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성경에 쓰여진 한자어(漢子語)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도 어려운 말로 쓰여진 성경을 읽고 있다.
김재욱 장로
성경은 계시의 원천이며 믿음의 확고한 증거이다. 이 증거는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되며 또 계시의 원천이 어려운 말들로 가리워져서도 안 된다.
여러 해 전에 어떤 시골 권사님이 몇몇 초신자들에게 마태복음 1장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의 세계(世系)를 세계(世界)로 잘못 이해하고 예수는 천지의 주제자이심을 천하 만민에게 선언한 것이라고 역설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세계(世系)라는 말은 원래가 한자어로 오늘날에는 별로 쓰이지 않으며 차라리 족보 혹은 가계라는 말이 현대인에게는 더 알기가 쉽다. 우리가 자주 읽는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라(시 102:27)의 여상(如常)도 은근히 어려운 한자말이다. 차라리 '주는 언제나 한결같으시고'로 쓰였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행1:16)의 '지로(指路)'는 '길 안내'의 뜻이나 여기에서는 나쁜 의미로 쓰이는 '앞잡이'임이 분명하다.
백여년 전 처음으로 이 땅에 성경이 들어왔을 때는 순한문으로 쓰였으며 얼마 후에는 그 한문에 토를 달았고 그 다음에야 문장의 결을 우리 구문(柩文)으로 고쳐 썼으나 여전히 한자어로 꽉 차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 당시의 성경독자에게는 그 한자 혼용 성경이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 여기에서 어렵느니 쉽느니 하는 것은 말씀의 진리적 해득이나 기독교 교리의 신학적 이해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쓰여진 언어의 용어로서의 의미 파악의 난이를 말함은 물론이다.)
사서 삼경 등 동양의 경전이나 고전에 익숙했던 그들 또는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일반인에게는 '창세기의 그 만고미문의 내용에 다만 경탄했을 뿐 그 문장이나 언어의 어려움이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초대목사 서화선 간증) 하기야 '귀신의 소리' 보다는 '鬼의聲'이 '피 눈물'보다는 '血의 淚'라는 한문투의 소설 제목이 그들에게 더 자연스러웠던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오래 전에 교인이 아닌 어떤 노유생(老儒生)에게 신명기(申命記)는 '성경의 한 책명'이라고 했더니, 그분은 책이름만을 보아서는 명령을 거듭 당부하는 기록이겠지라고 놀랄 만큼 정곡을 찔러 말했다. 출애굽기에서 받은 계명을 신명기에서 다시 강조한 사실을 이 노인이 알 이가 없는데 말이다.
'申'자는 '거듭·되풀이'의 뜻이 있고 '命'은 '명령·계명'의 뜻이 있는 글자이니 그분의 말은 알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오늘의 신신당부라는 말도 바로 申申當咐의 한자어였다.
성경은 동서양의 다른 경서와는 달리 인류 구원의 메세지를 담고 있으므로 될수록 빨리 보급 전파되어야 했다. 그래서 많은 한자로 쓰여진 우리의 초대 성경이 오랜 햇수를 거치지 않고 순한글로도 발행되었다.
표의문자인 한자가 하등의 수정작업도 없이 바로 그대로 음표문자인 한글로 옮겨져 발간된 것이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 일이 이 땅에서 놀라운 큰 성공을 거둔 첫째 원인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백성들의 복음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컸다는데 있지마는 당시 한글 성경 독자들의 한어교양도 그 성공에 일조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글로 쓰여진 이조의 내방가사도그 안에는 수준 높은 한어귀(漢語句)가 많이 담아져 있다. 어쨌든 당시의 성경 독자들은 한글로 표기된 언어를 한자로 재생시킬 수 있는 한자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경독자들은 다르다.
한자인구는 급감소했고 이른바 한글세대는 인구의 절반을 넘었는데 우리가 지금 애독하고 있는 개역 성경전서 (개신교 각 교회 공용)는 36년 전에 간행된 것으로 여전히 한자어가 풍성하다. 다시 몇 절 더 예시하면 신명기 24:3절(지난 3월7일 밤예배 시에 봉독한 본)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의 '후부'는 한자의 '後夫'로 '둘째 남편'의 뜻이다.
또 마 15:2의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는 '장로들의 전하여 준 관습을 범하십니까'로 바꿔 쓴다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얼마나 쉽고 좋을까.
얼마전 어떤 젊은 교인이 "나는 성경에서 어려운 낱말을 만나면 곧장 영어성경에서 해답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는 세례요한의 단곡 식사 메뉴인 석청이 바로 들꿀이라는 것도 영어성경에서 알았다는 것이다. 영어성경의 Wild honey나 merchant라는 단어는 우리의 중학생들도 쉬 알 수 있는데, 정녕 우리성경의 석청이나 상고(창 223:16)는 우리의 대학생도 알기가 어렵다.
신학적인 이해나 성경의석의(釋義)상의 어려움이 아닌 언어의 국어적인 이해의 벽이 날로 높아져 간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성서가 날로 멀어져 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쉽게 앍을 수 있고 또 친근하고 품위 있는 현대어로 고쳐진 성경이 하루빨리 나오기를 고대한다. 근년에 새로 번역되어 나온 것 중에는 매우 좋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이 소속 교단이나 교회의 정통성을 해치지 않는 한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 드려야한다.
보수의 벽을 허는 아픔은 참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그것도 민족의 고유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새로 나온 변역에 대한 비판은 좋으나 그것이 더러는 소속 교단의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수단으로 비쳐서는 곤란하다.
끝으로 젊은 성도들에게 성경의 한자 읽기 학습을 권한다. 국한문 성경을 한글 성경과 나란히 펴놓고 읽어 나가면, 이미 말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으므로 앞뒤 문맥으로 미루어서도 그 음을 알 수 있는 말이 많다.
그래도 안되면 한글 성경으로 해결한다. 처음에는 다소 힘들고 진도도 느릴 것이나 쉬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말씀의 한자어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한자는 가까이하면 다가오고 피하면 달아난다.
그 학습에 투여된 시간과 노력은 반드시 풍요롭게 보상받게 될 것이다. 한자라는 표의 문지가 갖고 있는 그 언어 기능의 우수성은 놀라운 학습효과를 나타낼 것으로 확신한다. 잠언이 아닌 (箴言)은 단순히 짧은 교훈의 말씀이 아니라 잠자는 인간의 심령을 바늘같이 또는 침같이 따끔하게 찔러 일깨워 주는 교훈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성경에 쓰여진 언어(言語)의 이해로서만 읽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언어의 올바른 이해는 진리에 접근하는 필수적인 기본과정임에는 틀림이 없다.
http://www.namsan.org/namsanji/138/138-2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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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한글전용에 따른 문제입니다..
수천년간 이어져온 언어생활속의 한자어를 한글로만 표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문제였지요.
수천년의 언어생활이 수십년만에 바뀔수도 없고 쉽게 바뀌어서도 안되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한글전용을 강제한다는 것은 불합리하지요.
한글과 한자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수천년간 조상들이 써온 한자...그렇게 쉽게 순식간에 버리면 안됩니다.
그리고 한자문맹...자랑이 아닙니다.
나중에 큰코 다칩니다...
아래는 국한자혼용, 국한문혼용으로 번역된 성경파일(한글파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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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한혼용성경.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