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訓民正音' 관련 연구를 하여 韓國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外國人이 객관적 관점에서 말하는 내용을 실은 것이다. 그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글專用이나 國漢字混用과는 아무런 利害關係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다만 학자적 관점에서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데, 訓民正音 창제의 목적은 한글專用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또한 한글專用을 계속하면 韓國語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韓國語를 해친다고 진지하게 걱정한다.
내용이 전문적이라 여러분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訓民正音에 대해 眞理를 알고 싶다면 한 번 노력하여 읽어보기 바란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先入見을 버리고 냉철한 理性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기 바란다. 그러면 眞理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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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朝鮮 1999년 12월호, 李東昱, 인터뷰 /「한글창제 연구」 독일인 라이너 도멜스 박사,
『저승의 세종대왕은 한글전용을 개탄할 것』
인터뷰/「한글창제 연구」 독일인 라이너 도멜스 박사
『세종대왕은 한글전용을 위해 한글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한글전용은 漢字란 뿌리를 잘라버린 꽃다발입니다. 우선은 화려하게 보이겠지만 얼마 안가 시들어버리지요. 한글전용은 韓國語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것입니다』
독일의 「코리아 포럼」
지난 3월6일 오후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꽁지머리를 한 紅顔(홍안)의 독일인을 만났다. 도멜스(Rainer Dormels·43) 박사. 그는 15년 전 우연히 한국말의 매력에 끌려 한국말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한국어 박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1990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유학와 4년 뒤 국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독일로 돌아간 도멜스 석사는 웬만한 한국사람들도 잘 모르는 조선 세종 때의 「洪武正韻譯訓(홍무정운역훈)」을 연구, 함부르크대학에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박사논문을 끝낸 뒤인 1997년 12월, 독일에서 발행되는 「코리아 포럼」 겨울호를 통해 독일어로 쓰여진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지난 15년간 독일 내 한인사회와 독일 주민 사이를 잇는 가교역할을 해온 「코리아 포럼」은 지금까지 주로 한국 정치상황에 대한 한국 학자와 독일 학자들의 글을 많이 실어왔다.
이 잡지에 게재된 도멜스 박사의 논문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의 「동기」나 「목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국내외적 요인인 「자극」에 초점을 맞춰 연구한 글로서 주목된다. 그는 明(명)나라의 公式(공식) 韻書(운서)인 「洪武正韻(홍무정운)」과 이를 번역하여 세종 때 편찬한 「洪武正韻譯訓(홍무정운역훈)」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홍무정운」이란 운서는 元帝(원제)를 멸한 朱元璋(주원장·洪武帝라 칭함)이 국호를 明(명)이라 칭한 뒤 학자들을 동원해 몽골식 漢字(한자)발음표기법이 가미된 元代(원대)의 韻書(운서)를 폐지하고 明代(명대)의 표준적인 운서를 공포하기 위해 洪武 8년(1375년)에 간행한 책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韻書(운서)란 무엇인가. 韻書란 글자대로 해석하면 韻(운)을 모은 책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韻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文」의 경우 발음은 「문」이다. 기자가 쓴 「문」은 발음기호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가 없던 중국의 경우 한자의 음을 표시하기 위해서로 다른 두 한자의 음을 절반씩 따서 발음을 표기했다. 이를 反切式(반절식) 표기라 한다.
가령, 「文」의 발음을 표시할 때 「文 無分折」로 기록한다. 읽는 이들은 無의 초성인 「ㅁ」과 分의 中聲 및 終聲인 「ㅜㄴ」을 합쳐 읽도록 한다. 이때 聲(성)에 해당하는 것이 「ㅁ」音(음)이고 韻에 해당하는 것이 중성과 종성인 「ㅜㄴ」音이다. 결국 韻書란 韻을 중심으로 편찬한 한자 발음사전이란 의미이다. 고대 중국엔 206개의 韻이 있었으나 14세기에 와서는 76개로 간편화했다. 이를 토대로 만든 韻書는 科擧(과거) 응시생들에게 중요한 詩作(시작)의 典範(전범)이 되었다. 새로 창건된 왕조는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취지하에 韻書의 개편을 단행하곤 했다. 洪武帝(홍무제)의 「홍무정운」도 마찬가지이다.
