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의 淵源과 東夷族-진태하
明知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문자학 박사가 전하는 한자의 주인공
漢字의 淵源과 東夷族
一. 漢字와 東夷族과의 關係
먼저 東夷族에 대하여 中國의 學者들이 具體的으로 考證한 바를 引用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추군맹(鄒君孟)은 <화하족기원고론 . 華夏族起源考論>에서
(華夏族是在我國原始社會末期, 以中原炎黃集團爲基礎, 融合了東方一部分夷人集團(主要是蚩尤和少昊這一支) 和南方一部分苗蠻集團(主要是女?和槃瓠這一支)而形成的.)
(화하족시재아국원시사회말기, 이중원염황집단위기초, 융합료동방일부분이인집단(주요시치우화소호저일지) 화남방일부분묘만집단(主要是女?화반호저일지)이형성적.)
蚩尤에 대하여 鄒氏는
(蚩尤屬于口那個集團? 自古以來就是一個聚訟紛?的問題. 東漢的學者, 如高誘馬融等都認爲他是九黎的君長(中略)近人却多以蚩尤爲東夷集團, 如徐旭生先生.(中略)我基本同意徐旭生先生的看法, 蚩尤屬東夷集團.)(華夏族起源考論)
(치우속우구나개집단? 자고이래취시일개취송분?적문제. 동한적학자, 여고유마융등도인위타시구려적군장(중략) 근인각다이치우위동이집단, 여서욱생선생.(중략) 아기본동의서욱생선생적간법, 치우속동이집단.)(화하족기원고논)
이라고 한 바와 같이 蚩尤를 斷定的으로 東夷集團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少昊에 대해서도
(少昊無疑是在蚩尤之後.(中略)少昊所在地的魯西南是中原和東夷集團交?的地方,是華夏族形成的一個熔爐.(中略)少昊卽小?, 又叫(金天氏)或(窮桑氏).(中略)少昊氏是以鳥作爲圖騰的氏族部落.(中略)大量的村料證明, 少昊氏是世居魯西南, 屬于地地道道的東夷集團的.(中略)少昊氏的發祥地和根據地在山東曲阜一帶.(中略)大汶口文化?可能就是在這樣的基礎上産生的, ?印方少昊文化爲主, 但也融?了中原文化的特點, 大汶口文化可以說是中?東兩大集團融合的結晶, 和仰韶?龍山文化一樣, 是華夏族文化中的?寶)(前揭書)
(소호무의시재치우지후.(중략)소호소재지적로서남시중원화 동이집단교?적지방, 시화하족형성적일개용노.(중략)소호즉소?, 우규(김천씨)혹(궁상씨).(중략)소호씨시이조작위도등적씨족부락. (중략)대량적촌료증명, 소호씨시세거로서남, 속우지지도도적동이집단적.(중략)소호씨적발상지화근거지 재산동곡부일대.(중략)대문구문화?가능취시재저양적기초상산생적, ?인방소호문화위주, 단야융?료중원문화적특점, 대문구문화가이설시중?동양대집단융합적결정, 화앙소?용산문화일양, 시화하족문화중적?보)(전게서)
라고 考證한 바와 같이 一般的으로 말하는 中國의 五帝 중 하나인 少昊까지도 蚩尤의 後裔로서 東夷族의 人物로 確定하였다.
장문(張文)도 <대문구문화도존부호시해 . 大汶口文化陶尊符號試解>에서
((前略)進而斷定此大汶口文化爲東夷少昊族文化之遺存, 考古界從實物資料出發亦認爲, (大汶口文化和山東龍山文化, ?可能是東夷諸部落遠古文化發展的先後兩個階段.)(中略)大汶口文化自中期後段開始, 受到了來自良渚文化的影響.(中略)後來經過山東龍山文化的發展, 最終導致了甲骨文字的産生.(中略)有學者曾謂中國古文化多與東夷有關, 以上觀之, 是?有道理的. 但有一點須更正. 傳統說法總以山東半島爲東夷之中心地區, 以今觀之, 亦不盡然. 從良渚文化之高度發達及其對大汶口文化之影響來看, 古太湖流域也是東夷一中心地區. 其文化前後相承, 自成體系, 幷對中國古代文明的發展進程産生過深遠影響.)
((전략)진이단정차대문구문화위동이소호족문화지유존, 고고계종실물자료출발역인위, (대문구문화화산동용산문화, ?가능시동이제부락원고문화발전적선후양개계단.) (中略)대문구문화자중기후단개시, 수도료래자량저문화적영향. (中略)후래경과산동룡산문화적발전, 최종도치료갑골문자적산생. (中略)유학자증위중국고문화다여동이유관, 이상관지, 是?유도리적. 단유일점수경정. 전통설법총이산동반도위동이지중심지구, 이금관지, 역부진연. 종량저문화지고도발달급기대대문구문화지영향래간, 고태호류역야시동이일중심지구. 기문화전후상승, 자성체계, 병대중국고대문명적발전진정산생과심원영향.)
이라고 闡明한 바와 같이 大汶口文化뿐만 아니라, 龍山文化까지도 東夷少昊族文化의 遺存이라 하였고, 그것이 發展하여 甲骨文字를 생산하였다고 主張하였다. 또한 東夷의 中心이 山東半島에 그치지 않고 古太湖流域까지 東夷地域에 屬한다고 說明하였다.
부영취(付永聚)도〈화하족형성발전신론 . 華夏族形成發展新論〉에서
(黃帝爲熊圖騰, 女?爲蛇圖騰, 東夷人爲鳥圖騰, 苗蠻爲狗圖騰,(中略)可見, 春秋末年, 華夏和蠻夷戎狄已定型爲相互區別的民族識別標志.(中略)中原的炎帝, 太昊;東方的蚩尤, 少昊;北方的黃帝;南方的伏羲女?, 盤瓠等, 統統成了中華民族的共同祖先. 他們創造的仰韶, 大汶口, 龍山, 靑蓮崗和岳石文化等, 也都成爲華夏文明的有機組成部分. “帝舜有虞氏集團源出于東夷,(中略) 商人之祖源于東夷.”(中略)如舜, 本爲 “東夷之人” 又娶戎女, 後代兼有夷戎血統無疑.(中略)商人祖先本爲古夷人一支, 以鳥爲圖騰, 後與戎人混血, “有?方將, 帝立了生商, 故稱 “戎殷”, “戎商”.(中略)結果, 不僅一大批夷人加入到華夏行列中, 從此變成了華夏, 而且還把夷人的血統大量帶入, 給華夏注入了新的血液.(中略)中華民族多祖先的祖宗崇拜意識來源于華夏文化的多源性.中華民族的祖宗是一個群體, 所謂三皇五帝, 都不是指一個人.)
