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장군은 '세종' 대통령이 맞다(독립군 네티즌 논객)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세종대왕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세종대왕이 맞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조의 세종대왕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다. 위치 상으로도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이겠지만, 치적면에서도 이조의 세종에 버금가는 업적을 달성하였다.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였고, 경제와 물가의 안정으로 서민경제를 살렸으며,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통해 국위를 선양시킨 전두환 대통령은 세종대통령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80년 3월 인민군 인민무력부 소속 이창룡 대위 이하 10명의 인민군이 서울 은평에서 검거됐다. 그리고 5.18 광주사태 때는 특수부대가 넘어와 친북좌익 세력들로부터 입수한 남한 군복과 경찰복을 갈아입고는 시민들을 쏘아 죽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83년에는 버어마에 아웅산 폭탄테러사건으로 80여명의 장관과 외교관, 기자들을 사상했다. 이런 자들이 지난 15년 동안에 애국자로 둔갑하고 민주화 유공자 대우를 받는다. 통탄스러운 일이 아닌가?
더구나 이런 친북이적행위를 하던 자들, 혹은 친북반역행위 하고 김일성-김정일을 찬양하고, 노동당 인민군 찬양하던 자들이 공무원, 교사, 정치인이 되어서는 탈북자들을 비하하고 모욕하고, 대사관에 넘어온 탈북자를 북으로 돌려보내고, 북한을 탈출하고 민족의 반역자들이라고 비하하는 마당에, 전두환이라고 영웅 대접을 받아서 안될 일도 없다. 어떻게 보면 저런 친북 반역자들을 처단한 것만으로도 전두환 장군은 영웅대접받아 마땅할 것이다.
11,12대 대통령 전두환 장군의 주요 치적을 말한다면,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끊임없이 지속된 북한과 친북세력의 폭동, 사태도발 등 위기의 순간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고 내분을 수습하여 정국을 안정시킨 광정의 공이 크다. 태조의 창업과 태종의 중흥의 공덕이 크다고 해도, 수성하지 못한다면 이는 도로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1,12대 대통령 전두환 장군의 공적 역시 크지 않다 할 수 없겠다.
전두환 대통령은 소년시절 창씨개명을 거부한 용기있는 소년이었다. 전두환에게는 창씨개명이 없다. 전두환의 창씨개명을 찾아내서 괴롭히고자 했던 친북 종김세력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독립운동가 전상우 선생의 넷째 아들로, 기환씨는 형이고 경환씨는 그의 친동생이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아버지 덕택에 가정을 꾸리는 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열환, 규곤 등 두 형이 질병으로 일찍 요절하는 것까지 목격하여야 했다. 어린 소년 전두환이 조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두환 장군이 호란소학교에 다닐 무렵, 가족은 한때 일본 헌병의 탄압을 피해 남만주에 2년간 숨어지내다가 다시 합천으로 되돌아온 일이 있다. 그리고 전두환은 소학교를 2년 늦게 졸업한다. 전두환이 호란소학교에 다닐 무렵인 1941년은 일본에 의해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의 무단통치는 더욱 거세어져,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독립운동을 할 용기가 없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 국내에 남아 식민당국자들에게 협력,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간에!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의 용기 없음을 오늘날 현대의 잣대로 함부로 평가하거나, 탓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것이다.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불복종하는 자들에게는 온갖 불이익이 가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일제의 압력에 마지 못해 굴복, 창씨개명을 하며 견분창위 犬糞昌爲, 견분취식 犬糞取食, 강원야원 江原野原 과 같은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일제의 압력은 그만큼 거셌던 것이다. 뜻이 재미있는 것은 견분창위나 견분취식은 '개똥이나 쳐먹어라'는 뜻이고, 강원야원은 '에하라노하라'라는 뜻이다. 창씨개명의 강압은 성인들도 굴복시킬 정도였으나, 전두환은 초등학생에 불과한 소년인데도 창씨개명을 당당하게 거절하였다.
옆구리에 긴 칼을 찬 훈도가 어떻게 무섭지 않았겠는가? 당장 훈도는 칼을 뽑아 전두환 소년의 목을 겨눌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학생에게는 온갖 불이익이 주어졌다는 것이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한결 같은 증언이다. 그러나 전두환 소년은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불이익을 감수했다.
