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語文章語의 한글專用表記政策은 1945年 祖國이 光復되면서 시작되었다. 千數百年동안 우리 겨레의 文化와 學問을 담아왔고 키워온 漢字요, 더욱이 近代的 國語文章語의 中樞가 되는 至極히 所重한 漢字, 이 漢字를 廢止하여 새 나라의 文章語를 한글專用의 그것으로 變革시키겠다는 것은, 아는 사람의 눈에는 天地도 鳴動시킬 大事件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變革이 몇몇의 한글專用主義者들에 의해 이렇다할 準備도 없이 突然히 强行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大變革에 그들 한글專用主義者들을 목을 걸고 나아가게 한 그 理論的 根據란 도대체 얼마나 놀랍고도 희한한 것이었던가. 우리의 그러한 짐작과는 달리 이들이 漢字廢止, 한글專用을 主張하는 根據 理論은 너무나도 單純하고 幼稚하고 그리고 不當하였다. 그 主張들을 간추린다면 대개 다음과 같다:
1. 漢字는 近代國家의 나랏글자로 쓰기에는 나무 어려운 글자이다. 우선 字數가 너무 많은데, 이것은 漢字가 表意文字이므로 모든 單語에 대해서 漢字 한 字씩이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字劃도 따라서 많고, 또 그 音 形 義를 아울러 알아야 하기 때문에 漢字를 익히는 것은 學生들에게 큰 負擔을 준다.
2. 漢字는 象形文字이며 진작에 博物館에 가 있어야할 古代文字요 未開한 文字이다. 이에 비해 알파벳이나 한글은 文字發達의 極에 이른 單音文字이다. 發達된 文字를 가진 西洋諸國은 世界를 制覇하였고 未開한 漢字를 쓰는 中國이나 우리 나라는 衰退하였다.
3. 漢字는 남의 나라 글자, 곧 中國의 文字이다. 우리는 世界에서도 으뜸 가는 우리의 글자 한글이 있고, 한글로써 우리말을 正確히 적을 수 있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漢字를 쓰려는 것은 中國에 대한 事大思想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글로 적어서 뜻을 잘 알 수 없는 말은 배달말 될 資格이 없는 것이니 그런 말들은 國語에서 淘汰시켜야 한다.
대개 이와 같은 것인데, 언듯 듣기에 그럴듯하고 妥當한 말인 듯 하다. 그러나 眼目과 識見을 갖춘 사람이 본다면 이들 말은 모자라는 知識, 잘못된 論據, 誤解, 誇張 등으로 얼룩진 전혀 取할 바 없는 妄說일 뿐인 것이다.
차례로 따져 보기로 하자.
한글專用論者는 漢字는 어려운 文字라고 되풀이 宣傳한다.
한글專用을 처음으로 提唱했던 周時經은 ?국문론?(1897)이란 글에서 漢字는 單語대로 한 字씩 글자가 마련되어 있어야 하니 그 字數가 限없이 많게 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로 漢字에 대한 科學的인 硏究가 이루어지면서 이런 허황한 생각은 無色하게 되었다.
日本의 國立國語硏究所에서 行한 두 種類의 調査(하나는 1956年에 90種의 雜誌를 對象으로 行한 것, 또 하나는 1966년에 3種의 新聞을 對象으로 行한 것)를 根據로 낸 統計에 의하면 日本의 오늘날 新聞이나 雜誌에 普通 使用되는 漢字 種數는 3,000字 程度이며, 그 中核을 이루는 것은 2,000字 程度이라 한다. 한편 當用漢字 1,844字가 新聞 등에서 차지하는 比率은 延字數의 98.2%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中國政府에서도 實際生活에서의 漢字의 使用頻度를 調査하기 위하여 各種의 文學作品, 新聞記事와 雜誌, 自然科學과 技術分野, 社會科學과 哲學分野 등 5개 分野의 各種文獻을 選定하여 그 안의 漢字를 모두 컴퓨터에 入力하고 이를 根據로 다음과 같은 統計를 내어놓은 바 있다.
使用된 漢字數 |
10 |
40 |
160 |
950 |
2,400 |
3,800 |
5,200 |
出現頻度 |
11% |
25% |
50% |
90% |
99% |
99.9% |
99.99% |
이 表는 中國人이 出現頻度가 높은 950字를 알고 있으면 一般的인 읽을거리 글의 90%의 漢字를 理解할 수 있고, 2,400字를 알고 있으면 99%를 理解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統計結果는 漢字가 表語文字(흔히 表意文字라 하나 그 本質에 비추어 表語文字라 함이 더 適切하다)이기 때문이다. 곧 漢字 한 글자는 文字라기 보다 한 單語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한 形態를 가진 漢字는 그 글자로서의 意味를 가지고 있으며 또 當然히 그 音形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漢字는 單語文字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造語素라 함이 더 適切하다. 이를테면 ‘日’이란 字는 日記, 日常, 日刊, 日課, 日沒, 日蝕, 日曜, 日用, 日月, 日益, 日直, 日辰, 日光浴 … 隔日, 近日, 今日, 吉日, 來日, 當日, 每日, 明日, 百日, 安息日, 元日 翌日, 前日, 終日, 主日, 擇日, 休日 … 등 數 많은 漢字語를 만들어내는 要素로 作用한다.