(황제위웅도등, 여?위사도등, 동이인위조도등, 묘만위구도등, (중략)가견, 춘추말년, 화하화만이융적이정형위상호구별적민족식별표지. (중략)중원적염제, 태호;동방적치우, 소호;북방적황제;남방적복희여?, 반호등, 통통성료중화민족적공동조선. 타문창조적앙소, 대문구, 용산, 청연강화악석문화등, 야도성위화하문명적유기조성부분. “제순유우씨집단원출우동이, (중략) 상인지조원우동이.”(중략)여순, 본위 “동이지인” 우취융여, 후대겸유이융혈통무의.(중략)상인조선본위고이인일지, 이조위도등, 후여융인혼혈, “유?방장, 제립료생상, 고칭 “융은”, “융상”.(중략)결과, 부근일대비이인가입도화하행열중, 종차변성료화하, 이차환파이인적혈통대량대입, 급화하주입료신적혈액.(중략)중화민족다조선적조종숭배의식래원우화하문화적다원성. 화민족적조종시일개군체, 소위삼황오제, 도부시지일개인.)
이라고 考證한 바와 같이 商人의 祖宗이 東夷에서 根源되었으며, 舜이 곧 東夷之人이라고 재확인하였다.
대만(台灣)의 문자학자 (文字學者) 이경재(李敬齋)는〈정리문화중도자술 . 整理文化中途自述〉에서
(黃帝南下遂都於軒轅之丘(在今河南新鄭縣境內). 嗣後與東夷相處甚善, 除湯誅桀外未聞有戰爭之事. 在武功方面, 諸夏雖獲勝利, 而在文化方面則同化於東夷矣. 古鐘鼎文字, (夷)皆作(人), 知(人)卽(夷)也. 今日吾人皆自命爲人, 卽自命爲夷也. 其同化之徹底, 有逾於此者乎. 今山東人, 尙讀人如寅. 寅夷變聲, 寅人疊韻, 則(人)(夷)爲一聲之轉毫無疑義. (中略) 夫東夷果何等人耶. 乃愷悌慈祥, 薄武力而崇藝術之人也. 其代表人物如舜(孟子曰舜, 東夷之人也). 至仁至孝, 能使人讓以天下, 而以復以天下讓人, 眞古今中外無比至聖也. 故孔孟艶稱之. 其次如契, 舜使爲司徒, 司徒卽今之敎育部長, 負推廣文化之責. 書曰(使契明倫), 古稱(蒼?)爲造字之祖,
實則(契)卽(蒼?)之合音. 可見我國文字東夷人亦多所創造. 而爲契所推廣因以造字之功歸之契. 如將東土西土古文略一比較, 卽東夷對於文字之智慧優於西夏, 東夷人旣握有敎育權, 故諸夏盡受東夷之文化.(中略)孔子, 殷人也, 倉?之後, 商湯之苗裔也. 由宋徙魯, 卽由今之商邱遷於曲阜, 曲阜爲少?之故都, 商邱爲三?之中心, 皆東夷文化之發源地. 此孔子之所以能成爲至聖也. 東夷文化經契孔二聖之宣揚敷施遂成爲卓然不拔之中國文化.)
(황제남하수도어헌원지구(재금하남신정현경내). 사후여동이상처심선, 제탕주걸외미문유전쟁지사. 재무공방면, 제하수획승리, 이재문화방면칙동화어동이의. 고종정문자, (이)개작(인), 지(인)즉(이)야. 금일오인개자명위인, 즉자명위이야. 기동화지철저, 유유어차자호. 금산동인, 상독인여인. 인이변성, 인인첩운, 칙(인)(이)위일성지전호무의의. (중략) 부동이과하등인야. 내개제자상, 박무력이숭예술지인야. 기대표인물여순(맹자왈순, 동이지인야). 지인지효, 능사인양이천하, 이이복이천하양인, 진고금중외무비지성야. 고공맹염칭지. 기차여계, 순사위사도, 사도즉금지교육부장, 부추광문화지책. 서왈(사계명윤), 고칭(창?)위조자지조, 실칙(계)즉(창?)지합음. 가견아국문자동이인역다소창조. 이위계소추광인이조자지공귀지계. 여장동토서토고문약일비교, 즉동이대어문자지지혜우어서하, 동이인기악유교육권, 고제하진수동이지문화. (중략)공자, 은인야, 창?지후, 상탕지묘예야.
유송사로, 즉유금지상구천어곡부, 곡부위소?지고도, 상구위삼?지중심, 개동이문화지발원지. 차공자지소이능성위지성야. 동이문화경계공이성지선양부시수성위탁연부발지중국문화.)
라고 고증한 바와 같이 이씨는 더욱 강조하여 중국의 문자는 모두 동이인이 창조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제하가 모두 동이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창?은 계의 합음이며, 孔子는 창힐(蒼詰)의 후예로서 은인(殷人)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부파(傅波)는〈한민족형성전적동북방여중원 . 漢民族形成前的東北方與中原〉에서
(漢民族的形成就是多民族(包括東北地區的民族)融合的結果.(中略)大約在四, 五千年以前, 黃河下游有太昊. 少昊部, 后又有?頊, 帝?族. 炎?黃二族興盛于黃河中上游, 强大後向東移動, 大戰蚩尤後, 炎?黃二族又合幷一族, 構成了華夏族的主干. 于公元前二十一世紀建夏朝.(中略)堯?舜皆東方集團的首領, 時間相當于龍山文化晩期.(中略)商源于東方集團(東夷), 這個看法在史學界基本是一致的. 更有專家?學者考證殷之先人源于東北地區.(中略)總的看來, 殷人先人吊北這個說法是有一定根據的.(中略)再聯系到商亡後箕子東走朝鮮, 這似乎都說明夏?商時我國東北地區南部爲東部集團的地域. 但商文化與東部集團各部的文化要有區別, 商爲東部集團中玄鳥部西進所建. 所以帶有濃厚的東部集團的文化色彩, 有着淵源關係. 但商在西進後, 不融合了他種文化面形成了新的文化. 因此, 不能把東方集團的文化統稱爲商文化.)
