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좌경화 유도한 한글전용 가로쓰기
주인과 도둑
도둑이 침입해 주인과 싸웠다. 이 때 도둑이 도리어 큰소리치며 몽둥이를 휘둘렀다면 이 것을 賊反荷杖이라고 한다.
어떤 언쟁이 있을 때 知覺없는 자가 자기에게만 유리하게 모든 것을 주장한다면 이 때 我田引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경우는 한마디로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둑이 주인의 밭에 침입해 한바탕 격전을 치렀다. 온힘을 다해 싸운 주인은 겨우 자기 밭을 빼앗기는 것까지는 막았으나 그 통에 기름졌던 밀밭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도둑도 지쳤는지 더 이상 거친 싸움을 걸기는 포기한 것 같았다. 도둑은, 역시 지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지만 아직도 도둑을 쫓아내기 위한 戰意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는 주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그 동안 싸운 건 없었던 일로 하고 같이 저 쑥대밭을 일구며 잘 지냅시다."
이 상황을 표현하는 故事成語가 있음직도 한데 여기 인용해 쓰지 못하는 것은, 필자의 無知의 所致가 아니라면 人類史上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발한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요즘의 우리 문학계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좌우익의 싸움의 시대도 지나갔으니 인간본질에 대한 탐구에 함께 노력을 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변질된 우리의 문학은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
좌익에 의한 '민중적 사고' 최우선의 文化觀은 우리 사회의 형식적 자본주의 틀과의 억지결합으로 경박한 대중성지향의 천민자본주의문화를 낳았다. 국민의 의식수준을 키워야할 문인과 출판인들이 '쉽고 편한' 독서만을 국민에게 버릇들이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국민의 기호를 독서보다 쉽고 편한 여타 오락문화 쪽으로 향하게 하여 문학의 침체를 가져왔다. 문제는 이러한, 좌익에 의한 우리 고유 정신문화의 파괴를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잘못 알고 체념하는 사고가 팽배해있는 것이다.
좌익에 의한, 문학의 변질
중세의 종교이념에 눌려 변질된 옛 문화를 되살리자는 르네상스운동이 있었듯이, 이제 좌익의 발호에 의하여 변질된 우리 문학을 그 이전 시대로부터 다시 되돌아보는 省察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문학의 脫 이념화이다. 지금 이념을 주장하는 문학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할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 사실 문학의 창작표현의 자유로 볼 때 그 내용을 일일이 시비건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 그 문학의 <틀>인 것이다. 좌익사상이 우리문학에 끼친 폐해는 '좌익문학작품'에 대한 문제제기 이전에, 좌익사상의 副作用이 우리의 문학풍토에 끼친 영향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이다. 이에 대해, 그 원인과 時期를 문제삼으며 좌익운동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반론할수 있다. 그러나 절개와 지조가 있어야 할 문학에 있어서 외부적인 요인에 대하여 최소한의 저항도 없었다는 것은 곧 동조를 의미한다.
좌익세력은 독재정권下에서 민주화세력에 寄生하여 자라났으며 오히려 독재정권의 전체주의적 성향을 자연스럽게 계승하여 우리의 문학에 파급시켰다. 요컨대 '꼭필요하지 않은' 정서적인 면은 무시하고 '민중의 생활에 꼭필요한 것'만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당연히 문학을 통해 어떤 知的인 만족을 얻고자 하는 지식층의 욕구는 거세될 수밖에 없었다.
선진국에서는 불황이면 책이 더 잘팔리는데 우린 그렇지 않다고 한다. 60년대 어려웠을 때에도 대학의 문학과 철학강의는 성황이었는데 지금은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꼭 필요한 것만 공부한다고 한다. 사실 우리로서는 불황이면 책이 더 안팔리는 것이 당연하다. 웬만한 장편소설 읽으려면 극장값의 두세배인 큰 책 몇권값 몇만원을 써야한다. 작은 지면에 압축되어 인쇄된 선진국의 책편집이 최대의 독자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되어있다면 우리의 책편집은 글자크기와 공간을 늘려 책크기와 권수를 늘리는 등 독자가 혹 값이 비싸서 사지않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가격대 판매수로 보아 최대의 이윤을 남기는 방향으로 되어있다.