漢字마다가 그런 造語素가 돼 二千字의 漢字로써 日常에 쓰는 거의 모든 漢字語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흔히 漢字 二千字만 알아도 國語 學力이 엄청나게 伸張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런 理致에서 나오는 말이다.
漢字는 과연 한글이나 알파벳 따위보다 더 익히기 어려운 것이 事實이다. 그러나 그것도 대단한 것은 아니어서, 옛날 우리 나라에서는 선비집 아이들은 대여섯 살이면 千字文(곧 漢字 千字)을 떼었고, 오늘날 日本에서도 石井勳式 漢字學習法으로 幼稚園에서 漢字 千字를 다 익힌다고 한다. 그리고 위에 본 바와 같이 漢字를 익혀서 얻는 所得은 한글이나 알파벳을 익히는 경우에 比할 바가 아니며 좀 어렵게 익히더라도 거기서 얻을 利得은 들인바 努力을 補償하고 남는다.
둘째로 漢字는 象形文字요 未開한 文字라는 데 대해서 檢討해보자.
우선 漢字는 象形文字라고 할 수 없다. 漢字를 그 形成에 따라 여섯 가지로 分類할 수 있는데 이를 ‘六書’라 한다. 그런데 全 漢字의 六書의 比率을 보면 形聲(諧聲)文字가 全體의 90%, 그리고 象形?指事文字가 5%, 나머지 5%를 會意?假借?轉注 등이 차지한다.
形聲文字란 中國語의 單語의 音을 적은 것이다. 그러니 形聲文字는 本來 表音文字이다. 그런데 漢字는 單音節을 적는 것이므로 同音異義字가 많게된다. 그래서 文字마다의 분별을 위하여 소리를 나타내는 部分(聲符)에 意味上의 範疇를 가리키는 部分(義符)을 덧붙여 분간을 하게 하였다.
지금 ‘새(鳥)’란 義符를 함께 하는 漢字들을 몇 개 적어 보이면: 鳩, 鴉, 鴨, 鵝, 鵬, 鵲, 鶴, 鷄, 鷗. 여기서 義符 ‘鳥’를 떼어낸 나머지 部分은 本來 그들 새의 이름 (곧 音)을 나타냈던 것이다.
漢字의 九割이 中國語 單語의 音을 나타냈던 表音的인 것이나, 單語들 사이의 분간을 위해서 義符를 붙여 한 字를 이루니 結局 漢字 한 字는 一定한 單語를 가리키게 되어 漢字는 表語文字의 特徵을 가지게 된 것이다.
文字가 象形文字 → 音節文字 → 單音文字와 같은 發達經路를 보인 것은 實은 西洋에서의 文字發達의 過程이었다. 먼 옛날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등 나라에서 쓰이던 楔形文字, 古代 이집트에서 쓰이던 神聖文字 등은 象形文字였다. 이들 象形文字는 事物의 모양을 본 떠 그 事物을 가리킨 것이나, 더러는 그 象形文字를 音을 나타내는 데 쓰기도 하였다.
이 象形文字가 뒤에 페니키아人들에 의해 純全한 表音의 文字로 發展되었는데, 이들은 音節을 나타내는 文字였다. 그리고 이들 페니키아文字를 古代 그리스人들이 單音文字(알파벳)로 發展시켜 오늘날 西洋語들을 적는 文字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西洋의 文字가 象形文字에서 表音文字로 發展한 것은 그들 言語構造가 表音文字로 적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한편 中國에서 漢字를 써 온 것도 中國語 構造에 漢字가 알맞기 때문이다. 中國語 構造의 특징은 孤立的이란 것이니, 孤立的이란 單語가 文章 안에 쓰이면서 그 機能을 달리해도 언제나 한가지 모양을 지니는 것을 이른다. 이를테면 ‘上’이란 上下, 頂上 등에서는 ‘위’란 名詞이고, 上京, 上書 등에서는 ‘오른다, 올리다’란 動詞로 쓰이고 있고, 上級, 上位 등에서는 ‘위의, 높은’ 등 冠形詞로, 上奏, 上昇에서는 ‘위에, 위로’같은 副詞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 글자의 形態는 항상 變함 없는 ‘上’이다.
이에 대해서 西洋語-印歐語-는 本來 屈折的인 特徵의 構造로서, 라틴語의 ‘벗(友)’은 格에 따라 amicus(主格), amice(呼格), amicum(對格), amici(屬格), amico(與格)처럼 모양이 바뀐다. 單語가 그 모양을 바꾸는 일이 없으며 한 單語가 한 音節이기 마련이라면, 中國語의 基本單位인 單語는 漢字같이 形聲義를 아울러 지닌 文字로써 나타내는 것이 가장 賢明한 方法일 것이다.
