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찬양은 민주화운동이 될 수 없어
- ‘서울 불바다 발언’ 발언 장본인이 수용소까지 와서 협박
- 월남 공산화 당시 공산세력은 5만명에 불과
- 맞서 싸우는 우익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희망 있어
- 한미연합사 해체되면 방위조약도 휴지조각
(프) 월남 공산화 당시에 현지 교민들을 먼저 대피시키시다가 월맹군에게 불법 억류되신 후 수감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억류되셨을 때의 상황과 수감 당시의 고초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이) 제가 억류된 기간까지 합치면 베트남에 총 14년 이상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교민들을 철수시키기 위한 임무를 맡고 있던 철수본부장이었습니다. 교민들을 전부 대피시킨 후 저도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마지막으로 철수할 예정이었습니다.
철수 직전 월남에는 한국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헬기가 오기로 한 바로 전날에 ‘베트콩이 이미 사이공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겁니다. 나중에 허위보고로 알려졌습니다. 월맹 공산군이 퍼뜨린 유언비어였겠죠. 당시에 미국과 월맹과 소련은 ‘미국인들이 모두 철수하기 전까지는 월맹 공산군이 사이공을 포위만 하고, 점령하지는 않는다’고 합의한 상태였습니다. 만일 월맹이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미군의 B-52 폭격기가 응징할 것이라고 경고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밤 9시에 공산군이 약속을 깨고 사이공에 들어왔다는 허위소문이 돌면서 철수계획이 취소됐습니다. 그때 거기 남은 한국인들이 약 200명이었습니다. 월맹군에게 잡히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분들을 영국 대사관과 프랑스 대사관에 들여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월맹과도 수교관계였기에 아무리 공산 월맹군이라고 해도 영국 대사관과 프랑스 대사관에 침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대사관에 갔으나 어지간해서는 한국인들을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정을 한 끝에 간신히 들여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게 실패했더라면 당시 200여명의 한국인들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겁니다.
원래 전쟁 당사국 간에도 외교관들을 체포할 수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월맹군은 저를 불법으로 억류시키더군요. 주월 일본 대사관 관계자들은 모두 중립국인 스위스로 보내준 반면, 한국 대사관의 저는 그들이 잡아 가둔 것입니다. 이는 국제 협약 위반이었습니다.
‘서울 불바다 발언’ 발언 장본인이 수용소까지 와서 협박
(프) 당시 월맹 당국과 북한측의 집요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지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좀 말씀해 주신다면?
(이) 제가 월남 패망 후 5년간 억류를 당했었습니다. 그 중에서 처음 5개월간은 시내에서 연금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사형수들을 수감시키는 감옥에, 그것도 독방에 가두더군요. 저보고 자꾸 뭘 쓰라고 하길래 보니까 전향서더군요. 제가 4살부터 오늘날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다 쓰라고 시키는 겁니다. 이 소설같은 걸 한달에 걸쳐 쓰라고 시키는데... 예를 들면 ‘초등학교 때 아무개 선생이 있었는데, 이 선생이 어떤 반동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런 걸 쓰라고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강요하기도 하더군요. 이걸 쓰면 사형을 시키지 않고 편한 곳으로 보내준다는 회유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왜 씁니까? 죽어도 안 쓰겠다고 끝내 버텼습니다. 처음에는 월남 정치부 소속 간부가 저를 심문하더니 제가 끝까지 버티니까 3년 후에는 하노이에 있는 북한 대사관 정보원들이 와서 심문을 하더군요. 예전에 남북회담에서 ‘서울 불바다’ 망언을 한 박영수도 그때 저를 협박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죄라도 졌습니까? 저는 떳떳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회유를 해도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이 욕을 하면 저도 같이 욕을 해줬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그들도 지치더군요. 아마 그 수용소에 있었던 수천명의 사람들 중에서 끝까지 면회 허가를 받지 못한 것은 나 하나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저를 심문하고 협박하던 정치부 소속 월남인이 바로 지금 주한 베트남 대사로 와 있습니다. 묘한 인연이죠? 그 당시에는 그 사람을 대단히 악독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 다시 만나보니까 꽤 선량한 사람이더군요. 당시에 위에서 시키니까 그렇게 한 것이지, 인간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당시에 소신을 꺾지 않은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저를 존경해 왔다고 뒤늦게 밝히더군요.
그래서 제가 드는 생각이.. 북한도 김정일 하나만 제거하고 나면 다 항복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산당이라는게 원래 그렇습니다.
(프) 월남 패망 당시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티우 전 대통령과 친한 사이셨다고 들었습니다. 티우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해 주신다면?
(이) 월남 티우 전 대통령과는 제가 미국에서 합동참모학교에 같이 다니면서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티우가 불과 3~4년만에 빠른 속도로 진급하더니 월남 대통령까지 되더군요. 그 이유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저를 월남에 파견하신 것 같습니다.