(한민족적형성취시다민족(포괄동북지구적민족)융합적결과. (중략)대약재사, 오천년이전, 황하하유유태호. 소호부, 후우유?욱, 제?족. 염?황이족흥성우황하중상유, 강대후향동이동, 대전치우후, 염?황이족우합병일족, 구성료화하족적주간. 우공원전이십일세기건하조. (중략)요?순개동방집단적수령, 시간상당우용산문화만기. (중략)상원우동방집단(동이), 저개간법재사학계기본시일치적. 경유전가?학자고증은지선인원우동북지구.(중략)총적간래, 은인선인적북저개설법시유일정근거적. (중략)재련계도상망후기자동주조선, 저사호도설명하?상시아국동북지구남부위동부집단적지역. 단상문화여동부집단각부적문화요유구별, 상위동부집단중현조부서진소건. 소이대유농후적동부집단적문화색채, 유착연원관계. 단상재서진후, 부융합료타종문화면형성료신적문화. 인차, 부능파동방집단적문화통칭위상문화.)
부씨도 상(商)의 근원은 동북지구 곧 동이집단에서 나왔으며, 요?순이 모두 동방집단의 수령이라 하고, 뒤에 서진하여 타종 문화와 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형성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상기 중국 제학자들의 고증으로써 동이족에 의하여 이른바 한자가 창조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二. 「漢字」의 名稱에 대한 再考
오늘날 중국뿐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漢字라는 명칭을 일반적으로 쓰고 있으나, 지금이라도 그 명칭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시비를 고증하지 않으면, 그 명칭으로 인한 오해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漢字라고 칭하게 되면, 한대의 문자라는 의미와 한족의 문자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앞에서 살펴 본 대로 한자와 동이족의 밀접한 관계가 왜곡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그러나 한자는 한대에 만들어진 문자가 아니라, 이미 은대에도 상당히 발달된 상태에서 쓰인 문자이다.
근래 중국에서 출토된 자료에 의하면, 은대의 갑골문뿐만 아니라, 하대를 소급하여 약 6,000년전의 서안 반파의 앙소문화(仰韶文化)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의도부(有意陶符)에서 부터 문자의 발생을 고증하고 있는데, 한자가 마치 漢代에 만들어진 것처럼 명명한 것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殷代의 갑골문 중에 漢이라는 글자가 있지도 않으며, 西周時代 父乙?의 金文에서 처음으로 나타나지만, 漢族이라는 명칭을 뜻한 문자가 아니라, 水名으로 쓰였을 뿐이다.
(漢)字에 대하여 說文解字에는 (한?야, 동위창랑수종수난성성 . 漢?也, 東爲滄浪水從水難省聲)이라 하였고, 고수번(高樹藩)은 이에 주석하여
(源出陝西省寧羌縣之水名, 其初出山爲?, 東流至漢中爲漢, 出荊山東南爲滄浪水;以其爲水名, 故從水, 又以 卽菫, 音勤, 本作(?土)解, 卽色黃性?之土 漢水黃色, 故 從 聲, 惟隸變作漢爲今所行者.)(正中形音義綜合大字典)
(한?야, 동위창랑수종수난성성)이라 하였고, 고수번은 이에 주석하여 (원출섬서성녕강현지수명, 기초출산위?, 동류지한중위한, 출형산동남위창랑수;이기위수명, 고종수, 우이 즉근, 음근, 본작(?토)해, 즉색황성?지토 한수황색, 고 종 성, 유예변작한위금소행자.)(정중형음의종합대자전)
라 하여, (漢)의 字源에 대하여 具體的으로 考證하였다.
(漢)자에 대하여 설문해자에는 라 하여, (한)의 자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고증하였다. 漢族의 명칭에 대하여 사해(辭海)에는
漢時兵威遠震, 外國人均稱遂我國人曰漢人, 魏晋以降, 仍有此稱, 由是我國人遂自名爲漢族.
한시병위원진, 외국인균칭수아국인왈한인, 위진이항, 잉유차칭, 유시아국인수자명위한족.
이라 하여, 漢族이라는 명칭은 오히려 외국인에 의하여 위진시대(魏晋時代) 이후에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명개도
漢人本來指我國漢朝的人, 後來却普指漢族人民. 唐人本來指的是唐朝的人, 現在廣東人却拿唐人去指一般漢人.(普通語言學)
한인본래지아국한조적인, 후래각보지한족인민. 당인본래지적시당조적인, 현재광동인각나당인거지일반한인.(보통어언학)
이라 하고, 주성(朱星)도
漢人本來指我國漢朝的人, 後來却普指漢族人民. 唐人本來指的是唐朝的人, 現在廣東人却拿唐人去指一般漢人.(普通語言學)
한족적명칭기적?만도한무제, 선제이후재개시칭한족.) (고한어개론)
이라 하여, 漢族이라는 명칭은 분명히 漢武帝, 宣帝 以後에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부파(傅波)는 漢族의 형성에 대하여
秦的統一爲漢民族的形成奠定了基礎, 但漢族的形成或說漢族之稱伊始, 應在漢朝建之後. 否則將無法解釋民族前冠以 “漢”字由何而來, 而在實際上秦漢以前也幷沒有形成一個統一民族.(漢民族形成前的東北與中原)
진적통일위한민족적형성전정료기초, 단한족적형성혹설한족지칭이시, 응재한조건지후. 부칙장무법해석민족전관이 “한”자유하이래, 이재실제상진한이전야병몰유형성일개통일민족.) (한민족형성전적동북여중원)
이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秦의 통일이 漢民族의 형성의 기초는 되었으나, 漢族이라는 명칭의 시작은 漢朝의 건립후라고 밝혔다.
주성(朱星)은 漢族의 來原에 대하여
在中國居住的人種兩個主要來源 : 一是蒙古人種, 一是馬來人種, 這兩個種族的類型, 面相, 體格等, 都有顯著的區別, 蒙古人種後又分夏族, 商族, 通古斯族, 羌族等氏族. 在新石器期, 散佈在今甘肅陝西, 山西, 豫西北等地的就成爲夏族, 在新石器初期, 到了山東半島的成爲商族, 散佈在滿洲的是通古斯族: 在殷朝就住在西北與夏族爲隣的是羌族. 馬來人種則散佈在浙江, 福建, 兩廣, 雲貴等地, 成爲東?, 百越, 苗?各族.(古漢語槪論)
재중국거주적인종양개주요래원 : 일시몽고인종, 일시마래인종, 저양개종족적류형, 면상, 체격등, 도유현저적구별, 몽고인종후우분하족, 상족, 통고사족, 강족등씨족. 재신석기기, 산포재금감숙섬서, 산서, 예서북등지적취성위하족, 재신석기초기, 도료산동반도적성위상족, 산포재만주적시통고사족: 재은조취주재서북여하족위인적시강족. 마래인종칙산포재절강, 복건, 양광, 운귀등지, 성위동?, 백월, 묘?각족.)(고한어개론)
이라고 상고한 바와 같이 오늘날 중국민족의 주류도 북방민족에서 연원되었음을 밝혀 놓았다.
