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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12.12 사태
1) 개요
79년 12월 12일에 국군보안사령관 겸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측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 연행하고, 그를 지지하는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체포 구금한 사건.
2) 성격
12. 12 사태의 성격은 정승화 측과 전두환 측의 주장이 대립된다.
- 정승화측 주장 => 전두환 등 신군부 정치군인들이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일으킨 하극상 반란이다.
- 전두환 측 주장 => 국가원수인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김재규와 함께 동조 가담한 정승화를 체포 조사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3) 당시상황
- 약 한달 반 전인 10.26일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 및 그 부하들에 의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및 경호원 들이 만찬도중 시해를 당하였고,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의 초청으로 사건 장소에 있었다.
-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약 한달 후인 12월 6일 정식 대통령에 선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되었다.
-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건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과 사건장소에 동석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행적에 박대통령 시해에 동조 또는 가담 의심이 가는 여러가지 정황이 포착되어 연행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계엄사령부소속 합동수사본부의 책임자인 전두환의 직속상관이었다.
- 합동수사본부장이 계엄사령관을 연행조사하려면 최규하 대통령(12월6일 헌법절차에 따라 간선으로 대통령에 정식 선출됨)의 재가가 필요했다.
4) 경과 및 결과
-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측은 차규헌, 황영시, 유학성, 최세창, 노태우, 정호용 등의 지지를 모아 하삼수 대령 등을 보내어 정승화 총장을 체포 연행하고, 이에 반발하는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12일 정오를 지나 체포 구금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명의 사상자 및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총장 연행에 대한 사전 재가를 받으려 애를 썼으나 끝내 사전 재가는 받지 못하고 정승화 총장 연행 후 사후 재가만 받을 수 있었다.
- 직후 계엄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맡았던 이희성 대장으로 교체되고, 노재현 국방장관도 윤성민으로 교체되었으며, 계엄령하의 군부 실권을 전두환 및 그 지지 세력인 신군부 측에서 장악하게 되었다.
- 일반 국민들은 80년 서울의 봄 당시 까지는 전두환이라는 인물의 실체를 거의 모르고 있었으며, 5.18 광주사태를 전후하여 운동권 핵심의 홍보에 의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조갑제(한국 현대사의 내막)
http://www.chogabje.com/board/board_list2.asp?tablename=cateboard&curpage=3&searchkey=&searchregion=&how=
2. 시스템 클럽(12.12) http://www.systemclub.co.kr/1212_2005.htm
II. 518 광주사태
아 휴, 정리하기 힘드네요. 대충 이야기 할께요..
1) 개요
- 80년 5월 18일 부터 5월 27일 새벽까지 9일간,
*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와 대학의 휴교령, 정치활동 금지 및 김대중 연행 등에 대한 정부측 조치에 항의하여,
* 광주에서 김대중 석방과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하였고,
* 계엄군의 과격 진압과 시위 주동자들의 선동적 유언비어에 흥분한 시민들이 합세하여
* 시위대의 무장 및 계엄군의 발포로 사태가 확산되어
* 약 200여명의 사망자와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유혈 폭동사태.
- 이 사태로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127명과, 군인 109명, 경찰 144명이 부상(사태종결 직후 계엄사 발표)
** 정확한 사망자수 파악은 이후 수년간 우여곡절을 겪음.
한때 광주출신 국회의원이 인구통계를 근거로 2만명설 까지 제기하는 등의 해프닝도 있었으나, 후에 김영삼 정권 때 공개적으로 사망자 및 실종자 접수를 받은 결과 최종적으로 사망 154명(가족들 주장 사망자), 행방불명 70명 도합 224명이 접수 됨(행방불명은 대도시에서 매일 수십명씩 있음).
당시 분위기에서 실종 시기나 동기가 애매한 사람까지 모두 접수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 5.18 관련 사망자는 정부 발표 191명이라는 것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 같음.
2) 성격
5.18 광주사태의 성격에 대해서는 견해가 대립된다.
- 시민군, 진보진영측 : 민주화요구 시위에 전두환 등 정치 군인들이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폭력적으로 진압 하고, 시민에게 발포한 유래없는 민주화 압살 학살극이다. 동학혁명과 항일투쟁, 4.19의 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하는 역사에 길이 빛날 숭고한 민주화 혁명이다.
- 계엄군, 우익진영측 :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된 비상계엄 하에서 과격시위가 일어났고, 파출소 등 무기고를 습격하여 소총 및 기관 총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방송국 세무서 등에 방화하는 등의 무장폭동으로 발전하여, 부득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배후에 민중을 선동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음모한 김대중, 윤상원 등 자생적 혁명주의자, 북한의 남조선 혁명공작과 관련된 인력의 간접개입에 의한 무장폭동이다.