이리하여 中國語를 적는 漢字는 오늘날까지 象形的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인데, 이를 未發達이니 格이 낮은 文字니 評함은 認識不足에서 빚어진 誤解일 따름이다. 오늘날의 發達된 文字學에서는 漢字는 오히려 文字 中 가장 效率的이고 近代的인 文字로서 評價되고 있는 바 뒤에 가서 이 點에 대해서 言及하기로 한다.
세 번째의 한글專用論의 根據에서 漢字는 남의 나라, 中國의 文字이니 쓰지 말자 하는 것은 千餘年동안 漢字 漢文을 使用하며 높은 文化를 쌓아올린 우리 祖上들의 功德을 冒瀆하는 일일뿐 아니라 理致에도 닿지 않는 말이다.
위에서도 言及하였듯이 우리말 語彙의 70%가 漢字語이며, 漢字語는 漢字로써 이루어진 말이니, 한글 學者들 論理에 따른다면 漢字語도 남의 나라말이 되고 따라서 쓰지 말자는 얘기가 되는데, 그래서는 우리말 自體가 成立되지 못한다. 소뿔을 발쿠려다가 소를 잡는 꼴이다.
한글學者들은 또한 한글은 優秀한 글자이므로 못 적을 우리말이 없다 한다. 이것도 自己矛盾的인 틀린 말이다. 한글맞춤법에 의하면 한 單語가 語根이나 接辭의 結合에 의한 複合語가 아닌 경우에는 그 單語를 밝혀 적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오단/, /반머리/를 ‘옷안’, ‘밭머리’로 ‘밝혀 적는’ 것은 이들이 두 形態素의 複合語이기 때문이다. 이 原則에 따르면 ‘大韓民國 獨立門’은 ‘대함밍국, 동님문’으로 적는 것이 한글맞춤법에 맞는 表記가 된다. 大韓民國, 獨立門을 이루고 있는 漢字들은 漢字인 限에서 單語나 形態素가 될 수 있는 것이지 그 音만 딴 /대/니 /민/이니 /독/이니 /립/이니 등은 우리말이 될 수 없다. ‘大韓民國’이나 ‘獨立門’은 엄연한 國語이지만 한글로 적히면(곧 그 音만 적으면) 國語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글專用者들의 생각대로 따른다면 國語 漢字語에 대한 處理에는 다음 두 가지 方法이 있게 된다;
하나는 漢字와 더불어 漢字語도 中國 것이요 남의 나라 것이니 쓰지 말고 우리말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妄發일 따름이다.
다른 하나는 ‘속임수’를 써서 漢字語를 使用하되 그것을 적을 때는 漢字로는 안 적고 그 音으로 적는 것이다.
한글專用者들은 두 번째의 ‘속임수’ 쪽을 擇하였는데 이것은 漢字를 前提로 한 것이므로 그 漢字語를 이룬 漢字를 알아야만 바른 表記를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속임수’ 탓에 國語는 學生들에게 엄청난 負擔을 지우는 科目이 되었다.
英語나 佛語 등을 공부해 본 사람이면 單語들의 綴字(spelling)를 외우는 데 고생한 記憶이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학생들은 /대함밍국/ /동님문/을 왜 ‘대한민국’, ‘독립문’으로 밝혀 적어야 하는지 그 理由도 알길 없이 덮어놓고 그 綴字를 외워야 한다.
數萬의 漢字語의 綴字法을 그같이 暗記하여야 하니 國語는 어렵기만 하고 재미없는 科目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二千字의 漢字만 익히면 問題도 되지 않을 일을 이같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 한글專用論이다.
여기까지 읽어온 讀者는 한글學者 한글專用論者들이 이런 알량한 理論이나 根據를 가지고 나라의 大本인 國語文章語의 方向을 멋대로 틀어서 낭떠러지로 몰고 간 데 대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나아가 一種의 憤激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專用의 잘못됨과 그 미치는 바 弊害는 훨씬 크고 넓은 것이니 한글專用論에 斷罪를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다음에는 視點을 달리하여서 한글專用論의 凶逆됨을 보기로 한다.
나라의 語文問題 같은 重且大한 問題를 다루려는 者는 높고 넓고 豊富한 學識, 見識, 認識을 갖추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 學者, 한글專用論者들의 이런 資格要件은 너무나 낮고 좁고 모자라는 것이었으니, 數量에 비겨 말한다면 要請되는 점수가 10점이라면 그들의 그것은 1~2점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들이 지닌 認識 識見 學識은 도대체 文字의 次元을 넘지 못하였다.
한글이나 알파벳은 훌륭한 文字다, 漢字는 못난 文字이다, 한글은 오래도록 핍박받고 제대로의 待接을 못 받아 왔다, 훌륭하고 우리 나라 글자인 한글만을 쓰자, 한글을 사랑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다 등등 그들이 口頭禪으로 외어댄 슬로건이 이를 證明하고 있다.
