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外來語 表記法’을 고쳐야 한다 (上)-金昌辰
金昌辰(草堂大 교수. 韓國語 바르고 아름답게 말하기 運動本部 事務局長)
1. 現行 ‘外來語 表記法’은 意味 傳達을 抛棄한 엉터리다
‘現地 原音’을 따라 적어야 한다는 우리나라 ‘外來語 表記法’은 잘못되었다. 그 첫째 번 이유는 모든 언어생활은 ‘意味 傳達’에 重點을 두어야 하는데, 현행 ‘外來語 表記法’은 ‘소리’에 重點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言語는 말을 할 때는 ‘소리’를 통해, 글을 적을 때는 ‘글자’를 통해 표현된다. 하지만 그 目的은 ‘소리’와 ‘글자’에 있는 게 아니다. ‘소리’와 ‘글자’를 통해 ‘意味’를 傳達하자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외래어를 적을 때 ‘現地 原音’을 원칙으로 하여 적으면 어떻게 되는가?
‘現地 原音’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은 곧 외래어 표기에서 ‘소리’에 중점을 둔다는 뜻이다. 그런데 ‘외국어’는 우리말과 달라서 ‘소리’에 중점을 두면 ‘의미 전달’은 失敗한다. 우리말은 ‘소리’가 곧 ‘의미 전달’로 直結된다. 예를 들어 “光州”라는 글자를 보거나 [광주]라는 소리를 들으면 곧 “光州廣域市”를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우리말에서는 ‘소리’와 ‘의미 전달’이 일치한다. 하지만 외국어는 다르다. 외래어 표기에서 그 ‘소리’에 중점을 두면 ‘의미’ 전달은 불가능해진다.
몇 개의 보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지린성, 옌지, 후진타오”,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자주 보게 되는 중국의 고유명사다. 그런데 그런 글자를 보고 혹은 그걸 소리로 듣고 “吉林省”, “延吉”, “胡錦濤”라는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또 “고이즈미 준이치로‘, “후쿠다 야스오”, “하코다테”도 자주 신문에서 보는 일본의 고유명사다. 그런데 그런 글자를 보고 혹은 그걸 소리로 듣고 “小泉純一郞”, “福田康夫”, “函館”라는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 한국인이 중국말의 발음(‘현지 원음’)이나 일본말의 발음(“현지 원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모르는 ’현지 원음‘을 적어놓았으니, 그 ’현지 원음‘을 통해 의미를 전달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소리= 의미“라는 공식이 외국어에서는 깨지는 것이다.
이러므로 ‘외래어’를 ‘현지 원음’이라는 외국어 발음 위주로 적는 방식은 언어의 목적인 ‘의미 전달’을 포기하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언어의 목적을 喪失한 외래어 표기법은 非正常的인 엉터리 법이다. 따라서 잘못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하루라도 빨리 고쳐야 마땅하다.
2. ‘外來語’ 發音은 ‘外國語’ ‘現地 原音’과 다르다
우리나라 ‘외래어 표기법’이 잘못된 둘째 번 이유는 이 법은 ‘外來語 表記法’이 아니라 ‘外國語 表記法’이기 때문이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원칙으로 삼은 ‘現地 原音’은 곧 외국 땅에서 외국인이 말하는 ‘外國語’ 발음이다. 따라서 그러한 외국어 발음을 그대로 적는 표기법은 ‘外國語 表記法’이지 ‘外來語 表記法’이 아니다.
‘外來語’ 발음이란 自國語化한 발음이다. 그러므로 ‘外來語’는 ‘現地 原音’과는 달라진 발음이다. 생각해 보자. 外國의 現地에서 外國人들이 하는 말 그대로는 그게 ‘外國語’지 무슨 한국인이 쓰는 ‘外來語’인가? 예를 들어 ‘레이디오’는 ‘외국어’지 무슨 ‘외래어’인가? 한국어처럼 변한 ‘라디오’나 ‘나지오’가 ‘외래어’인 것이다. ‘타바코’는 ‘외국어’고 ‘담배’는 ‘외래어’며, ‘구쓰’는 ‘외국어’고 ‘구두’는 ‘외래어’며, ‘자장미엔’은 ‘외국어’고 ‘짜장면’은 ‘외래어’인 것이다.
