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전용 小說은 예술이 아니다
近代名文鑑賞
한글과 言語藝術
장용학
小說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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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語生活에 있어서 두 가지의 文章을 갖고 있는 民族은 우리뿐일 것이다. 우리의 雜誌를 펴 보면 확연히 두 개의 地帶로 나뉘어져 있다. 한글專用의 그것과 國漢倂用의 그것이다. 小說은 한글專用으로 되어 있고, 그 밖의 知識의 글은 國漢倂用으로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漢字와 한글의 두 種類의 文字가 주어져 있다는 特殊事情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겠으나, 그러면 어째서 小說에서는 한글만이 專用되고, 知識의 글에서는 國漢이 倂用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主로 그 글의 內容의 難易에서 그렇게 된 것 같다. 知識의 글은 어려운 것이니 漢字를 섞어 쓸 필요가 있고, 小說은 漢字를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通念이라고 해도 틀리는 말이 아닐 것이다. 한글은 우리글이다라는 名分論도 있지만, 知識의 글에서는 쉽게 그것이 讓步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그렇게 권위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 小說에 있어서는 그 權威가 압도적인 威力을 발휘하고 있다. 밖에서 그렇게 강요해서가 아니고, 小說家 자신이 한글專用을 當然한 것으로 보고 있고 거기에 矜持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名分論이나 難易를 일단 떠나서 本質的인 面에서 볼 땐 도리어 그 反對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知識의 글은 한글專用을 해도 무방하나 小說의 글에서 한글專用을 한다는 것은 小說의 本質과 摩擦을 일으킨다. 小說은 무엇보다 우선 藝術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目的은 知識을 전달하는 데에 있지 않고 感動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있는 것이고, 그 感動은 情緖活動이고 情緖는 感覺的인 이미지에서 생긴다.
言語에는 뜻과 이미지의 두 가지 側面이 있다. 그럴 때 知識을 다루는 科學은 槪念에 의해 眞理를 알아내는 것이므로 뜻만으로 足하고, 情緖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知的 活動을 誤導한다 하여 排斥된다. 이미지가 전연 없는 數字와 記號만으로 이루어진 數學을 가장 純粹한 科學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한 科學에 대하여 藝術의 表現은 뜻을 넘어선, 感覺的인 現象化에 의하여 情緖에 호소하는 이미지 活動이다. 다시 말하면 科學은 槪念에서 끝나지만, 藝術의 本質은 개념을 넘어선 이미지에 있고, 이미지를 떠나 藝術은 成立될 수 없다. 따라서 知識의 글은 한글專用을 해도 무방하지만 小說의 글은 한글專用을 하면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漢字에는 이미지가 있지만 한글에는 그것이 없거나 극히 稀薄하기 때문이다.
文學은 言語藝術이라고 한다. 그 言語는 音聲과 文字의 두 가지 形式을 빌어서 나타낸다. 言語藝術인 文學은 그 本質에 있어서 聽覺藝術이지만, 오늘날에는 視覺을 통한 文字藝術로서의 比重이 壓倒的이다. 小說은 음성을 통해 대할 때에는 한글專用의 것이건 國漢倂用의 것이건 마찬가지이지만, 文字를 통해서 대할 때에는 두 가지 經路가 있다. 뜻과 音聲의 結合과 뜻과 字形의 結合의 두 가지이다. 그럴 때 한글專用의 글에서 빚어지는 이미지는 主로 前者의 경우의 것뿐이고, 國漢倂用의 글에서 빚어지는 이미지는 兩者의 것이 合쳐진 것이다.
한글은 表音文字이기 때문에 文字 하나하나에는 뜻이 없어서 이미지가 깃들 수 없고, 獨立된 그런 글자(音節)가 몇 개 합쳐져서 이루어진 낱말에도 소리에서 오는 것 以外는 이미지가 깃들 수 없다. 같은 表音文字라도 英語의 알파벳은 몇 개의 音節이 한 낱덩어리로 結合되어 낱말을 이루기 때문에 그 낱말은 漢字 하나와 같은 生理를 지닌다. 漢字가 立體的으로 綴字되는 데에 대하여 알파벳의 낱말은 옆으로 한 줄로 綴字되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한글專用의 小說에 있는 이미지가 주로 音聲에서 빚어지는 것뿐이라는 것을 否定할 수 없다면, 그리고 오늘날 小說이 文字藝術로서의 比重이 압도적이라면 文字에서 오는 이미지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小說을 藝術로 대하는 態度가 아닐까 한다. 藝術인 小說 쪽이 科學인 知識의 글보다 더 漢字使用에 더 積極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實情은 小說을 스스로 한글專用의 展示場으로 제공하고 있다. 한글 問題와 결부될 땐 小說家 스스로가 한글의 權威 앞에 무릎을 끓고 小說을 準藝術쯤으로 취급하기를 사양하지 않는 空氣가 우리 小說界를 덮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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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살펴본 一般論을 떠나, 通念과는 달리 오히려 小說에 있어서 國漢倂用을 해야 하는 根據로 藝術鑑賞의 一回性과 言語藝術의 기본적인 鐵則인 一語說을 들 수 있을 것이다.
