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모든 出版物 모든 文章은 대부분 한글專用으로 되어있다. 한글專用이 民族主義的이고 漢字混用은 事大主義的인 것으로 잘못 認識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疑訝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漢字는 表意文字이기 때문에 그 뜻을 생각하게 만드는 文字이고 한글은 表音文字이어서 情感과 情緖를 느끼게 한다. 漢字라는 낱말 그 自體도 漢字를 아는 사람은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나 漢字의 낱말을 한글로 發音만 아는 사람은 그 뜻을 正確하게 알기 어렵다.
우리 나라 말의 약 70%는 그 根源이 漢字이기 때문에 漢字의 知識 없이는 우리 나라 말의 약 70%를 正確히 알고 認識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漢字를 모르는 젊은이들은 대충 뜻을 斟酌은 할 수 있지만 正確한 뜻을 깨우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우리 나라 말을 純全히 한글로만 적었을 때 正確한 發音은 할 수 있지만 正確한 뜻을 認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잘못하면 한글만으로 적었을 때 한국말을 잘 모르는 이에게는 暗號를 깨우쳐야 하는 것과 같은 混亂스러움을 겪지 않을 수가 없다.
뜻을 어둠 속에서 촛불 찾듯이 할 때 그 言語가 表現하는 文化는 水準이 낮아지고 正確性을 缺如하거나 曖昧하게 된다. “眞理는 人間이 가지고 있는 語彙로는 正確히 表現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人間의 語彙는 어떤 現狀이나 뜻을 正確히 傳達하기에는 限界가 있고 充分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音을 表示하는 한글만 가지고 正確한 뜻을 傳達한다는 것은 거의 不可能에 가까운 難澁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外國사람들이 홀로 서울에 와서 한글로만 된 地圖만을 보고 또는 道路標識에 따라 自動車를 運轉하여 원하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道路標識와 信號가 잘 되어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한글을 모르는 外國人이 길을 찾아간다는 것은 거의 不可能한 일이다.
중국, 일본, 대만 사람들은 韓國에 올 때 같은 漢字 文化圈이기 때문에 看板이나 案內文 程度는 漢字로 쓰여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現實은 전혀 다르다. 解放 이후 進行되어온 한글專用은 우리社會를 漢字文化圈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고 正體를 알 수 없는 文化的 孤兒로 만들고 있다.
北韓에서도 한글專用으로 했다가 자신의 이름 정도는 漢字로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最近에는 다시 漢字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보는 新聞에서도 한글專用으로 表示된 낱말만으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表現이 許多하다.
所謂 常用漢字도 쓸 줄 모르는 젊은이들의 水準에 맞추어 한글을 專用한다면 社會 全體의 文化水準이 내려갈 수밖에 없다.
“골든벨을 울려라”라는 TV 프로를 보면 忠淸道에 所在한 高等學校의 學生인데도 不拘하고 忠淸道를 漢字로 쓸 줄 모르는 學生이 相當數있는 것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旣成世代가 젊은이들에 대한 敎育의 義務를 抛棄하고 모든 것을 쉽게만 處理하고자 하는 데만 沒頭한 結果로 밖에 볼 수 없다. 이토록 뜻이 모호해지고 不正確하며 나아가, 경우에 따라서는 最小限의 禮儀凡節조차 지켜지지 못하게 된 것은 旣成世代의 責任이 크다.
漢字와 한글의 混用을 主張하는 사람들을 事大主義者처럼 規定하고 한글專用을 主張하는 사람들은 愛國하고 自主獨立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처럼 意味를 附與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람들은 漢字가 中國文字이고 外國 것이기 때문에 排斥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漢字는 西紀 4世紀 경에 韓半島에 들어온 이후 1600年 동안 우리 나라 歷代 王朝에서 公用문자로 쓰여져 왔다. 우리 歷史의 90%이상이 漢字로 記錄되어 있다. 漢字를 모르면 우리 歷史의 약 90%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世宗大王이 한글을 만든 뜻은 漢字를 아예 없애 버리고 한글로서 代替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漢字와 한글을 오히려 混用하자는 뜻으로 創製한 것이다.
