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漢字의 流入과 우리 말
우리나라에 漢字가 언제 들어와 쓰이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남아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최근에 출토된 4세기경 百濟 사람들이 읽던 『論語』木簡과 6세기경 高句麗 <廣開土大王碑>ㆍ百濟 <武寧王陵> 誌石 등을 보면,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漢字와 漢文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의 문자가 없던 시대에 漢字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ㆍ사상ㆍ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였던 셈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 어휘 중 약 60%가 漢字語로 되어 있다. 우리 말 속에 이처럼 漢字語의 비중이 높은 것은 漢字가 유입이 되고, 漢文化와의 접촉으로 자연스럽게 漢字語가 우리의 말 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上位文化의 언어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민족의 언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점은 中國 내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지역마다 소통되는 언어가 전혀 달랐던 중국에서 비교적 통일된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은 秦과 漢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부터이다. 이때부터 우월한 문화의 언어가 주도적으로 자연스럽게 각 지방의 언어와 融合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대사회에 들어와 서구 문물이 밀려들어오면서 각종 사물의 명칭을 英語로 쓰는 것을 당연시했으며, 일본에서 만든 학술용어도 현재까지 아무 비판 없이 쓰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영어를 우리말에 섞어서 쓰는 것을 세련되고 知的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선진 문화의 언어가 受容되고, 使用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漢文文化圈에서 살면서, 우리의 문자가 없던 시절 우리는 漢字를 받아들이고, 그 결과 우리말의 많은 부분이 漢字語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며,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일부 한글학자들이 이러한 자연스러운 현상을 마치 事大主義의 표상인양 여겨,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인 중세사회의 특징과 이러한 언어 사이의 영향과 융합 관계를 간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漢字와 한글은 서로 대척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표기 수단이 漢字일 뿐 곧 우리말이며 글인 것이다.
Ⅱ. 한글 專用과 漢字敎育
光復이 되고 1948년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법령은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동안 필요한 때에는 漢字를 倂用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나라의 독립으로 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하려는 노력이 언어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제하에서 ‘한글’을 지키려고 수많은 노력을 했던 학자들에 의해 漢字는 사대주의의 표상으로 폄하가 되고, 급기야 ‘한글전용’이라는 정책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970년 모든 공문서와 교과서에 漢字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한글전용 원칙이 시행이 되었다. 이후 교육 현장에서 漢字를 가르치지 않다 보니, 漢字를 아는 세대보다 漢字를 모르는 세대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들이 바로 購買力을 지닌 세대가 되면서, 각종 상점의 간판을 한글로 바꾸어 달 수 밖에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 新聞과 雜誌도 이들의 수준에 맞추어 한글 전용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30여년 가까이 지내면서, 사회적 분위기는 ‘漢字 不必要性’을 주장하는 논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20세기 말 급격한 컴퓨터의 보급은 ‘漢字 不必要性’의 논거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제 모든 문서는 한글로 쓰면 되고, 不可避하게 漢字로 쓸 일이 있으면, ‘?글’ 검색창에서 漢字를 찾아 쓰면 되는데 - 이미 현실적인 실효성이 소멸되어버린 - 굳이 어렵고 복잡한 漢字를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얼핏 보면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밀하게 따져보면 많은 허점을 내포하고 있다.
최근 漢字에 대한 관심과 학습 열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확산이 되고 있다. 물론 그 저변에는 개혁개방 이후 세계 경제를 주도할 만큼 급속도로 中國의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나라와 교류가 확대되면서 시작된 현상이기는 하다. 그러나 漢字 학습의 열기는 이보다 앞서 서서히 진행되었다.
대개의 학부모는 漢字敎育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세대이다. 이들이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漢字敎育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게 되고, 자신의 자녀에게 漢字敎育을 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한글 전용’ 30여년의 결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말의 정확하고 올바른 구사도 어렵게 되었으며, 전문 용어의 이해와 전공 서적의 개념을 파악하는데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 ‘한글전용과 컴퓨터의 보급’으로 漢字의 불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확한 우리말 구사를 위해서, 또 올바른 글쓰기와 문서 작성을 위해서도 漢字敎育은 반드시 필요하다.
얼마 전 KBS 방송(2005년 6월 1일 KBS 아침뉴스타임) 자막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놓았다. “국민들의 자괴감을 상세 시켜 주기 바란다.”