세종은 1448년경 집현전 학자들을 통해 명나라의 韻書인 「홍무정운」에 한글로 音(음)을 표기한 「홍무정운역훈」을 편찬토록 했다.
『홍무정운역훈은 타협의 결과입니다. 홍무정운은 反切(반절)만 있고, 홍무정운역훈은 반절도 있고, 한글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홍무정운역훈의 音의 근거는 홍무정운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홍무정운역훈의 음을 한글로 표기했을 때 편찬자들이 홍무정운 이외에 고려시대에 즐겨 사용한 문서인 古今韻會擧要(고금운회거요)도 참고했습니다. 고금운회거요란 파스파 문자를 발음기호로 사용하여 한자(중국어)를 읽도록 표기한 蒙古韻略(몽고운략)을 참고한 책이지요』
碧眼(벽안)의 외국인이 우리나라 中世(중세) 국어학의 전문서적들을 줄줄이 나열하며 자신이 발견한 학문적 성취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연구과정에서 世宗大王(세종대왕)과 集賢殿(집현전) 학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더 들어보기로 했다.
파스파 문자
『홍무정운역훈이 편찬된 연도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건국(1368년)된 지 87년이나 지나 있을 때(1455년)였고, 1392년에 개국한 조선도 63년째 되던 해입니다.
명은 그 당시 이미 초강대국으로 동양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들과 국경을 맞대고 살아야 했던 조선도 국내적으로는 정치적인 안정기로 접어들 때였습니다. 강대국과 연접했던 조선으로서는 명나라의 정책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또 고려에서 朝鮮으로 국호가 바뀌고 왕조가 바뀌었지만 고려 6백년 동안 내려온 문화는 서민 사회 속에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는 점도 조선왕조로서는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말과 글이란 정권이 바뀐다고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거든요.
세종은 고려를 지배했던 몽골(元)의 한자발음 표기법이 조선의 지식사회에 지속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표음문자인 파스파 문자로 쓰여진 蒙古韻(몽고운)이 조선시대에도 알려졌다는 사실은 「홍무정운역훈」의 序文(서문)과 「四聲通攷(사성통고)」의 범례에서도 찾을 수 있고, 최세진(崔世珍·1478~1543)의 「四聲通解(사성통해)」도 「蒙古韻略(몽고운략)」으로부터 많은 인용을 했습니다. 「몽고운략」은 파스파 문자를 발음기호로 사용해서 한자를 읽을 수 있게 한 책입니다.
거슬러 올라가 몽골이 고려를 지배했던 무렵에 고려인들이 즐겨 보던 중국 한자의 韻書(운서)는 元(원)나라 때 黃公紹(황공소)가 지은 「古今韻會擧要(고금운회거요)」였습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도 인기 있는 책이었지요. 그렇다면 고려인들이나 조선인들이 「고금운회거요」의 音(음)을 읽을 때 무엇으로 읽었을까요. 표음문자 없이 표의문자를 읽는다는 것은 발음기호를 모르고 영어를 읽는 것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파스파 문자로 쓰여진 蒙古韻(몽고운)을 보조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금운회거요」는 「몽고운략」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조선시대 초기에도 파스파 문자로 쓰여진 발음서인 韻書가 중국어 학습시 공개적으로 혹은 비공개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파스파 문자는 元나라 世祖(세조)가 넓은 제국의 문자 통일을 위해 라마교 승려를 시켜 만들게 한 데서 유래한다. 파스파란 聖者(성자)란 뜻으로 중국의 자료에는 「八思巴」로 표기되고 있다. 웬만한 백과사전들을 보면 파스파 문자가 「몽골민족의 통치하에 있었던 여러 민족들은 1백여년 동안 이 문자를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문화유산 속에 파스파 문자를 사용해 제작된 책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고려시대 말엽이나 조선시대에 파스파 문자를 사용해 만든 책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책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발음기호가 있다고 해서 발음기호로 책을 만들 수 없지 않습니까. 고려인이나 조선인이 파스파 문자로 된 발음기호를 애용했다는 뜻입니다』
―훈민정음이 파스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란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世宗(세종)도 중국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틀에 한 번씩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世宗도 파스파 문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에게는 파스파 문자가 하나의 고민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파스파 문자로 된 책을 중국어 학습시간에 사용하면 곤란했겠지요.
