語文政策의 反省, 그리고 當面課題
宋 百 憲(忠南大學校 名譽敎授)
1 우리말 純血主義 精神에 立脚하여 設計된 言語政策과 그 背景
8.15 祖國光復은 이 땅의 모든 政策을 새롭게 樹立하는 契機가 되었다. 이 때를 맞추어 우리의 語文政策도 새롭게 設計되었다. 그런데 그 때 設計된 語語政策의 잘못으로 우리는 지금 甚한 後遺症을 앓고 있다. 그 잘못된 語文政策이란 數千年을 우리가 使用해 오던 漢字語를 排除하고 오로지 한글만을 專用하자는 主張이었다.
그 政策이 樹立될 當時 祖國光復의 感激에 휩싸여 있었던 大多數의 우리 國民들은 純粹한 우리 것을 지키자는 그 政策을 反對할 理由가 없었다. 더구나 그 政策 設計에 關係한 분들이야말로 日帝의 우리글인 한글 抹殺政策에 맞서 獄苦까지 치른 바 있으니 設令 그분들의 主張이 充分한 名分과 國民情緖를 鼓吹시키는 方法上 多少의 矛盾이 있다 하더라도 敢히 그것을 反對할 수도 없었고 反對해도 그 名分이 稀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事實 日帝 强占期에 우리 말 글을 主張하는 많은 國語學者들은 日帝의 우리 語文 抹殺政策으로 甚한 獄苦를 치러야만 했다. 當時 植民地 統治者들은 우리의 말과 글이 살아 있는 限 韓國人의 民族魂은 결코 꺾을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當時 그들은 些少한 트집을 잡아 우리의 말과 글을 硏究하는 많은 國語學者들을 獄에 가두었던 것이다. 이른바 ‘朝鮮語學會事件’이라고 부르는 이 엄청난 事件으로 그 獄苦를 치르는 過程에서 몇 분은 목숨을 잃었고, 多幸히 살아남은 분들도 그 後遺症을 相當期間 苦痛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운 苦痛을 겪은 분들이기 때문에 祖國이 光復되자 이분들은 獨立運動家에 못지않은 極盡한 禮遇를 했던 것이다.
그 분들 중에는 一石 李熙昇선생처럼 講壇으로 돌아가 黙黙히 우리 國語 硏究에만 專念하는 분들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語文政策 樹立에 主導的으로 參與한 분들도 多數 있었던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우리말을 지키려는 데는 共通點이 있었지만, 그 方法이 달랐던 것이다. 이 때 잘못된 方法을 옳다고 생각하는 쪽이 設計한 政策이 지금까지 修正 없이 施行되어온 것이다.
그 잘못된 政策이란 바로 ‘한글 專用’ 政策이었다. 그분들의 主張은 ‘이제 우리는 祖國을 되찾았으니 이 참에 지금까지 使用해 오던 固陋한 漢字語는 버리고 純粹한 우리말만을 가꾸고 다듬자’는 것이었다. 그 분들은 「朝鮮語學會」의 正統性을 잇는 嫡長子라는 自負心을 가지고 그 學會를 「한글학회」라는 이름으로 改稱하고, 오랫동안 機關紙로 發刊해오던 <한글>誌를 그대로 이어 刊行하여 나갔다. 그러므로 當時의 많은 國民들을 이분들의 主張을 全幅的으로 支持한 것은 當然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우리말과 글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이제 獨立國家가 된 마당에 예로부터 使用해오던 漢字語는 이참에 없애고 새로운 時代에 걸맞은 語彙를 만들어 使用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든 語彙들은 실로 다양했는데, 이를테면 三角形은 ‘세모꼴’, 四角形은 ‘네모꼴’, 名詞는 ‘이름씨’, 飛行機는 ‘날틀’, 自動車는 ‘길틀’, 算數는 ‘셈본’, 文法은 ‘말본’, 심지어는 恐妻家를 ‘아내 무서움 쟁이’로 바꾸어 使用하자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純血主義精神이 透徹한 主張같기도 하다. 이 것들 중 그 뒤 ‘세모꼴’, ‘네모꼴’처럼 妥當性이 認定되어 지금도 使用되고 있는 語彙들도 있지만, 선 듯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語彙들이 相當數이었다. 그래서 그 때에 만일 이러한 主張이 더 擴大된다면 男女混成合唱團도 ‘연놈 떼거리 노래패’, 梨花女子大學校를 ‘배꽃 계집애 큰 배움 집’으로 쓰일 것이라는 反對 主張이 만만치 않아 얼마 뒤 이 計劃은 잠시 後退하였지만, 그러나 ‘한글 오로지 쓰기’만은 緻密하게 計劃되고 執拗하게 ‘오로지 쓰기 운동(專用)’으로까지 擴散시켜 나갔다.
