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蘭西·法蘭西·프랑스 원음주의에 짓눌린 외국어 표기 불란서·법란서·프랑스의 차이
고종석
나는 30대 후반을 불란서에서 보냈다. 허랑방탕한 세월이었다. 처음부터 무슨 작정을 하고 간 것이 아니니, 그런 허랑방탕은 예정된 일이기도 했다. 그저 바람에 이끌려 나는 가족을 이끌고 파리로 날아갔고, 환란의 여파에 밀려 가족과 함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파리행 비행기를 탔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이는 서울행 비행기를 탈 때는 고등학생, 중학생이었다. 그 동안 나와 아내는 40대가 됐다. 아이들은 불어가 유창해진 만큼 한국어가 어눌해졌다. 나와 아내는 불어도 한국어도 예전처럼 어눌했다.
*‘불란서’의 이미지, ‘프랑스’의 이미지
아내와 내가 대개는 불란서라고 부르고 이따금 프랑스라고 부르는 나라를, 아이들은 꼭 프랑스라고 부른다. 그리고 내 어머니는 그 나라를 꼭 불란서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그 나라를 불란서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내 아이들은 자라서도 아마 그 나라를 프랑스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아마 불란서와 프랑스를 오락가락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어의 불란서와 프랑스는 세대의 표지라고도 할 만하다. 「프랑스」를 표준어로 본다면, 사회언어학적으로 「불란서」는 일종의 사회방언이라고도 할 만하다. 특정한 연령대 이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나는 또래 친구들이나 손윗사람들과 얘기할 때는 그 나라를 대체로 불란서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이들과 얘기할 때는 그 아이들 입버릇에 맞춰 프랑스라고 해 준다. 물론 글을 쓸 때는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프랑스라고 쓴다.
사실인즉, 내게는 프랑스라는 말보다 불란서라는 말이 더 친근하다. 그것은 내 입버릇이 내 또래에 견주어도 꽤나 보수적이고 「고전적」이라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 또래 친구들은 대체로 프랑스라는 말을 선호하는 듯해하는 말이다. 내가 이 나라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아마 초등학교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이 나라 이름을 프랑스라고 배웠다. 내가 일상적으로 독일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그 교과서에 도이칠란트라고 박혀 있었듯이. 그러니까 내게 불란서나 독일이 프랑스나 도이칠란트보다 더 친숙한 것은 사회교육이나 일상적인 독서가 학교교육을 압도한 결과다.
내 또래는 물론이고 어린아이들 가운데도 독일을 도이칠란트라고 부르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불란서/프랑스의 경우는 불란서가 프랑스에 점점 밀려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내게는 불란서 영화나 불란서 안경원이나 불란서 요리나 불란서 빵집이, 프랑스 영화나 프랑스 안경원이나 프랑스 요리나 프랑스 빵집보다 더 불란서/프랑스적이다. 불란서가 내게 주는 마음의 떨림을 프랑스는 내게 주지 못한다. 나는 불란서에서 역동적인 역사와 세련된 문화의 힘을 느끼지만, 프랑스에서는 테제베와 미라주 전투기로 상징되는 얄팍한 모더니티만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감상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불란서의 원래 글자인 佛蘭西는 일본인들이 France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것이다. 요즘은 일본에서도 가타카나로 후란스(フランス)라고 쓴다. 즉 佛蘭西라는 표기는 일본에서도 아주 낡은 것이다. 그러니까 佛蘭西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불란서」라는 말은 과거 일본어가 한국어에 남겨 놓은 유물인 셈이다.