우리의 문학이 어차피 꼭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애자는 좌익전체주의의 노선을 따르는 한에서는 우리생활에 꼭필요하지않은, 문학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 꼭필요하지 않은데 漢字는 쓰지말자, 꼭필요하지않은 불편한 세로쓰기는 없애자 하고 밀어붙였던 이들이 꼭필요하지도않은 문학을 살리자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꼭 필요하다의 '꼭'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必要라는 말에 '꼭'의 의미가 있으니까.)
한글전용의 문학은 순문학이 아니다
이제는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위한 새로운 가치관이 定立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존에 잘못 판단했던 많은 문학적 가치관에 대한 재평가이다.
순수예술이라 하면 그 추구하는 바에 對해 어떠한 外壓을 加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압'은 우선 상업적인 요인에 의한 대중 인기영합의 흥미유발이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이념적 목적을 띤 계몽, 선동의 목적이 있을 수 있겠다. 물론 이 경우 어떤 큰 사회적 共感帶에 의한 集團偏向을 뜻하므로 일반적인 문학작품의 思想性과는 의미가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근대문학에서 당연시 되어 왔던 한글전용의 문학은 純文學이 아니다. 그 이해를 돕기 위해서 문단 원로급 평론가 두 분의 말(言)을 인용하도록 한다.
'한글전용은 어떤 인위적인 것이 아니었을까.'(金允植:<現代文學>)
'민중 속에 사용의 역사가 긴 낱말이라야 정서적 호소력이 있다.'(柳宗鎬:평론집, 同時代의 詩와眞實)
前者는 그 말(言) 그대로, 한글전용이란 것이 문학 본래의 순수의미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여건에 따른 인위적인 작용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니 그대로 의미가 통하지만, 後者는 얼른 그 연관이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後者는 본래, 민중사이에서 쓰여진 역사가 오래된 순수 고유어를 많이 써야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의 정서적 호소력이 강하다는 것을 力說하는 글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한글이념'에 물들은 상당수 문학인들은 대뜸 '그러면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는 영어는 물론 에스페란토語等도 자유로이 활용해야겠네.' 하고 비웃을 것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옳다. 따지고 보면 黑白的으로 모국어와 비모국어를 구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의 本 목적으로 볼 때, <어느 만큼 그 민족에게 오랫동안 쓰(用)여와서 그 민족의 정서 속에 의미가 배여 있는가>가 文學語로서의 쓰임에 우선권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낱말 역사의 길고 짧음이 불과 수십 년의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그 느낌의 차이를 주는 것에 대해서는, 獲得情緖의 遺傳이라는 精神的 用不用說에 의해 설명되어져도 좋고, 因緣이 얽힌 곳에 다시 태어나곤 하는 輪廻의 사상으로 설명되어도 좋다.
그렇다면 오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한글보다 당연히 이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漢字가 더 우리민족 특히 지식인 계층의 정서에는 깊이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어는 본래 중국어인데 어불성설'이라고 할 지 모르나 여기서는 '文學'의 의미를 살려 글을 말(言)하는 것이지 말(語)을 말(言)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글자로서 나타내고자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지 반드시 한자를 중국어 유사 발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다. 훈민정음 창제로 한자음을 중국어 발음식으로 통일시키기 전까지는 한자는 일천오백년 가량 우리말(語)의 표기수단이 되어왔다. 오히려 한자어를 일일이 한글로 音表記함으로써, 우리 식으로 그 뜻을 생각하지 않고 중국어에서 따온 音讀만을 강요하는 것이 중국어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층민중(어린빅셩)의 최소한의 자기표현을 위해 창제된 문자를 '예술문학'의 專用도구로서 轉用한 한글전용 문학은 순문학이 아니다. 한글전용 문학은 이광수, 심훈의 맥을 잇는 계몽주의 문학 혹은 민족주의 문학(한글전용이 정말 民族主義인지는 論外로 치고, 일단 당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니) 혹은 상업주의 문학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대중문학인 것이다. 재미를 늘리기 위해서 주제의 나타냄과는 무관한 장면을 삽입하고, 가끔은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묘사를 늘리며, 어찌하면 보다 읽기에 편하게 할 수 있을까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중요의미를 때로는 稀釋하고 생략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이 표현을 한자를 안 쓰고 나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군더더기 같은 한자괄호를 없애고 '삼빡'하게 글을 쓸(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창작하는 것은 全혀 同等한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문학의 목적을 위한 창작표현 이외 일체의 외압을 거부하는 것만이 진정한 순문학인 것이다.
