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은 결코 독립의 상징이 아니다
「독립문」과 서재필
"쌀 등 기초 농산물을 지키는 일은 민족주권을 지키는 제2의 민족운동입니다."
농산물 수입 개방 압력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함성이 드높았던 지난 1993년 서울의 한켠에서는 이색적인 시위가 있었다. 정확히는 1993년 12월 13일 오후 2시 20분경 서울 서대문구 현지동 독립문 꼭대기에서의 시위다.
전국농계대학 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 18명이 독립문에 올라가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쌀개방 반대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1890년대 열강의 침략 야욕에 맞서 자주, 민권, 자강의 의지를 다지며 세운 주권 수호의 상징인 독립문에서 시위를 벌임으로써 그들의 의지를 좀 더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이려는 몸짓이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독립문이 그리 자랑스러운 배경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아니 오히려 부끄러운 문화 유산이라면? 우리의 동료들은 엉뚱한 곳에 힘들게 올라가서 엉뚱한 주장을 한 것이 된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이들이 내세운 제2의 독립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 된다.
"약 90년 전 한일 합방에 압장 섰던 매판 관료들이 주장한 조선의 근대화는 결국 우리 민족의 노예화와 굴종만을 가져 왔습니다. 지금의 개방과 국제화라는 구호는 다시 한 버 민족을 예속과 굴종에 빠뜨릴 것입니다."
이 땅의 앞날을 걱정하는 젊은 대학생들의 의기만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잘못된 근대화, 왜곡된 개화를 더욱 큰 목소리로 주장한 이들이 독립협회라면? 우리가 배워온 모든 것은 뒤틀려지기 시작한다.
방곡령! 입시에 자주 출제되는 빈도 높은 문제로 낯익은 방곡령 사건은 오늘의 쌀 수입 개방 문제를 비춰보는 거울이 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방곡령은 1889년 이 땅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행한 곡물의 해외수출 금지령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게 개항한 이래 일본 상인들은 우리 농촌에 침투하여 갖은 방법으로 쌀, 콩 등을 매점, 제나라로 보내는 바람에 이 땅에 식량난을 더욱 부채질 하게 되었다.
이에 곡물 수출항인 원산을 관장하던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선생은 1888년 9월 원산항을 통해 해외로 유출되는 곡식의 수출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그 결과 조선과 일본 두나라 사이에는 분규가 일어나게 되고,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정부에서는 조병식 선생에게 방곡령 해제를 명한다. 그러나 조병식 선생은 방곡령을 더욱 강력하게 시행했고. 결국 강원도 관찰사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 전부는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방곡령 문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쓰러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회복하고자 한 조병식 선생은 조선의 으뜸가는 애국자로 뽑힌다. 그렇다면 자주독립의 상징 독립문과 관련된 『독립신문』은 방곡령을 어떻게 보았을까?
당연히 방곡령을 지지했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가 배운 대로 『독립신문』이 애국애민하는 신문이라면.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바램에 지나지 않는다. 『독립신문』은 방곡령과 그것을 시행한 조병식 선쟁을 비난하는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독립'의 의미는 청나라로부터 독립,
일본에 붙자는 속뜻을 가지고 있었다.
1896년 12월 15일자 『독립신문』을 들춰본다.
「함경감사하며 곡식 출구 하는 것이 외국 약조에 어기는 줄도 모르고 막다가 조선 정부에서 일본 정부에 배상 9만원을 물게 하고, 근일에 장례원경을 하고 또 지금은 법무대신을 하며, 의정부 찬정을 하였으니 사람을 많이 죽이고 도둑질을 많이 하고 외국 약조를 어기어 정부를 시켜 배상을 물리게 하면, 아마 정부안에 높은 관원들이 되는 풍속인가 보니 조선은 아무리 하여도 야만국이라는 소리는 면치 못할네라.」
이처럼 악의 적인 비방을 서슴치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애국신문으로 배우는 『독립신문』이다.
방곡령을 실시한 조병식 선생을 비난하기에 앞서 약탈에 가까운 곡물유출을 한 일본을 먼저 비난했어야 하는 것이 애국 신문(?)