이는 일방적인 전두환 미화는 아니다. 김대중도, 김영삼도 창씨개명이 있다. 당시 20대였던 김대중이나 10대 후반인 김영삼 조차도 도요타 다이쥬 豊田大仲와 가네무라 코유 金村康祐라는 이름으로 각각 창씨개명을 했을 정도라면, 객관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전두환 소년도 사람인데, 옆구리에 칼을 찬 일본인 훈도가 어떻게 무섭지 않았을까? 전두환은 유소년 시절부터 당찬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광주폭동(민주화세력에 의해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됨) 토벌에 관련된 문제는 전두환의 책임이 아니다. 전두환이 발포명령자라는 것도 입증하지 못하였다. 발포명령은 불확실하지만, 광주폭동 사태수습 과정에서 관련된 것은 전두환 장군의 탁월한 업적일 것이다. 북한 김정일과 인민군의 무력도발인 5.18 광주폭동을 진압하여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북한은 부마폭동 때부터 수시로 인민군을 남하시켜 폭동을 선동해왔고, 80년 3월에도 인민군 인민무력부 전사들을 내려보냈으나, 장군은 이를 조기에 진압하여 내분을 수습하였다.
5월 18일에는 폭도들이 예비군부대와 경찰서를 습격, 29인의 군경을 학살하고 병기고를 탈취하여 폭동을 일으켰으며, 있지도 않은 계엄군이 나타나서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자칭 시민군들이 거병했다며 루머를 날조했다. 탈취한 차량으로 시내를 순회하며 확성기로 떠들어댔고, 카랑카랑한 여성의 섬뜩한 목소리는 시민들을 경악하게 했다. 날조된 루머들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이어 광주폭동을 통해 남한을 전복시키려는 저 김대중 추종세력과 북한 인민군을 끌어들여 사태를 확산시켰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먼저 학살한 것이 아니라, 자칭 시민군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 국가공권력에 폭력봉기를 행사했던 것이다.
1980년 초 서울의 봄을 악용하여 학생들의 데모는 거셌고, 그해 3월에는 인민군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의 휘하에 있던 인민군들이 집단으로 남하, 남하한 인민군 심리전대 병력을 지휘하던 이창룡 대위 외 10여명이 서울 입구에서 검거되었다. 4월부터 학생들의 데모는 더욱 거세졌고, 5월에는 학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편집자 주: 민주화세력은 이런 1980년의 데모를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했고,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는 해석은 민주화보상법으로 보상까지 해줄정도로 정설로 굳어져있다.)
80년 5월 10일에는 학생들이 10만명이 집단으로 서울역 광장에 운집하여 주변상가를 약탈, 파괴하고 노점상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전봇대와 가로수를 파괴하고 담벼락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10만 명의 대학생이 서울역 주변에서 그와같은 난동을 저지른 것이다. 난동이 일주일 가량 가까이 진행되다가, 17일 아침 계엄군 투입이 우려되자 전국적으로 연결된 각 대학 운동권 간부들의 사전연락망을 통해 소식이 전해지면서 자진해산된 일이 있다. 북한에서 이를 폭동이 가능한 신호, 충만화된 혁명력량으로 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5월 17일 새벽에 긴급조치 발동과 함께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시키고, 김영삼 등을 가택연금시키고 김대중 등은 바로 구속했다. 김대중이 그 무렵 밖에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선동했을지 몸서리쳐진다. 5.18 광주폭동이 터지기 전에 김대중을 검거한 것은 전두환 장군의 슬기로운 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김대중 추종세력이 5.18 광주폭동에 가담함으로써 폭동진압 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김대중을 회부시킨 원인이 되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라면, 국가존망의 위기의 사태에서 유언비어로 병기고를 탈취하고 군경을 학살한 자들의 폭동에 가담할 수가 없다. 그러나 김대중 추종자들에게는 국익보다는 오직 김대중 슨상님만의 정치적 이익이 소중했던 것이다. 김대중 광신도들에게 터럭만큼이라도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이 있었다면 광주폭동에 가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결국 김대중 광신도들이 내란음모 재판, 군법회의에 세우는 꼴이 됐다.
