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가 사라지면 우리 社會는 어떻게 될 것인가
IMF보다 더 深刻한 國家的 危機
漢字死亡 五分前의 韓國社會
朴正熙 前 大統領의 失策
李在田(이재전, 漢字敎育振興會 會長 2004年 6月 作故 )氏는 自身을 朴正
熙(박정희),前 大統領의 治績을 極讚하는 사람中에 하나라고 前提하면서도
"한글專用은 朴大統領의 決定的인 失策이었다"고 말했다. 果然 朴大統領이
한글專用의 칼을 빼든 理由는 무엇이었을까.
朴正熙 大統領은 1968年 10月 25日, 大統領 指示 한글專用 促進 7個事項을
文敎部에 指示했다.
그 內容은 1970年 1月 1日부터 行政,入法,司法의 모든 文書뿐만 아니라 民
願書類도 한글專用으로 하며, 漢字가 든 書類는 接受不可, 文敎部(現 敎育
人的資源部)안에 한글專用硏究委員會를 두어 알기 쉬운 表記方法과 普給方
法 硏究 發展, 한글 打字器 開發 및 末端機關까지 普給, 言論出版界에 한글
專用 積極勸奬, 1948年 改正된 한글專用에 關한 法律을 改正, 1970年 1月 1
日부터 한글專用 實施, 各級 學校 敎科書에 漢字 廢止, 古典의 한글飜譯 等
可히 文字革命을 彷彿케 하는 것이었다.
이 指示가 내려간後인 1968年 12月 한글專用에 關한 總理 訓令(68號)과 19
69年 9月, 國民學校(初等學校) 敎育課程 改正令(251號)에 依해 모든 敎科書
에서 漢字가 쫓겨났다.
韓萬年(한만년, 一潮閣 社長)氏의 證言에 따르면 "組版까지 끝난 다음 學期
敎科書에서 갑자기 漢字를 削除하라는 指示가 내려와 大騷動이 벌어졌다"
고 한다.
朴大統領의 한글專用 促進 指示에 의해 學校와 官公署에서 漢字를 몰아내
느라 숨이 가쁘던 무렵의 文敎部長官은 閔寬植(민관식, 한나라黨 顧問)氏였
다. 閔長官은 朴大統領의 한글專用이 精神 나간 짓이라고 생각했다. 閔長官
은 大統領 年頭巡施 브리핑資料準備過程에서 部下職員에게 "報告書를
國漢混用으로 만들라"고 指示했다. 깜짝 놀란 次官以下 高位幹部들이 "그
러시면 큰일납니다"하면서 强力히 挽留했고, 甚至於 長官說得協議會까지
만들어 說得에 나섰다.
그러나 報告書는 閔長官의 强力한 指示로 國漢混用으로 만들었고, 閔長官
은 大統領앞에서 "한글專用의 時代입니다만 文敎部는 國漢混用으로 보고
드리게 됐습니다"하고 諒解를 求했다. 朴大統領은 "漢字를 섞어 쓰니 보기
도 좋고 理解하기도 便하군"하고 答辯했다.
閔長官은 機會다 싶어 該當部署에 敎育用 漢字 制定을 指示했다. 그 結果
온갖 口說數와 防害工作을 무릅쓰고 1972年 8月 16日에 制定한 것이 漢文
및 漢字敎育을 爲한 敎育用 漢字(1,800字)였다. 閔長官은 이렇게 말했다.
"迂餘曲折 끝에 敎育用 漢字를 中高校에서 가르치도록 했을 때 많은 新聞이
積極 讚成하는 社說을 실어 應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言論은 뭐하는 겁
니까. 20, 30代 讀者를 잃지 않기 위해 漢字를 줄이고 한글專用 하는 것은
無知와의 野合이나 다름없지 않소. 苦生 끝에 만들어놓은 1,800字마저 제대
로 敎育시키지 않으니 나라 꼴이 이게 뭡니까."
朴大統領이 한글專用을 推進하던 무렵은 3選 改憲, 10月 維新이라는 政治
드라마가 幕後에서 숨 가쁘게 進行되고 있었다. 政局은 混亂했고, 政權次元
에서는 局面轉換을 위한 프로파간다(宣傳運動)가 必要했다.
이런 時代的 背景에서 選擇된 것이 한글專用 政策이었다.
朴大統領의 한글專用은 結局 傳統과의 斷切이라는 結果를 惹起했다.
文化的 價値로 論해야 할 事案이 政治的 目的에 利用되면 그 結果는
破壞로 歸結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