 민족은 이 지구상에 우리뿐이 아닌가 해요. 그리
고 소설은 많은 독자에게 읽혀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은 일리가 있
지만 이 땅에서는 그 일리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전체를 덮어버린 것
같아요. 많은 독자를 의식적으로 의식하면서 쓰면 자연히 이야기 중심
의 소설이 됩니다.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것은 소설의 '알파'이지
'오메가'는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근대소설과 그 이전의 소설이 구별
되는 첫째 조건이 전자는 이야기의 흥미를 위주로 하고 후자는 인간의
탐구를 사명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 여기서
작가의 근대소설에 대한 정의가 바로 현재 '본격문단'에서 취급하는
순수문학을 의미한다고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음 필자는 국내의 현역 주요 문인들의 견해를 전화인터뷰로 조사
하였다.
현학적인 문장으로 정평이 나있는 작가 李文烈씨는 소설의 한글전용
문제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대해 일단 "우리 고유어로 좋은 표현이 되
는 것은 당연히 고유어가 바람직하다."는 기본적인 일반론을 인정했
다. 오히려 한글전용을 하니까 한자어를 정확한 뜻의 확인 없이 남용
하지 않느냐는 필자의 질문에는 공감을 표시했고, "'달콤하다'와 '감
미롭다'처럼, 한글고유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그 뉘앙스가 한자어
가 더 알맞는 경우가 있다."며 인위적인 '한글지향'의 문제점을 지적
했다.
우리 문학의 한글전용 지향이 外來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아닐까하는
필자의 질문에 작가는 신중론을 펼치면서, "전반적으로 기성세대의 反
日 反事大主義 추구과정에서의 세련되지 못한 명분론이 초래한 것"이
라는 견해를 보였다. 바로 이러한,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신세대의
모형에, 신세대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묶여 있는 상태라 생각되었
다.
필자의 생각은 '달콤하다'를 '감미롭다'로 해도 좋다고 모두가 인정
한다해도 '감미롭다'는 '甘美롭다'라고 해야 제 맛이 나는데 현실은
'감미(甘美)롭다'라고 번거롭게 표기하게 되어 사실상 '달콤하다'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한자혼용의 글을 출판할
생각이 있으신가의 질문에는 "핵심독자를 위한 高品位 에세이를 써보
겠다면 가능하겠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소설에서는 당분간 어려울 것
이다."고 밝히고, "이미 보수적인 작가로서의 선입감이 너무 배어져
있기 때문에 설사 시도를 한다 하더라도 그 순수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실토하면서, 오히려 "신진작가 층에서 치고 나오는 것이 신
선감과 함께 좋은 파급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새로
운 풍토가 조성되면 자신은 "가장 큰 수혜자"가 될 수 있다고 피력했
다. 이 말은 곧 이제까지 그토록 많은 작품을 발표했던, 작가도 이제
껏 충분히 창작의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며, 여건이 好調되면
풀어놓을 새로운 '보따리' 또한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순수문학지향이면서 작품에 한자를 잘 쓰지 않는 작가 金采原씨는
소설의 한글전용 문제에 관하여 "구체적인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아무
래도 우리의 문화전통을 되찾기 위해 뭔가 바뀌어야할 것 같다는 느낌
은 갖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괄호 안의 한자는 뜻을 알기 위해 도
움이 되므로 "한자에 의한 표현이 자연스레 나오는 작가들은 제약 없
이 한자를 많이 쓸 수 있도록"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소설에서의
한자노출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작가는 개인적으로 한자사용에 익숙
지 않기 때문에 현행이 좋다 생각하나 다른 사람의 창작방식에 대해서
는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했다. 한자도 중요하지만 한글표기가 같이
있어주어야 우리 문학의 正體性이 살(生)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 작
가의 견해였다.