의 자세가 아니었을까? 극심한 가뭄으로 굶어 죽어가는 민중에 대해서는 『독립신문』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또한 그들의 표현대로 야만국 조선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1백년전 이 땅에서는 쌀 수출 문제를 두고 개방과 금지주장이 서로 맞섰다. 그 뒤 1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쌀 수입문제를 두고 개방과 반대가 맞서고 있다. 수출과 수입만이 다를 뿐 무엇이 진정으로 민중을 살리는 애국의 길인가는 불을 보듯 명확하다.
독립문에 올라가 쌀 개방 시위를 하는 아리송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에는 독립문이 지닌 독립이라는 말에 너무 현혹되어 있었던 결과이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독립문, 『독립신문』, 독립협회의 '독립'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제(외세)
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때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일본에 붙자는 속뜻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의 임금이 버젓이 있었고, 조선국이라는 국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독립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1890년대의 '독립'과 1910년 이후의 '독립'은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르지만 독립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쉽사리 구분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독립운동 탄압의 현장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는 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바로 옆에는 독립문이 서 있어 독립의 의미를 구분하는데 더욱 혼란을 준다. 아니 이제는 분간조차 불가능해진 것 같다.
독립협회는 애국 단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독립'을 거론 할 때 독립문을 그 상징으로 내세워왔다. 그리고 고종이 종묘에서 올린 들을 이야기 한다. '독립'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 글이 바로 종묘에 올린 고유뮨(告由文)
이다.
이 일을 두고 '고종 임금께서 왕세자를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서고(誓告)
함으로써 청나라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국임을 안팎에 선명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들이다. 5백 년 묵은 청과의 관계를청산했다는 자랑스런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나무만 보았지 숲은 보지 못한 결과이다.
이 글의 전체적인 뜻은 '청국의 붓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확실히 자주 독립하는 긔업을 세우는일'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청국에 대한 독립선언서'가 된다. 여기까지는 별반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조금 더 살펴보면 야릇한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수 있다.
고종이 올린 고유문에는 '우방충(友邦忠)'이란 글이 들어 있다. 이웃 나라(일본)
의 도움을 입고서 청국과의 관계를 끊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종이 종묘에서 올린 내용들을 살피면 '독립'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종이 올린 첫째내용이 '임금권리를 내어 놓겠습니다' 는 것이었다. 독립 선언을 해놓고는 '왕권을 포기하겠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서고(誓告)
를 한 것이다. 당연히 이 고유문은 일제의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여기까지 살피지 못했나 궁금하기만 하다. 독립선언을 했다는 사실만 알고 어떤 내용으로 했는지는 알지 못함으로써 생긴 아둔은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세들이 그대로 답습하는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다. 려중동 선생에 의하면 고종시대에 독립이라는 말은 모두 여섯 곳에서 찾아볼수 있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종이 종묘에서 올린 글에 처음으로 나타나있다. 두 번째는 내무아문령의 '아국가(我國家)의 독립 자주하는 기업(基業)으로 종묘(宗廟)에 서고(誓告)
하시며......'라는 글귀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 글귀의 뜻은 '우리 조선이 청국와 인연을 끊고 종묘에서 독립을 선언했는데도 나쁜 무리들이 청국을 그리워 하고 있다'라는 내용이다. 종묘에서 서고한 내용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살핀 것과 같이 진정한 독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세 번째로는 『독립신문』이라는 신문이름이다. 네 번째로『독립신문』에 실린 '독립노래'라는 노래 이름이다. 다섯 번째로 '독립협회'라는 단체 이름. 여섯번째로 독립협회에서 세운 독립문이라는 문 이름에서 '독립'이라는 말을 찾아 볼 수있다.