2. 運動으로 擴散된 한글政策
漢字를 배제한 한글만 專用하자는 우리 말 글에 대한 計劃은 祖國의 光復과 더불어 점차 緻密하게 計劃되었다. 日帝强占기에 이미 『우리말본』이라는 尨大한 著書를 펴낸 바 있는 큰 선비께서 軍政廳時節 文敎部의 編修擔當官로 就任하여 우리나라 初 ․ 中等 敎科書 編纂에 主導的으로 干與하였다. 當時에 初 ․ 中等學校에서는 ‘新生 祖國의 實情에 맞는 各種 敎科의 圖書를 編纂하는 일이 急先務’이었다. 하지만 自然科學이나 地理, 東 ․ 西洋史, 美術, 音樂, 體育 등 大部分의 敎科目은 光復 以前부터 使用하던 敎科 內容과 大同小異하였기 때문에 그 內容을 一部 修整하여 우리말로 表記하는 等 比較的 簡單한 作業으로 解決되었다. 뿐만 아니라 擔當敎師도 그 以前부터 敎壇에 勤務해왔던 분들이 많아서 얼마동안의 우리말 敎習을 받아 授業을 했고 不足한 敎師는 當時에 國內外에서 高等敎育을 마친 人士들이 많아 쉽게 充當할 수 있었다. 그런데 國史도 비슷한 形便이었지만 特히 國語는 가르칠 敎科書도 없었을 뿐 아니라 國語를 擔當할 資格者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시 國語敎育을 擔當할 敎師를 檢定으로 選拔하여 充員했던 것이다. 그 때의 敎材는 그 編修擔當官이 새롭게 편찬하고 그분의 家族이 차린 出版社에서 發行한 『우리말본』이나 『한글의 바른길』이 主였고 그 밖에 몇몇 學者들이 펴낸 文法 敎材도 있기는 하였지만, 別로 큰 呼應을 얻지 못했다. 事實 1945년 光復 直後부터 1950년대까지 우리나라 中等 國語敎師 中 大部分이 速成으로 養成된 檢定出身이었음은 물론, 그들이 익힌 國語實力이란 거의 ‘우리말본’의 範圍를 크게 넘지를 못한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그 분들은 大部分 恩惠로운 분이 主管하는 學會의 熱誠的인 會員이 된 것은 너무나 當然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분들이 所屬된 學會야말로 우리 말 글의 正統性을 지켜 왔다는 「한글학회」였기에, 그 學會가 中心이 되어 이 나라 國語 政策을 樹立하는 莫强한 勢力으로 發展하면서 마침내 政府의 高位官吏나 國家 最高 責任者까지 이분들의 主張하는 한글 專用이 妥當한 것으로 認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過程에서 1960年代부터 敎科課程 改編에 따라 初等學校는 勿論 甚至於 中等學校의 敎科書에서 段階的으로 漢字가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全 敎科書에서 漢字가 完全히 排除된 채 純 한글로 씌어졌다.
3. 바른 政策을 指向하는 새로운 學會의 發足과 그 鬪爭 過程
그러나 그 분들이 이러한 政策을 펴나가는 동안, 이를 黙黙히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 漢字敎育을 語文政策에 包含시키자고 正規 國語敎育을 받은 學者들이 드디어 뭉치기 시작했는데, 그 核心에 서신 분이 바로 蘭汀 南廣祐 선생님이셨다. 그 분께서는 스승이신 一石 李熙昇, 心岳 李崇寧 선생 등 國語學을 正統으로 硏究한 분들을 顧問으로 모시고 組織한 學會가 바로 「語文敎育硏究會」였다. 이 분들의 主張은 너무나 當然한 것이었으니
첫째 ‘한글전용’을 함으로써 한자어가 지니는 表意文字의 深奧한 뜻을 攄得치 못하고 表音文字 爲主의 言語 使用을 强調함으로써 思考의 單純化를 招來할 것이라는 憂慮 때문이다. 왜냐하면 漢字는 한 字 한 字가 모두 獨立된 뜻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글자 한 字가 많게는 數百 個의 造語能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漢字를 익히면 頭腦 開發에도 크게 作用하기에 이웃나라에서는 세살 때부터 漢字를 가르쳐야 한다고 主張하는 學說이 일찍부터 擡頭되어 早期 漢字敎育이 盛行 中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둘째 漢字를 모름으로써 圖書館에 山積해 있는 우리의 古典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父母의 姓銜은 勿論 자신의 이름도 漢字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古典을 읽을 수 있겠는가? 그 結果 文化 傳統의 斷絶은 불 보듯 하다는 點이 그것이다.