교육계에게만은 절대 순종하는 문학계
이런 문제가 거론되면 많은 문학관련 종사자들은 교육제도가 그러니 어쩔수 없다고 한다. 물론 교육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원인제공자라는 교육계쪽에 정식으로 한마디 항의를 하는 것을 보지못했다.
이것은 문학계 측이 상당부분 교육계 측과 이해를 같이하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우리의 문학계는 각종의 외부압력에 의한 물리적인 표현자유의 제약에 대해서는 훌륭히 투쟁해 온 바 있다. 사회제도에 의한 창작자율권의 침해에는 민감하기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 문학계이다. 최근의 음란물시비에 관련해서도 꽤나 저항의 의지표명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같은 표현의 자유 문제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원천봉쇄적 표현자유의 억압이 이제껏 우리문학에 행해지고 있음에 대해 저항한 문인은 거의 없었다. 되도록 한글로만 쓰는 것이 쓰기에도 쉽고, 한자를 일일이 괄호안에 넣는 것은 원고매수를 늘리기 위한 좋은 방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좌익운동세력의 문화사상적 소신과 일반 문인들의 현실적 편의추구는 서로간에 조화로운 타협을 이루었던 것이고 그에 대한 어떠한 異議의 제기도 머쓱하게 만들었다. 진정한 문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발표하고서 문제가 되어 봉변을 당하는 것보다는 아예 발표를 못하게 봉쇄하는 것이 더욱 큰 탄압이다. 작금에 이르러 우리 전통의 멋을 온전하게 지닌 어떤 문학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자비출판이 아니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아직도 '한글이 우리글이니 우리문학은 한글로 창작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하는 문인들이 있을 것이다. 문자논쟁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아직도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고 있다. 이미 국가 권력의 핵심에 근접한 수많은 인사들이 한자교육 강화의 의견표명을 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지만 아직도 교육과 문학은 요지부동으로 한글전용을 고수하고 있다. 이것은 해방후 수십년간 한글에 대한 과대평가에 의한 사회문화의 불합리에 편승하여, 우리사회에는 이미 쉽사리 건드릴수 없는 광범위한 기득권층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한자혼용주장은 여기서 略하기로 하자. 단지 우리의 문학계에서 그리도 떠받드는 한글의 實狀에 대해 조금 알아보자. 의미없는 뜻글자 소리글자 운운은 불필요하다. 문자의 기능은 아날로그한 정보인 사고를 디지탈한 활자로 표기하는 것 즉 視覺기호에 의한 의미변별력의 문제이지 뜻글자 소리글자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말의 수많은 동음이의어 문제는 한자사용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말, 말, 눈, 눈, 밤, 밤, 등 순수고유어의 장단음 혼동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소(牛)'와 '소년(少年)', '새(鳥)'와 '새(新)', '사자(買)'와 '사자(獅子)'는 'ㅅ' 이 있는 음절의 발음이 다르다. 우연한 대중적 관습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다르게 발음하므로 귀로 들을때는 구분이 가는데, 한글로 쓰(書)면 앞뒤정황을 보아 추측하지 않고는 구분이 안가는 것이다. 영어로 보면 'sit', 'sheet', 'seat', 'shit'를 모조리 같은 글자로 표기하는 것이나 같다.
'나와 놀자' 하면 'lets play with me' 인지 'lets come out and play' 인지 모른다. 하지만 대충 집을 나와서 말한 자와 함께 놀자는 것은 맞으니, 대충 알고 넘어가는 것이다. 이런 표기법을 신봉하면서 무슨 문학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글을 그리도 중하게 여긴다면 한자배격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한글학자'들에게 기대하지 말고 작가들이 솔선하여 이러한 사례들에 대한 변별의 기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매너리즘에 대하여도 솔직이 대중문학을 표방하면서, '현재 교육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대중의 취향에 어쩔수 없이 맞춰야 한다'하면 뭐라할수 없다. 그러나, 딴에는 우리의 문화를 선도하는 고급예술문학을 표방하면서 그리하니, 자가당착적이며 이율배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토인문학만을 고집할 것인가
물론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한글만으로도 '좋은' 글을 잘쓰는 작가들은 많다. 아프리카 토인의 고유어만을 가지고도 좋은 문학작품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제한된 어휘로 문장을 무리없이 구성하는 일종의 기교 혹은 기술이 우리문학에서는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문장구성의 기술습득에만 많은 노력을 투입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주제포착력과 풍부한 어휘사용력 배양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작가는 사회의 정신적 지도층이 되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전문기술을 가진 직업인화 되는 것이다.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저네들의 글자에 점찍거나 꼬리달린 것 등이 실용적으로 불편하다고 해서 그것을 없애도 좋도록 맞춤법을 개정한다고 하니까 文人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한다. 어찌 우리말의 오묘한 맛을 없애려 하냐고... 그러니까 당국자가 하는 말은, 여러분의 항의는 지극히 온당하다, 앞으로도 문학작품에 그대로 점찍고 꼬리달고 쓰라고... 다만 앞으로 신속을 요하는 실용문에서는 그런 것 없이도 괜찮도록 하는 것 뿐이라고... 였다.
