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석 영산대 일어학과 교수·전 대한일어일문학회 회장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는 ‘다문화’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다문화 가정’과 ‘다문화 센터’라는 말이 그 예다.
그런데 ‘다문화 센터’를 ‘우리의 전통 차(茶)를 마시는 곳’, 즉 ‘다문화’를 ‘茶文化’로 알았다는
어떤 유명 인사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실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다.
‘다문화’라는 한자어를 한글이 아닌 ‘多文化’로 표기를 한다면 이러한 우스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노조 전임자의 ‘전임자’라는 말이 ‘전에 노조에 근무한 적이 있는 전임자(前任者)’인지,
‘지금 노조 업무만 전담하는 전임자(專任者)’인지 몹시 헷갈린다.
또한 ‘대표팀 5연패’라는 말에서는 ‘연달아 이긴 5연패(連覇)’인지, ‘연달아 진 5연패(連敗)’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회사에 대한 감사’는 ‘고맙다는 감사(感謝)’인지, ‘조사한다는 감사(監査)’인지, 이 또한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이 밖에 한자어인데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한글 전용 정책에 의해 한자를 적절히 사용하지 않고 한글만을 고집함으로써 생기는 이러한 혼란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정말 답답하고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최근 일본 정부는 새로운 상용한자표(常用漢字表)를 내각 고시 제2호로 공표하면서
1981년부터 사용해 오던 종래의 상용한자 1945자에 다시 191자를 추가 및 보완하여 2136자로 확대 개정하였다.
여기에는 컴퓨터 등의 보급으로 ‘변환’에 의해 보다 많은 한자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배경 설명이 있다.
이 상용한자는 법령과 공용문서, 신문 잡지 방송 등 일반 사회생활에서 일본어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은 정부 주도의 국어정책하에서 한자 사용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1948년 한글전용법이 제정된 이래 ‘한글 전용론’과 ‘한자 혼용론’의 열띤 논쟁 속에서
문자정책이 수없이 많이 바뀌었다.
1970년 이후 한자는 교과서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1975년부터 괄호 속에 보조적으로 병기를 하는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또한 1972년에 제정된 한문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도 ‘한문’ 시간에 가르치고 있을 뿐
현재 ‘국어’ 시간에는 한자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한자의 읽기와 쓰기 능력이 뒤떨어지는 소위 ‘한글세대’가 우리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자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괄호 속에 병기된 한자는 별 의미가 없다.
한자는 뜻글자로서 하나하나에 그 의미가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천지’를 ‘天地’로 표기하면 ‘하늘과 땅’, 나아가서는 ‘온 세상’으로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한자를 모르면 ‘천지’를 영어 단어 외우듯이 소리글자로 그 뜻을 익혀야 한다.
우리말의 약 70%가 한자어인데 이 한자어를 한자가 아닌 한글로 표기하니 그 의미 파악에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학습효과도 그만큼 떨어지게 마련이다. 한자 교육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한자어는 고유어, 외래어와 함께 우리의 말이다.
이 한자어는 한자로 표기해야 그 효용성이 제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한자는 필요한 사람만 공부하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루 빨리 학교라는 공교육 기관에서 한자 교육을 강화하여 우리의 언어생활을 더욱 풍요롭고 윤택하게 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2011.07.22 이우석 영산대 일어학과 교수·전 대한일어일문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