이같이 文字次元에 머물러 있는 限 거기에서는 아무런 價値도 論議될 수 없는 것이며, 또 現實로 그런 次元에 그치는 事實은 存在할 수도 없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좀 理解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說明을 곁들이겠다.
이를테면 世宗大王이 한글을 만드셨지만, 世宗大王의 뜻한 바는 한글 創制에 있던 것이 아니다. 뜻한 바는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手段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쓰임도 없는 文字를 만들어 骨董品처럼 모셔 둔다는 일은 現實的으로 存在할 수 없는 일이며 文字는 그 맡은 바 機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存在理由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한글學者, 한글專用論者는 이런 뻔한 認識조차 가지지 못하고 오직 한글이라는 文字의 認識次元에서 맴돌면서 曰可曰否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文字의 機能이라든가 文字란 한 國語의 文章語를 적는 手段이라든가 하는 더 높은 次元의 認識, 識見, 學識만 가졌더라도 그들은 결코 한글專用論을 부르짖지 않았을 것이다.
文字의 機能은 무엇보다도 表語 곧 單語를 적는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單語를 적는다는 것으로써도 文字는 아직 그 온전한 存在理由를 主張할 수 없다. 表語를 통하여 文章語를 적는다는 데에 이르러서 비로소 文字는 그 存在價値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가령 英語를 공부하는 學生이 알파벳을 익혔다해서 그 段階에서 그가 英語를 익혔다고 할 수는 없다. 또 그 學生이 보다 나아가 많은 英語 單語를 외웠다고 해도 아직 그는 英語를 옳게 獲得한 것이 못된다. 그가 英語文章語의 構造를 알고 지니고 있는 語彙들의 知識을 부려 英語文章으로 쓰인 바를 理解할 때 비로소 그는 英語를 알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글專用論者들은 겨우 文字 次元의 認識, 見識, 知識에 머물렀으므로 文字와 文章語의 關聯에 대한 認識을 못 가졌고 한 껏해서 입말(口頭言語)을 소리대로 적어놓으면 글(文章語)이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文字의 文明史的 意義에 대한 識見을 못 가졌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에 트이고 높은 視點에서 한글 學者들의 낮은 認識을 엿보면서 한글專用論을 評價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에게 바람직한 正書法이란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위에서 文字의 機能은 ‘表語’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좋은 文字表記는 이 表語의 機能을 온전히 이루는 데에 있다. 文字가 表語機能을 效果的으로 이루려면 무엇보다도 讀者가 表記된 單語를 正確히 同定(identify)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글專用表記는 이 文字表記의 첫째 要件에서 이미 落第한다. 國語의 漢字音은 約490個가 되는데 그에 대해 漢字數는 그 열 배는 넘으니 當然히 同音異義字가 많아진다. <漢韓大字典>(李相殷 編, 民衆書館, 1966)의 ‘字音索引’에 보면 ‘기’의 音을 가진 漢字가 151字나 된다. 同音異義의 漢字語도 많아서, 한글학회 지은 <국어사전>에는 同音異義語가 22,983語로서 總語彙數의 거의 1/4이나 된다.
同音異義語의 問題를 떠나서도 本質的으로 表音文字인 한글로는 表語文字인 漢字를 적을 수 없다. 이를테면 위에 든바 ‘기’音을 가진 漢字 151字는 모두 그 뜻이 다른데 ‘기’ 한 音으로써 그 숱한 意味들을 어떻게 분간케 할 수 있겠는가. 國語語彙의 70%가 漢字語인데 그 漢字語를 제대로 同定할 수 없는 表記라면 한글專用表記는 결코 國語文章語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文字法임에 틀림없다.
表語機能을 넘어서 文字의 眞正한 機能, 窮極的인 存在價値는 한 國語의 文章語의 效率的인 文字化에 있다. 이를 文字의 言語的 機能이라 한다. 文字가 效率的인 言語的 機能을 이루기 위한 第一義的 要件은 그 文章語가 正確히 그리고 빨리 읽혀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正確한 意味把握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했지만 速讀性은 大量의 文書를 處理해야 하는 近現代社會에서 文章語에 要求되는 또 하나의 重要한 價値이다. 그런데 이 點과 관련하여 漢字는 오늘날 發達된 文字學, 言語學에서 가장 優秀한 近代的 文字라는 새로운 評價를 받고 있다.
漢字만큼 뛰어난 視覺性을 지닌 文字는 없다. 한 日本學者의 硏究 調査에 의하면 하나의 漢字를 識別하는 데에 要하는 時間은 千分의 一秒(1/1000秒)라 한다. 이 경우 意味把握까지 깃들여져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視覺性의 높이는 當然히 文章語에서 速讀性의 높이로 反映된다. 文字類型을 이 速讀性이란 觀點으로 차례 지운다면 제일 높은 것이 表語文字(漢字)이고, 그 다음이 音節文字 그리고 제일 낮은 것이 音韻(單音)文字가 된다. 이런 觀點에 설 때 日本語의 文字法이 世界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란 評價를 얻게되는 所以然도 쉽게 理解된다.