여기서 ‘상세’는 ‘상쇄(相殺)’의 잘못이다. 그러면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바로 漢字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자막을 처리하는 사람이 漢字에 대한 기본 소양이 있었다면 이런 실수를 범했겠는가? ‘殺’은 ‘죽이다’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살’로, ‘줄이다’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쇄’로 발음된다는 교육을 받았다면 이러한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말은 ‘ㅔ'와 'ㅐ’의 구별이 쉽지 않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비슷한 발음의 차이를 구분 못하는 실수를 자주 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실수는 유사성이 높은 ‘ㅔ'와 'ㅐ’를 구분 못한 정도가 아니다. 엄연한 차이가 있는 ‘ㅔ’와 ‘ㅙ’의 차이를 구분 못한 것이다. 이러한 실수는 우리말 어휘라고 ‘漢字語’를 사용하면서도 어원인 ‘漢字’에 대한 교육이 소홀한데서 빚어진 것이다.
필자가 경험한 바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현제’라고 쓰는 학생이 의외로 많다. 만일 이 학생이 漢字를 배웠더라면 아무리 ‘ㅔ’와 ‘ㅐ’의 구별이 안 된다고 해서 ‘현재(現在)’를 ‘현제’라고 썼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漢字를 반드시 배워야하는 이유이다. 적절한 어휘를 골라 우리말을 정확하게 구사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도 漢字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漢字와 우리말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漢字語의 개념을 명확히 알고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과 懸隔한 차이가 있다.
우리 말 가운데 同音異義語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총 16만 여개의 어휘 중 漢字語가 약 9만 여개 이고 이 중 80%이상이 同音異義語이다.
‘가장’만 해도 ‘家長’ ‘?裝’ ‘?葬’ ‘架藏’ ‘?將’ ‘家狀’ 등 수도 없이 많은 同音異義語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컴퓨터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이들 同音異義語를 구별해서 올바른 漢字語를 선택할 수는 없다. 漢字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한글전용의 확대와 컴퓨터의 보급’도 漢字敎育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논거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新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요즈음 일부 신문의 社說에서 漢字를 倂記하고 있다. 아마 漢字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아울러 漢字를 노출시키지 않으면 정확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없었던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간혹 신문에서도 漢字 誤記의 실수를 접하게 된다. 조선일보(2005년 6월 3일 사회면)에서 부동산 문제로 사임하는 어느 대법관의 말을 옮기면서 ‘반구제기(反求諸己)’라고 기사를 썼다. 여기서 ‘諸’는 음이 ‘제’가 아니고 ‘저’로 ‘반구저기’로 읽어야 옳은데, ‘諸’가 음이 ‘제’만 있는 것으로 알고 썼을 것이다. 이것도 漢字에 대한 기본 지식만 있어도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요즈음 TV를 보면 주로 오락프로에 자막으로 漢字 주로 漢字成語를 올리는 것을 본다. ‘百聞不如一見’을 우리는 토를 달아 흔히 ‘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말을 하는데, 여기서 붙인 ‘이’라는 토를 漢字로 잘못 알고 ‘百聞以不如一見’이라고 버젓이 쓰고 있으며, ‘雪上加霜’을 ‘雪上加上’으로, ‘挑戰’을 ‘桃戰’으로, 사람의 성씨인 ‘姓’을 ‘性’으로, 北京 시내의 유명한 거리인 ‘王府井’을 ‘王附井’으로 잘못 표기하기 등 그 잘못된 예를 일일이 들 수도 없을 정도이다.
오락 프로의 漢字 사용은 어떤 상황을 압축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겠지만, 그러나 오락 프로의 유치한 내용을 일반인이 잘 모르는 漢字로 품위 있게 윤색해 보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0개 중 8,9개는 틀린 내용이다. 어차피 대부분 시청자는 모르는데, 연출자가 노린 소기의 목적만 이루면 될지도 모른다.
특히 철저한 考證이 요구되는 현대사를 다루는 드라마의 경우 이 같은 현상은 더욱 심하다. MBC에서 방송하는 <제5공화국>의 경우, ‘少將’을 ‘小將’으로, ‘不正蓄財者’를 ‘不定蓄財者’로 잘못 쓰더니, 급기야 사람이름까지 바꾸어 ‘金鍾泌’을 ‘金鍾必’(7월 2일 방송)로 하는 등 漢字에 대한 無知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 일부 국회의원들이 漢字명패를 한글로 바꾸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들은 ‘한글 전용’이 가장 ‘민중적’이며 ‘민족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지만, 漢字를 쓰는 것이 결코 ‘反民族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중세사회의 특징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에 깔려있는 검증되지 않은 漢字에 대한 선입견은 하루 빨리 불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국어 생활과 글쓰기를 위해서도 漢字敎育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Ⅲ. 專門 學術分野와 漢字敎育
보통 사람들은 漢字 한 글자를 몰라도 일상생활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생 정도만 되어도 漢字에 대한 기본 소양이 없이는 전공 서적을 이해하는데 많은 지장이 있다. 지식이 확장될수록 漢字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대학 교육에서 언어의 사용은 단순한 일상생활의 會話 언어가 아니다.