‘外來語’가 왜 생기는가? ‘外國語’를 ‘現地 原音’대로 발음하지 못하니까 달리 발음하게 되어 ‘外來語’가 된다. 왜 ‘外國語’를 ‘現地 原音’대로 발음하지 못하는가? 각 나라 언중은 자국어의 발음에 맞게 입의 구조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곧 母國語와 外國語의 발음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외국어를 ‘현지 원음’처럼 발음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서 ‘현지 원음’의 ‘외국어’와 다른 자국어화한 ‘외래어’가 생겨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본다. 유럽의 ‘카이사르’를 미국인은 ‘시저’라 부른다. 미국인에게 ‘카이사르’는 ‘현지 원음’의 ‘외국어’고 ‘시저’는 자국어화한 ‘외래어’다. 그러면 미국의 신문․ 방송은 ‘외국어’와 ‘외래어’ 중 어느 것을 적고 말할까? 당연히 ‘현지 원음’과 다른, 자국어화한 ‘외래어’를 적고 말한다. 이런 이치로, 미국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저스 크라이스트’로, ‘플라톤’을 ‘ 플레이토우’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애러스타틀’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어거스틴’으로, ‘괴테’를 ‘거터’로, ‘미켈란젤로’를 ‘마이클안젤로’로, '장 가뱅'을 ‘존 개빈’으로, ‘뉘른베르크’를 ‘뉴어럼버그’로, ‘프랑스’를 ‘프랜스’로, ‘빠리’를 ‘패리스’로, ‘로마’를 ‘로움’으로, ‘피렌체’를 ‘플로런스’로, ‘빈’을 ‘비에너’로, ‘아테네’를 ‘애신즈’로, ‘미케네’를 ‘마이시니’로 말한다. 앞의 것들이 ‘현지 원음’의 ‘외국어’고 뒤의 것들이 자국어화한 ‘외래어’다. 이처럼 미국은 외래어를 ‘현지 원음 위주’로 적는 게 아니라 ‘자국어 중심’으로 적는다.
알다시피 西洋 文字들은 대부분 로마자에서 分化되어 나왔으므로 綴字가 비슷하다. 하지만 發音은 나라나 민족마다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면, ‘요한’이 다른 나라에서는 ‘존’으로, ‘요셉’이 ‘조세프’로, ‘바오로’는 ‘바울’로, ‘앙리’는 ‘헨리’로, ‘빌립보’는 ‘필립’으로 바뀌는 것은 우리도 다 잘 아는 일이다. 우리나라 國號도 그렇다. 영어․ 독일어․ 네델란드어는 Korea로, 프랑스어는 Coree로,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는 Corea로, 포르투갈어는 Coreia로, 일본어는 韓國[Kankoku]으로, 중국어는 韓國[Hanguo]으로 모두 적기도 조금씩 다르게 적고 발음도 각기 조금씩 다르게 한다. 우리나라 국호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이지만 ‘현지 원음’으로 적고 불러주는 나라는 전 지구상에 단 한 나라도 없다. 이러니 ‘外來語’를 ‘현지 원음’으로 적어야 한다는 국립국어원의 규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다.