漢字와 한글을 混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나라 國語辭典의 單語 가운데 약 70%가 漢字로 構成된 漢字 語原의 單字이기 때문이다. 이런 形便에서 한글만을 專用하면 正確한 意思傳達이 되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면 서투른 外國語를 읽듯이 대충 理解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우리 社會에서 情報傳達이 대단히 不正確해지게 되고 그런 習慣이 固着化 되면 良質의 情報의 蓄積량도 줄어들게 되며 한글專用은 오히려 障碍物로 變할 수밖에 없다.
한글과 漢字의 對備로서 意思傳達 할 때 그 速度는 더 빨라지고 正確하게 된다. 漢字는 그 많은 長點에도 불구하고 時間이 많이 걸린다는 弱點이 있다. 이 問題도 最近 눈부신 컴퓨터의 發達로 이제 거의 解決이 되어 가고 있다.
한글과 漢字를 混用하자는 것은 漢字語를 全部 漢字로 表記하자는 뜻은 아니다. 한글로 썼을 때 混同의 憂慮가 있는 單語와 줄임말 정도만 漢字로 써도 理解가 아주 쉽고 正確하게 된다. 全體 單語 중에서 약 10%를 漢字로 써도 理解가 아주 쉽고 正確하게 되어 우리의 言語 文字 生活은 훨씬 向上되고 高級化 될 것이다.
어떤 企業의 幹部들에게 稟議案을 漢字混用으로 要約箋을 써 붙여서 報告하라고 했더니 “飛弱的인 發展”이라고 써서 提出하는 웃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한글專用으로 뜻을 正確히 傳達하려면 漢字와 한글 混用보다도 훨씬 더 힘이 든다. 努力은 기울이지 않고 혹시 한글專用이 民族主義的이고 漢字混用은 事大主義的이라는 理念的 색깔을 附與하려 하는 것은 怠慢한 사람들의 詭辯에 不過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文化發展과 國家競爭力 向上에 도움이 되겠는가. 한글專用이냐 漢字專用 아닌 混用이냐 하는 問題는 韓國人의 敎養을 涵養하는데 得이 되는 尺度에서 論議가 되어야 하며 小數의 偏向性 學者들이 討議해서 決定하는 경우 問題 本質을 逸失하기 쉽게 된다.
한글專用으로 할 경우 반드시 熟考해야 할 問題가 있다. 한글은 表音文字이기 때문에 槪念語를 만들어 내는데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哲學, 美學, 經濟學 等의 槪念語를 순 한글로 어떻게 代替 할 것인가. 炭素 同化作用이나 核分裂 臨界点, 經濟哲學, 經常收支 等을 한글로만 쓰면 어떻게 그 뜻을 알 수 있겠는가.
情報化의 要諦는 最小限의 時間에 最大情報를 最高로 正確하게 傳達하는 것인데 漢字를 쓰지 않는 경우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그 反對가 되고 만다. 사실에 土臺를 두고 眞理를 探究한다는 實事求是로 中國의 理氣心性學을 批判한 우리나라의 實學者들이 空論的 名分論을 克服하려고 했다는 것을 어떻게 理解할 수 있겠는가. 한글로 쓴 ‘시장경제’와 한자로 쓴 ‘市場經濟’는 사람에게 주는 聯想作用이 다를 수 있다.
中國 사람들이 英語를 比較的 쉽게 배우는 것은 漢文의 構造가 英語와 비슷하게 이루어져 있기도 하지만 漢字가 사람들의 言語感覺 全般을 높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가장 좋은 說得力은 글이 品位가 있고 誤解와 錯覺의 素地가 없어야 된다고 한다.