*점차 사라지는 한자 음역 이름들
나라 이름을 포함한 외국의 고유명사를 원음에 가깝게 부르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여서, 불란서가 프랑스에 맞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말이 쉬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불란서라는 말은 한국어의 어휘 목록에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어, 불문학, 불한사전, 한불사전 같은 말들과 단단히 묶여 있기 때문이다. 불어나 불문학이나 불한사전이나 한불사전이라는 말이 사라지기 전에는, 불란서라는 말도 근근이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갈 것이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어려서는 「불령 인도지나」(프랑스령 인도차이나)라는 말을 가끔 들었던 것 같다. 또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을 「불역」이라고 표현하는 관습도 아직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추세는 나라 이름을 그 나라 발음대로 불러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한자어 국명은 중국, 일본, 월남, 미국, 영국, 독일, 호주, 몽고, 인도, 태국, 희랍 정도다. 이 가운데 전통적인 한자문화권 나라인 중국와 일본은 아주 오래도록 중국, 일본으로 불릴 것이다. 한국어가 한자와의 관련을 끊지 않는 한(그런데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중국을 「종궈」라고 부른다거나, 일본을 「닛폰」 또는 「니혼」으로 부르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월남도 한자 문화권에 속하기는 하지만, 프랑스 식민 치하에서 한자가 폐지되고 로마자가 채택된 이후 이 나라 문화와 한자 사이의 관련은 아주 엷어졌다.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 나라 이름을 그 나라 발음에 가깝게 베트남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점차 자리잡고 있다. 나이든 세대에게는 아직도 「베트남전」보다 「월남전」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만, 새 세대는 이 나라를 베트남이라고 부른다. 대중 매체도 이 관행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월남이라는 말 역시 금세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 역시 한국어 어휘 목록 안에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월맹, 파월 장병, 주월 특파원, 월남 식당 같은 말들과 단단히 묶여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같은 한자어 국명이라도 중국, 일본, 월남은 다른 한자어 국명과 그 본질이 조금 다르다. 이 세 국명 이외의 다른 국명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원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을 우리가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즉 한자로 음역한 국명이다. 그러나 「중국」 「일본」 「월남」이라는 말은, 해당 나라에서 한자가 사용되었거나 사용되고 있으므로, 따로 한자를 통한 음역 과정을 거쳐 지어진 이름들이 아니다. 그 이름들은 그 나라 사람들이 한자로 짓고 자기들 한자음으로 읽어온 자기 나라 이름을 우리가 그저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중국, 일본, 월남 같은 이름은 진짜 한자 국명이다. 중국이나 일본이나 월남 같은 국명이 한국어 어휘 목록 안에서 지니고 있는 질긴 생명력은 부분적으로 이 이름들이 진짜 한자어라는 사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들
한자로 음역된 국명이라고 해서 생명력이 작은 것은 아니다. 미국, 영국, 독일 같은 이름들은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 같다. 미국의 「미(美 또는 米)」는 아메리카의 둘째 음절, 즉 「메」를 음역한 것이지만, 우리가 미국을 아메리카라고 부를 일은 가까운 장래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미국을 공식적으로 부를 때 「미합중국」이라거나 「아메리카 합중국」이라고 부르는 일도 있지만, 그것 역시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번역한 것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현지인들이 자기 나라를 부르는 원래 이름은 아니다.
영국이라는 이름도 오래갈 것이다. 영국이라는 말은 잉글랜드의 부분적 음역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어원학 수준에서는 영국과 잉글랜드가 동의어다. 그러나 현대 한국어에서 영국과 잉글랜드는 지시하는 범위가 다르다. 영국은 대브리튼섬과 북아일랜드를 합한 연합왕국(the United Kingdom) 전체를 일컫지만, 잉글랜드는 대브리튼 섬에서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방을 뺀 잉글랜드 지방만을 가리킨다. 이들 지방이 각기 독립적인 대표단을 출전시키는 국제 축구대회 같은 데서 이런 구분된 용법이 도드라진다. 예컨대 월드컵 축구에 「영국」 대표팀은 출전하지 않는다. 「잉글랜드」 대표팀이나 「스코틀랜드」 대표팀이 출전할 뿐이다.
독일 역시 쉽사리 도이칠란트로 바뀔 것 같지 않다. 그 이유 가운데 독일이라는 이름에 견주어 도이칠란트라는 이름이 너무 길다는 것도 있으리라. 비슷한 이유를 호주에도 댈 수 있겠다.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이름은 호주라는 이름에 견주어 너무 길다. 게다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이름이 중부 유럽의 나라 오스트리아와 혼동될 염려가 있다는 점도 호주라는 이름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몽고라는 이름도 계속 사용될 것이다. 이 말이 지닌 역사의 무게 때문이다. 몽고의 원래 글자인 蒙古는 몽고 사람들이 자신을 일컫는 말인 「몽골」을 당대(唐代)의 중국인들이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몽고」라는 말과 「몽골」이라는 말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몽고어」와 「몽골어」를 구분한다. 그들에 따르면 「몽고어」는 몽고 사람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 사용해온 몽고계 언어 전체를 가리키는 반면, 「몽골어」는 현재의 몽골인민공화국에서 사용되는 표준 몽골어, 이른바 할하 몽고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구분에 따르면 한자 음역어 「몽고」는 「몽고계」라는 뉘앙스를 지닌 넓은 개념이 되고, 원음에 가까운 「몽골」은 현재의 몽골을 가리키는 좁은 개념이 되는 셈이다. 이런 용법은 일본 학자들의 습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또 한국의 몽고어학자들이 다 따르는 습관도 아니다. 그러나 한자로 음역된 이름과 원음에 가까운 새 이름의 차이를 이용해서 학문적 개념의 구분을 시도한 것은 멋진 착상이라 할 만하다.