한편, 발음을 가르치는 문자가 없으면 어떻게 외국사람으로서 중국말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파스파 문자로 된 책을 代替(대체)하는 길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훈민정음은 파스파 문자의 대체물입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대신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봅니다. 고려 때부터 전수된 「몽고운략」에는 분명 중국 한자음을 표기하는 파스파 문자가 있었습니다. 세종 때는 이미 중앙집권제가 안정기로 접어들 때였습니다. 민족의식에도 상당히 눈을 떴을 때이지요. 억압자 몽골로부터 물려 받은 문자를 사용한다는 데 대한 수치심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의식이나 對明事大主義(대명사대주의)에 치우쳐 실용적인 표음문자를 단순히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종은 고유전통 속에서 찾을 수 있던 실용성과 당시 新(신)문화였던 유교의 명분론과의 충돌을 피하고 타협시켰다고 봅니다』
세종대왕의 위대성:실용과 명분의 조화
―국내 국어학계에서도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했다는 일부 가설이 있는데 도멜스 박사는 이런 주장을 인정하십니까.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언뜻 유사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지만 세종대왕이나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어떻게 하면 파스파 문자와 다르게 문자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봅니다. 파스파 문자는 원나라의 것으로 명나라에서는 철저히 없애버린 오랑캐 나라의 글자입니다. 없애려는 글자를 의도적으로 모방하겠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상정됩니다. 조선 고유의 말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의 현실적 필요성, 조선의 한자음을 표준화할 필요성, 유교 사상과 王命(왕명)을 쉽게 보급하는 유용한 수단으로서의 필요성 등이죠. 그런데 도멜스 박사는 마치 한글이 한자를 읽기 위해 사용했던 파스파 문자의 대치로만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건 절대 아닙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그 동기가 반드시 한 가지뿐만은 아니겠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 고유의 말을 표기할 문자의 필요성도 분명 있었습니다. 제가 착목한 것은 동기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 세종 때 한글창제를 하도록 했는가라는 점입니다. 제 견해로는 세종 당시의 상황이 중국 한자음을 표기하는 새로운 수단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시기라는 점입니다』
―절박한 시기라면?
『국내정치가 안정될수록 중국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때였습니다. 대외관계가 군대가 아닌 외교로 유지되던 시절에는 통역관들의 정확한 말과 글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明나라가 간행한 「홍무정운」은 공식적인 韻書로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었지만 간행된 후 이 책이 갖고 있는 결함들이 많이 발견됐습니다. 실제 사용되는 중국 발음과 다른 방언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것으로 통역관이나 외교관들을 양성했다가는 곤란하다는 것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고 봅니다.
명분론적으로는 당연히 「홍무정운」을 받아 들여야 하지만 중국에서조차 실용성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게다가 元나라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고려말을 거쳐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어 온 「고금운회거요」는 실제 중국 발음과 흡사한 면이 강했습니다. 명분론적으로는 고려할 가치가 없었지만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이것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세종때 만든 「홍무정운역훈」은 명나라의 「홍무정운」과 고려 때의 「고금운회거요」의 각각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참고하여 체계화한 책입니다. 전통과 혁신을 타협하려는 정신이 바로 「홍무정운역훈」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정신은 훈민정음의 창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통과 혁신을 타협하려는 세종대왕 시절의 시대정신이 「홍무정운역훈」과 「훈민정음」 이외에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까?
『당시 집권층 속에서는 전통에 대한 보존을 주장하는 세력과 혁신을 주장하는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法典(법전)인 「經國大典(경국대전)」은 전통과 혁신이 어떻게 타협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鄭麟趾(정인지), 崔恒(최항), 申叔舟(신숙주)와 같은 세종 시대의 음운론적 업적에 참여한 集賢殿(집현전) 학자들이 「경국대전」 편찬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잖습니까. 훈민정음의 창제에서도 이와 같은 타협의 정신은 발견되고 있는 겁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전용 반대했을 것』
도멜스 박사에 의하면 세종대왕을 존경해야 하는 이유는 한글 전용의 기회를 만들어 준 점 때문이 아니라 우리 고유 전통과 새 潮流(조류)인 유교적 개혁을 융합시키면서 중국과 다른 나라의 音韻學(음운학)을 참고하여 독자적인 한국적 음운학을 개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1945년의 해방은 조선조의 개국과 비슷한 점도 있다. 해방 직후 일제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했듯이 조선도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해방 후 우리는 일제의 잔재청산에 치우친 나머지 한글전용이란 극단적 처방을 택해왔다. 한글이 폐지되고 한자와 일본어만 통용된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을 맞았을 때 세종대왕의 고민과 같은 수준의 고민을 위정자들이 했더라면 한자의 표기가 유효적절한 선에서 한글과 어우러졌을 터이다. 正(정·한자전용)의 시대와 反(반·한글전용)의 시대를 거쳐 우리는 이제야 合(합·漢字倂記)의 시대로 가는 중이다.