대한민국 세종(世宗) 대통령 전두환! 위기의 순간에 의협심을 발휘하여 박정희 대통령 사후 반란을 일으킨 김재규 일당을 진압하여 국가를 구하였다. 12.12는 386 주사파들이 음해하는 것처럼 정변이 아니라 김재규 일파를 일망타진하기 위한 전두환과 신군부, 하나회 일부의 거사였다. 이는 폭동도 반란도 아닌 국가를 구하기 위한 정의의 거사였다.(편집자 주: 12.12사건은 정승화를 수사하기 위한 우발적 사건) 대통령을 시해한 반역자 김재규와 그 일파를 잡아들이고 국가를 환란에서 구한 12.12는 쿠테타나 사태가 아니라 의거나 거사로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친북 주사파들의 영향으로 5.18 광주폭동과 아무 관련없는 12.12까지도 정치보복으로 인해 12.12쿠테타로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고, 혹평받아온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또한 장군은 80년 '서울의 봄'이라는 자유를 이용하려 한 북한 인민군과 김대중 추종세력이 일으킨 광주폭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내 또한번 나라를 구하였다. (편집자 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민주화세력과 군부세력 간에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80년 5월 18일부터 30일까지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광주사태의 광기에서 나라를 구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전두환 대통령은 김정일의 사주를 받은 각종 테러사건들, 아웅산 테러사건, KAL기 격추사건 등 수십회의 북한의 대남도발 등을 신속히 진압, 수습하여 국가환란으로 번질 우려가 있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였다.
물가 안정과 경제 안정 역시 5공의 치적일 것이다. 1990년 이후 지금껏 1년에 물가가 몇 번 인상하는가 알수 없을만큼 한해에도 물가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계속 상승하는데,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 재임시 물가를 꽉 잡아서 80년과 87년 단 2회 물가인상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하여 물가를 안정시켰다. 물가가 안정될수록 서민은 살기가 편하다. 예전에는 천원 지폐 한두 장으로 시장을 봐 오기도 했다. 5공 당시 경제는 연평균 10%대의 성장을 지속하였으며 가정경제는 안정되었다. 천원 한 장으로도 시장을 봐올 수 있도록 물가안정과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월급은 꾸준히 상승하였지만 물가는 안정되고, 경제는 성장되었으니 서민들이 살기 편한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1년에 물가가 몇 번을 오르는지 알지도 못하는 시대와는 확실히 대조적이다.
범죄자들을 단속하여 밤길에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일 것이다. 1980년 9월 1일부로 전두환 장군은 개혁안을 발표해, 연좌제와 야간 통행금지령을 해제했다. 야간 통금령은 사라졌으나 야간범죄는 기승을 부리지 않았다. 왜 그럴까? 전두환 대통령은 정의사회와 보국안민을 구호로 내세웠다. 헛된 공리공담으로 끝내지 않고 그 구호를 실현하였다. 살인자, 강간범, 성추행범, 조직폭력배, 깡패, 인신매매자, 패륜아, 음주운전자, 뺑소니, 마약중독자 등 각종 극성 흉악범죄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계도하였고, 계도가 불가능한 자들은 삼청교육대로 보내 인간성을 개조시켜 내보냈다. 반사회성 범죄자들이 함부로 기승을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과 같이 야밤에 아내와 누이, 딸을 출타시키고 걱정이나 염려하지 않아도 됐다.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 치하에서 만큼은, 각종 극성 흉악범죄자들을 잡아서 격리시키거나 인간성을 개조한 결과, 밤길에 아내나 누이, 딸을 내보내고도 걱정이라 염려를 덜어도 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중 국위선양을 위해 노력하였다. 86 아시안게임을 서울로 유치하였고,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 개최, 진행하였다. 86 아시안게임을 호주와 독일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대한민국 서울로 유치하는데 노력하였으며, 노상방뇨와 가래침뱉기 처벌과 범칙금 제정 등의 공중도덕법 제정, 깨끗한 거리 가꾸기 등으로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에 대비한 철저한 사전준비를 기하였다.
86 아시안게임과 세계적인 축제 88 서울올림픽을 연이어 성공적으로 개최, 진행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한국의 이미지 개선에 훈적을 쌓았다. 과거 국제사회에 6.25 전쟁의 폐허와 잔해 더미, 거지와 고아들이 드글거리는 나라 정도로 인식되던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벗겨낸 것도 전두환 대통령의 주요 치적!