인도라는 말도 길게 사용될 것 같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서는 인디아라는 (변형된) 영어 이름을 쓰고 있지만, 대중 매체에서는 인도라는 말을 선호하는 듯하다. 태국은 인도보다 세력이 약하다. 기성 세대의 입버릇에는 아직 태국이 완강히 남아 있고 젊은 세대도 무심코 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신문을 포함한 대중 매체에서는 점차 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태국 군부」는 「타이 군부」에 밀리고 있고, 「태국 국왕」은 「타이 국왕」에게 양위할 준비를 하고 있다. 희랍도 마찬가지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희랍이라는 한자 음역 이름보다는 그리스라는 영어 이름이 더 자연스럽다. 「희랍」의 원래 글자인 希臘은 「그리스」의 음역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헬라」의 음역이다.
이 나라들 이외에도 우리가 한자 음역 이름으로 부르는 나라들이 있다. 앞서 말한 불란서가 그렇고, 이태리가 그렇고, 화란이 그렇다. 그러나 이 이름들도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에 점점 밀리고 있는 듯하다. 「화란」이라는 말의 용법은 「영국」의 용법에 비견할 만하다. 화란의 원어인 홀란드는 네덜란드 왕국의 서부 지역을 의미하지만, 한국어에서 화란은 홀란드를 포함한 네덜란드 왕국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나라들에서도 홀란드가 흔히 네덜란드 왕국 전체를 의미하고 있는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한국어 「화란」과 그 원어인 「홀란드」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즉 한국어 「화란」은 「네덜란드」의 동의어일 뿐, 「홀란드」처럼 네덜란드 서쪽지방을 가리키는 말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나이든 사람들은 비율빈, 애급, 토이기, 오지리, 서반아, 포도아, 애란, 파란, 서서, 서전, 정말 같은 이름을 가끔 입에 담지만, 이 말들에서는 짙은 의고(擬古) 취미가 묻어난다. 일상적인 언어에서 비율빈은 필리핀으로, 애급은 이집트로, 토이기는 터키로, 오지리는 오스트리아로, 서반아는 스페인으로, 포도아는 포르투갈로, 애란은 아일랜드로, 파란은 폴란드로, 서서는 스위스로, 서전은 스웨덴으로, 정말은 덴마크로 바뀌었다.
스페인의 경우에는 영어 이름인 스페인에 대해 스페인어 이름인 에스파냐가 약간 저항하고 있지만, 둘 사이의 싸움은 이제 끝난 것 같아 보인다. 스페인을 에스파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스페인 문학자들을 포함한 스페인학 연구자들밖에 없는 것 같다.