동양학문을 바탕으로 역사물 등에서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
이재운씨는 "한문은 문화 계승에 필수적"이라고 중요성을 강조하고
"몽고의 경우 투르크어와 한문 등으로 비문을 썼는데 다른 언어는 사
멸되었으나 한문이 남아 오늘날 전해질 수 있었다."고 예를 들었다.
한글의 표현력을 늘릴 생각은 않고 한자배격만 주장한 맹목적 한글전
용론에 否定的인 견해를 표하면서, 한자혼용에 대해서도 소설, 학술을
구분 않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한글 또한 주체성 있는 고유문화
로서 "한글은 한글, 한문은 한문대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
다. 중국과 구분되는 東夷族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작품성향과 관계 있
는 견해인가. 아무튼 작가의 의견대로라면 학술 등의 목적에서도 한자
혼용을 할 바에는 차라리 조선시대처럼 한문으로 모든 학술서를 발간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현실적 문제를 배제한다면 그 또한 一理가
있었다. 사실 순한문이 한자혼용보다 더욱 함축적인 표현에 유리할 것
이다. 그러나 한글과 한자의 혼용은, '漢字專用'보다도 더한 視覺的
효과와 단어변별력을 준다는 것 또한 여기서 필자를 포함한 한자혼용
론의 견해로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필자가 프로페셔날한 취재를 하지 못한 탓에 평소 가깝지 않은, 평
론계에서는 이렇다할 의견수집을 못하였는데, 단 이전에 평론가로서
한글전용주의자임을 자처하다가 근래 한글전용을 비판하는 소설을 낸
바 있는 소설가 박덕규씨는, "그것은 개개인의 나름."이라 하면서 신
축성을 보였다. 작가는 "한글로 해서 좋을 것은 한글로 하고 괄호 안
에 넣는 것도 무방하나 경우에 따라 노출하고 싶은 것은 노출시켜도
좋을 것."이라고 하고 단지 출판계와 사회적인 관습 등이 문제로 작용
할 수 있음은 여운으로 남겼다.
개개의 문인으로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고 또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
해 뭐라 할 일도 없기에 결국 이 문제의 열쇠는 출판사가 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민음사>의 李甲洙편집장은 "소설의 성격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하면서 "역사소설, 仙道소설이라면 경우에 따라 가능
할 것이지만 가급적이면 한자는 괄호 안에 넣어야 할 것."이라고 했
다. 만약 작가가 한자노출을 요구한다면 들어줄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서는 作家가 요구한다면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
로, 출판을 당당히 청탁하는 유명작가라면 가능하겠지만 屈指의 출판
사에서의 출판 그 자체로 感泣할 신인作家가 과연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출판 원칙에만 맞으면 된다"고 했다. 하
지만 결국, 구체적인 제약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현실은 현실로서, 턱걸
이 출판을 하는 풋내기 작가가 웬만한 自信感아니고서 고집을 부리기
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겠다.