藝術作品의 鑑賞에 있어서는 먼저 健全한 視聽覺과 知能을 가진 사람이 한번으로 보고 듣고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그 뜻(文學)이나 모양(美術)이나 소리(音樂)를 把握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論理的으로는 그 다음이지만 時間的으로는 同時)에라야 鑑賞活動이 가능하다. 그 鑑賞活動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 흐름이 끊어지지 않을 데에서 끊어지면 鑑賞은 깨어진다. 이것은 너무나 當然한 이야기로 音樂鑑賞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레코드를 감상할 경우 우리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돌아가고 있는 레코드를 세우는 일을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鑑賞者의 事情에 의해 中斷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一回性과 別個의 문제이다.
한글專用의 小說의 경우는 이러한 흐름의 中斷이 종종 있게 된다. 한글로만 쓴 漢字語는 한 번만 읽어서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 鑑賞이라는 情緖活動의 흐름은 中斷되고, 鑑賞의 水位는 낮아진다. 그런 것은 些少한 問題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藝術의 鑑賞은 그런 些少한 뜻의 蓄積이고 그 蓄積 以外 달리 큰 것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中斷을 막기 위해 한글專用의 小說에서는 括弧를 하고 漢字를 써넣는다. 小說에서 括弧를 하고 漢字를 써넣는 것은 뜻을 强調하기 위해서거나 이미지를 고려해서가 아니고, 뜻을 알게 해서 鑑賞의 一回性을 維持하기 위해서이다. 낱말 하나하나의 뜻은 다 알 수 있는데 그 文章 전체의 뜻을 몰라 중단되는 경우는 作者의 表現力이 부족했거나 讀者의 理解力이 부족한 데서 온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一回性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여기서 다음으로 問題가 되는 것이 括弧의 使用이다. 괄호를 사용하는 것이 宿命처럼 되어 있는 그런 文章을 온전한 文章 이라고 하기 어렵다. 기워놓은 것 같은 것이 方便的이고 臨時的이라는 印象을 면할 수 없다. 그것이 臨時的인 것이 아니고 原則처럼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文章을 남에게 내세우기에는 주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國漢倂用의 文章과 括弧使用의 文章,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부끄러운 文章일 것인가. 우리와 事情이 같은 日本의 경우, 그들은 括弧를 하지 않고 그 옆에 그 音을 단다. 括弧를 하는 것보다는 덜 어색하지만 떳떳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日本도 우리와 마찬가지라고 해서 우리의 括弧 사용이 떳떳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括弧 사용의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괄호를 일체 쓰지 않고 글자 그대로 한글專用을 한다면 그것은 本末의 顚倒요 矯角殺牛의 愚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一回性의 희생을 自請하는 것이고, 一回性을 살리려면 一語說과 衝動을 일으키고 나아가서는 우리 小說의 作品世界를 좁히고 水準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 거기에 適合한 形容詞나 副詞나 動詞나 名詞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適合한 낱말이 括弧를 하고 漢字를 써넣을 必要가 있는 漢字語일 때 括弧를 피하기 위해서 다른 낱말로 바꾸어 쓴다면 그것은 창작이 아니라 作者 자신의 손으로 한 것이라 해도 模作이고 飜譯이 된다. 幾何에서의 相似形처럼 뜻이 똑같은 낱말은 두 개가 없으며, 이미지가 같은 낱말은 더더구나 없다. 文學에서는 '인간'과 '사람'은 쓰는 경우가 다르며 '밀물'과 '만조(滿潮)'는 이미지가 判異하다. '홍소(哄笑)를 터뜨렸다'가 適語일 경우 그것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나 '입을 크게 벌리고 떠들썩하게 웃었다' 쯤으로 그쳤다면 그는 스스로 藝術家이기를 포기함을 意味한다. 그런 일을 壯한 일로 생각한다면 그는 藝術을 위해서 文學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한글을 위해서 小說을 쓰는 것이 된다. 文學에 있어서의 愛國은 한글專用을 하는 데에 있지 않고 훌륭한 作品을 쓰는 데에 있다.