도멜스 박사는 『한국에서 한자혼용론자와 한글전용론자 간의 대립을 잘 알고 있다』면서 『그래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부언했다.
―세종대왕은 한글 전용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요.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당시 기록된 문헌들을 보아도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세종대왕은 한글 전용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것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은 한자를 잘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 분이지 한자를 반대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분들이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데모를 했더군요. 앞 뒤가 안맞는 이야기입니다』
―한자 倂記(병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야죠. 한국 사회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한자를 쓰면 「보수적」이고 순한글을 쓰면 「진보적」이란 오해입니다. 세종대왕 당시 진보적인 조류는 對明事大主義(대명사대주의)였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도 치우치지 않고 명분과 실리를 종합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세종대왕이 살아 계시다면 한글 전용에 반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언어학의 大家(대가)이기도 했던 세종대왕 스스로가 한글 전용으로 된 책들을 높게 평가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이 공문서와 도로표지판부터 한자倂記(병기)를 하도록 결정했다는 데 이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외국인으로서 한국학, 그것도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한자를 쓸 수밖에 없는 한국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 사람들은 너무 순수한 것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독일어도 분석해 보면 여러 언어群(군)으로부터 영향받아 왔고 지금도 불편없이 잘 쓰고 있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못난 민족이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동양문화권이니까 영어가 아닌 중국 글자인 한자를 유용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현명한 태도라고 봅니다. 일본이 한자를 그토록 많이 쓰지만 서양에서 비웃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이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외국인으로서 한국 사람들에게 한자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양 관광객의 눈으로 보면 한국의 초가집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초가집을 보고 감탄하는 관광객이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들을 안타깝게 여긴다고 한국인들이 오해하면 곤란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한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서양의 보통사람들이 볼때 한자는 심오하게 느껴질 겁니다. 그들은 한자를 중국의 소유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중국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문자라고 보는 겁니다』
그는 1984년 말부터 독일에서 한국어를 공부해 왔다. 1990년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로 유학와 석사과정을 밟는 과정에서 숱한 「한국어 책」을 읽어야 했다. 외국인으로서 한국 서적을 접할 때 한자혼용된 책과 한글전용으로 된 책 중 어느 쪽이 더 편리할까. 도멜스 박사는 『한글로 된 책은 너무 어렵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글전용은 뿌리 없는 꽃다발…』
『한자가 포함된 책을 읽으면 主題語(주제어)를 금방 찾아낼 수 있어 중요한 부분만 읽어도 쉽게 내용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한글로만 표기된 책은 주제어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문장 하나 하나가 한자를 포함했을 때 의미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데 반해 한글로만 된 책은 빨리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있어요』
―한글 전용론자들은 한자어라도 한글로 표기하면 문맥을 통해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복수」라는 단어를 보면, 단어만으로는 「復讐」 「複數」, 「腹水」도 있고 「福壽」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 속에서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안다는 겁니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이런 주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제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렇겠지만, 한글로만 된 책은 同音異義語(동음이의어)가 너무 많아요. 현미경을 통해서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초점이 정확하게 맞질 않아서 뿌옇게 보이는 것과 같아요. 얼마나 답답한지 한국사람은 모를 겁니다. 저같은 외국인은 몇 번씩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고통스러움이 있습니다. 한자가 함께 나오는 책들은 한 번 읽어도 또렷하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요. 초점이 맞는 현미경으로 보는 것과 같지요』
―그럼에도 지금처럼 한글전용을 계속한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틀림없이 한국어는 약해질 것입니다. 한국어의 70%는 한자입니다. 한자로 표기하지 않으면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글자들입니다. 나도 한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한글이 아름다워서 한글만 쓴다면 곤란할 겁니다. 말과 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식을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꽃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뿌리를 잘라버린 꽃다발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기는 해도 며칠 못가서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꽃을 상대방에게 줄 때 뿌리째 준다면 꽃을 받은 사람은 이 꽃을 심어 가꿀 수가 있지요. 한자는 한글의 뿌리이니까, 자르지 않고 서로가 주고 받는다면 한국어는 더욱 아름답게 번성할 것입니다』
―하지만 3천 자나 되는 글자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잖습니까.