日本語 文章語에서는 視覺性이 높은 漢字와 速讀性이 높은 가나를 絶妙하게 調和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漢字에 대해서는 말하였으니 音節文字와 單音文字를 速讀性이란 觀點에서 比較해 보자. ‘かねもち’ - ‘가네모찌’; 위 보기에서 日本 가나文字의 把握對象은 그 形態自體이므로 瞬息間이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는 各音節마다에서 그 子音과 母音을 把握하고서야 그 音節의 音價를 把握하니 가나에 比해 한 段階를 더 거쳐야 한다. 더욱이 日本 가나는 約50字인데 比해 한글(音節文字)의 경우는 日常 쓰이는 것만도 二千字 가량이 되므로 가나에 비겨 한글의 把握은 훨씬 더디게 되는 것이다.
한글學者, 한글專用論者들은 무엇이나 眞實과 거꾸로 되는 얘기를 하였다. 한글學者들은 한글이 音韻(單音)文字이기 때문에 優秀한 文字가 된다 하였으나 事實은 單音文字는 가장 效率이 떨어지는 類型의 文字이다. 알파벳도 單音文字이기 때문에 速讀性이 떨어지는 신통치 못한 文字班列에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파벳에는 이 不名譽에서 救濟될 理由가 있었다. 西洋語의 文字法과 關聯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重要한 事實은 文字法으로서는 즉 그 쓰임새에서는 單音文字가 아니라 表語文字처럼 機能하고 있다는 點이다.
西洋語, 이를테면 英語는 單語의 個體的 獨立性이 뚜렷하다. 그리하여 單語마다를 空白을 두고 表記하였을 때 금방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항상 同一한 綴字形을 지니고 있는 單語의 이미지(形象, 말하자면 圖形)이다. 讀者는 책을 읽을 때 알파벳을 하나하나 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 單語의 圖形을 把握한다. 익숙한 讀者에게 있어 이 圖形的 이미지의 把握은 瞬間的이다.
英語單語 表記에서의 알파벳은 이런 뜻에서 漢字 한 字를 이루는 劃과 같은 구실을 한다 해도 된다. 알파벳이 單音文字인데도 近代的 文字로서의 榮光을 누리고 있는 秘密은 이런 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경우로 눈을 돌리자. 한가지로 單音文字인 한글로 적힌 國語文章語에서도 英語文字法에서와 같은 單語의 圖形的 이미지 把握이란 效率性을 누릴 수 있을까. 미리 結論을 말한다면, 섭섭하지만, 안 된다는 것이다.
한글 學者들은 한글도 알파벳과 같은 發達된 單音文字라 하여 기뻐하였지만 이 두 文字가 實際使用에 있어서는 그 價値를 전혀 달리한다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그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음에 한글로 적힌 文章語에서는 英語文字法에서와 같은 表語的 機能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을 알아보기로 하자:
言語學者는 흔히 世界의 言語를 그 形態構造의 類型에 따라 屈折語, 孤立語, 膠着語로 나눈다. 屈折語의 特徵은 印歐語(Indo-European language)에서 主로 볼 수 있는 것인데, 西洋의 言語들이 대개 이 印歐語에 屬해 있다. 印歐語들은 우선 單語의 獨立이 뚜렷하다는 것, 다음으로 여러 ‘文法範疇’(名詞에서의 人稱, 數, 性, 格; 動詞에서의 人稱, 數, 時稱, 法 등) 들을 대개 單語內에서의 部分的 形態變化(屈折)로써 나타낸다는 共通點을 지닌다.
우리는 앞에서 라틴語의 ‘[ami]-(벗)’을 例로 하여 그 모습을 본 바 있다. 그런데 現代의 英語, 獨語 등에서는 이러한 屈折現象이 거의 없어지고 單語의 獨立性만 뚜렷하므로, 앞에 말한 바와 같이 各單語의 圖形的 이미지 把握으로써 讀書效率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孤立語의 特徵도 이미 앞에서 中國語의 경우로서 說明하였는데, 이 孤立的인 言語에서는 文法範疇에 따른 單語의 形態變化가 없는 것이 特徵이다. ‘上’의 例로써 그 모습을 본 바 있다.
이들과 달리 韓國語, 그리고 日本語 따위는 膠着語的 類型에 드는 言語이다. 膠着語的 言語에서의 形態的 特徵은 여느 言語類型에서 單語로서 表示될 것이 다음 같이 두 種類로 나누어져 있다는 點이다. 하나는 語彙的인 意味를 擔當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文法範疇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새가 운다”, “꽃이 피었다”에서 ‘새, 울. 꽃, 피’ 등은 앞 部類에 屬하며, ‘가, ㄴ다, 이, 었, 다’ 등은 뒷 部類에 屬한다.