*이중의 변형을 겪은 이름들
실상 우리가 예전의 한자 음역 이름을 버리고 채택한 이름 가운데 많은 수는 그 나라의 원어 이름이 아니라 영어 이름이거나 다소 변형된 영어 이름들이다. 영어를 모르는 오스트리아 시골 사람은 자기 나라 이름이 오스트리아인 줄 꿈에도 모를 것이다. 독일어밖에 모르는 그들에게 자기 나라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동쪽의 제국」, 즉 외스터라이히일 것이다. 핀란드 사람들이 「수오미」라고 부르는 나라를 우리는 핀란드라고 부르고, 헝가리 사람들이 「마자르오르삭」이라고 부르는 나라를 우리는 헝가리라고 부른다. 러시아나 폴란드나 그리스라는 「한국어」 역시 그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영어 사용자들이 그 나라를 부르는 이름(의 부분적 변형)들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을 다시 원어 이름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은 부질없을 터이다. 어떤 단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특정한 언어 입법자가 제시하는 명료한 원칙이 아니라,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때로는 변덕스러운 습관이기 때문이다. 이 영어 이름들은 이미 한국어 화자들의 습관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것은 20세기 내내 한국어에 끼친 영어의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한다. 실은 그것은 한국어에 끼친 일본어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외국의 고유명사를 영어식으로 부르는 한국인의 관습은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 탓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영향 탓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라 이름을 비롯한 외국의 고유명사가 한국어에 대량으로 흡수된 것은 19세기 말 이후다. 물론 그 이전의 문헌들에도 瓜蛙(자바 『고려사』)니 波斯(페르샤 김만중의 『西浦漫筆』)니 英吉利(영국)니 亞非里加洲(아메리카주)니 하는 지명들이 보인다. 이런 이름들은 중국인들이 외국의 지명을 음역한 것을 우리가 수입한 것이다. 그러니까 개화기 이전에도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몇몇 외국의 지명들이 아주 낯선 이름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세계의 나라 이름들과 그 밖의 고유명사가 한꺼번에 한국어 어휘 체계 속으로 흡수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각급 교과서, 신문, 신소설 따위의 문헌들에는 그 때까지의 한국어 문헌이나 한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명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예컨대 나라 이름으로는 義大利(이탈리아), 法蘭西(프랑스), 波蘭(폴란드), 凶牙利(헝가리), 俄羅斯(러시아), 丹麥(덴마크), 瑞典(스웨덴), 瑞西(스위스), 希臘(그리스), 埃及(이집트), 葡萄牙(포르투갈), 西班牙(스페인), 和蘭(네덜란드), 白耳義(벨기에), 濠太利亞(오스트레일리아), 德意志(독일), 土耳其(터키), 禮哥羅哥(니카라과), 把羅貴(파라과이), 彬涯朱越那(베네수엘라), 拔利比亞(볼리비아) 등이 보이고, 도시 이름으로는 巴里(파리), 排沙遊(베르사유), 馬塞里(마르세유), 里昻(리용), 伯林(베를린), 倫敦(런던), 牙典(아테네), 華盛頓(워싱턴), 池家皐(시카고), 必那達彼亞(필라델피아), 密加(메카), 波斯頓(보스턴), 保羅喀那(볼로냐), 奧克司法達(옥스퍼드), 紐育(뉴욕), 伊丹堡(에든버러), 發太毛(볼티모어), 布朱淡(포츠담), 巖秀擄淡(암스테르담), 祿擄淡(로테르담), 富羅泄(브뤼셀), 安道岬(앤트워프), 咸福(함부르크), 岷仁見(뮌헨) 등이 보인다. 또 인명으로는 疏格刺低(소크라테스), 布拉圖(플라톤), 亞力斯多德耳(아리스토텔레스), 皮斯哥刺斯(피타고라스), 亞其美低斯(아르키메데스), 何馬(호메로스), 哥伯尼(코페르니쿠스), 家利勒阿(갈릴레이), 培根(베이컨), 陸克(로크), 德嘉(데카르트), 堪德(칸트), 希傑耳(헤겔), 婁擄(루터), 葛彬(칼뱅), 古天堡也(구텐베르크), 馬質蘭(마젤란), 夫蘭克連(프랭클린), 衣底順(에디슨) 같은 이름들이 보인다.
이 이름들은 대체로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의 한자음을 기준으로 음역한 것이므로, 그것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을 때는 원음과 꽤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물론 巴里 같은 경우는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도 Paris의 원음과 비슷해서, 지금 우리가 프랑스의 수도를 「파리」라고 할 때 그것이 원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인지, 아니면 원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을 한국음으로 읽은 것인지는 모호하다. 도시 이름 가운데 伯林 같은 것은 요즘도 나이든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하다. 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유럽의 한국인 학자·예술가들을 간첩으로 몰아 조작한 사건을 사람들은 「동베를린 사건」으로보다 「동백림 사건」으로 더 기억하고 있다.
*한문 표기의 혼란
「불란서」와 「프랑스」의 경우에서 보듯 지금도 외국 지명의 표기가 고정돼 있지 않지만, 이 말들이 처음 한국어에 편입된 개화기에는 그 혼란이 더 심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원어 이름(이나 영어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 주류를 이뤘던 표기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음역한 외국 지명을 수입해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 한자 이름의 한국음을 한글로 표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원어 이름이나 영어 이름을 한글로 표기한 것과,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넘어온 음역 표기가 혼재해, 그 당시의 외국 지명 표기에는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예컨대 우리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프랑스만 하더라도 佛蘭西, 法蘭西, 法國, 불랸셔, 불란셔, 법란셔, 흐란스, 프란쓰, 프랑쓰 등으로 표기되었다. 佛蘭西는 앞서 말했듯 일본인들의 한자 음역이다. 그리고 法蘭西는 중국인들의 한자 음역이고 法國은 法蘭西의 준말이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프랑스를 法國으로 표기한다.
