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좌파·극우란 말 아무렇게나 쓰면 안 돼
▲ 정용석 단국대 명예교수
우리나라 학계·언론계·정치권에서는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극우 등의 어휘를 정확한 개념과 다르게 함부로 쓴다. 진보와 좌파를 같은 개념으로 혼용하는가 하면, 보수와 극우도 구분 없이 토해낸다.
保守主義는 17~18세기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에드먼드 버크 등에 연원한다. 그들은 생명·자유·재산을 불가침의 권리로 보았고 자유방임을 신봉했다. 현대 보수주의는 미국 공화당과 영국 보수당이 대표한다. 국가 권력 행사의 최소화, 개인자유 극대화, 자유 시장경쟁, 엄격한 법질서, 낙태 반대, 사형제 존속, 철저한 반공 및 강한 대외노선 등을 대체로 표방한다. 보수는 수구(守舊)가 아니고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전통과 기존 제도를 소중히 여긴다.
進步主義는 19세기 영국의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와 조지 버나드 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평화적인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면서도 공산주의 폭력혁명을 거부하였다. 오늘의 진보는 국가 권력을 통한 경제 규제, 부의 평등적 배분, 느슨한 법질서, 낙태 합법화, 사형제 폐지 등을 주장한다. 영국의 노동당과 북유럽의 사회민주당들이 이에 속한다. 진보는 평등을 강조하는 데 반해 보수는 자유를 역설하면서도 둘은 다 같이 자유민주체제 내에서의 변혁을 추구한다.
한편 右翼(右派)과 左翼(左派)의 근원은 프랑스 혁명 당시인 1792~95년 '국민공회'에 유래한다. '국민공회' 때 좌측에 자리 잡은 쟈코뱅을 좌익으로, 우측의 지롱드를 우익이라고 불렀다. 좌익의 쟈코뱅은 근로민중·소시민 보호, 재산권 통제, 왕권체제 폐지 등 급진적이었다. 현대 좌익에는 급진적 사회 혁명,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추종자들이 속한다. 우익의 지롱드는 지주 및 상공인 보호, 자유시장 경제체제, 입헌 왕정제 존속 등을 표방하였다. 작금의 우익은 점진적 개혁, 자유시장 경제체제, 엄격한 법·질서 유지, 반공 및 강한 대외정책 등을 지향한다.
極右는 우익과는 전혀 다르다. 극우로는 독일 히틀러의 나치와 프랑스의 장 마리 르펜 등을 꼽을 수 있다. 르펜은 단일 유로 통화 반대, 보호무역, 나치의 유대인 학살 미화, 폭력과 전쟁 수단 의존, 자본주의와 국제화 거부, 반미(反美) 등을 외쳐댔다. 우익인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극우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韓國에는 히틀러나 르펜 같은 극우는 물론 없다. 한국의 우익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옹호, 국제화 지지, 자유무역, 엄격한 법·질서, 반공 및 강한 대외정책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남한 좌익 세력은 우파를 극우라고 부른다. 어감이 좋지 않은 딱지를 붙여 국민의 반감을 유발코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保守와 右翼은 서로 겹치는 데가 많아 거의 같은 의미로 보아도 된다. 하지만 進步와 左翼은 엄격히 다르다. 한국에서 진보라 불리는 세력 중에는 보편적 진보의 의미를 벗어나 친북·종북(從北)으로 기운 사람이 많다. 그들은 북한의 6·25 남침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천안함 공격에는 '북한 소행의 확증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유민주체제 내에서의 진보가 아니라 한국을 부정하며 북한을 섬긴다. 진보의 가면을 쓴 것뿐이다. 언론·학계·정치권도 진보와 좌익을 확실하게 구분해 '좌파'는 '좌파'라고 지칭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