漢字라는 명칭은 요사(遼史), 금사(金史) 등의 사서에도 이미 출현되었지만,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원사(元史) 병지(兵志)에
漢字 : 漢族人之文字也, 對蒙古文字而言.
한자 : 한족인지문자야, 대몽고문자이언.
이라고 한데서 비롯된다.
이상으로 볼 때에 漢代 당시에도 漢字라는 명칭이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명칭의 부당함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상의 고증을 통하여 볼 때, 漢字의 본래 명칭은 계(契 . 기흘절 . 欺訖切) 곧 글[geul] 이지만, 오늘날 한,중,일 삼국의 공용문자임을 감안하여 동방문자(東方文字)로 일컫게 되면, 한국이나 일본에서 차용문자(借用文字)라는 거부감도 제거할 수 있으며, 앞으로 전개되는 아시아 태평양문화권시대에 있어서 韓,中,日 삼국이 결속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두 그림은 셈이나 계약을 할 때 목간에 줄을 긋고 반으로 나누어서 보관 했다가 나중에 맞추어 보는 것으로 칼로 나무에 새긴다고해서 만들어진 " 계약할 계" 의 甲骨文이다.
三. 東方文字의 本來 名稱
역사적으로 문자의 사용이 확실했던 은대에는 이른바 漢字를 무엇이라고 일컬었는가를 살펴본다.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文字라는 말은 許愼의 說文解字에는
文:錯畵也, 象交文, 字:乳也, 從子?下, 子亦聲
문:착화야, 상교문, 자:유야, 종자?하, 자역성
이라 하였고, 단옥재 주에는
像兩紋交互也紋者文之俗字, 字者, 言?乳而浸多也.
상양문교호야문자문지속자, 자자, 언?유이침다야.
라 하여, 文은 본래 글자의 뜻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무늬의 뜻으로 만든 글자이며, 字도 본래 글자의 뜻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아이를 낳다의 뜻으로 만든 글자로서, (文)이나 (字)가 모두 글자의 뜻과는 전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文)과 (字)의 사용에 대하여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日知錄)에서
春秋以上 言文不言字, 如左傳:(於文止戈爲武), (於文反正爲乏),
(於文皿蟲爲蠱), 及論語:(史闕文), 中庸:(書同文)之類. 竝不言字
춘추이상 언문부언자, 여좌전:(어문지과위무), (어문반정위핍), (어문명충위고), 급론어:(사궐문), 중용:(서동문)지류. 병부언자
라고 고증하여, 춘추시대 이전에는 글자의 뜻으로 (文)은 썼으나, (字)는 결코 쓰지 않았음을 밝혔다.
또한 강영(江永)은 군경보의(群經補義)에서
其稱(書), (名)爲(字)者, 蓋始於秦呂不韋著呂氏春秋, 懸之咸陽市, 曰:(有能增損一字者, 予千金)此稱(字)之始, 前此未有以(文)爲(字)者也.
기칭(서), (명)위(자)자, 개시어진여부위저여씨춘추, 현지함양시, 왈:(유능증손일자자, 여천금)차칭(자)지시, 전차미유이(문)위(자)자야.
라 하여, (字)를 글자의 뜻으로 쓴 것은 진대의 여불위(呂不韋)가 지은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文字의 복합명칭에 대하여 임윤(林尹)은 문자학개설(文字學槪說)에서
秦始皇二十八年(西元前219年)在琅邪刻石, 敍說(皇帝之功)有(同書文字)的記載, 這是(文字)合稱之始
진시황이십팔년(서원전219년)재랑사각석, 서설(황제지공)유(동서문자)적기재, 저시(문자)합칭지시
라 하여 (文)과 (字)가 복합되어 (文字)로써 글자의 뜻으로 쓰인 것은 진시황 28년(BC219)부터라고 밝혔다.
(文)은 갑골문에 ( , , ) 등과 같이 사람의 가슴에 문식한 모습을 상형하였고, (字)는 갑골문에는 나타나지 않고 금문에 ( , , ) 등과 같이 집 안에 아이를 그리어 서호의 해석과 같이 부인유자거실중(婦人乳子居室中)의 뜻을 나타내었다.
이상의 고증으로 볼 때, (文)과 (字)는 동시대에 만들어진 글자도 아니고, 또한 오늘날의 글자의 뜻으로 만든 글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殷代 갑골문의 명칭이 (文)도 아니요, (字)도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林尹은 漢字의 初期 名稱에 대하여,
我國文字在初創的時候, 叫作『書』. 這可由說文解字敍上:(倉?之初作書)和(著之竹帛謂之書)的話中看出來. (書)也叫(書契), 唐朝陸德明經典釋文解釋尙書序 (造書契)這句話, 認爲(書契)就是(文字).)(文字學槪說)
아국문자재초창적시후, 규작『서』. 저가유설문해자서상:(창?지초작서)화(저지죽백위지서)적화중간출래. (서)야규(서계), 당조륙덕명경전석문해석상서서 (조서계)저구화, 인위(서계)취시(문자).)(문자학개설)
라 하여, 마치 (書)가 漢字의 草創期 名稱처럼 考證하였으나, (書)가 甲骨文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金文에 비로소 出現되는 것으로 볼 때, 漢字의 最初 名稱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임씨는 창?지초작서(倉?之初作書)를 예시(例示)하였으나, 許愼의 說文解字에 (書著也, 從聿者聲 . 서저야, 종율자성) 이라 하였고, 단옥재(段玉裁)는 저어죽백위지서(著於竹帛謂之書)라고 注한 것으로 보아도 창힐이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었다는 뜻이지, (書)라는 글자를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은대 갑골문중에서 글자의 뜻으로 쓰인 것은 (?刀 )이다. 서중서은 (?刀 )에 대하여
從 (刀)從 , 象以刀?刻之形, 象所刻之齒, 古人用以記事.)(甲骨文字典)
종 (도)종 , 상이도?각지형, 상소각지치, 고인용이기사.)(갑골문자전)
라 하였고, 고수번(高樹藩)도
一說?刀 契古今字, 契爲?刀 之累增字, 今契行而?刀 字廢) (形音義綜合大字典)
일설?도 계고금자, 계위?도 지루증자, 금계행이?도 자폐) (형음의종합대자전)
라 하였고, 좌민안(左民安)은
契字的本義就是刻, 在<六書正爲>中說 : 象刀刻畵竹木以記事者, 別作?契爲後人所加, 這話是對的, ?外, 當刻字用的契, 有時還加金字旁, 表示用金屬刀雕刻之意, 字爲? (漢字例話)
계자적본의취시각, 재<육서정위>중설 : 상도각화죽목이기사자, 別作?계위후인소가, 저화시대적, ?외, 당각자용적계, 유시환가금자방, 표시용금속도조각지의, 자위? (한자예화)
이라 하여 (?도 →?→글)의 자형 변천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契字의 초기상형문을 설명하고 있다.
