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희 (作家)
몇 년 전 전라도 어디서 있었던 웃지 못할 난센스다. 검문을 하던 경찰관이 검문도중 신분증에 기재된 漢字를 몰라 도경찰청에 문의한 일이 있었다.
"아, 여보세요. 저는 어느 검문소에 근무하는 아무갠 데요, 검문을 하다보니 漢字로 된 이름자를 몰라 문의하는데요, 탱크같이 생긴 자가 대체 무슨 잡니까?"
검문하던 경찰관은 아무리 뜯어봐도 이 자가 무슨 잔지 몰라 탱크같이 생긴 글자라고만 했다. 글자(字形)가 꼭 탱크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탱크같이 생긴 글자?"
"예. 글자가 꼭 탱크같이 생겼습니다."
그 경찰관이 문의한 글자는 '이름 설(卨)'자였다. 자형으로 봐 이 이름 卨자는 얼핏 탱크를 닮아 있다. 그러고 보면 그 경찰관은 비록 무식(?)은 했지만 발상(아이디어라고도 할 수 있겠다)만은 가위 기발하다 아니할 수 없다.
얼마전 정부가 모든 公文書와 道路標識板에 漢字를 병행하겠다 하자 한글학자를 포함한 한글학회에서 결사 항쟁하듯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인 즉 왜 좋은 우리 글(문자)을 두고 남의 나라 글(문자)을 쓰느냐였다. 이는 우리글을 경시하고 남의 글(漢字)을 숭상한 事大여서 결단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얼른 들으면 그럴듯해 아하, 그렇구나 할지도 모른다. 자기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문자를 쓰고 남의 나라 문자를 쓰지 말자 하니 맞는 말이다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조금만 생각하면 矛盾이요, 自家撞着(자가당착)이라는 걸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글이 漢字에서 비롯되지 않은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漢字, 그리고 漢字語는 누가 뭐래도 우리말화한 國語다. 그러므로 이는 정부 원안대로 과감히 밀고 나아가야 한다. 漢字를 쓰되 漢字가 主가 되고 한글이 從이 되는 漢主國從體(한주국종체)를 쓰지 말고, 한글이 主가 되고 漢字가 從이 되는 國主漢從體(국주한종체)를 쓰면 된다.
지금 중요한 학문, 예컨대 윤리, 도덕, 역사, 민속, 철학, 법학, 문학, 과학, 수학, 물리, 농학, 천문, 지리, 한의학 등 모든 학문은 漢字 없이는 도무지 범접을 못하고 뜻풀이에 있어서도 의미 전달이 불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고급 논문이라는 석·박사의 논문은 거개가 漢字나 漢字語彙로 돼 있다. 그런 것을 한글로만 바꿔놓으니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우리말은 불행히도 겨우 25% 내지 30%고 나머지는 모두 漢字語와 외래어들이다. 설령 漢字語가 아니라 할지라도 漢字에서 파생된 어휘들이다. 때문에 漢字를 떠난 漢字語는 소리일 뿐 말이 아니다.
漢字를 몰라서 생기는 폐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언어의 高低와 長短을 모르고 지성의 저하를 가져온다. 뿐만 아니다. 漢字를 사용치 않으므로 언어 능력이 없어지고 사고능력이 떨어진다. 언어의 고급한 발달은 고급한 문자 없이는 불가능하고 고급한 사상의 발달 또한 고급한 문자 언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글專用論者들은 漢字가 중국 것이라 하여 마치 이를 수입해서 쓰는 事大로 보는 듯하다. 이는 우리말과 漢字語가 합쳐져 일체가 된 國語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생각해 보라. 영어가 영국의 고유어인 앵글로색슨語와 외래어인 프랑스語 라틴語가 합쳐져 하나의 국어인 '잉글리시'가 됐고, 알파벳이 그리스의 文字인 동시에 백인 전체의 文字가 된 사실을. 이와 마찬가지로 漢字는 중국의 文字인 동시에 黃人 전체의 文字다. 이는 라틴語가 로마의 國語인 동시에 백인 전체의 國語인 것과 같이 漢字語는 중국의 국어인 동시에 黃人 전체의 國語이다. 가령 예를 들어 國號 '大韓民國(대한민국)'을 漢字로 쓰면 중국어가 되고 한글로 쓰면 국어가 된다는 논리는 發音盜用主義的(발음도용주의적) 발상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사기'란 어휘가 자그마치 27개나 된다. 이 중에 우리말(한글)로 된 '사기'는 하나도 없고 27개 모두가 漢字 '사기'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는 대체 어떻게 할 것이다. 이 27개 모두를 한글로 '사기'라 썼을 때 설명 없이는 어느 사기가 어느 사기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姓만해도 그렇다. 유씨만 柳, 兪, 劉, 庾의 네 성씨가 있고, 강씨도 姜, 康, 江, 强의 네 성씨가 있다. 그런데 이를 모조리 유, 유, 유, 유하고 쓴다든가 강, 강, 강, 강하고 써보라. 어느 성이 어느 성인지 분간할 길이 없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잔디'니 '보람'이니 '하늘'이니 '새롬'이니 하고 한글로 지었다면 모르지만 漢字로 이름을 지었다면 왜 하고 많은 글자 중에서 하필 그 자를 골랐겠는가.
漢字의 혼용은 시급을 요하는 절체절명의 사안이다. 요즘의 청·소년들이 漢字를 배제하고 한글 위주로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언어 능력의 저능화와 저급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대학을 나오고도 언어 능력은 물론 언어의 고저 장단을 모른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일본이 漢字를 쓰지 않았다면 저 서구의 학술용어는 번역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漢字는 造語가 거의 무제한 가능하여 3,000자를 2개씩 연결해도 60만 단어를 알게된다. 그러므로 基本漢字 3,000자를 알면 60만 단어를 배우지 않고도 알아 不學而解(불학이해)하게 된다. 漢字는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한글과 倂用해야 할 至上課題(지상과제)요, 定言的命法(정언적명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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