셋째 우리만이 ‘한글전용’을 固執함으로써 國際 競爭力을 잃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다가올 無限競爭時代에서 살아남기 爲해서는 東洋의 많은 나라들이 漢字를 使用하고 있는 데 유달리 오직 우리만 ‘한글전용’을 固執한다면 우리가 이웃 나라와 競爭 乃至 協力을 期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같은 漢字文化圈에 屬하는 나라에 旅行을 하거나 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看板이나 案內板을 읽지 못함으로써 意思疏通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에 列擧할 수 없이 많은 理由 때문에 ‘한글전용’은 시간을 두고 深思熟考해야 한다고 强力히 主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저분들은 自身들의 괴팍한 論理를 들어 妥協은커녕 國語에 對한 背信者라는 視線으로 이를 受容하려 하지 않고 더욱 그들의 理論을 固執 强化해 나갔다.
처음부터 외로운 鬪爭을 覺悟하고 出發한 運動이었지만, 그 過程을 참으로 외롭고 고달프고 險難한 鬪爭의 連續이었다. 事務室 하나도 변변히 마련하지 못하고 某 出版社의 한모서리를 빌려 出發한 學會였지만, 다행히 뜻이 있는 京鄕 各地의 有名 社會人士들이 積極 後援해 줌으로써 그 慘憺한 環境 속에서 學會誌인「語文硏究」를 繼續 刊行하면서 외로운 鬪爭을 繼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뒤에 이 運動을 보다 더 具體的이고 積極的으로 實行하기 爲하여 社團法人 「韓國語文會」를 다시 發足시켜 「語文生活」도 竝行해서 刊行하여 왔다. 오늘날 우리 學會들이 이처럼 成長하고 많은 國民들로부터 呼應을 받게 되기까지 얼마나 피눈물 나는 歷程을 거쳐 왔던가를 돌이켜 볼 때 참으로 感激스럽다. 오늘이 있기까지 그 동안 滅私奉公의 透徹한 使命을 가지고 學會를 이끌어 온 여러분들의 勞苦에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나 우리의 現實은 이제 겨우 물고를 조금 터놓았을 뿐 앞으로 우리 앞에는 한글과 漢字가 倂用될 때까지 險하고 고달픈 課業이 가로놓여 있다.
4. 當面한 現實과 改善方向
우리 「語文敎育硏究會」가 發足하면서부터 憂慮했던 點이 바로 큰 問題點으로 하나하나 다가왔다. 그것은 國民 大多數가 이른바 ‘한글세대’라는 漢盲者들로 轉落하고 말았다는 事實이다. 그 結果 現在 全國의 大學生들은 물론 심지어 國語國文學科의 學生들마저 自身들의 이름을 漢字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國文學을 專攻한다면서 漢字가 섞인 古典이나 學術論文을 읽을 수가 없어 많은 學生들은 詩나 小說 등 漢字語가 없는 分野를 專攻으로 選擇하고 있다. 筆者가 在職했던 當時 해마다 50名 內外의 學生이 卒業을 하였는데 그 중 現代文學 分野의 卒業論文을 選擇한 사람이 무려 85% 以上이었고, 그 중 筆者가 論文 指導를 擔當한 學生이 25名 內外이었다. 얼핏 보면 筆者의 人氣가 높은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誤算이었다. 왜냐하면 그 現代文學 中 筆者의 專功分野가 現代小說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現代文學 中에서도 詩는 比較的 難解하기 때문에 理解하기 쉬운 小說을 擇한 것이었다. 이러한지라 藝體能系에는 더욱 深刻해 冊을 읽지 못하는 學生이 不知其數였다. 人文系列 特히 國文學 專攻者가 이럴진대 其他 系列의 學生들은 말해 무엇 하랴.
狀況이 이 地境에 이르렀으니 學生들의 思考는 單純化 되어 知性의 殿堂이 자리한 大學村에는 古書店 한 곳이 없고 다만 술집을 비롯한 娛樂室 및 遊興業所만 櫛比한 것은 當然한 일이다.