여담이지만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프랑스」라는 말의 앞부분을 각각 法과 佛에 대응시킨 것이 재미있다.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자기들의 한자음을 기준으로 삼았으므로 음역을 위해 골라낸 글자는 서로 달랐지만, 이 글자의 의미가 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佛은 「부처」라는 뜻이고, 法 역시 이 글자가 지닌 여러 가지 뜻 가운데 「불교의 진리」라는 의미가 있다. 두 나라 사람들 다 프랑스에 불교의 이미지를 입힌 것이다. 흔히 「가톨릭 교회의 맏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에 의해서 확실한 「불교 국가」가 되었다. 일본어에서는 佛을 「부쓰」라고 음독하면 「부처」라는 뜻이 되고, 「후쓰」라고 음독하면 「프랑스」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佛語를 「부쓰고」라고 읽으면 「불교용어」 또는 「부처의 말」이라는 뜻이 되지만, 「후쓰고」라고 읽으면 「프랑스어」라는 뜻이 된다. 佛書나 佛學이나 佛法 같은 말들도 마찬가지다. 음독하는 방법에 따라 불교 서적, 불교학,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뜻도 되고, 프랑스어 서적, 프랑스에 관한 학문, 프랑스법이라는 뜻도 된다.
불랸셔와 불란셔는 佛蘭西를 19세기 말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 한글로 표기한 것이고, 법란셔는 法蘭西를 그 당시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흐란스와 프란쓰와 프랑쓰는 France의 원음을 한글로 유사하게 표기한 것이다. 흐란스는 일본 사람들의 발음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이름들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프랑스나 불란서와도 다르다.
게다가 한자 음역의 중국식과 일본식 사이에만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자의 음역표기도 동일한 대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실현되는 경우가 많았고, 한글 맞춤법이 통일되기 이전이어서 한글 표기의 혼란도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다.
우선 외국 고유명사의 한자 음역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본디 음역이라는 것은 한자 제정 원리인 육서(六書) 가운데 하나인 가차(假借)와 비슷하게, 뜻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비슷한 음만을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자 음역의 본산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하나의 고유명사가 여러 방식으로 표기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 그것을 수입한 한국에서도 혼란은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개화기 문헌들에서 이탈리아는 위에서 언급한 義大利와 우리 기성세대에게 비교적 익숙한 伊太利 외에 伊大利 意太利 意大利 以太利 伊國 따위로 표기됐다. 독일을 지칭하는 표기도 德意志 외에 德國, 獨逸, 獨國, 日耳萬(게르만의 음역) 따위가 있었다. 덴마크에 대한 지칭도 위에 언급한 丹麥 외에 나이든 한국인에게 익숙한 丁抹이 있었고, 러시아는 俄羅斯 외에 路西亞, 俄國 따위로 표기됐다. 도시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파리는 巴里 외에 지금 중국어의 관행과 마찬가지로 개화기 한국 문헌에 巴黎로도 표기됐고, 보스턴은 波斯頓 외에 波士頓, 寶樹墩 따위로 표기되었다. 뉴욕에 대한 지칭도 紐育 이외에 紐約이 있었다.
사람 이름은 혼란이 더 했다. 피타고라스는 皮斯哥刺斯 외에 披沙哥刺斯, 披阿哥刺斯, 畢達哥拉斯 따위로 표기되었고, 또 줄여서 皮宅高, 畢達固라고 표기되기도 했다. 皮宅高나 畢達固는 피타고라스의 「피타고」만을 중국 사람들이 음역한 것을 우리가 빌려다 쓴 것이다. 이런 예들은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의 전부 음역하면 위에서 언급한 亞力斯多德耳가 되지만, 흔히는 「아리스」나 「아리스토」까지만 음역된 阿利秀, 亞里斯德, 亞里斯多 따위로 표기되기도 했다.