<문학동네> 편집부의 김철식 과장은 일반 출판실무자로서의 입장임
을 전제한 뒤, "한자는 가급적 쓰지 않으며 꼭 필요한 경우에 병행"
즉 괄호 안에 넣는 원칙을 지킬 것이며 "한자를 노출하는 출판은 불가
능하고, 또한 옳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현재 학술서적 출판에 치중하고있는 <문예출판사>의 田炳晳사장은
한자의 필요성에 대해 새삼 강조하여 力說한 후 "출판사중에 가장 늦
게까지 한자혼용을 고집했으나 그러다 보니 회사가 지탱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실토했다. 결국 책의 내용을 희생하면서 "한글 세대를 위
한 한글 철학개론..." 식으로 출판을 하였더니 우려와는 달리 대학에
서 교재로들 채택하여 많이 팔린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문제는 문장의
모범이 되는 소설이 일찍부터 한글전용을 함으로써 '先導'한 결과라는
필자의 의견을 말하고, 文學書에 한자를 혼용하는 관습을 세우면 학술
서의 한자혼용은 저절로 될 것이라고 하니 공감을 표시했다. 田사장은
앞으로 한자혼용을 한 文學書도 "시도해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비록 일부에만 設問하였지만, 현재 문학서 출판이 활발한
주류 출판사들은 모두가 '한글전용을 원칙으로 하고, 한자는 가급적
줄이되 꼭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병기한다.'는 출판원칙을 고수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이들 대여섯의 출판사에서
등단시키고 지원하는 작가만이 신문의 문화면 등에서 '순문학 작가'로
인정받으며 대학 등의 평론가들의 평론 대상이 되므로, 결국 우리의
순문학은 한글전용을 鐵則으로 삼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었다. 이들
대여섯 屈指의 출판사들의 문예지 말고도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등이
있으나 신문사의 성격과 관계없이 거의 같은 기준이 적용되고 있고,
保守를 표방하는 신문일지라도 문화면의 경우에는 한글전용을 철칙으
로 삼는 주류출판사의 영향력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주요 문학서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문예지들은 비록 그 부수와 대중
적 인기는 높지 않으나 사실상 우리의 문장의 모범을 규정함으로써,
우리의 語文性向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문예지의 출간을
보수언론이 등한시했다는 것에서 작금의 한자사망위기에 보수언론들도
一抹의 책임이 없다할 수 없을 것이다.
사단법인 韓國漢字敎育硏究會의 朴在成회장은 "작가의 정확한 의사
전달을 하기 위한 한자어의 한자표기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한 그
렇게 되어져야 한다"고 하고 "문학작품집을 간행하는 데 있어서도, 한
자를 병기하면 한글세대들이 잘 안 사볼 거라는 기우 때문에 순 한글
전용을 한다면 지나친 상술일 뿐만 아니라 결국은 독서력을 저하시키
는 원인이 되어 출판업계 스스로 자멸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
이라고 했다. 朴회장은 "한자를 병기하면 팔리지 않을 것을 염려할 것
이 아니라 출판인들이 힘을 모아 한자교육이 전 학교교육과정에서 이
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나라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요, 출판계의 앞날도 보장되어 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朴
회장은 "모든 교과목 교과서를 한글과 한자를 병용하여 편찬하는 교육
정책이 제자리 서고, 국내에서 발행되는 신문, 잡지는 물론 문학작품
간행 또한 한자혼용이 자리잡아갈 수 있도록" 월간지 <歷史와 文字>를
발행할 예정이다.
대중 장르문학의 위축
학계, 評壇의 지원을 받는 순수문학이 본연의 목적보다 대중에로의
전파 위주로 흘러가는 것은 연쇄적으로 대중문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순수문학 측에서 쉽고 편하게 漢字를 쓰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
는데 일반대중들의 오락을 위한 대중문학이 감히 漢字를 자유로이 쓸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는 대중문학으로 자리
매김하는 환타지, 에스에프 등이 다양한 표현력의 봉쇄로 인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가끔가다 어린이 만화영화 대본 수준의 몇몇으로 청
소년 층을 상대로 겨우 시늉을 내는 정도이고, 실질적인 에로소설들만
이 대중문학의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한글전용 관습의 타파 없이는 우리나라에 에스에프(과학소설)
의 발전은 불가능할 것이다. 토속어보다는 개념, 추상, 논리적인 어휘
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학소설에서 한자어의 사용억제는 곧 그 뼈대
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쓰기 싫은 한자대신 영어를 사용한
다? 하지만 그리도 젊은이들이 한자를 모른다는 세태 속에서도, 한자
사용이 빈번할 수밖에 없는 무협은 읽히고 있는 반면에 영문용어 혼용
의 에스에프는 맥을 못추고 있다. 이것을 보아도 영어는 문학어로서
우리의 체질에 용해되기는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2001스페
이스오디세이>에 나오는 '문워처'라는 이름은 비록 아는 단어라 할 지
라도 번역본을 읽으면서 그 뜻을 음미하기 어렵다. 영문과학소설의 많
은 다채로운 표현은 우리가 아무리 번역을 하거나 비슷한 글을 쓴다
한들 결국 바라만 보고 다가가지 못하는 '望'의 대상일 뿐이다. 이럴
때 '望月이'라고 지어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물론 모든 경우에 다
해낼 자신이 있다면 '달바라기'같은 순우리말을 쓰(用)는 것도 좋다.