『독립신문』. 독립문은 모두 독립협회에서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독립협회를 통해 살핀다면 '독립'에 대한 내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추진했고, 또 그로 인해 우리가 추앙해 마지않는 서재필도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주장한 '독립'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가 배워 온 역사 상식으로는 독립협회는 외국 의존을 반대하는 애국자들이 모여 나라의 자주 독립을 표방하여 결성한 것으로 알고있다. 그 애국자들은 서재필을 비롯하여 이상재,주시경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주도했다고 국사책에는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독립협회 구성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간판격으로 내세우는 이상재, 주시경선생을 빼고 나면 거의 모조리 친일 인사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896년 독립협회가 조직될 당시 구성원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고문에 필립(서재필)
, 회장에 안경수, 우원장에 이완용, 위원에 김가진,김종한,민상호,이근호,이채연,권재형,현홍택,이상재 등이었다. 1895년에는 이완용이 회장이 되고 부회장으로 윤치호가 등장한다. 그해 5월 부회장 윤치호는 독립협회 회장이 된다.
거의 모든 이들이 한눈에 친일 세력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친일행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쌍벽을 이룬 윤치호와 이완이 모두 독립협회를 대표하는 회장 출신이다. 이들이 독립협회 시절에는 애국자들이었다는 억지를 부리지는 말자. 한일병합이 있은지 열흘 뒤 일본은 조선 침략에 공이 큰 자들에게 돈과 귀족작위를 주었다. 일본의 은전을 받은 독립협회의 회원은 김가진, 안경수, 이완용, 김종한,민상호,이근호 등이었다.
거의 모든 독립협회 간부들이 일본의 합방공신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독립협회의 성격을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윤치호는 그 아비 윤웅렬이 남작을 받음으로써 일단 보류되었으나 결국은 일본 귀족원 위원으로 뽑히게 된다. 윤치호는 17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지사(同志社)
에 입학, 경응의숙 총장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도를 받았다. 일찍부터 친일인물로 길러 지고 있었던 것이다.
윤치호는 1898년 한 가지 흥미있는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에에게 독립문을 새긴 은찻잔을 선물한 것이다. 서울을 방문한 이토히로부미는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만나고자 했고, 윤치호는 일본 요리점 국취루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잔치를 베풀었다. 사건은 그 다음에 벌어지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떠나는날 윤치호는 독립문을 새긴 은찻잔을 만들어 선물을 준것이다. 이른바 '독립문 은찻잔'을 선물로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의 사진을 건네 준다. 이런 행위는 비단 윤치호 개인의 친일행위로 치부될 수만은 없다. 그는 독립협회의회장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던 것이다.
서재필은 순수한 조선인임을 스스로 거부했다.
고종 35년 『독립신문』논설에는 '이토히로부미 씨는 당금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대한독립한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 유람차로오니, 정부와 인민에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신문』의 논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독립신문』의 논조는 독립협회가 가진 인식이라고 봐도 별반 무리가 없을 것이다. 『독립신문』이 독립협회의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독립협회가 가진 인식은 '조선은 일본의 승리로 독립이 되었고, 우리는 이에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운 것도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있다. 독립문이 결코 민족의자주 독립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뒷반침하는 자료는 더 있다. 의병항쟁 유적지를 누비며 다닌 이태룡 선생의 『의병 찾아가는 길』에서도 독립문이 세워진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홍주 의병의 정신적 지주 지산 김복한 선생이 일제에 체표되어 일본인 니와 켄다로에게 심문을 받은적이 있다.
조선 사람들이 국권을 잃어버린 것을 통탄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당초에 독립문을 세우게 한 것은 누구의 공인가? 정치가 해이하여 자력으로 지키지 못할 때에는 반즈시 러시아 사람에게 빼앗기게 됨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와서 한국을 지켜 교육시키고 발달시켜거 족히 국권을 회복할 만하게 되면 당영히 도로 내주고 돌아갈 것이다.