너무 길다 싶은 이름을 짧게 줄이는 것은 사람이름만이 아니라 땅이름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얘기했듯 오스트레일리아는 濠太利亞로 음역 표기되었는데, 이것은 흔히 濠洲로 축약됐다. 濠洲는 濠太利亞의 濠에다가 대륙을 뜻하는 洲를 붙인 말이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濠洲는 나라 이름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이름인 오세아니아, 즉 대양주(大洋洲)를 지칭했다고 할 수 있다. 구주(歐洲)가 유럽 대륙을 뜻하고, 미주(美洲)가 아메리카 대륙을 뜻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호주」가 대륙 이름으로보다는 나라 이름으로 쓰이고 있듯이, 그 당시의 濠洲 역시 나라 이름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개화기 사람들도 濠洲의 영역에서 뉴질랜드와 폴리네시아·멜라네시아·미크로네시아 지역을 제외했다. 그것은 한 단어의 외연이 어원을 포함한 언어학적 요인보다는 사람의 관습에 더 크게 의존한다는 또 다른 증거다.
*한글 표기의 혼란
원음을 한글로 표기할 때도 혼란은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부다페스트는 다페스트, 다페쓰드, 다폐쓰트, 다페숫 등으로 표기됐고, 브뤼셀은 루쎌, 룻셀, 루셀, 라씰, 럿실 따위로 표기됐으며,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외에 오슈트리아, 오슈튜리아, 오스튜리아, 오쓰트리아, 오쓰트리, 오스탓 등으로 표기됐다. 또 한자 음역으로는 歐羅巴라고 표기하던 유럽은 원음의 한글 음역으로는 유롭, 유로부, 유로바, 유로파, 유롭파, 요롭고 따위로 표기됐다. 사람 이름도 사정은 같아서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개화기 문헌에 알렉산더 외에 알넥산더, 아렉산더, 알렉산던, 아력산더, 알넥산 등으로 표기되었고, 괴테는 데, 에데, 테 따위로 표기됐다. 원음의 한글 표기마저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것은 그때까지 한글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법이 확정되지 않았던 데 일차적 원인이 있었고, 또 언어를 포함한 외국사정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지식이 충분치 않았다는 데도 원인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외국의 고유명사를 표기하면서 겪고 있는 혼란의 일부는 그 당시 혼란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외국의 고유명사를 표기하는 방식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건너온 음역 한자어를 한자나 한글로 표기하는 방식에서 점차 원음(또는 영어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것 역시 부분적으로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인들 역시 외국 고유명사를 표기하기 위해 처음엔 음역 한자를 사용하다가 점차 원음 또는 영어음의 가타카나 표기로 나아가고 있다. 원음주의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제 우리는 비교적 잘 정비된 한글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을 지니고 있어서, 외국의 고유명사를 표기하는 데 개화기 때와 같은 혼란은 겪고 있지 않다. 비록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것이 아직도 다듬을 데가 많고, 또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외국어 고유명사 표기의 과도한 원음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나는 원음주의를 두 가지로 구별하고 싶다. 그 첫째는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다. 이 원음주의는 한자 음역어를 한국음으로 읽는 개화기 의 방식을 버리고, 원음에 가까운 한글 표기를 하자는 주장이다. 이 원음주의는 원칙상 옳고 자연스럽다. 우리가 덴마크를 丁抹이라고 쓰거나 「정말」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워싱턴을 華盛頓이라고 쓰거나 「화성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습관이라는 예외다. 우리가 일본을 「닛폰」으로 바꾸거나 중국을 「종궈」로 바꿀 수 없듯이, 독일을 도이칠란트로 바꾸거나 호주를 오스트레일리아로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원음주의라는 것이 습관을 강제로 바꿔야 할 만큼 대단한 원칙은 아닐 것이다. 그 점을 전제한다면,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는 옳다.