3. 東洋 三國의 漢字音은 각기 오랜 傳統을 지니고 있다
‘外來語’를 ‘現地 原音’으로 적지 않는 現象은 우리 東洋도 마찬가지다. 韓中日 三國은 지난 2천 년간 같은 漢字文化圈으로서 漢字를 共通된 文字로 쓰고 漢字語도 共通된 게 많았다. 하지만 發音은 각기 자국어로 달리 발음했다. 이 원칙은 외국의 고유명사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다. 우리는 중국의 北京은 ‘북경’으로, 南京은 ‘남경’으로, 일본의 東京을 ‘동경’으로, 大板은 ‘대판’으로 불렀다. 중국의 孔子는 ‘공자’, 老子는 ‘노자’, 일본의 ‘豊臣秀吉’은 ‘풍신수길’, ‘伊藤博文’은 ‘이등박문’이라 말했다. ‘외래어’를 ‘현지 원음’으로 발음한 게 아니라 ‘韓國式 漢字音’으로 2천 년간 발음해 왔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中國도 한국이나 일본의 고유명사를 모두 漢字로 적고 ‘현지 원음’이 아닌 中國語 發音으로 말한다. 한국의 金大中을 [찐따종]으로, 盧武鉉은 [루우쒠]으로, 大田(대전)은 '다톈'으로, 三星은 [싼씽]으로, 現代汽車(현대자동차)는 [쌘따이치처]로 발음한다. 또 일본의 日産汽車(닛산자동차)는 [르찬치처]로, 安倍晋三(아베신조)은 [안베이진싼]으로, 小泉純一郞(고이즈미 준이치로)은 [샤오췐춘이랑]으로, 靖國神社(야스쿠니 신사)는 [징궈션셔]로 발음한다. 우리가 일본의 고유명사를 일본어 발음으로 적고 말해주는 것과는 다르다.
日本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李承晩(이승만)을 ‘리쇼방’, 全斗煥(전두환)을 ‘젠또깡’, 李敭河(이양하)를 ‘리요까’, 光州를 ‘고요슈’, 崔昌華(최창화)를 ‘사이쇼까’로 부른다. 재일교포인 崔昌華(최창화) 목사가 자기 이름을 한국식 발음으로 불러달라고 일본 법원에 提訴했다가 敗訴한 일까지 있다. 일본 법원이 ‘외래어’의 ‘현지 원음’을 부정하고 자국어 중심이 옳다고 판결한 것이다. 日本 신문은 한국․ 중국의 고유명사를 漢字로 적고, 독자는 그것을 당연히 日本 漢字音으로 읽는다. 일본 방송도 중국의 고유명사를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는다. 하지만 한국의 고유명사만은 1990년대 이후 아나운서가 한국식으로 읽고, 자막을 넣을 때는 한자를 앞에 적고 한국식 발음을 뒤에 적는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이고, 일본의 일반 국민들은 한국의 고유명사를 한자로 적고 그냥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는다. 우선 한국식 한자음을 모를뿐더러 한국식 발음으로 말하려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韓國과 中國과 日本의 세 나라는 ‘外來語’를 2천 년 동안 ‘現地 原音’이 아니라 ‘自國語 漢字音’으로 말해 오고 있다. 그 이유는 ‘남의 말’ 그대로인 ‘外國語(foreign words)’와 달리, ‘外來語(loan words)’는 외국어가 자국어화한 ‘들온말’이기 때문이다. 곧 ‘外來語’는 자국어 안에 들어온 외래적 요소지만 자국어가 된 말이다. 곧 ‘外來語’는 韓國語의 일부인 점에서 남의 말인 ‘外國語’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글專用派는 漢字를 섞어 적자는 漢字竝用派에게 漢字를 그렇게 쓰고 싶으면 中國에 가서 살라고 비아냥댄다. 하지만 漢字를 적는 일은 우리나라의 2천 년간 傳統이다. 그러므로 한자를 적는다고 해서 중국에 가라는 말은 우리 겨레의 2천 년간 역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 겨레의 “半萬年 文化民族”으로서 矜持를 깎아내리는 妄發이다.
漢字를 적는 일은 우리 한국인의 正體性에 결코 어긋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외래어랍시고 우리 한국인이 중국말을 하거나 일본말을 입에 올리는 일이 우리 한국인의 正體性에 어긋난다. 우리나라가 事大主義를 내걸었던 朝鮮시대에도 중국의 고유명사를 결코 중국말로 적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중국말을 외래어로 적고 말하는 일은 오히려 조선시대보다 더 中國에 事大하는 일이다. 게다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事大하니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국제적 웃음거리다.