3) 당시상황
-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유신헌법의 간접선거 절차에 따라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 대통령은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연 내에(80년) 완료하고 80년 말경 직선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81년 초에 정권을 이양한다는 정치일정을 제시.
- 80년 봄이 되자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을 주축으로 하는 야당 및 민주화 단체 등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야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는 각종 집회를 열었고, 대학생들은 이를 지지하며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 및 집회를 전국적으로 전개(80년 서울의 봄).
- 직전 4월 말에는 사북탄광에서 폭력적 노사분규가 일어나 경찰관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하였으며 사북 일대가 치안공백 상태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
- 5월 15일 운동권 대학생이 주도하여 10만여명이 운집한 서울역 시위에서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경찰 수명이 숨지는 등 극심한 사회혼란 및 안보불안 상태에 놓임.
- 김대중 등 재야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하여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것을 선언하고 대학생 등을 동원하여 봉기계획을 추진.
- 이에 정부는 5월17일 자정을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김대중 및 그 측근 등을 내란 혐의로, 김종필 이후락 등을 부정축재 등의 혐의로 체포하고, 김영삼을 가택 연금함.
-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모든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시킴.
4) 경과
- 5.17일 0시를 기하여 발표된 계엄 포고령에 의하여 조선대 전남대 등 광주시내 대학가에 계엄군 진주(교내의 학생들을 강제로 추방시킴).
- 5. 18일 오전 등교하던 전남대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
* 오전 10시경 시내 중심가로 이동한 2백여 명의 전남대생이 시위, 오후 2시경에는 1천여명으로 늘어나 경찰과 투석전 등 격렬한 시위로 경찰이 밀리자, 오후 5시 40분경 계엄군 병력을 투입, 상호 격렬한 충돌 및 부상자 다수 발생.
*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 계엄군에 살해되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 유포 => 전 광주시대로 확산
- 5.19일 시위가 확산되어 파출소 방화, 차량 방화 등의 사태 발생.
* 시위대 나주 예비군 대대 무기고 등을 습격, 소총과 탄약 탈취하여 무장.
* 광주 시외 버스터미널 근처의 시위대 중에 총상으로 의심되는 사망자 1명 발생.
- 5.20일 1만명의 시위대가 광주 MBC방송국 점거 방화/시청습격 파괴/ 도청앞 저지 경찰관 4명이 시위대가 돌진하는 차량에 치어 사망 / 시내 파출소 다수 방화
* 광주시내의 거의 모든 경찰서와 파출소를 시위대가 습격 점거.
- 5.21일 광주세무서 방화로 전소/ CBS 방송국 점거 방화 및 차량 탈취.
* 시민군이 오전에 아시아자동차를 습격, 장갑차 및 군용 차량 등 2백여대를 탈취.
* 12시경 도청경비 계엄군과 수만명의 시민군 대치하던 중, 시위대의 차량 돌진으로 계엄군이 깔려 수명의 사상자 발생. 그 와중에 계엄군 시민군을 향하여 최초(?) 발포.
(그 이전에 시민군 혹은 계엄군이 먼저 발포했다는 주장과 증언들도 있음)
* 시민군이 5차에 걸쳐 2천7백 여명의 죄수가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습격. 상당수의 사상자 발생.
* 계엄군 외곽지대로 완전 철수 => 시민군측이 광주시내를 장악, 계엄군 광주 외곽 봉쇄.
- 5. 23일 시민군측 지역유지 및 종교계 인사 등으로 수습위원회를 구성, 무기 회수와 당국과의 협의를 통한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 => 강경파의 타협 반대로 수습 실패.
- 5.24이후 강경파와 온건파의 의견 대립과 혼란 속에 광주 시내는 시민군이 장악하고 계엄군은 광주 외곽 봉쇄.
* 대부분의 시민들은 귀가하고 강경파 시민군 200여명 정도가 전남도청 및 인근에 잔류.
- 5.27일 새벽에 시민군의 최종 집결지인 전남도청에 계엄군이 진입하여 장악 => 시민군 완전 해산.
* 사태 종결
5) 결과 등
*** 계속 기술하기 너무 힘들군요. 다음 사이트를 참조바랍니다.
* 다만, 각자의 입장과 주장이 크게 대립 됨을 유의바랍니다.
* 어느 일방의 주의주장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 중심으로만 기술하려 노력하였습니다.
* 본래 역사적 사실의 해석은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 대부분 기억에 의존하여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일부 내용의 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http://altair.chonnam.ac.kr/~cnu518
지만원 시스템 클럽 http://www.systemclub.co.kr/0518_2005.htm
역사학도의 시사토론 글방 http://cafe.daum.net/issue21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1407&docid=692759&qb=7KGw6rCR7KCcIDUuMTg=&enc=utf8&pid=fWEA/g331y0ssZ/2TI4ssv--061890&sid=Stmi6iaI2UoAAEt-GB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