궤변을 늘어놓은 일본인에게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립문을 세워 주지 말고 국권이나 빼앗지 말았으면 어찌 좋지 않겟느냐. 만약, 과연 도로 내어주는 알이 있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부끄러워 죽을 일이나 지금 보는 바로는 반드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
당시에 애국 지사들은 이미 독립문의 허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제 치하이던 1928년 독립문의 기초가 내려앉을 위험이 있어 조선총독부에서는 공사비 4천원을 들여 수리 하였다는 사실도 독립문에 대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서 독립문 쪽으로 내려다 보면 먼저 눈에 뛰는 것이 3·1독립선언 기념탑이다. 본래 탑골공원에 있었다가 1979년 공원 정비사업때 철거되었던 것을 각계이 복원 건의에 다라 1992년 이곳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 탑 아래로 오른손에는 『독립신문』을 들고 선 서재필 동상의 뒷모습이 보인다. 독립문을 바라보고 서 있다. 동상아래에는 한 면에 『독립신문』창간호 다른 한 면에 서재필을 기리는 명문이 대리석에 각인 되어 있다.
「조국의 자주 독립과 민주 개화 운동의 위대한 용장이며 우리 민간신문의 시조인『독립신문』의 창간 은인에 관함 공적을 간추려 명문에 대신한다.」
위대한 만족의 선각자라 일컬어지는 서재필에 대한 추앙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그는 분명 다시 봐야 할 인물이다.
1994년 4월 서재필의 유해는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귀환햇다. 이를 계기로 언론은 개화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온통 장식되었다. 그러나 '애국 지사 서재필 유해 봉송'은 서재필이 살아 있었다면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순수한 조선인임을 스스로 팽개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는 18세 때 가지만 서재필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 군대를 이끌고 7명의 대신을 칼로 찔러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명분은 독립에 걸었으나 실제는 대일 종속을 가속화 시킨 불장난에 불과했다. 갑신정변으로 알려진 이 사건이 실패한 후 서재필은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탈출한다.
여기까지 그가 서재필로 살아온 날들이었다. 이후로는 철저히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다. 쿠데타가 실패한 후 일본으로 피했던 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 망명후 그는 스스로를 '필립 제이슨'이라 불렀고, 그렇게 불리기를 바랬다. 그가 만든 『독립신문』에서조차 서재필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재신 '피재손'이라는 미국인이 등장할 뿐이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일제에 팔아넘기려 했다.
필립은 조선 정부가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한 미국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영어로 말햇고, 대중 연설조차 영어로 하였다고 한다. 독립문 기공식 행사에서도 그는 미국인의 신분으로 영어로 연설했다. 기공식 행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 졌다.
①독립협회 회장 연설: 안경수
②독입을 영구 보존: 이채연(한성판윤)
③우리나라 장래: 이완용(외부대신)
④외국사람 연설 통역(조선말로)
: 필립 제이슨
상명여대 주진오 교수는 『역사비평』을 통해 서재필의 반 민족적인 행태를 꼬집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독립협회의 회장을 지낸 윤치호는 일기에 '서재필이 쓰거나 말하기 모두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점에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서재필은 신문 발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윤치호에게 번역 업무를 맡아 줄 것을 제안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영문판 논설을 썼을지 몰라도 국문판의 논설은 직접 쓰지 않앗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립은 철저히 미국인이 되고자 햇고 도 그렇게 살다 갔다. 주진오 교수의 글에 다르면 그가 조선 정부에 의해 추방될 당시 그는 출국을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귀국 정부가나를 필요없다고 하여 가는 것'이라 햇다고 한다. 그에게 잇어 조선은 '내 나라'가 아니라 '너희 나라'인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연합회를 개최하고 의장이 되었다. 하지만 회의 벽두에 애국가가 아닌 미국 국가를 부르게 하여 '미국은 한국인들이 조국 다음으로 사랑하는 나라'라는 태도를 보였다. 의장 취임사에서는 '만일 대회 진행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사임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서술대 규장각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이성찬 선생은 다음과 같이 필립늬 반 민족성을 꼬집는다.