월남 공산화 당시 공산세력은 5만명에 불과
(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한총련, 범민련 등 좌익세력들이 창궐하면서 사실상의 무법천지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월남 패망 당시에도 좌익세력이 월남 사회를 장악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 패망 이전의 월남 정부에서는 공산주의와 관련된 좌익 데모대는 구속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었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정부도 겁이 났는지 잘 잡아넣지도 않더군요. 당시 좌익들은 소수였습니다. 월남에서 선거를 할 때마다 공산당을 지지하는 비율은 11~18%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월남 인구 1900만명 중에서 실제 공산당원은 9500명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인민혁명당원(베트콩) 들의 수가 4만명 정도였으니, 도합 5만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5만명이 대국민 선동을 해서 선거 때마다 18%까지의 득표를 기록하기는 했으나 항상 우익이 승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익들은 ‘우리가 절대 다수이므로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익인사들이 하나둘씩 암살당하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월남에는 총이 많았습니다. 수상 후보로 나왔던 사람과 대학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던 사람 등.. 우익인사들이 한명씩 죽어가니까 우익들은 겁이 나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수의 조직화된 좌익들에게 우익들이 밀리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과 당시 월남의 공통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 월맹은 미국의 거듭된 북폭과 경제 제재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습니다. 월맹군은 식량이 부족해서 하루 두끼의 식사만 하며 반찬은 소금뿐이었습니다. 월남은 이런 가난한 군대에게 멸망당한 것이죠.
맞서 싸우는 우익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희망 있어
(프) 현재의 대한민국과 패망 당시의 월남을 비교할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부분은 있을까요?
(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패망 당시의 월남에서는 암살을 두려워한 우익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국가 안보와 반공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암살당했습니다. 그렇게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대한민국은 다릅니다. 우익들이 두려움 없이 좌익들의 창궐에 맞서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대한민국이 적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차이점은, 정부의 성향입니다. 그 당시 월남의 티우 정권은 반공정권이었습니다. 좌익세력은 주요 재야에 숨어있었죠.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정부부터가 좌파 성향이라서 그런지 좌익들이 대놓고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더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본다면 그만큼 ‘반작용’이 크다는 의미도 되는 겁니다. 실제로 정부의 좌편향적 정책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이 반발하면서 역풍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프) 6·25 전쟁 당시 6사단의 중대장으로서 1950년 10월 26일에 압록강변에 맨 처음 당도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신다면?
(이) 내가 운이 좋아서 그런지 여러 군데 총을 맞아도 계속 살더군요. 우리 연대가 춘천에서 유일하게 인민군을 격퇴했습니다. 이틀째엔 반격해서 적을 도주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총탄을 맞은 건 충북 음성이었습니다. 정말 수많은 전투를 치렀죠. 낙동강 전투에서는 부상을 당해서 붕대를 감고 있는 상태에서도 몰래 탈출해서 부대에 합류, 다시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치열한 싸움을 거치면서 북진을 하는 동안 다들 죽는데 저는 자꾸 안 죽고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총을 맞아도 급소는 피해가면서 맞더군요.
그렇게 북진하다가 우리 중대 하나만 압록강에 도달했습니다. 연대는 90리 후방에 와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감개무량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남북을 통일하니 당장 죽어도 무슨 한이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북쪽으로 가면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국내성도 있을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설레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말을 타고 대륙을 활보하던 만주 벌판이 버로 저 너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3일 후, 완전히 포위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크게 포위당했더군요. 본대에서는 철수 명령이 내려졌고, 후퇴가 시작됐습니다. 아군과 합류한 건 대동강까지 남하한 후였습니다. 당시 중대장 중에서는 저 하나만이 병사들을 인솔해서 후퇴했습니다. 병사들 중 일부는 일단 총을 버리고 민간으로 위장한 채 퇴각하자고 했지만 저는 군인으로서 총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생각 하에 만나는 인민군마다 전투를 거듭하면서 퇴각했습니다.
한미연합사 해체되면 방위조약도 휴지조각
(프) 최근 전시작전권 단독행사로 한미연합사 해체가 결정되면서 주한미군이 결국 철수하고, 한미동맹마저 와해되면서 한반도가 결국 월남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이) 한미연합사가 존재하는 한 김정일은 절대로 남침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죽는게 뻔한 전쟁을 왜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걸 우리가 나서서 해체하려고 하는 건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미국은 패망 직전의 월남과 방위조약을 맺고, 월맹이 남침할 경우 북폭을 재개하고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당시 월남 지상군이 월맹군을 일단 격퇴한 후에 미군의 해-공군이 월맹을 북폭하려는 것이 방위조약이었고,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월남 티우 대통령에게 이 방위조약의 이행을 약속하는 친서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월맹이 남침한 후, 미국 의회는 지상군 보강을 위해 월남이 요청한 지원금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월남의 반미 시위에 이골이 났었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계철선이 없는 미국과의 방위협정은 그 이행이 반드시 보장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미동맹을 탄탄하게 관리하고 연합사 체제를 유지한다면 북한은 핵무기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를 위협하지 못합니다. 미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한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 속국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한미연합사가 해체된 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도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적화통일을 이루겠다는 김정일 정권의 속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프) 내년 대통령 선거가 좌파정권을 종식시키고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해낼 마지막 기회라고 거론되고 있습니다. 우파가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 반드시 우익이 정권을 잡기는 해야 하지만.. 가능성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단결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한나라당이 분열되서 후보들이 따로 출마하거나 한다면 우파는 필패할 것입니다. 얼마전에 김진홍 목사가 ‘경선에 불복하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저도 김 목사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 찬양은 민주화운동이 될 수 없어
(프) 차기 정권에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이) 국제 규격에 맞는 민주주의를 정립시켜야 합니다.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북한의 적화통일에 협조한 행위를 ‘민주화운동’이라고 승격시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김일성주의자들을 어떻게 민주화와 연관지을 수 있습니까? 차기 정권에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프) 장군님은 6.25 남침을 감행한 북한 인민군을 격퇴하셨고 월남 패망의 역사도 지켜보신,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십니다. 2006년 12월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