계(契)의 반절은(反切音)이 광운(廣韻)에는 고결절(苦結切), 집운(集韻)에는 기흘절(欺訖切)로 되어 있고, 계(契)의 上古音을 의정(擬定)하여 동동?(董同?)는 [*K‘i?d], 주법고(周法高)는 [k‘ear-k‘iεi], 고본한(高本漢)은 [*k‘iad]
上古音韻表稿,漢字古今音彙,中國音韻學硏究
상고음운표고,한자고금음휘,중국음운학연구
이라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契丹)을 (글단→글안→거란)이라고 稱한 바와 같이 (契)를 (계), (설) 외에 (글)이라고 읽어 왔다.
契字의 古字에는 나무木 받침이었으나 후일 약속은 大事이므로 큰大字로 바뀌었다.
우리말의 (글)이란 말은 근래에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이미 북송시대(1103年) 고려어를 표기한 계림유사(鷄林類事)에 독서왈걸포(讀書曰乞鋪), 사자왈걸핵살(寫字曰乞核薩) 등과 같이 표음한 바와 같이 (글)로 되어 있고,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문현현일운근시파혜(文峴縣一云斤尸波兮)로 되어 있어 (글)이란 말이 문헌상으로도 삼국시대부터 이미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말의 고어에서 (자ㅅ그슬 모로매 고?고 正히 ?며, 자화필해정(字畵必楷正) 내훈초간본(內訓初刊本), 畵(긋획) . (類合)이라고 한 바와 같이 글씨를 (쓰다) 이전에 이미 (긋다)라 하였고, (그리다, 긁다, 깎다) 등의 말이 모두 글(契,각)과 동어원임을 생각할 때, 우리말의 (글)이 (글)에서 연원 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글)이 (글)의 자음을 형성하였다고 추정된다.
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여러 민족중에서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면면히 文字를 (글)이라 일컫는 민족은 유독히 우리 한民族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글)자를 처음 만든 민족도 앞에서 제학자들이 고증한 바와 같이 동이족 곧 우리 한민족의 조상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의 뜻에 대하여 설문해자에는 겸(鎌) 곧 (낫)으로 해석하였으나, 앞에서 좌민안(左民安)이 표시용금속도조각지의(表示用金屬刀雕刻之意)라 하고, 고수번(高樹藩)이
以契本作(重要之約)解, 乃從中割分而雙方各持以爲信者,?爲從中割分之利器, 故從契聲.)(形音義綜合大字典)
이글본작(중요지약)해, 내종중할분이쌍방각지이위신자, ?위종중할분지리기, 고종글성.)(형음의종합대자전)
새기다, 끊다, 낫, 풀베는 낫 이라고 사전에 나와있다.
이라고 한 바와 같이 은 (낫)의 뜻이 아니라,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던 각도(刻刀)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말에 각도(刻刀)에 해당하는 연장의 명칭이 (?→?→끌)이 있음은 (글)이 본래 우리말임을 확증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四. 東夷族에 의하여 만들어진 文字例
동이족이 이른바 漢字(東方文字)를 창조했다고, 張文은
大汶口文化爲東夷小昊族文化之遺存, (中略)最終導致了甲骨文字的産生.
대문구문화위동이소호족문화지유존, (중략)최종도치료갑골문자적산생.
이라 하고, 부영취(付永聚)는 상인지조원우동이(可見我國文字東夷人亦多所創造)
라 하고, 이경재(李敬齋)는 가견아국문자동이인역다소창조(可見我國文字東夷人亦多所創造)라고 역설하였으나, 지금까지 중국학자들 중에 구체적으로 어떤 漢字가 동이족에 의하여 만들어진 문자라고 밝힌 바는 없다.
筆者가 그동안 甲骨文을 통하여 東夷族의 傳統的인 生活習俗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글자들을 考證한 것 가운데 몇 字만 例를 들어본다.
家자를 갑골문에서 찾아보면, 의 자형과 같이 집 속에 돼지를 그려 놓은 모양이다. 해서체(楷書體)도 그대로 發展하여 (家) 곧 (집 면)字와 豕(돼지 시)字의 합체자(合體字)로 되어 있다. (家)의 字形이 집 속에 돼지가 있다면 마땅히 (돼지우리)의 字義여야 하는데, 사람이 사는 집의 뜻으로 쓰인데 대하여, 中國의 文字學者들은 허신(許愼) 以來 근 2000年이나 연구(硏究)하여 왔으나,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해석(解釋)을 내리지 못하고, 시비(是非)의 논쟁(論爭)을 계속하고 있다.
집면자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집안에 여자가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습 (편안할 안)
(家)字에 대하여 허신(許愼)은
거야, 종??성성 (설문해자)
居也, 從??省聲 (說文解字)
과 같이 ?(수퇘지 가)字를 생략하여 (家)의 자음을 취한 형성자라고 풀이한 것이 문헌상으로 (家)字에 대한 최초의 자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說에 대하여 淸代의 단옥재(段玉裁)는
按許書言省聲多有可疑者(中略)若家爲?之省, 哭之爲獄省, 皆不可信 (說文解字注)안허서언생성다유가의자(중략)약가위?지성, 곡지위옥성, 개부가신 (설문해자주)
이라고 한 바와 같이 (家)字가 (?)의 생략자(省略字)라는 說을 부정하였다.
