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실제로는 '문맹국가'
글쓴 날짜: 2006년 7월 7일
작년 OECD(경제개발기구)에서 가입국 22개국의 '
실질문맹률'을 비교했는데, 우리나라가 문서해독능력이 꼴찌라고 발표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OECD 조사 결과는 우리 국민의 75% 이상이 '새로운 직업에 필요한 정보나 기술을 배울 수 없을 정도로 일상문서 해독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단계'에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글자는 읽을 줄 알지만 그 뜻을 모르는 사실상 문맹국가란 소리입니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에 돌렸지만, 좀 솔직하자면 학교에서
漢字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입니다.
제가 이곳 기자수첩에 여러 번 쓴 적이 있지만, 우리말은 지금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먼저 정보화 시대를 맞아 우리말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실제 해방 이후 순 우리말이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다는 어느 교수의 연구결과도 있었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단어만 나와도 피하게 되니, 한자말은 한자말대로 사라지고, 수도권 지역 말을 중시하다보니 어휘가 풍부한 지방 말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순 우리말이 사라지는 속도는 가히 두려울 정도입니다. 저는 앉은 자리에서 지금 시골에서는 쓰지만, 사회에서는 사실상 死語(사어:죽은 말)가 된 말을 100개는 더 댈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라지고 있는 시골말이 '사투리'이기 때문만은 아니란 것입니다. 한글로 된 고전(古典)이나, 고시조 등을 읽다보면 조선 500년간 전국에서 거의 다 쓰던 단어들입니다. 순 우리말은 한자어 우리말과 달리 한번 사라지면 일상생활에 복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국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자어 우리말’과 ‘순 우리말’을 마치 다른 종류의 말인 것처럼 구분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한자어 우리말이나, 순 우리말이나 다 같이 소중한 우리의 國語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모르기 때문에 국어 교육에서 겪지 않아도 될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최남선의 '독립선언서'는 그 자체로 우리 국어입니다. 최남선이 중국말로 독립선언서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한자어 단어들은 우리 조상들이 수백년 동안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 중국이나 일본 사람하고 대화하려고 만든 단어들이 아닙니다. 정철의 ‘관동별곡’도 아름다운 우리말로 지은 노래입니다. 정철이 중국말 반, 우리말 반씩 섞어서 노래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일부 국어학자들이 '국어 사랑'과 '위대한 한글 사랑'을 잘못 이해하여, 한자어로 된 우리말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자를 모르면, 전국 도서관에 쌓여 있는 1980년대 이전에 국한문 혼용으로 발간한 수천만권의 책은 그냥 '쓰레기 더미'에 불과합니다. 국민들이 읽지 못하는 책이 도서관에서 태산을 이룬들 국민 교양 함양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시대 쓰여진 한문으로 된 책을 보려면, 한문 전공자나 역사학자의 손길을 빌려야 합니다. 한문 문장을 해독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그 내용이 궁금해도 곧바로 1차 자료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몇십년 가지 않아 국한문 혼용으로 발간된 그 많은 책도 어느 누군가 번역아닌 ‘번역’을 해야하는 시대가 올지 모릅니다. 후손들이 속수무책으로 눈뜬 장님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책을 보다 보니 “연어는 회귀, 즉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다”는 식으로 써 놓은 문장이 있었습니다. 일본어로 책을 쓴 것도 아니고, 여기가 미국도 아닐 진데, ‘회기’(回歸) 같은 초보적인 국어 단어조차 이제는 풀어서 써야 뜻이 통할 지경이 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일어나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예전 같으면 그냥 한 단어로 번역해도 될 것을 빙빙 돌리고, 풀어서 번역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난감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조간 신문이나, 인터넷 신문을 보면 언뜻 봐서 무슨 뜻인지 모르는 제목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두 번 이상 읽어야 뜻이 통할 때도 있습니다. 함축적으로 뽑아야 하는 큰 제목이나, 중간 제목에 한자를 쓰지 않으니까 동음이의어 때문에 뜻이 한눈에 안 들어오고, 무슨 암호문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말이 사라진 곳에서는 영어와 왜색단어, 외래어 등이 마구 들어와 온갖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넘쳐납니다. 아래는 어느 자동차 회사의 광고 문구를 그대로 옮겨 온 것입니다.
<커먼레일 엔진, 셀프 레벨라이져, 헤드램프 와셔, 앞열선 유리, 세이프티 원터치 썬루프, 운전석 세이프티 파워 윈도우, 오토라이트 콘트롤 헤드램프, 속도감응형 파워 스티어링, 자외선 차단 글래스, 와셔액 부족 경고 등, 우적감지 와이퍼, 원격조정 백글라스 오픈, 가스식 후드 리프터, 터치스크린 시스템, 음성 경보 시스템. 멀티미터의 첨단 신기술이 집약되었습니다.(이 광고 문구는 이곳 기자수첩 2004년 1월7일 쓴 「프리터족도 모자라 이젠 ‘웰빙족’까지…」에서 옮겨옴>
저런 걸 말이라고 써놓고는 알아먹으라고 하는 사람이나, 또 저런 하수구 같은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들이나 비정상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의식구조가 어디 고장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런 엉터리 말때문에
실질 문맹률이 높게 나타나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반 문맹국가, 혼 빠진 나라에 살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은 한자 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기본이 튼튼하면 나라에 다 보탬이 되는 법입니다.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
hana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