文法에서 앞 部類를 ‘語彙部’, 뒷 部類를 ‘토’라 부른다. 앞 部類에 ‘單語’란 이름을 못 주고 ‘語彙部’라 하는 것은 單語는 홀로 自立할 수 있는데 ‘울, 피’같은 것은 自立할 수 없어 單語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實際 言語表現에서는 語彙部에 토가 結合된 것이 單語같이 自立할 수 있는 單位가 된다.
위에 든 例에서 ‘가’나 ‘이’는 主格의 토이고 ‘ㄴ다’는 現在時稱 平敍文의 終結을 나타내는 토이며, ‘었’은 過去時稱의 토, ‘다’는 平敍文, 終結의 토이다.
그런데 우리가 注目해야 할 것은 토가 갈아드는 데에 따라 이 文章을 이루는 單位(西洋語에서 單語에 該當될 單位)의 形態가 限없이 變한다는 點이다. 이를테면 ‘먹-’은 ‘먹는다, 먹고, 먹으면, 먹으니, 먹다가, 먹겠으면, 먹었겠지, 먹자, 먹어라…’. 名詞의 경우도 토가 限없이 갈아들어 ‘새가, 새를, 새한테, 새와, 새도, 새만, 새조차, 새로서, 새한테만, 새와도…’. 그리하여 文章 안에서 語彙部에 토가 結合된 形態는 一定한 모양으로 安定되어 있지 못한다.
英語에서라면 單語는 언제나 一定한 形態를 가지므로 各單語의 圖形的 이미지 把握으로 讀書를 進行시킬 수 있지만 國語에서는 그런 一定한 形態의 文章 形成 單位를 얻을 수 없으니 讀者는 結局 文字(한글 字母)를 차례를 따라 읽어 가면서 意味 있는 單位를 把握하고 그 形態의 意味를 짐작하여 文章內容을 理解한다는 節次를 밟을 수밖에 道理가 없다.
다시 말하면 國語의 文章을 읽을 때는 적혀 있는 글자를 하나하나 뜯어읽어야지 有意味的 單位를 한꺼번에 把握한다는 것은 不可能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漢字語도 한글로 적혀 있으니 有意味的 單位의 把握을 위해서 그것이 固有語냐 漢字語냐를 분별하는 手苦도 더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한글로 적힌 文章語의 讀書 效率性은 대단히 낮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앞에 첫 번째로 말한 缺陷과 아울러 한글專用의 文章語는 아마 世界에서도 가장 非效率的이고 가장 低劣한 文章語가 될 것이다. 이런 低劣한 文章語를 가지고서는 우리나라가 文明國家, 一流國家 되기는 어림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深刻히 생각해야 할 問題는 그러면 이 悲觀的 狀況에서 벗어날 方法은 없는 것일까 하는 것이겠다.
多幸히도 우리가 視野를 넓게 가지고 우리의 識見을 보다 賢明한 것으로 가다듬으면 解決의 方法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우선 賢明해진 우리는 國語文章語의 이 같은 低劣性이 바로 한글專用表記가 가져온 것임을 깨달을 수 있으며, 다음으로 視野가 넓어진 우리 눈에는 世界에서도 으뜸가는 效率的인 文章語를 이룬 日本語 文字法이 들어온다.
日本語는 韓國語와 言語構造가 아주 비슷하며, 또한 같은 漢字文化圈 안의 一員으로서 두 言語는 거의 같은 量의 漢字語를 지니고 있다. 日本語도 가나文字로만 적으면 低劣한 文章語 됨을 免치 못하나 日本人은 賢明하게도 視覺性이 높은 漢字를 利用하여 日本文章語의 價値를 크게 提高하였다.
日本語 正書法에서는 漢字語는 말할 것도 없고 固有語도 語彙的인 意味를 나타내는 部分은 漢字로 적으므로 讀書效率性이 매우 뛰어나다. 이리하여 國語表記에서도 漢字語를 漢字로 적기로 하면 國語文章語는 단번에 그 品等이 上位圈으로 올라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國漢混用이라는 正常의 자리에 돌아온 國語文章語는 한글專用의 文章語에 비겨 그 速讀의 效率性이 天壤之差異로 높아진다. 한글專用政策後로 우리 나라 出版界에서는 漢字를 섞어 쓰더라도 文面에서 될수록 漢字를 적게 하는 것이 文章을 읽기 쉽게 한다고 생각하는 듯 한데, 이것은 180度 틀린 생각으로서 眞正한 國語文章語에서는 漢字가 많을수록 讀書效率性이 높아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漢字語는 반드시 漢字로 적도록 해야만 가장 바람직한 國語文字法이 될 수 있다.
여기까지 읽어와서 만약 그래도 매양 한글專用表記를 두둔하겠다 한다면 그 사람은 理性이라는 것을 못 갖춘 사람이거나 아니면 하나의 信念에 사로잡히면 옳든 그르든 그것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偏執症者이거나 할 것이다.