서호(徐灝)는 단씨(段氏)의
此篆本義乃豕之居也, 引伸假借以爲人之居) (說文解字注)
차전본의내시지거야, 인신가차이위인지거) (설문해자주)
라고 주한데 대하여
古者造字, 何至從豕所居爲人之居乎, 段說非也, 家從豕者, 人家皆有畜豕也.) (說文解字注箋
고자조자, 하지종시소거위인지거호, 단설비야, 가종시자, 인가개유축시야.) (설문해자주전)
라고 반박하였다.
徐氏가 옛 사람들이 글자를 만들 때, 어찌 돼지우리를 사람의 집으로 삼았겠는가? (家)字에 (豕)字를 붙인 것은 人家에 모두 돼지를 길렀기 때문이라고 풀이한 것은 상당히 타당성(妥當性)이 있다
고명(高明)도
根據甲骨文資料, 家字寫作 , , 亦非從?聲所省.) (中國古文字學通論)
근거갑골문자료, 가자사작 , , 亦非從?성소생.) (중국고문자학통론)
이라 한 바와 같이 허설을 부정하였다.
나상배(羅常培)는 徐氏보다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不過照我推想中國初民時代的‘家’大槪是上層住人, 下層養猪, 現在雲南鄕間的房子還有殘餘這種樣式的.) (語言與文化)
불과조아추상중국초민시대적‘家’대개시상층주인, 하층양저, 현재운남향간적방자환유잔여저종양식적.) (어언여문화)
이라고 추상하였으나 하층에 왜 돼지를 길렀는지는 밝히지 못하였다.
풍작민(馮作民)은
字形是表示房屋下面有一隻猪, 爲什?用來代表人住的房屋?? 自古就有?多爭論. 不過這個時代一般人的住宅, 多半都是接近穴居狀態. 房頂是爲配合祭祀而建造, 屋裡的猪可能是用祭祀神的供品.)(象形文字)
자형시표시방옥하면유일척저, 위십?용래대표인주적방옥?? 자고취유?다쟁론. 부과저개시대일반인적주택, 다반도시접근혈거상태. 방정시위배합제사이건조, 옥리적저가능시용제사신적공품.)(상형문자)
이라 하여 (豕)를 집안에 차려 놓은 제품으로 억측하였다.
강은(康殷)은
象飼育牧豕的屋, 舍, 從 ?而不從豕的原因就是因爲?與家聲相同, 故取其聲.)(古文字學新論)
상사육목시적옥, 사, 종 ?이부종시적원인취시인위?여가성상동, 고취기성. (고문자학신론)
이라 하여 허신의 설을 긍정하면서, 또한 강씨는
淸人解作 (陳豕于屋下以祭也)迂腐可笑, 他們一点也不?古代社會的情形.) (文字學源流淺說)
청인해작 (진시우옥하이제야)우부가소, 타문일점야부?고대사회적정형.)(문자학원류천설)
이라 하여 풍씨의 說을 간접적으로 부정하였다.
경본식(經本植)은 (家)字에 대하여
‘家’字在甲骨文和西周金文中都有從公猪(卽?)的形體(卽在象猪之形的‘豕’的腹部增添一筆象陽性生殖器的符號)也有省而?的豕. 看來, 小篆的‘家’正是甲骨文和金文‘家’字形體中省體的繼承. 許愼說家是‘?省聲’, 是根據後産的形聲字‘?’而言的.(中略) 但是許愼所說的‘省聲’字有許多是不可信從的. 參證以古文字的形體, 對此就比較淸楚了.) (古漢語文字學知識
‘家’자재갑골문화서주금문중도유종공저(즉?)적형체 (즉재상저지형적‘豕’적복부증첨일필상양성생식기적부호) 야유생이?적시. 간래, 소전적‘家’정시갑골문화금문‘家’ 자형체중생체적계승. 허신설가시‘?생성’, 시근거후산적형성자‘?’ 이언적.(중략) 단시허신소설적‘생성’자유허다시부가신종적. 참증이고문자적형체, 대차취비교청초료.) (고한어문자학지식)
라고 논증한 바와 같이 허신의 (?성성)은 (家)字보다도 후기자인 (?)의 형성자에서 (家)의 자음을 취하였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劉?은
‘家’字是由母系社會進入到男子當家的父系社會的標志, 因爲‘?’(公?)也可泛指陽性, 因此‘家’這個‘省聲字’仍不失‘?’之義, 表示是以男子爲代表的社會細胞.) (古漢語文字學知識
‘家’자시유모계사회진입도남자당가적부계사회적표지, 인위‘?’(公?)야가범지양성, 인차‘家’저개‘성성자’잉부실‘?’지의, 표시시이남자위대표적사회세포.) (고한어문자학지식
와 같이 이미 잘못된 허신의 설에 자신의 공상까지 더하여 설명하였다.
호기광(胡寄光)은
家庭是中國古代社會結構的基本單位. 通常說古代家庭的組織, 發生于夫妻的關係. 但許愼《說文》却說:家:居也. 從??省聲. ‘?’是公猪, ‘?省聲’是說意符‘豕’形體不省, 聲符‘?’則爲省體. 這就使歷代學者不解, 連段玉裁也稱之爲 ‘一大疑案’:‘家’爲什?不用人來表示, 而用公猪來表示? 看來還是許愼說得有道理. 對此, 唐蘭作了解釋:‘大汶口文化區域裏用養猪多小來分別財富的多少, 在我國古代語言裏代表財富的是家, 有財産稱爲家, 卽有家富,在古文字裏, 家裏畵出屋內有猪, 有的淸楚地畵出是公猪, 也有畵出屋裏有兩頭猪’. 羅琨張永山亦指出‘家’的本義不是‘豕之居’, 而是指房屋和家畜, 卽是 ‘以房屋和猪來表示一個打破氏族公有制而擁有一定的和有財産的血緣團體.’而文字的産生要晩于他所表述的事物, ‘家字産生應不晩于大汶口文化或者相當于大汶口文化晩期的歷史階段.’顯然‘家’的本義不是指夫妻及其子女, 而是指一個人占有屋內的猪群, 這與羅馬人說的‘Familia’(家庭)原指屬于一個人的全體奴隸, 都是說明家庭起源的絶妙實例. (中國小學史)
가정시중국고대사회결구적기본단위. 통상설고대가정적조직, 발생우부처적관계. 단허신《설문》각설:가:거야. 종??생성. ‘?’시공저, ‘?생성’시설부‘豕’형체불생, 성부‘?’ 칙위생체. 저취사력대학자불해, 연단옥재야칭지위 ‘一大疑案’: ‘家’爲什?불용인래표시, 이용공저래표시? 간래환시허신설득유도리. 대차, 당난작료해석: ‘대문구문화구역이용양저다소래분별재부적다소, 재아국고대어언이대표재부적시가, 유재산칭위가, 즉유가부, 재고문자이, 가이화출옥내유저, 유적청초지화출시공저, 야유화출옥이유양두저’. 나곤장영산역지출‘家’적본의불시‘시지거’, 이시지방옥화가축, 즉시 ‘이방옥화저래표시일개타파씨족공유제이옹유일정적화유재산적혈연단체.’ 이문자적산생요만우타소표술적사물, ‘가자산생응부만우대문구문화혹자상당우대문구문화만기적력사계단. ’현연‘家’적본의부시지부처급기자녀, 이시지일개인점유옥내적저군, 저여나마인설적‘Familia’(가정)원지속우일개인적전체노예, 도시설명가정기원적절묘실례.) (중국소학사)
라 하여, (家)의 字義가 後代에 와서 전의된 부(富)의 뜻으로 해석한 것은 부회지설이 아닐 수 없다.