'공공기관'의 직무유기
무협작가이면서 현재 대중문학 및 만화 출판사 초록배를 운영하는
이상운씨(필명 劍弓人)는 "인터넷 통신판매를 하면 무협 이외 추리,
에스에프, 환상소설등은 거의 전멸상태"라고하면서 "이렇게 대중의 취
향이 편중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무협은 한자가 꼭 필요하다
고 인정되어 한자를 쓰고 있지만 여타분야는 한자를 자꾸 안 쓰다 보
니 내용의 빈약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독자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는 것
이었다.
"에스에프를 읽지 않는 국민은 과학적 사고함양이 이루어질 수가 없
다"고 하는 李사장은 "언어의 세계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영어 공용
화도 좋은 것이지만 우리와 보다 가까우면서 표의문자로서 다양한 상
상력을 유발시키는 한자의 자유로운 활용이 선행돼야한다"고 했다. 한
자를 자연스레 혼용하는 관습이 정착되어야 무협뿐만 아니라 환타지,
에스에프 등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지만 "당장 대중에게로의
판매에 생명을 걸고 있는 대중문학의 속성상 '총대'를 지기는 곤란하
고, 순수 본격 문학 측에서 나서주어야 한다"고 했다. 공공기관 - 상
당수 평론가들은 국립대학 등에서 봉급을 받고 있으므로 - 의 '직무유
기'로 因해 '일반기업'이 곤란을 겪는 격이라고 필자는 생각되었다.
왜곡된 젊은이의 허상
한글전용이 작품창작에 미치는 영향은 원로 중견작가는 그래도 덜하
다. 소설을 쓸 때는 한글전용을 하더라도 평소에 한자를 쓰면서 그 어
휘사고를 풍부히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세대는 그 수
련과정이 없이 단지 한자 없이 글을 매끄럽게 쓰는 글쓰기 기교만을
익혀 왔다.
사람의 知性은 소(牛)의 뿔이나 호랑이의 이빨과 같이 살아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자라나는 송아지 뿔을 억지로 누르면 제대로
된 소가 되지 못하고 엉뚱한 데서 뿔이 솟아나온다는 뜻을 가진 속담
이 있듯이, 한글전용이 불변의 신성불가침으로 인식된 나머지 최근에,
한글전용으로 인한 창작표현의 제한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는, 비교
적 知性을 갖추었다고 할 객관적 자격을 가진 작가{{) 복거일 <- 게재 不要
}}로
부
터
영어공용화의 논쟁이 튀어나온 것은 苦笑할 일이다. 상황이 답답하기는 한데 '漢字'
운운하면 고리타분한 구세대로 몰릴까봐 영어사용을 주장하는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에는 日帝末의 식민지교육의 陰謀를 폭로하는 구절
이 있다. 황국신민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철저히 교육시켜
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 저들의 바램에 맞게 황국신민으로서
의 교육을 철저히 하면 그대로 성년이 되어서도 충성을 바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란 어릴 때 인위적인 세뇌교육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
니다. 아무리 돌려놓으려 해도 그 사람의 타고난 본질은 자라면서 다
시 회복되는 것이다. 요즘 어린이들이 밥과 김치보다는 햄버거와 피자
를 좋아한다고 해서 앞으로는 우리음식이 없어질 듯이 난리를 치지만
필자의 세대도 어릴 때는 입에 쉽게 들어가는 짜장면이나 빵을 더 좋
아했다. 자라면서 자기 뿌리를 찾는 것은 막지 못할 인간의 본성이
다.