「 철저한 미국인 이었던 필립 제이슨이 자기 사진이 남한의 국정교과서에 실려 있고, 또 한국인 서재필이 '귀국'했다고 씌어져 있는 것을 알면 아마도 통곡할 것이다. 부당한 대우에 펄펄 뛰면서 미국인 중추원 고문 필립 제이슨이 '입국'한 것으로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고쳐 달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해 온 『독립신문』을 일본인에게 팔아 넘기려 했던 사람이 바로 필립 제이슨이었다. 서재필은 조선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기 때문에 『독립신문』의 소유자가 아니다. 단지 경영권만을 가진 그가 『독립신문』을 팔아 치우려 했다는 사실도 말이 않되는데 일본인에게 팔아 치우려 햇다니 더더욱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독립신문』은 조선정부가 마련해 준 신문사 건물과 4천 4백원의 국고금으로 창간되었다. 신문 창설비 4천 4백원 안에는 시설비가 3천원이었고 1천 4백원이 필립이 거주할 집이었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나라의 재산이었던 것이다. 1898년 정부에서 필립을 추방하려하자 그는 2만 4천 4백원을 요구했다. 자신은 10년 계약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왔는데 아직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월급 2만 8천 2백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백원을 요구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의 요구대로 모두 들어주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망해가는 나라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애국자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매국노와 다를 바 없다.
필립은 미국에 들어갈 즈음에 『독립신문』의 소유권을 일본공사계약을 맻는 데 까지 이르렀지만 일본측이 이를 이행하지 않아 매각에 실패했다.
주진오 교수는 『역사비평』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일 조건만 맞으면 정부 재산으로 설립한 『독립신문』을 일본에 팡아 넘길 수도 있다는 서재필의 사고 방식일 것이다. 일본측이 이행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약속을 지켰더라면 『독립신문』은 일본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이런 그가 창간하고 주도한 『독립신문』의 논조가 애국적일 리 만무하다. 『독립신문』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독립'이라는 해괴한 이름뿐이다. 『독립신문』은 일본을 극구 칭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침략 정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의병을 비적이라 하고 조선을 철저히 비하하기를 서슴지 않은 것이 『독립신문』이었다. 대표적인 논설을 다음과 같다.
「일본서 두 해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조선 인민니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아니라.」
-고종 33년 6호『독립신문』논설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사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고종 34년114호『독립신문』논설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인용 할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고종 35년 별호 『독립신문』논설
이와 같은 신문이 어떻게 애국 신문으로 포장 되엇고, 그 창간일이 이 나라의 '신문의 날'로 기념되는가? 그리고 언제나 미국시민임을 자랑스러워 햇고 일본을지지하며 조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던 필립이 어떻게 '위대한 애국자'란 말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 규장각 연구원으로 있는 이상찬 선생은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햇다.
1945년 이후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 세력들이 자기들을 합리화 하려고 자기들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역사에서 증거를 찾았던 까닭이라고 믿고 싶다. 친미파의 뿌리이며 역사적 근거였던 서재필 아니 필립 제이슨. 그가 내세웠던 독립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이었고 일본이 이를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뭉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 봐야 한다.
독립문은 영은문이 기둥과 함꼐 나란히 서 있다. 그 앞을 대리석에 새긴 안내문이 있다.
「 독립문은 1898년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독립협회에서 세운 것으로 이곳에서 동남쪽 70미터 지점에 있던 것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이전공사는 1979년 12월 31일 완공하였으며 본래의 석재를 사용 , 옛모양 그대로 옮기고 독립문이 있던 옛 자리에는 독립문지라고 새겨진 표지판을 매설, 그 위치가 보존 되도록 하였다.」
국권을 상실하지 않은 시기의 독립이 가신 허상은 이제 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서재필이 신화도 수정되어야 한다.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한 학계의 충분한 영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 하나의 안내문을 더 세워 후세의 규범으로 삼자. 새로운 안내문은 대략 이런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립문은 1898년 청과의관계를 끊고 일본에 붙고자 하여 세운 것으로 이를 세운 독립협회는 매국적인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1백년 세월 동안 이런 사실들은 철저히 감추어져 왔고 독립문은 자랑스런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독립협회와 필립 제이슨은 애국자로 잘못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에 따라 훼의 규범을 세우고자 한다.」
- 이의제기 내용추가
- 2005.05.28 19:30 추가
- 잘못된 부분이 있었군요.
'조선 정부는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방곡령 문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른 분들도 이렇게 읽어 주셨으면 하네요.
출처 : [기타] 부끄러운 문화 답사기에서기록문학회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