上記 제학설중 나상배의 說을 제외하고는 거의 객관성도 합리성도 없는 억측이나 견강부회지설에 불과하다. 여기서 (家)의 字源에 대한 키 포인트는 古代에 있어서 무슨 理由로 집집마다 집 밑에 돼지를 길러야 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古代 파충류가 번성하던 時代에 사람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잠잘 때에 뱀이 기어들어 와서 해치는 것이었다. 실로 古代에 있어서 사람들이 뱀을 얼마나 두려워 하였는가에 대하여 주법고(周法高)는
我們常用的第三身代詞‘他’, 在上古是不用作第三身代詞的. 南北朝隋唐以後, 此種用法便?常見了. ‘他’本作‘?’. 說文卷十三下云:?, 蟲也. 從蟲而長, 象寃曲垂尾形. 上古草居患?, 故相問:無?乎? 段玉裁注:‘相問無?. 猶後人之不恙, 無恙也. 語言轉移, 則以無別故當之. 而其字或假‘?’爲之, 又俗作‘他’經典多作‘?’, 猶言彼也. 許言此以說假借之例.’) (中國語言學論文集)
아문상용적제삼신대사‘他’, 재상고시부용작제삼신대사적. 남북조수당이후, 차종용법편?상견료. ‘타’본작‘?’. 설문권십삼하운: ?, 충야. 종충이장, 상원곡수미형. 상고초거환?, 고상문:무?호? 단옥재주:‘상문무?. 유후인지부양, 무양야. 어언전이, 칙이무별고당지. 이기자혹가‘?’위지, 우속작‘타’경전다작‘?’, 유언피야. 허언차이설가차지례.’ (중국어언학론문집)
와 같이 구체적으로 고증하였다.
上古時代에 있어서 (뱀)이 얼마나 두려운 存在였으면, 상호(相互) 인사(人事)말이 (無?乎?) 곧 (뱀 없어?)였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뱀)과 (돼지)의 상극관계(相剋關係)를 발견하여, 집 밑에 돼지를 길러 뱀의 침입을 방지한 것이다. 지금도 아무리 둔한 집돼지도 뱀만 보면 한 입에 잡아먹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집() 안에 사람은 없어도 되지만, 돼지( )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 →家)字 형상(形態)의 글자를 만들어 사람이 사는 집의 뜻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제주도에는 지금도 편소에 돼지를 기르는 풍속이 전래되고 있다.
본래 부터 편소에 돼지를 기른 것이 아니라, 집 구조가 바뀌면서 집 밑에 돼지를 기르던 것이 변소로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근래(近來)까지 경상도 합천초계와 전라도 어촌 등에서도 변소에 돼지를 기른다고 하니, 대륙에서부터 한반도를 거쳐 제주도로 전래된 고대의 풍속이 이 땅에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또한 한대의 분묘에서 출토된 모형도옥(模型陶屋)에도 집 밑에 돼지를 기르는 것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
한국에서는 혼담이 오가다가 남녀간에 (돼지띠)와 (뱀띠)라면, 원진(元嗔)이라하여 무조건 혼담을 중단하는 풍습이 전래되고 있음으로도 동이족의 오랜 풍습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필자는 중국의 문자학자들이 근 이천년 동안이나 (家)자의 자원을 풀지 못하고 論爭하여 온 것을 비로소 결론짓게 된 것이다.
(秋)字를 갑골문에서 찾아보면, ( , , ) 등과 같이 상형하여, 소전체나 해서체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글자였다.
이건 메뚜기
조성(趙誠)은 갑골문의 ( )字에 대하여
象??形, 前面的 象觸鬚, 背上突出的 象羽翼, 在秋天用來鳴叫, 這些都是蟠?的特徵. 卜辭用來指稱春秋之秋則爲借音字. 秋字?文寫作 , 從禾從 從火, 卽 之變, 後來 完全省去, 全字變作小篆的 再演化就成了楷書的秋.) (甲骨文簡明詞典)
상??형, 전면적 상촉수, 배상돌출적 상우익, 재추천용래명규, 저사도시반?적특징. 복사용래지칭춘추지추칙위차음자. 秋字?문사작 , 종화종 종화, 즉 지변, 후래 완전생거, 전자변작소전적 재연화취성료해서적추. (갑골문간명사전)
라고 풀이한 바와 같이 조씨는 갑골문의 ( )의 자형을 귀뚜라미(??)로 해석하였다.
甲骨文에 가을을 뜻하는 메뚜기 밑에 불화(火) 字 ... 뫼산이 아님
(가을)을 (귀뚜라미)로써 상징적 표현을 하였다는 것이 일반상식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것 같지만, 갑골문에 ( )의 자형과 같이 ( ) 곧 (火)자가 밑에 그려진 字形으로 볼 때 결코 귀뚜라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약재(約齋)는 甲骨文의 (秋)자에 대하여
秋字是 的簡體, 從禾, 以 兼爲聲義. 讀如焦是卜用的龜灼焦了不成兆坼的意思, 秋的本義也就是禾焦. 禾焦就是禾黃熟, 秋天就是禾黃的季節. (字源)
추자시 적간체, 종화, 이 겸위성의. 독여초시복용적구작초료부성조탁적의사, 추적본의야취시화초. 화초취시화황숙, 추천취시화황적계절. (자원)
이라 하여, (秋)의 본의를 화초(禾焦)로 해석한 것은 ( )字에 부회(附會)시킨 것이다.