*딜레마에 빠진 「창비」의 원음주의
이런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 안에는 이와는 개념이 다른 원음주의가 또 있다. 이 둘째 원음주의는 외국의 고유명사를 원음대로 표기하면서 한글이 허용하는 한 원음에 가장 가깝게 표기하자는 주장이다. 이 좁은 의미의 원음주의를 나는 「과도한 원음주의」 또는 「근본주의적 원음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이 과도하거나 근본주의적인 원음주의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생기지 않는다. 이 원음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원음주의를 근본주의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사람들은 세 가지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소리의 물리적 특성만을 생각할 뿐 그 소리들이 한 언어에서 조직되는 음운체계를 간과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언어 규범에 대한 최종 심판관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위에서도 얘기한 습관의 문제다. 셋째, 그들은 외국어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하고 원음주의를 고집하는 대표적 매체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일 것이다. 이 잡지에서 프랑스의 수도는 「빠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는 「프루스뜨」다. 프랑스어의 무성 파열음은 영어에서와 달리 무기음(無氣音)이므로 「파리」가 아니고 「빠리」이며, 그 무성 파열음이 R 소리 앞에서는 유기성(有氣性)을 회복하므로 「쁘루스뜨」가 아니라 「프루스뜨」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원음주의자들은 프랑스어 첫걸음을 한국인들에게 걸리느라 바빠서, 프랑스어에서 Paris의 p와 Proust의 p가 동일한 음소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빠리」의 첫 소리와 「프루스뜨」의 첫 소리를 구별하는 원칙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자면, spy는 「스파이」가 아니라 「스빠이」가 되고, style은 「스타일」이 아니라 「스따일」이 돼야 할 것이다. 영어에서 s 소리 다음에 오는 p, t, k 소리는 그 뒤에 r 소리가 오지 않는 한 유기성을 많이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비」는 아직까지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속생각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창비」에서는 여전히 「스파이」고 「스타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근본주의적 원음주의자들은 우리가 「리얼리티」로 표기하는 것을 「리앨러티」로 바꾸고 싶어하고, 「잉글랜드」로 표기하는 것을 「잉글런드」로 바꾸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reality를 「리얼리티」라고 표기하는 것은 그 단어의 발음이 「리앨러티」에 가깝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진짜 이유는 「리얼리티」라는 단어가 한국어에서 「리얼」(영어 real에서 차용한)이라는 단어와 굳게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England를 「잉글랜드」라고 표기하는 것도 「잉글런드」라는 올바른 발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단어의 뒷부분과 「랜드」(영어 land에서 온)라는 말의 관련을 표상하기 위해서다.
그런 관련을 파괴하고 원음주의를 고수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가령 그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자.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그 원음주의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외국어의 음성학과 음운론에 통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어떤 위대한 학술 단체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근본주의적 원음주의를 만족시킬 외래어 표기법의 세목은 수백권의 책에도 다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창비」의 표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창비」가 원음주의를 적용하는 언어는 고작 영어와 프랑스어를 포함해서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몇몇 유럽어들과 일본어 정도다. 그 원음주의는 다른 언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령 프랑스어 이름만 해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대로라면 「알튀세르」라고 표기할 Althusser를 「창비」는 여전히 「알뛰쎄」라고 표기한다. 「튀」를 「뛰」로 표기한 것이나 「세」를 「쎄」로 표기한 것은 예의 「원음주의」 때문이고, 「르」를 잘라먹은 것은 이 유명한 철학자의 이름을 부를 때 프랑스인들은 마지막 r를 발음한다는 사실이 「창비」의 편집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 이름이라고 해서 만만한 것은 아니다. Marjoribanks라는 영국인 이름을―외래어 표기법을 따른다고 하더라도―「마시뱅크스」로 읽고, Featherst-onehaugh라는 또 다른 영국인의 이름을 「팬쇼」라고 읽는다는 걸 그 집안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알겠는가?