그리고 括弧를 안 쓰는 한글專用에 專念하다 보면 낱말만 쉬운 것을 찾게 될 뿐 아니라, 題材도 內容이 쉬운 것을 찾게 된다. 물론 文學의 價値는 內容의 上下에 있지 않고 表現의 그것에 있지만, 한글專用으로 表現할 수 있는 것만 찾게 되면 作品世界가 좁아지고 水準도 낮아지기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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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文學이면서 詩에서는 漢字가 倂用되고 있는데 小說에서는 왜 그것이 禁忌로 되어 있는가. 小說 자체에서는 題名이나 作者名은 漢字로 쓰는 것은 무슨 理由에서인가. 이런 물음에 合理的인 答을 제공할 수 없다면 小說에 있어서의 한글專用에는 정당한 市民權이 없었던 것이 된다.
그런데도 한글專用이 우리 小說의 傳統처럼 굳어지게 된 것은 다음 세 가지 理由에서가 아니었던가 한다. 하나는 舊朝鮮時代의 이야기책이 한글로 쓰여졌기 때문에 現代의 小說도 이야기니까 이야기책의 한글專用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日帝下의 特殊事情이다. 日帝時代에는 대부분의 知識層은 日語小說을 읽었고, 우리 小說을 읽은 것은 民族意識이 뚜렷한 知識層도 읽었지만 그 數는 극히 少數이고, 主로 漢字의 素養이 부족한 庶民層이었다. 셋째로 우리의 경우는 日本과 달라 漢字는 音讀만 하고 訓讀을 하지 않기 때문에 國漢倂用으로 하면 小說의 경우 어떤 場面에는 漢字가 많이 쓰이게 되고, 어떤 場面은 한글로만 이어지게 되어 視覺的으로 紙面이 고르지 못하게 된다. 國漢倂用을 한 부분은 한글專用을 한 部分이 훤한 데에 비해 칙칙하다. 個個의 小說作品은 藝術品이니 그 表現手段이 文字일 경우 文字로 이루어지는 文章, 그 文章들로 이루어지는 紙面이 주는 視覺性도 考慮되어야 한다. 그럴 때 國漢倂用의 경우는 漢字專用이나 한글專用의 경우에 비해 눈에 거슬려서 藝術品으로 흠이 된다. 몇몇 先人이 初期에 國漢倂用을 試圖해 보았다가 포기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위에 든 세 가지 理由 중 처음 두 가지는, 오늘날의 小說은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서 이야기를 넘어선 데에 近代小說의 特性이 있는 것이고, 또 오늘의 讀者는 庶民層에 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할 것이 못 된다. 오늘에 있어서도 小說에 있어서의 國漢倂用을 구속하는 것이 紙面이 주는 視覺的인 缺陷이다. 그러나 이 拘束은 한글專用이 주는 拘束에 비하면 훨씬 작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모든 小說이 國漢倂用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漢字를 필요로 하지 않는 小說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거기에서도 얼마든지 藝術的 價値가 높은 作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한글專用은 藝術的인 必然性에서 행해져야 하는 거이고 한글은 우리글이다 하는 따위의 他律的인 名分論에 이끌려 排他的으로 주장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漢字도 엄연한 우리 國字이다.
우리의 얼이 깃들여 있는 것은 言語이고 文字가 아니다. 한글이 생기기 전에도 우리 民族은 우리 民族이었다. 民族文化를 위해서 한글이 있는 것이지 한글을 위해 民族文化가 있는 것이 아니다. 文學家가 아끼고 다듬어야할 것은 言語이지 한글이 아니다. 우리가 한글을 아끼는 것은 그것이 우리 言語를 적는 手段이기 때문이다.