요즈음 大學生들은 도대체 複雜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單純하고 機械的이며 卽興的인 傾向이 있음은 勿論, 漢字는 英語보다 더 어렵고 不便하다는 생각마저 가지고 있는 實情이다. 이는 모두 複合的 思考를 要求하는 漢字 敎育을 等閑視 한 데서 緣由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글전용’만을 固執함으로써 讀書能率을 크게 低下시키고 있음은 勿論 內容의 暗記도 많이 떨어진다. 筆者의 經驗으로는 한글만으로 씌어진 글보다는 中間 中間 漢字를 섞어 썼을 경우 훨씬 讀書能率이 오를 뿐 아니라 그 內容 把握에도 훨씬 수월함을 알 수 있었다. 특히 學生들의 이름을 외울 때 假令 ‘김정자’라는 이름을 가진 學生이 같은 學級에 10명이 있다고 할 때, 그들을 모두 순 한글로 ‘김정자’라고 表記해 놓으면 누가 누구인지 쉽게 判別하기가 어려웠는데 ‘金貞子, 金亭子, 金定子, 金靜子, 金晶子, 金淨子, 金楨子, 金正子, 金丁子, 金井子라고 各各 漢字로 적어 놓으니 쉽게 그 이름과 學生의 얼굴을 聯想할 수 있었다. 이것은 筆者만의 經驗이 아닐 것이다.
또한 한글을 專用함으로써 國家는 물론 個人에 있어 經濟的으로나 精神的으로 莫大한 被害를 입히고 있다. 21世紀 無限競爭時代를 맞아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여러 나라들과 自由롭고 便利한 言語疏通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우리나라는 祖國光復 以後 오직 ‘한글전용’만을 固執한 나머지 같은 漢字文化圈에 살고 있는 東洋의 여러 나라 중 國民이 漢字를 解讀할 수 없는 나라의 하나로 轉落하고 말았다. 過去 北韓이 한글만을 固執하더니 最近에 이르러 國漢文을 混用하고 있음도 다 國際競爭力을 높이기 위한 手段으로 풀이된다. 이 밖에 ‘한글전용’으로 말미암은 被害事例는 일일이 枚擧할 수 없으리만큼 많지만 紙面關係로 省略한다.
多幸히 最近에 이르러 우리 學會의 이웃에 「社團法人 전국漢字敎育추진총연합회」가 이미 發足되어 月刊으로 <한글+漢字문화」를 110餘號나 發刊하여 오고 있다. 이 <한글+漢字문화>의 每號마다 많은 읽을거리를 실어 漢字文化의 暢達과 漢字 混用의 啓導에 앞장섬은 물론, 이 學會 역시 우리 學會처럼 ‘漢字能力檢定試驗’制度를 施行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많은 國民으로부터 높은 呼應을 얻고 있음은 多幸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初等學校부터 學年別로 漢字를 履修할 字數를 定하여 全 敎科目에 걸쳐 段階的이며 體系的으로 國漢混用 敎科書를 編成하고 指導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른바 ‘한글세대’의 敎師들에 대한 漢字 硏修는 물론 漢字 兼用의 必要性과 改善에 대한 全國的인 啓導로 共感帶를 形成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政策 立案者들로 하여금 强한 意志를 갖도록 그 妥當性을 理解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現在 全國의 많은 企業體에서 入社試驗에 漢字能力試驗을 보는 傾向이 漸次 늘어가고 있으며, 아직 一部 學生들에 지나지 않지만, 漢字 課外를 받는 學生들이 차츰 늘고 있음은 물론, ‘漢字能力檢定試驗’에 應하는 學生들이 해마다 增加하고 있는 趨勢다. 게다가 中國으로의 留學生이 날로 增加하는 등, 갈수록 漢字敎育의 必要性을 認識하는 사람들이 增加하고 있으니, 이것이 우리 語文敎育의 앞날이 밝다는 徵兆로 보여 그나마 작은 慰安이 된다.
특히 漢字文化가 世界文化의 中心圈에 자리매김해나가는 오늘의 現實에서 앞으로의 漢字敎育은 더욱 强化되어야 마땅하다.
앞으로 이러한 運動過程을 展開함에는 더 많은 抵抗에 부딪치겠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굳은 意志로 이를 積極 推進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 言語의 幅은 더욱 넓어져 豊饒로운 文化를 누림은 물론 우리 傳統文化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참조사이트
한국어문회 http://www.hanja.re.kr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http://www.hanja-ed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