*무모한 ‘전문가’들이 가져올 혼란
지난해 월드컵 축구 경기를 계기로 포르투갈어 고유명사 표기에 일고 있는 개신(改新) 바람도 나는 우려스럽다. 예전 같으면 「로날도」라고 표기됐을 어느 축구 선수 이름이 월드컵 대회를 계기로 「호나우두」로 둔갑했다. 표기 방식이 바뀐 데에는 아마 어느 「위대한 포르투갈어 전문가」의 참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강세의 위치에 따른 모음의 변화를 제쳐 놓는다면, 이 「전문가」는 포르투갈어의 R가 어두와 몇몇 자음 뒤에서는 ㅎ에 가까운 소리로 실현된다는 것, 그리고 특히 브라질 포르투갈어의 L이 음절 끝에서 이른바 「어두운 L」로 변해서 모음화한다는 것을 「무지한 한국 민중」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가 한 일은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외래어 표기에 쓰레기 한 무더기를 더 던져 놓은 것뿐이다. 이 「전문가」 덕분에 우리는 앞으로 포르투갈어의 R를 위치에 따라서 ㅎ과 ㄹ로 구별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고, 포르투갈어의 L을 위치에 따라서 ㄹ과 「우」로 구별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더구나 음절 끝의 L이 「어두워지는」 정도는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지방에 따라 다르니, 이젠 어떤 사람의 출신지를 확인해가며 이름의 한글 표기 방식을 결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 용감한 포르투갈어 「전문가」의 선창에 힘을 얻어, 『실낙원』의 저자를 「밀턴」이 아니라 「미으턴」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국 영어 전문가가 머지 않아 나올지도 모른다. 대부분 지역의 영국 영어에서도 음절 끝의 L 소리가 「어두운 L」로 변해 거의 모음화하니 말이다. 또 분명히 어느 프랑스어 전문가가 그 뒤를 이어서 예술과 패션의 도시 빠히(파리)에 대해서, 그리고 미떼항(미테랑)과 호까흐(로카르)와 시하끄(시라크) 같은 정치가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학술회의」는 처음의 그 포르투갈어 「전문가」가 호나우두의 조국은 「브라질」이 아니라 「브라지우」라고 외치며 막을 내릴 것이다.
설령 우리가 모든 외국어에 통달해서 외래어 표기법이 근본주의적 원음주의를 만족시킬 만큼 정비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대중의 습관, 관행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 관행이 예의 과도한 원음주의에 배치될 때는 물론이고, 현행 외래어 표기법과 어긋날 때도 마찬가지다. 「베르그송」이 아니라 「베르크손」이 원음을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표기한 것이라고 해서, 한국인에게 베르그송을 버리고 베르크손을 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국 이름을 처음 표기할 때 원음에 가깝게 표기할 수는 있겠지만, 베르그송처럼 이미 만인의 것이 돼버린 이름, 한국어가 돼버린 이름을 어느날 갑자기 베르크손으로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다.
유럽어를 음사(音寫)할 때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해가며 모음 앞의 s를 ㅅ이 아니라 ㅆ으로 표기하는 「창비」의 원음주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Stevensons의 s와 Sanders의 s는 동일한 음소인데 그걸 구별해서 표기하자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창비」는 정작 ㅆ이 필요할 때를 위해 그 ㅆ을 아껴두었으면 좋겠다. 가령 창비식의 표기대로라면--그것은 외래어 표기법의 규정을 따라도 마찬가지인데--영어의 bus에서 차용한 한국어 표기는 「버스」다. 나는 오히려 이런 것이야 말로 고쳐야 할 표기라고 생각한다. 영어의 bus를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 어떻게 발음하든, 그 대중 교통기관을 우리는 「뻐쓰」라고 부른다. 그것이 영어 단어가 아니라 영어에서 한국어로 차용된 외래어, 즉 한국어 단어인 이상 우리는 그것을 「버스」가 아니라 「뻐쓰」로 표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럴 때야말로 ㅆ이 필요하고 ㅃ이 필요한 것이다. 「빠리」나 「에피쏘드」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든 좁은 의미의 원음주의든 이 원칙이 우스꽝스러운 억압으로 변하는 것을 막는 것은 관습 존중의 태도다. 실상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런 관습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우리는 「도이칠란트」보다는 「독일」을 선호함으로써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를 조롱하고, 「스빠이」나 「스따일」이나 「어메리커」에 대해서가 아니라 「스파이」와 「스타일」과 「아메리카」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좁은 의미의 원음주의를 비웃는다. 그것이 말들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런 관습 존중의 태도가 깊이 뿌리를 내린다면, 가장 완고한 원음주의자조차도 감히 헝가리를 「마자르오르삭」이라고 부르자거나, 오클라호마는 틀린 발음이므로 「오우클러호우머」라고 표기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는 불란서를 프랑스라고 표기한다. 편지 같은 사적인 글이나 이 글처럼 「불란서」라는 말 자체가 주제가 된 글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발표를 전제로 한 일반적인 글에서는 프랑스라고 적는다. 합리적 절차를 거쳐 확립된 공적 표기법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자기 기준으로 보아 마땅치 않더라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프랑스라는 말보다 불란서라는 말이 좋다. 그것은 내 취향의 영역이므로 누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이따금 내 꿈 속에 나타나고, 언젠가 한번 훌쩍 다녀올지도 모를 나라는 프랑스가 아니라 불란서일 것이다.
신동아 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