한글專用의 施行은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글과 말의 下向 低級化, 우리의 時代的 使命인 一流國家 建設을 위한 障碍物로 作用할 수밖에 없다. 國家競爭力의 母胎도 그 나라의 文化水準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우리는 世界에서 가장 科學的인 表音文字와 世界에서 가장 高度로 發達된 表意文字를 다 같이 쓸 수 있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戰略的으로 有利한 條件을 享有하고 있다.
이런 하늘이 내려주신 福을 저버리고 한글專用이란 原則的으로 實現 不可能한 文字 活動을 擴散시키는데 專念하고 있다면 一流國家 國民의 資格을 얻으려고 하고 있는 것인지 忖度하기 어렵다.
거짓 없는 現實 認識, 冷靜한 科學情神의 普及, 世界的 視野에 立脚한 自主的 判斷이라는 能力의 資産을 國民에게 提供함으로서 새로운 民主主義 社會를 構築하기 위해서 民主精神을 暢達하고 現代人으로서의 敎養을 涵養하여야 하는 이때, 現實 社會가 昏迷하고 國內外에 일찍이 보지 못한 激甚한 變化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科學과 技術의 發展과 文明의 틀을 未來指向的으로 再整立하는 것이 要請되고 있는 디지털 21世紀에 世界的 規模의 競爭에 對應하여 새로운 文化의 胎動이 각 方面에서 顯在化 되어가고 있다.
全世界에서 자기나라 말과 漢字를 混用하는 나라는 日本과 韓國 두 나라 밖에 없다. 日本은 漢字混用을 오래도록 實行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活字 離脫現狀이 進行되고 있는 것에 대해 크게 憂慮하여 超黨的으로 〈文字, 活字 文化 振興法〉의 立法을 現在 推進하고 있다.
우리와 比較가 안될 만큼 漢字混用이 普遍化되어 있는데도 아직도 未洽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言語能力向上과 學校 圖書館의 整備를 爲始하여 出版과 正確한 表現 活動의 活性化를 追求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歷史認識도 適正한 漢字混用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아야겠다.
1806年 나폴레옹과의 戰爭에서 敗戰한 프로이센이 危機에 처했을 때 칼피히테는 「독일국민에게 고한다」 라는 有名한 講演을 하였다. 이것은 나폴레옹 軍隊에 陷落된 베를린에서 독일 民族主義의 새로운 認識과 독일 國民의 覺醒을 깨우치기 위한 有名한 演說이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西紀 1세기 로마군에 맞서 싸운 게르만 民族의 勇猛性을 稱頌하고 있다.
正確하게 살아있는 獨逸語의 優秀性을 强調한 言語驅使의 힘이었다. 日帝强占 暗鬱時期에 한글은 우리나라 獨立運動의 燈臺이고 Beacon이었다. 하지만 漢字語없이 高級思想과 思考의 傳達은 不可能하였고 獨立宣言文에서 보듯이 漢字語의 活用 없는 知識 傳達은 不正確하고 歪曲되기 쉬우며 感傷的 情緖로 誤導되기 쉽게 된다.
우리의 傳統文化로 보아 一流國民에 걸 맞는 敎養은 漢字語를 媒介로한 言語體系로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가 一流國이 되려면 漢字를 배우고 活用함으로서 意思傳達과 表示의 正確性을 提高하여야 하며 二?三流國으로 自足한다면 漢字는 저버려도 無妨할 것이다.
訓民正音은 百姓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인데 그때 當時로는 類例를 찾아볼 수 없는 崇高한 民本主義에 基盤하고 있다. 訓民正音이 發明되기 전에는 朝鮮은 中國을 尊敬하여 士大夫들은 政治에 吏讀를 사용하였다. 世宗大王의 德治를 위한 한글이 創製된 지 550年이 된 지금 한글 創製의 깊은 뜻이 漢字混用에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 再照明해볼 必要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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