근본적으로 갑골문의 ( )의 자형을 (거북)으로 본 데 문제가 있다.
이효정(李孝定)은
按說文 (?禾穀孰也. 從禾. 省聲. ?文不省.)卜辭? 爲 字, 重文說詳十三卷 下又或?條爲秋條字重文說詳六卷條下至?文之 當由 字所衍變以 爲秋乃?借後或增禾爲形符遂爲從禾 聲 龜形近音竝近或有從禾龜聲之 字後復?龜爲 (廣韻省此字音焦與龜音亦近)遂爲許書?文之 矣.) (甲骨文字集釋)
안설문 (?화곡숙야. 종화. 생성. ?문부생.) 복사? 위 자, 중문설상십삼권 下又或?조위추조자중문설상육권조하지?문지 당유 자소연변이 위추내?차후혹증화위형부수위종화 성 구형근음병근혹유종화구성지 자후복?구위 (광운생차자음초여구음역근) 수위허서?문지 의.) (갑골문자집석)
라 하여, 허신의 설문해자의 (秋)자에 대한 보충설명에 불과하였을 뿐, 갑골문의 (秋)자에 대한 상고를 하지 않았다.
상기 제설에 대하여 서중서(徐中舒)는
卜辭亦借 爲秋, 見卷十火部 字說解. 此卽《說文》秋字?文所本. 或謂 , 等形象蝗形, 爲蝗之初文, 於卜辭辭例亦可順釋.) (甲骨文字典)
복사역차 위추, 견권십화부 자설해. 차즉《설문》추자?문소본. 혹위 , 등형상황형, 위황지초문, 어복사사예역가순석.) (갑골문자전)
과 같이 갑골문중 ( )의 자형을 황충(蝗蟲) 곧 (메뚜기)로 본 것은 정확한 견해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 갑골문중에 ( )字가 직접 황충의 뜻으로 쓰인 예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왜 하필이면 (메뚜기)를 그려 (가을)의 뜻으로 표현하였는가이다.
당시 문자를 만들던 사람들은 (가을)이라는 추상어를 상대방이 (가을)로 알 수 있도록 형상화하는데 고심하였을 것이다. 가을철에 무엇보다도 (메뚜기)를 잡아 불에 구워 먹는 것이 秋(가을)을 대표적으로 상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메뚜기)를 상형하였을 것이다. 더욱 구체적인 증거로는 갑골문중에 ( )자형과 같이 (메뚜기) 밑에 불( →火)을 상형하여 놓은 점이다.
이 갑골문의 자형이 (秋)자라는 것은 서중서(徐中舒)의
以 爲聲, 卜辭同假二字爲秋)(甲骨文字典)
이 위성, 복사동가이자위추)(갑골문자전)
와 같이 고증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뒤에 와서는 (메뚜기)를 갑골문의 자형과 같이 상형하기가 번거로우니까, (메뚜기)는 (벼(禾))에 붙어 살고 있음에 착안하여, 메뚜기 대신에 (禾)字에 (火)字를 더하여 (秋)字를 만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中國人들은 지금도 (메뚜기)를 황충 곧 벌레라하여 전연 먹지 않는 것이다.
펄벅의 (大地)라는 小說에서 그렇게 많은 메뚜기떼가 묘사되어 있지만, 中國人들은 아무리 가난하여도 메뚜기를 잡아 구워 먹을 줄 모른다. 中國人들은 韓國人들이 (메뚜기)를 먹는다고 흉을 볼 정도이다.
中國人들의 메뚜기에 대한 실화를 소개하면,
什?叫??? 妻說:就是蝗蟲, 北方人叫??(中略)妻還典意的解說??的燒法:北方鄕下每年都有蝗蟲侵入, 對農作物損害?大, 到那季節大家出動捕捉, 然後一袋袋?回家, 吃法是將??活生生倒在燒熱的大鍋裏, 將鍋蓋一蓋, 等那些?跳聲沒有了, 打開蓋子再乾炒一會兒到熱爲止, 吃起來又香又脆(中略)以後每當妻提起吃??, 我都以嘲笑的口氣, 說些不相信的風凉話, 等將來, 中國大陸修復, 我一定去多吃些?們北方的??. 我這樣說, 是因爲我根本不相信有吃??那回事.)(台灣, 中央日報. 1970. 11. 15. 文魁)
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인들은 근본적으로 메뚜기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부언할 것은, 현재는 같은 중국인인데도 중국 북방에서 ??(황충)을 먹는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우리 민족과 동계임을 알 수 있고, 또한 (??)(마책)이란 북방어도 곧 한국어의 (메뚜기)를 차음표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메뚜기)를 불에 구워 먹는 것으로 (가을)을 상징하는 글자를 만든 민족이 어느 민족일 것인가? 그러한 생활습속을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 오고 있는 우리 한민족의 조상들이 그 文字를 만들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에서 이미 言及한 바와 같이 中國의 文字學者들이 甲骨文의 (秋)字를 (귀뚜라미)로 본 것이 오석인 이유는 (귀뚜라미)는 불에 구워 먹지도 않고, (귀뚜라미)와 (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점이다.
?文에 (秋)字를 ( )와 같이 쓴 것은 갑골문의 ( )字가 (메뚜기)를 象形한 것인데, 뒤에 어떤 사람이 (거북)의 모양으로 잘못 알고 ( )와 같이 그린 점이 와전되어 ( )→( )와 같이 자형이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 )字를 中國의 文字學者들이 (禾)字에 성부로서 (구)자를 더하였다는 해석은 근본적인 자형상의 오류를 고증하지 않고 범한 부회지설이다.
이처럼 우리 韓民族의 祖上인 東夷族이 아니면, 그러한 字形을 만들 수 없는 東方文字(契)의 例가 한 두 字에 불과하다면 우연한 일치라고도 할 수 있으나, 지금까지 筆者가 甲骨文을 통하여 찾아낸 자료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다한 데서 동방문字(한자)가 동이족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중국학자들의 학설을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른바 漢字의 모든 글자를 우리 民族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附言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서 東方文字는 古代 여러 部族에 依하여 만들어졌으며, 約 60,000字의 漢字中에는 後代 中國人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大部分임은 분명한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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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考證한 바와 같이 華夏族은 이미 原始社會末期에 東夷集團(蚩尤, 少昊)이 融合하여 形成되었음을 中國人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