전두환 대통령은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왔다. 저평가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매도당해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와 김정일은 민주화 유공자에 해방전사로 칭찬받고 있고, 광주폭동 당시 16명의 경찰관을 사살한 윤기권은 1991년 2억 달러의 보상금을 받고 참조국과 진정한 수령님 찾아서 북한으로 월북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친북이적행위, 김일성 김정일 찬양하던 자들은 민주화 유공자로 보상받고 공무원이 되어서는 자유찾아 넘어온 탈북자들을 중국 공안당국이나 해당국가 경찰에게 넘겨서 북한으로 되돌려보내고 있다. 그런 마당에 전두환이라고 찬양받아서 안될 이유는 뭐가 있는가? 이런 반역자들을 때려잡았다는 것만으로도 전두환 대통령은 구국의 영웅으로 찬양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북한을 찬양하고 김정일 김일성 만세를 부르던 자들이 최저 2억원에서 최고 50억, 60억 원의 민주화 유공자로 보상받고, 공무원 정치인 교사가 되고 있다. 공무원이 되어서는 대사관에 앉아서 자유찾아 넘어온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되돌려보내고 있고, 교사가 되어서는 김일성과 김정일 독재자를 찬양하고, 대한민국은 정체성없이 친일파가 지은 나라이며, 로동당 간부들과 인민군 간부들만이 잘먹고 잘사는 북한을 자주적인 나라라며 찬양하고 있다.
북한을 보라. 지금도 굶주리고 질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오직 노동당 간부와 인민군 간부, 김일성, 김정일의 가족만이 잘먹고 잘사는 저런 나라가 어떻게 지상낙원인가! 저런 북한을 위한 반역행위를 하고도 50,60억 이상의 돈을 보상받는 것이 제정신인가? 그것도 국민이 낸 세금으로 친북 반역자들을 보상해주는 것이다. 그 돈으로 탈북자들을 도와주거나, IMF 이후 실직자들을 지원하면 몇백 명의 목숨을 살리고도 남지 않겠나!
전두환 대통령은 세종대왕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세종대통령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전두환 세종 대통령! 5.18 광주폭동을 비롯한 숱한 친북세력의 도발과 폭력으로부터 사직을 지켜내고, 탁월한 수성의 업적을 쌓은 영웅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세종이라는 칭호가 적합할 것이다. 건국과 중흥에 이어 수성을 한 전두환 대통령 역시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중요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김일성, 김정일은 비판할줄 모르면서 전두환을 비판하는 것은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김정일의 무력도발을 막아낸 것이 그렇게 죽일 죄였더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광주폭동과 친북세력을 토벌한 전두환은 구국의 영웅이 맞을 것이다. 전두환 세종 대통령에 대해 지나치게 저평가 되어 온 것을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볼 때도 되었다. 5.18 폭동을 일으킨 친북좌파들의 주장만 보지 말고 다른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일이다. 세는 세상이고 종은 근본, 근원을 나타내는 뜻이니 세종이란 세상의 근본, 세상의 표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김일성이 독립운동가이고 김정일이 자유를 지키는 정의의 수호자이며, 북한 인민군이 해방전사들이라면 전두환 장군은 구국의 성웅이다. 김일성이 독립운동가이고 김정일이 자유를 지키는 정의의 수호자이며, 북한 인민군이 해방전사들이라 찬양하는 자들을 엄벌에 처한 것만으로도 전두환 대통령은 대자대비한 구국의 성웅이 아니겠나? 지금도 북한에는 노동당과 인민군에 의해 억울하게 굶주리고 질병에 걸려 아사하고, 억울하게 정치범으로 몰려서 학살당하는 동포들이 수두룩하다.
김정일과 노동당을 찬양하고 그들과 내통하려던 자들을 격퇴한 것만으로도 전두환은 구국의 성웅이 확실한 것이다. 이는 폭도의 한사람인 윤기권이 2억달러를 광주보상금을 받고, 북한으로 월북한 것만으로도 확실히 알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영웅 전두환 장군은 마땅히 대한민국의 세종 대통령이라 불려 타당할 것이다. [독립군 네티즌 논객: http://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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