문제는 그 '회복'의 기간은 짧지 않은 세월을 要한다는 것이다. 他
意에 의해 뒤틀렸던 자신을 스스로 되찾는 과정에서 생기는, 젊은이의
가치관의 혼란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사고능력에
걸맞는 표현력의 不在로 인한, 사회의 基本 생산계층인 二三十代층의
정서적 불안정은 곧 이 사회 전체의 불안정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쉽고 편한 한글전용이 어릴 때는 더 잘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어릴
때라는 것은 정신적인 면을 말하므로 법적 성년여부와는 관계없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자라나면서 점차 그 뿌리를 그리워하고 한글전용이
라는 인위적인 틀에서는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현재의 문화주
도층은 한글전용이 젊은 층의 변할 수 없는 대세인양 못박고 있다. 실
상 그들이 그토록 존중하는 젊은 층은 아무런 선택의 기회를 갖지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상당수 중노년층은, 젊은 층은 자신들과는
다른 불변의 취향을 가진 것으로 알고 허탈함을 삼키며 체념한다. 이
제 모두들 그 인위적이고 비본질적인 너울을 벗어야 한다.
창작표현의 자유 주장명분 없어
소설의 한자혼용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모두 창작의 중요한 성향으로
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것은, 한자혼용을 주장한다고 해서
다른 모든 작가도 한자를 꼭 노출해서 써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
니다. 이에 반해 한자혼용을 반대하는 쪽은 결과적으로 상대방의 창작
욕구를 제한하는 것이다. 한자혼용을 주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한자를
많이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또한 소설의 본질상 일단 일반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언어 위주로 쓰여질 것임은 당연하다. 獅子는 초원에서
살지만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철책을 쳐놓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자
가 억제될 대로 억제되어 거의 없는 글에서 결국 꼭 필요하기 때문에
괄호를 동반한 '특별한' 한자어는 물위에 뜬 기름처럼 이질적이고 부
담을 주는 게 사실이다. '必要', '正體' 등 쉽고 한글로 써도 뜻을 짐
작할 수는 있는 낱말이라도 경우에 따라 자유로운 포기를 해야 전체적
인 균형이 맞는다.
대중적 판매의 확장만을 지향해서 글을 쓰는 풍토에서는 문학의 창
작표현 자유의 주장도 명분을 잃게 된다. 사진예술, 행위예술 등에서
는 일반인으로서는 혐오감 혹은 외설스러움을 느낄만한 것도, 消化능
력이 있는 少數를 대상으로 하는 限에서는 얼마든지 창작표현의 자유
가 주어진다. 소설도 일반대중에의 너른 傳播를 철칙으로 여기지 않으
면 얼마든지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야한 소설'로 곤욕을 치뤘
던 마광수 교수도 '소설은 무조건 쉬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면 '性의 자유에 의한 절대다수의 최대행복 추구의 思想'
을 표방하는 문학작품을 남겼을지 모른다. 작가 장정일의 경우도 마찬
가지다.
서울대 권영민교수는 월간 <新東亞>에서 '검찰이여, 올가미를 거둬
들이시오'라는 題下에 교과서에 실린 金起林의 詩에 대한 검찰의 '간
섭'을 비판하였다. '하나의 기준을 고집하는 법의 논리가 다양한 기준
을 필요로 하는 문학의 논리와 대응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 要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權교수 스스로 지난번 논술고사 출제
위원장을 맡으면서 이미 작년에 논술고사에 漢字를 넣어 출제하겠다고
했던 서울대의 약속(朝鮮日報 사회면 보도)을 뒤집고 한글전용이라는
'하나의 기준'을 고수하고 있었다. 문학 스스로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
으면서 단지 '언제 누가 강요했느냐?'는 논리로 '체제'를 고수하려 한
다면, 간혹 있을 수 있는 외부의 물리적 간섭에 대처할 명분을 잃게되
어 결국 문학계 스스로의 위상 약화와 자멸을 초래할 것은 명백하다.