이 亡國的 한글專用法이 우리 國家民族에 끼쳐온 바, 그리고 앞으로도 끼칠 弊害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그것을 다 들자면 끝이 없지만 한 서너 가지만이라도 들어 한글專用의 凶逆됨을 다시금 確認하기로 한다.
1) 우선 들 것은 漢盲(漢字文盲者) 곧 이른바 한글世代의 國語學力이 顯著히 낮아졌다는 事實이다.
國語 語彙에서 文化的 語彙, 學術的 語彙는 거의 全的이다 싶이 漢字語이고 따라서 國語의 中樞가 되는데, 漢字語彙力이 형편없이 낮아지니 國語學力이 떨어지게 됨은 自然스러운 歸結이다.
더 具體的으로 살피건대; 한글世代가 지니는 漢字語彙數가 아주 貧弱해졌다. 한글專用의 文章語에서는 漢字語를 그 音形만으로 獲得하게 되므로 漢字語 獲得에 있어 造語素로서의 漢字가 주는 情報, 漢字語들 사이의 有緣性이 주는 情報(앞에서 例로 든 ‘日’字가 든 漢字語들은 모두 ‘날, 해, 하루’란 意味의 有緣的 單語들이 된다), 漢字語의 形態的 이미지가 주는 情報 등은 모두 없어지고 音相의 情報만 남으니 漢字語는 獲得키 어려운 難解語가 되고 그 獲得量이 줄어들 것은 當然한 理致이다.
漢盲世代는 漢字語의 意味把握이 많은 경우 曖昧模糊하거나 잘못되며 또 적지 않은 경우 意味 把握을 못하고 만다. 漢字語는 漢字를 基盤으로 形成된 單語인데, 그 漢字가 傳해주던 意味情報가 完全히 없어졌고 또 漢字, 漢字語는 同音異義의 文字나 單語가 퍽 많지만 그것들을 분간하는 能力도 안 가진 音相만으로 분간하자 하니 이 같은 結果가 될 것은 當然한 理致이다.
漢字를 진작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文脈 등에 비추어보면서 音相 뒤에 숨은 漢字를 推定해 낼 수나 있지만 完全한 漢盲들에게는 그 조차 할 수 없으니 漠漠할 뿐인 것이다. 한글世代, 漢盲世代들에게는 國語文章語는 이제는 알기 어려운 難解語로 가득 차고 熟達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2) 둘째로 들 것은 한글專用文字法이 國語를 救濟할 수없이 混亂되고 低劣한 言語로 墮落시켰다는 점이다.
우선 固有語와 漢字語의 분간이 없어지고 그에 따라 두 다른 文法이 뒤섞이게 되었다. 漢字語를 漢字로 적고 있는 限, 國語語彙 안의 漢字語部類와 固有語部類는 分明하게 분간된다. 그러나 漢字語를 한글로 적게 되면 그 분간의 標識이 없어져 버린다. 분간되어야 할 것이 분간할 수 없게 된다면 거기서 混亂이 말미암을 것은 當然한 理致이다.
漢字語는 固有語와는 달리 漢文法에 의하여 造成된 單語이다. 이를테면 下車, 着手, 遵法, 植樹, 成功 등은 ‘動詞 - 目的語’의 語順이지만 固有語에서는 ‘目的語 - 動詞’로 된다.(차-내림, 손-댐…) 또 다른 경우, ‘대도시, 대부대, 대인물, 대자연, 대호평, 대동맥’ 등에서 ‘대(大)’를 뺀 뒷 部分은 單語로서 成立되니 ‘대’는 接頭辭로 處理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國文法으로서는 이것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處理임에 틀림없다. 두 다른 文法을 하나의 文法으로 處理함에 따른 乖離는 이 밖에도 얼마든지 들 수 있지만 그 結果 한글專用된 國語에서 文法은 겉잡을 수 없이 混亂 雜駁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다음 漢字語의 한글專用表記로 말미암은 國語의 墮落 가운데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漢字語에서의 長短 分揀의 紊亂이다.
漢字音의 長短 분간은 漢字의 屬性인데 漢字를 없애버리니 長短音을 밝힐 根據가 없어진 結果이다. 고등학교(高等學校), 고급(高級), 고층(高層) 등에서는 ‘고’를 짧게 發音하면서 고기압(高氣壓), 고속도로(高速道路)의 ‘고’는 아나운서조차 길게 소리낸다. 漢字音의 長短 분간의 紊亂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또 다른 경우는 漢字가 지닌 形像美나 品位가 國語文章語에서는 다 사라져 버린 點이다. 이와 關聯하여 佛蘭西의 有名한 哲學者 「작크 데리다」가 한 말이 있으니 잠깐 引用해 보이겠다.
“알파벳은 글자로서의 그 自體의 存在性에 대한 主張이 없다. 文字 自體로서의 거의 獨立의 價値가 없는 것이다.… (이에 比해) 漢字에 있어서는 音聲보다도 그 圖形的 意味 形像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漢字의 連鎖는 第一義的으로는 意味와 槪念의 連鎖이며 더욱이 意味는 여기서는 대개의 경우 뚜렷이 이미지化 되어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미지化된 圖形的 意味의 둘레에는 짙은 情感性이 떠오르는 것이다. … 文字 그것의 形像性에서 美的 價値나 精神的 價値를 보는 中國의 漢字는 이 點에서 알파벳과는 比較할 수 없는 重要性이 있다.”