또한 우리가 日本의 植民地였던 시절에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우리말을 썼지 일본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학교에서도 일본어를 ‘國語’라 해서 가르쳤지만, ‘朝鮮語’도 1938년까지는 가르쳤다. 放送에서도 ‘京城 제1방송’은 일본어 방송이었지만 ‘京城 제2방송’은 한국어 방송을 했다. 물론 ‘朝鮮語’ 시간과 ‘韓國語 放送’은 ‘東京’을 ‘동경’이라 말했다. 다만 일본이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키면서 戰時體制로 들어가면서 우리 국민에게 ‘創氏改名’을 强要하고 ‘國語(日本語) 常用’을 强要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일본말을 모르는 일반 국민은 ‘東京’을 그냥 우리말 ‘동경’으로 말했다. 이처럼 식민지 시절에도 잘 쓰지 않던 일본말을 오늘날 우리가 외래어로 적고 말하고 있는 일은 오히려 식민지시절보다 더 日本의 植民地 노릇을 하고 있는 일이 된다. 게다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植民地 國民이 되기를 自請하니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렇게 스스로 일본어를 익혀 놓으니 언제든지 한국은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될 준비를 잘하고 있다고 일본은 만족해하고 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우리 한국인 전체를 바보라고 비웃고 있다.
따라서 외래어라고 해서 중국말과 일본말을 우리말 안에 마구 들여오는 일은 우리말을 더럽히는 참으로 나쁜 일이다. 이미 있던 우리말 ‘북경’과 ‘동경’을 빼버리고 그 자리에 외국어인 ‘베이징’과 ‘도쿄’를 대신 집어넣는 일은 엄청난 民族 叛逆的 행위다. 어떻게 우리 스스로 우리말 낱말을 없애면서 그 자리에 중국말과 일본말을 스스로 들여온다는 말인가? 그것도 우리말을 살리라고 국민의 血稅로 만든 정부기관인 國立國語院이 우리말을 죽이는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漢字는 글자로 적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 漢字를 중국말과 일본말로 적고 말하는 일이 문제다. 漢文으로 된 글을 놓고서 韓․中․日의 어느 나라 사람이 썼는지를 알기 어렵다. 漢字 자체에는 國籍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漢文을 읽는 소리를 들으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말에 國籍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말과 일본말을 씀으로써 스스로 자기 자신을 蔑視하는 바보짓을 하고 있다. 東洋 三國 중 오직 우리나라만 그렇다. 아니, 전 地球上에서 오직 大韓民國만 그렇다.
4. 現行 ‘外來語 表記法’은 國民을 苦痛에 빠뜨리는 惡法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세 나라는 ‘外來語’를 2천 년 동안 ‘現地 原音’이 아니라 ‘自國語 漢字音’으로 말해 온 것이다. 그리고 中國과 日本은 지금도 그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런데 오직 우리나라만 1989년에 외래어 표기법에 中國語를 포함시키면서 한국 한자음의 ‘外來語’가 아니라 ‘현지 원음’의 ‘外國語’인 ‘中國語’를 적게 만들어 버렸다. 이건 엄청난 改惡이다. 이론 인해 우리 국민이 겪게 되는 苦痛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첫째는 한국인이 중국이나 일본 고유명사의 ‘現地 原音’을 모르니 적고 말할 수 없다는 고통이다. 오늘날 한국인 중 몇 명이나 중국이나 일본의 외래어를 표기법대로 적을 수 있는가? 내가 중국 고유명사 몇 개를 한자로 적을 테니, 누가 현행 외래어 표기법으로 적어보기 바란다. 山西, 江西, 遼寧, 雲南, 貴州, 河北, 黑龍江, 內蒙古, 新疆, 西藏, 廣西壯族. 나는 이것들을 현행 외래어 표기법으로 적을 능력이 전혀 없다. 명색이 한국어를 전공하는 대학교수가 한국어를 적을 수 없다면 내가 잘못인가, 외래어 표기법이 잘못인가? 저것들을 過去 傳統대로 한국 한자음으로 적게 하면 나는 금방 다 적을 수 있다. 과연 어느 표기법이 옳은 것인가? 한국어를 중국어로 적으라는 표기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표기법인가?