『물론 많이 걸리겠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그 길이 빠른 길입니다. 처음 배울 때는 시간이 걸리지만 배우고 나면 한자가 표기된 책을 읽고 이해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이 얼마나 큽니까.
조급성 때문에 단기적으로 빨리 익힐 수 있는 한글만 배우면 학습하는 과정에서야 시간과 노력이 그만큼 작게 들지요. 하지만 그 후부터 책을 읽을 때마다 두고 두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한자를 익히면 외국어 학습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독일에도 외국인들이 많아요. 한국 교포와 터키 교포들이 2세를 낳아 기르고 있지요. 독일에서 교사생활을 해 본 경험에 의하면 외국어를 배울 때는 모국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모국어의 학습능력은 언어능력과 연결되고 나아가 사고의 발달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모국어 학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교포 2세들은 독일어를 배우는 데 더디고 한계가 있어요.
한국 사람들의 경우 한자를 많이 외우면 모국어와 같은 개념으로 언어능력이 발달하고 思考의 확장이 가능해지겠지요. 이런 상태에서 영어나 독일어를 배우면 당연히 쉽게 익힐 수 있습니다』
『한글만큼 재미있는 글자 없어요』
1957년 독일 힌스벡에서 태어난 도멜스 박사는 1987년 쾰른 대학을 졸업(지리학 전공)했다. 학부시절에 함께 공부하던 한국 학생들이 도멜스씨에게 써 보인 한글 이름에 매료되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때 한글을 보니 일본어처럼 복잡하게 뱅글뱅글 돌아가지 않고 각을 이루면서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는 글자들이 참 쉽게 보였지요. 3~4주 만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漢字도 읽어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한글은 배우지 않았을 겁니다. 나중에 어쩔 수 없이 한자를 배워야 했는데 하면 할수록 한자 공부도 나름의 맛이 있더군요』
학부를 졸업한 뒤인 1987년 봄에 약 5개월 가량 한국을 방문했다.
『여행이기도 했고, 제 장래를 위한 모색이기도 했어요. 어떻게 계속 한국 지리학을 연구할 수는 없을까. 그게 아니라면 한국 언어를 연구하는 쪽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이런 물음들을 배낭과 함께 짊어지고 한국 땅을 헤매다 돌아갔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1990년에 한국의 문교부에서 제공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 봄, 서울대학교 언어연구원에서 한국어 훈련을 거친 뒤 가을학기부터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정식으로 등록한 그는 꼬박 3년 동안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때 그는 현대 옥편과 조선시대의 옥편에서 표기된 漢字 발음 표기의 차이에 관심을 갖게 되어 석사학위 논문을 「玉編類(옥편류) 한자음 비교연구(1994년)」로 완성했다.
석사학위를 마친 그는 1994년 봄 독일로 귀국해 한국학 박사논문을 쓰기 시작해 1997년에 함부르크대학에서 「홍무정운역훈」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료수집과 연구차 2년간 한국에 머물던 중 외국어 학원 강사 崔誠恩(최성은·29)씨와 결혼해 현재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살고 있다. 뒤스부르크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한국경제와 관련한 인터넷 시스템을 구축하며 교수자격 논문을 준비하다 최근에 한국을 방문한 그는 인터뷰를 끝낸 이틀 뒤 사진촬영차 덕수궁에서 기자와 다시 한번 만났다. 세종대왕 동상 아래서 기자와 헤어질 때 그는 이런 말을 남겨 놓았다.
『한글은 音價(음가)가 무척 논리적이어서 쉽게 읽어 갈 수 있지요. 한자는 뜻을 정확히 알 수 있고 보기에도 재미가 있습니다. 두 문자의 장점을 취합한다는 것이 바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