國漢倂用이 文學藝術의 必然性이 가리키는 方向이라면, 한글專用이라는 傳統은 飛翔하려는 우리 小說의 날개를 묶어 두려는 桎梏의 役割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語文硏究』제15·16호. 1977
<解說>
「近代名文鑑賞」이라 이 欄이름을 내어 걸었지만 事實은 우리 나라에 近代名文이란 없다. 그러니 이 題目은 '아이러니'이다. 왜 우리 나라에 '近代名文'이란 없는가. 그것은 한글專用 때문이다. 한글專用文으로는 名文을 지어낼 수 없으며 지난날 名文이 지어졌었더라도 그것을 한글專用으로 내어놓으면 名文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왜 한글專用을 하면 名文이 안 되는가. 文章이란 語彙를 材料로 한다. 그런데 그 材料가 헛것이고 엉터리고 속 빈 것이라면, 요컨대 몹쓸 것이라면 그런 材料를 가지고 아무리 훌륭한 솜씨의 料理人이라도 名品料理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게 道理이다. 별 값어치 없는 아무렇게나 쓰는 文章이라면 글 쓰는 사람은 文章에서 쓰는 單語나 語彙에 별로 神經을 안 써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名文章, 또는 뜻이 精密한 文章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그가 쓰는 單語, 語彙의 選拔에 한치의 讓步도 없는 것이다. 그가 文章의 그 자리에 쓰고자 하는 單語는 그 單語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그 하나의 單語를 찾아내려고 머리를 짜고 呻吟(신음)할 것이다.
한글專用論者는 漢字語는 國語가 아니라 하지만 그러면 우선 우리말의 語彙는 半, 아니 三分의 一로 줄어들어 버린다. 國語의 語彙의 약 70%가 漢字語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貧弱한 語彙로 어떻게 名文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한편 漢字語를 한글로 그 겉모습을 적어 놓으면 거기에 그 單語가 表記되어 있는 것으로 알겠지만 한글로 쓰여진 漢字語는 이미 그 單語가 아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 적혀 있는 것은 껍데기이며 헛것이며 속 빈 것이며, 요컨대 죽데기요 허깨비다. '사기'는 결코 '詐欺'가 아니며 그렇다고 '史記'도 '沙器'도 '死期'도 아니다. 이 事情을 당장 여기에 그 글을 싣는 張龍鶴의 경우로 생각해 보자. 張龍鶴은 진작 우리 나라 한글專用정책, 學校에서 漢字를 안 가르치는 語文政策을 强力히 批判, 反對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고, 또 그의 小說創作에서는 漢字를 섞어 썼다. 비록 마음놓고 뜻대로 쓴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小說에는 漢字語가 더러 漢字로 적혀 나온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한글로 뜯어고친다면 그것은 그의 글을 죽이는 것이 된다. (實際로 最近 어느 出版社에서 낸 張龍鶴作品集에서는 原作의 漢字를 빼버리고 出版하였다. 語文硏究 103號 1999년 가을號의 朴光敏 : "張龍鶴 先生을 追慕함" 參照) 그의 作品의 題目 몇 가지를 한글專用으로 해보면 곧 이 말의 뜻을 알 것이다. 「육수」, 「비인탄생」, 「역성서설」, 「산방야화」. 讀者들은 이들 말의 뜻을 알 수 있는가. 아마 漢字로 적어주지 않으면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肉囚, 非人誕生, 易姓序說, 山房夜話'로 表記되어야 한다. 한갓 小說題目을 가지고 얘기했지만 한글專用은 이같이 根本的으로 文學을, 또 精緻(정치)함을 要하는 用語 위에 세워지는 科學을 成立시키지 못하는 表記法인데 더구나 「名文」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한글專用主唱者들이야 제쳐놓더라도, 지금 우리 나라의 文學家에는 眞正한 文章家가 없다고 생각해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 眞正 文學을, 그리고 文學의 素材인 言語를 사랑하고 아끼는 文學家, 評論家가 있다면 벌써 옛날에 한글專用 같은 惡法을 앞장서서 反對하고 排擊하고 表現의 自由를 찾으려 했을 것인데 張龍鶴 같은 두서넛 '깨달은' 作家 外에는 찍소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 有象無象은 料理人이랍시고 하면서 自己 料理에 쓰는 材料 吟味도 못하는 類와 한 또래이다.
우리는 이 欄에서 近代名文鑑賞을 하려 하기보다 近代名文을 鑑賞할 수 있는 與件을 마련하는 데에 뜻을 두는 것이다. 우리의 뜻이 이루어져야, 다시 말해 眞情 한글專用이 우리 나라에서 사라져야 비로소 우리도 近代名文을 가질 수 있고, 또 그것을 鑑賞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 싣는 張龍鶴의 글은 이러한 한글專用과 文學語의 問題를 眞情으로 다룬 드문 글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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