불행을 낳는 문학
밭에 잡초가 많아 김을 매야 했다. 김을 매기 위해 고용된 품꾼은
잡초를 뽑으려다 문득 딴 생각이 들었다.
"잡초가 다 뽑아져서 더 안 나면 다음에 일을 못 얻지..."
그리하여 품꾼은 잡초의 이파리 끝만 조금씩 잘라내고 품삯을 받았
다. 다음에 더 자라나면 또 불려가 품삯을 받기 위하여...
한국은 독재와 부패가 많아 문학이 할 일이 많아 한국에 나기를 다
행으로 생각한다는 작가{{) 안정효 <- 게재不要
}}도
있다. 문학은 사회의 불행을 먹고산다{{) 이청준 <- 게재 불요
}}고
한
다. 한글전용이 우리사회를 불행하게 하고 있음이 드러났음에도 언제까지나 계속 그
불행의 씨를 키우려는 것인가.
불행을 먹기 위해서 불행을 만들어내는 문학은 마치 이산화탄소를
광합성에 필요로 한다해서 산소를 내뿜지 않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나무와도 같다. 동물에 비유하면 즐겨 먹는 것과 내보내는 것의 성분
이 엇비슷한 어떤, 農家에 흔한, 사람을 잘 따르는 카키색 털빛의 짐
승과도 같다. 또한 짐승의 소리는 그 자체로는 의미전달이 되지 않고
앞 뒤 정황을 따져봐야 알 수 있다. 같은 소리라도 먹이를 달라는 건
지, 낯선 자가 왔다는 건지, 아프다는 건지 앞 뒤 정황을 따져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파악할 눈치가 부족하다고 너무 책망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상화되면 문학의 소재가 고갈될까 두려워하는가. 그
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인간세상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에 따라 그 때 그 때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날 것이다. 조금 그 관찰의
눈이 섬세해야 할뿐이지 건전한 사회라고 해서 문학의 소재가 줄어들
지는 않는다. 문학인들은 현재 우리사회의 불행의 뿌리를 뽑아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글 섬기기에 들이는 비용
구조조정이 안된 公企業에는, 회사에 그다지 기여는 않으면서 직위
는 높은 理事長 등이 있다. 바로 이런 理事長을 모시기 위하여 회사가
부담을 떠 안듯이 한글에 대한 예우를 위하여 우리는 많은 비용을 지
출하고 있다. 한자의 철저한 괄호 넣기는 반드시 한자교육이 덜되고
한자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한글로 반드
시 음표기를 해야 한다면 60년대 교과서나 일본의 경우처럼 한글로 작
게 토를 달수도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할까? 일본이 로얄티를 요
구하기 때문인가? 한자보다 한글이 더 작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글을 '남의 글'보다 푸대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로
쓰고 '한자 토'를 단다는 것인데, 한자를 작게 쓰기는 현실적으로 어
려워서 결국 일일이 괄호에 넣어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山, 上下, 등
의 한자도 일일이 한글을 앞세우고 괄호 안에 넣고 있다. 한자를 앞세
우고 한글을 괄호 안에 넣는 것도 안되고 결국 한자는 '비공식 문자'
로서 가급적이면 안 쓰되 불가피한 경우 토를 다는 수단일 뿐이다.
한자혼용 외에 '한자병기', '한자병용' 등의 용어를 마치 한자를 괄
호 안에 넣는 것을 뜻하는 듯 하며 한자를 써야 할 땐 제대로 쓰고 있
는 것처럼 말을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일단 괄호 안에 들어간 것은
한자를 정식 문자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므로 한글전용이다. 결국은 한
자를 함께 쓴다는 뜻이니 다른 의미가 없다. 오히려 字句的 뜻을 따른
다면 뒤에 괄호로 넣지 않고 '竝列'로 씌어져야 할 것이다.