이 사례에서 우리의 방식과의 다른 면을 보았다. 그들에게서 문학어는 실용어의 超集合(superset)이다. 당장에 꼭 필요하지는 않아도 언어의 잠재적인 확장성을 위해서 문학어는 편의성을 희생해서라도 실용어보다 더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문학어는 실용어의 방향을 이끌고 啓導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꼭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문학어는 실용어의 部集合(subset)이다. 설령 실용어 이상으로 쓰는 언어가 있다 하더라도 거의가 '지청구', '고샅', '밭은 기침', '도리질' 등의 末端語들일 뿐이다. 이들 낱말들은 읽는이에게 우리말의 색다른 자료를 제공하는 효과는 있을지라도 어떤 派生力있는 사고력을 증진시켜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경량급' 문학은 '민중지향적' 이념 외에는 그 안에 어떤 짙은 思想을 담기가 어렵다.
우리 전통 글양식의 복원
우리 옛 여인은 우물가에서 나그네가 물을 달라할 때 표주박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고 한다. 목이 마른 나그네가 물을 함부로 들이켜 체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지혜로운 배려였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빠르고 경박한 것 보다는 慇懃(은근)하고 鎭重한 것을 추구하며 마음을 수양하는 문화였던 것이다. 글공부를 할 때나 글을 쓸 때 '편안한' 자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곧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라고 했는가 다 이유가 있었다. 세로쓰기의 글양식은 그러한 우리의 전통문화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가로쓰기가 읽기 편하다는 것은 마치 똑바로 앉아 있다가 기대앉으면 긴장이 풀려 편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남의 思想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쉽고 편하게만 하지 말고 되도록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여 精讀을 유도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문학의 상층부에서 지키게하고 권장해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무너뜨리는데 앞장섰으니 어찌 우리문학이 온전히 이어왔다고 할수 있겠는가. (또 귀찮게, '그러면 가로쓰기를 한 서양인들은 어찌 그렇게 나라가 발전했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독서를 하는 것은 왜 따라하지 않는가.)
좌익에 의해 변질된 문학을 원상회복 시키는 것은, 이미 남발되어 의미가 바랜 낱말인 民族精氣를 되살리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좌익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아무리 '탈이념화'된 문학을 추구한들 그것은 跋扈(발호)하는 좌익문화의 기세를 막기 위해선 역부족이다. 완전한 우리문학의 복원 즉 르네상스만이 이념에 물들지 않은 참 문학을 일으키는 길이다. 赤菌을 옮기는 벼룩을 퇴치하기 위해서 예전에는 살충제(반공문학)를 사용했지만 이미 면역성이 강해진 벼룩에게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청결히 몸을 간수하는 자에게 벼룩이 기생할수 없듯이 우리의 전통문화의 氣로 충만한 문학이 문화계의 상층부를 占하고 있으면 좌익문화는 파고들 여지가 없어 저절로 퇴치될 것이다.
일찍이 60년대의 저항詩人 金洙暎은 당시의 암울한 시기를 딛고 언젠가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단단하고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뛰는 세상은 정말 벅차게 기대되는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는 實로, 붉은 속살의 열매를 키울 그날을 기대하며 설레이는 수박씨와 석류씨가 이념에 미쳐 날뛴 날이었던 것이다. 이제 모두들 그 시절의 集團狂氣로부터 자유로와질 필요가 있다.
(한국논단 19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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