둘째 苦痛은 중국어를 공부하여 중국 발음을 설혹 안다 하더라도 正確한 表記가 어렵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北京은 ‘베이징’, ‘뻬이징’, ‘뻬이찡’, ‘베이찡’, ‘베이킹’, ‘뻬킹’ 중 어떻게 적어야 할지 알기 어렵다. 중국어 전문가가 되어야만 가능할 텐데, 한국어를 적는데 왜 한국인 모두가 중국어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국어를 적을 수 있어야 하고, 또 누구나 적을 수 있는 방법이 이미 있다. 그런데 왜 그 좋은 방법을 버리고 우리가 구태여 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
셋째 苦痛은 외래어를 보거나 듣고서 한국인이 그 意味를 理解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내가 중국 외래어를 몇 개 적어볼 테니 그 의미를 알아보기 바란다. 산시, 장시, 랴오닝, 윈난, 구이저우, 허베이, 헤이룽장, 네이멍, 신장, 시짱, 광시좡쭈.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명색이 한국어를 전공하는 대학교수가 한국어를 읽고서 이해할 수 없다면 내가 잘못인가, 외래어 표기법이 잘못인가? 저 낱말들을 과거 전통대로 한국 한자로 적고 한국 한자음을 달아주었다면 나는 금방 다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어느 표기법이 옳은 것인가? 한국어를 중국어로 적고 말하라는 표기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표기법인가?
日本語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일본 고유명사 몇 개를 한자로 적을 테니까 현행 외래어 표기법으로 적어보기 바란다. 小林光一, 高尾紳路, 坂田榮壽, 山下敬吾, 依田紀基, 羽根直樹, 藤澤秀行, 王銘琓. 이 낱말들을 현행 외래어 표기법대로 고바야시 고이치, 다카오 신지, 사카타 에이오, 야마시타 게이고, 요다 노리모토, 하네 나오키, 후지사와 히데유키, 왕밍완으로 적을 수 있는 사람이 한국인 중에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일본어는 한자를 발음으로 읽는 音讀과 뜻으로 읽는 訓讀으로 나눈다. 그러므로 일본말의 현지 발음을 漢字만 보고서 읽기는 매우 어렵다. 심지어는 일본인들조차도 헛갈려 하는데 어떻게 한국인들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또 그렇게 어렵게 적은 일본어를 보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또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오로지 일본어 전문가만 가능할 것이다. 한국어를 전공하는 대학교수인 나도 불가능한 외래어 표기법이 올바른가? 국민 대다수가 가능한 방법을 두고 왜 국민 대다수가 불가능한 방법으로 외래어 표기법을 바꿨는가?
과연 그 理由가 무엇인가? 외래어 표기법은 ‘中國의 辛亥革命’ 以後에는 中國語의 ‘現地 原音’으로 적으라고 한다. 그런데 ‘辛亥革命’ 때 중국에 무슨 言語的 變化가, 그것도 急激하게 벌어졌는가? 그런 일 전혀 없다. 중국인도 모르는 그런 변화를 우리 한국은 어떻게 알고 그런 이상한 규정을 만들었는가? 정말로 해괴한 일이다.
標準語를 정하는 기준은 '傳統性'과 '合理性' 두 가지다. 외래어 표기법이 이 두 가지 기준에 들어맞는가? 아니다. 외래어 표기법은 지난 2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우리말의 '傳統性'을 破壞했다. 그러면 '合理性'은 더 높아졌는가?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意味 傳達도 더 不正確해지고, 意思疏通도 더 不便해졌다.
그러면 이 모든 불편을 무릅쓰고 어렵게 적은 ‘現地 原音’이 실제로 ‘現地’에 가서 外國人과 會話할 때 쓸모가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中國語에는 四聲이 있는데, 우리가 적는 중국말은 그 聲調를 무시하고 적기 때문에 그 ‘現地 原音’은 실제로는 중국인을 만나면 아무 쓸모도 없는 말이 된다. 이처럼 ‘現地 原音’으로 적는 일은 고생만 죽도록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정말 無意味한 苦痛이요 苦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