한글의 탄생목적은 어리석은 백성도 자기의 생각을 글로 나타낼 수
있게 하여 백성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위치에서
벗어나, 한글만으로도 쉽게 고급문화의 대접을 받는, 즉 문화적으로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는 이미 상당히 진척되었다. 현재는 한자제목
을 한 소설은 일단 대중 오락용 무협지로 간주되곤 하고있다. 한글로
표제를 달아야 '고상한 순문학'이라는 관념이 심어진 것이다.
상당수 한자혼용을 지지하는 사람조차 소설은 그냥 한글로만 써도
되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소설을 그대로 둔 채 학술서적 등 '불가
피한' 분야에서만의 한자복원은 뿌리가 든든치 못한 나무와 같다. 문
학의 한자복원과 더불어 근본적인 '再意識化'가 필요하다.
필자는 70년대에서 80년대를 거쳐 대학을 다니며 70년대에는 소수에
그쳤던, 학생의 의식화가 80년도 봄을 계기로 학생대중에 널리 퍼진
과정을 보았다. 80년대의 의식화 세대가 사회의 중견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지금 그 '의식'은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그
당시 '여러분이 학문과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정부의 보조비 때
문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피와 땀 위에서 가능했다'는 운동권의 외
침을 순진한 이공학도들은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주도측인 사회계 학
생들보다 철야 농성에 더 많이 참가하였던 순수한 자연계 학생들을 필
자는 기억한다. 이제 그들은 자연과학에서의 '民族民衆自主'의 실현을
위해 알갱이, 공模樣별송이, 민이음줄, 에돌이 등의 낭만적 용어를 도
입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이미 언어생활을 先導하는 문학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해방 후 한자혼용이 보편적이던 시절에도 소설만은 한자를 철저
히 괄호 안에 숨겼다. 괄호를 의무적으로 동반해야하는 불편한 한자어
는 사용이 억제되었다. 섬세한 의미의 한자어는 경시되고 '지청구',
'고샅' 등 어쩌다 발견한 지엽적 의미의 순우리말만을 중시하였다. 이
것은 오늘날 일반 학술어에도 감염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언어사용
의 뿌리이다. 소설에서의 한자사용이 자유로와지면 학술어 등의 한자
사용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자연스레 한자를 혼용하는
소설이 대접받게 되면 科學技術書도 자연스럽게 한자를 쓰게 될 것이
다.
한글이 망하지 않으면 한국이 망한다
이제 맹목적인 信條만을 가지고는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경쟁력을 가
질 수 없다. <한글>은 이제까지와 같이 각종 문화 예술의 중심에 우뚝
서서 그들을 統御(통어)하려는 오만함과 독선과 권위주의를 버리고,
문화 예술을 위한 다양한 표현력 제공을 위한 서비스정신에 입각하여
폭넓은 수용력을 갖는 겸손한 문화의 도구로서 거듭나야 한다.
중국의 작가 魯迅은 "漢字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고 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문자생활을 하여 초기 산업사회를 일으켜
야 할 당시로서는 그렇게 생각했을 만도 하다. 그러나 현대는 여가생
활의 증대로 기본 교육을 받을 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 이
제는 정보화사회를 맞아 단순히 문맹을 벗어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국민각자의 지식수준의 향상이 선진국에로의 가름을 하게된다. 국민
의식수준의 선진화를 위해 한글은 겸손히 그 지위를 낮춰 망해야 한
다. 한글이 망하지 않으면 한국이 망한다. 적어도 작가 魯迅보다는
옳게 보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노니, 한글을 지금과 같은 문화
예술의 중심적 위치로부터 끌어내리지 않는다면, 한국은 수십 년 안
가서 망할 것임을 예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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