한글專用이 國語文章語를 貧弱하게 한 것은 이 들 밖에도 漢字語가 가지는 縮約性(特委 ← 特別委員會, 當落 ← 當選落選, 司試 ← 司法考試, 大入試 ← 大學入學試驗), 漢字가 가진 뛰어난 造語力 등 長點을 모두 잃게 하였다는 것도 들 수 있다. 漢字 二千字 敎育의 負擔을 던다고 國語文章語는 이같이 香氣도 生命도 없는 가짜 模造品이 되었고, 그러면서도 익히고 쓰기에는 너무나 힘든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3) 말이 이미 너무 길어졌으므로 끝으로 한가지, 한글專用法은 한글世代를 우리 民族이 過去에 지녔던 文化, 歷史, 傳統과 斷絶시켜 버렸다는 데 대해서 말하기로 한다.
우리의 過去의 文化, 傳統, 學問은 漢字를 바탕으로 發展되어 왔으며 따라서 漢字는 우리 民族文化 속에 떼어놓을 수 없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뒷날 그 漢字를 전혀 모르는 백성들이 사는 세상이 되면 過去와의 斷絶 또는 그의 喪失은 必然的이다.
우리의 祖上은 人名, 地名, 冊名, 그 밖의 여러 이름들을 漢字의 뜻과 모양을 考慮하여 지었다. 端的으로 人名問題에서 柳, 兪, 劉, 庾氏들이 ‘유’로, 申, 辛, 愼氏들이 ‘신’으로, 全, 田, 錢氏 들이 ‘전’으로 적히게 되니 姓氏의 正體性이 없어지고 한가지 宗氏가 되어 버렸다.
漢盲에게는 ‘이 이, 이 개’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나 욕으로 느껴지겠지만 ‘李珥, 李塏’로 적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漢盲의 學生들이 國史時間에 ‘왕오천축국전’, ‘목민심서’, ‘의종’, ‘육조’, ‘임오군란’ 등을 對하면서 거기서 ‘往五天竺國傳’, ‘牧民心書’, ‘毅宗’, ‘六曹’, ‘壬午軍亂’을 떠올릴 수 없을 것은 當然하니 그들은 우리의 歷史의 眞相을 결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혹시 庶民들의 文化나 傳統에는 漢字가 없는 줄 알겠지만 民謠, 俗謠, 民俗劇, 古小說 등에는 漢字 漢字語가 가득 차있다. 이를테면 大學校 國文學科에서의 ‘春香傳’ 講讀은 그 안에 豊富하게 쓰여있는 漢字語句, 漢文文章引用의 解釋이 授業의 主가 된다.
먼 過去로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한글專用 세상이 되기 以前 近間에까지 國語文章語는 國漢混用文으로 쓰였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初中高校生은 且置하고 大學生들조차 漢字가 조금만 들어 있어도 그 책이나 글은 못 읽는 것이 되었으니 大學 圖書館의 大部分의 책은 그들과 無關한 쓰레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果然 韓國에 大學이 있는가? 이제는 國漢混用文과도 因緣이 없어진 판에 여기서 漢文文籍을 들어 얘기하는 것은 허황한 일이 될지 모르나 漢字를 익혔던 ‘前한글世代’에게는 漢文도 먼데 있지 않았다.
中國古典의 四書(大學, 中庸, 論語, 孟子)의 集字(쓰인 漢字種數)가 2,317字이고 五經(易經, 書經, 詩經, 春秋, 禮記)의 集字가 4,159字이다. 그러니 二千字의 漢字만 알아도 漢字文獻의 語彙는 어느 만큼 獲得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注釋, 飜譯을 곁들인 것이면 당장에 漢文文章을 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漢字 二千字를 獲得하면 漢文 또는 現代中國語 書籍들의 理解 把握과도 별로 徑庭이 없어지는 것이다.
한글專用論者 그리고 그 推進者들은 우리 後世들을 제대로 國語도 모르는 반 병신으로 만들며, 우리 後世들로 하여금 우리의 過去의 文化, 學問과 斷絶시켜 文化없는 民族으로 행세케 하며, 앞으로의 文化 學問의 發展을 제대로 이루어 나갈 수 없는 人間으로 만들며 그러면서 國語를 형편없이 低劣하고 價値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 기를 쓰고 있다.
東洋哲學者 李相殷 博士는 이미 三十年前에 한글專用政策은 ‘國民知性低下, 敎育效果減退, 國語混亂招來, 現實適應能力不備, 學術發展沮害, 民族文化의 傳統抹殺, 同文化圈에서의 孤立自招 등 七大弊害를 말미암케 함을 指摘, 警告하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