지식인은 학문적인 용어와 전문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때로는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때 만들어낸 어휘는 즉각적으로 공식화되기도 하고, 대중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내는 ‘造語 能力’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적합한 어휘를 새로 만들지 못해서 외래의 말을 그대로 가져다 써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부의 경우는 인정할 수 있지만, 충분히 만들어 쓸 수 있는데도 그렇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단지 지식인들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일반 대중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오늘 우리의 삶은 과거의 문화적인 累積 속에서 가능하지만,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 즉각적으로 정확한 개념을 담아내고 품격 있는 어휘를 만들어내야 한다.
새로운 문화가 창출될 때에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조어 능력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도 길러지기도 하지만, 학교 교육에서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중ㆍ고등학교에서 漢文은 ‘재량과목’ 또는 ‘선택과목’으로 이미 원천적으로 정상적인 漢文敎育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학에 들어와 심도 있는 전공과목을 공부해야할 시점에 기초적인 漢字 공부를 시작해야하는 것이다. 이런 국가적인 낭비가 어디에 있는가?
또한, 1980년부터 이른바 ‘韓國學’이 강조되면서, 학문 전 분야에 걸쳐 ‘韓國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따라서 ‘韓國○○學會’라는 이름의 학회도 자연히 수가 증가하였으며, ‘우리의 것’에 대한 연구가 확대되었고, 연구자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韓國學’을 연구하는 학자의 기본적인 토대는 더 말할 것도 없이 ‘漢文’을 解讀하는 능력이며, ‘東洋 文化’ 전반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해,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 중 일부는 연구 방법론은 참신한 서구의 이론을 바탕으로 연구하면서, 정작 본령인 ‘漢文’ 독해 수준은 매우 낮은 경우를 볼 수 있다. 학문 각 분야의 ‘한국학’ 연구 성과물을 보면 ‘漢文’을 誤讀하거나, 句讀를 잘못 끊거나, 전반적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심각한 문제는 연구자가 漢文原典 즉 原資料를 誤讀하고, 자신의 誤謬도 모른 채 그 상태에서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이 全無했던 것도 우리 학계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韓國學’에 대한 관심과 IT산업의 발전은 ‘漢文 遺産’의 번역과 전산 입력을 가능하게 하였다. 번역의 문제는 차치하고, 그간 정부에서 막대한 재원을 들여 漢文古典을 연차적으로 전산 입력을 해왔으나, 결과는 실패했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가장 완벽하게 입력을 했다는 民族文化推進會에서 입력한 결과물을 검사하면 자료에 따라 보통 純度가 99.8%라고 한다. 純度 99.8%면 1,000자 당 1글자는 틀린 것이 있다는 것인데, 漢文典籍 한 페이지가 400자임을 감안할 때 보통 두세 페이지 당 1글자는 잘못된 글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만 되어도 학술적인 기초 자료로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하지 않게 입력된 原典은 학술적인 가치는 물론 자료로서의 생명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가장 완벽하다는 民族文化推進會를 제외한 다른 기관의 原典 입력물의 정확도는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말할 것도 없으며,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러한 현상도 다름 아닌, 漢字에 대한 기본 소양을 학교 교육 과정에서 쌓지 못한 결과이다. 漢字에 대한 관심과 소양을 갖춘 인력이 많다면, 이런 입력 단계의 오류와 검사 단계의 부주의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국가대로 돈을 낭비한 셈이고, 연구자들은 아무 자료로서 가치가 없는 원전 입력물을 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세종대왕께 부끄럼이 없도록 애썼습니다.’라고 자랑하는 ‘국어대사전’을 보면서, 漢字語의 표기와 뜻풀이에 이렇게 많은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今始初聞’은 ‘今時初聞’으로, ‘至高至純’은 ‘至高至順’으로, ‘不正腐敗’는 ‘不淨腐敗’로 잘못 표기하였고, 漢字語의 뜻풀이도 본뜻과 전혀 다르게 잘못 풀이한 것들이 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국어사전’은 그 나라의 ‘지성’과 ‘학문 수준’을 대표하는 것인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된 것도 모른 채 사전을 신뢰하고 이용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국어사전’의 오류는 바로 ‘?글’의 漢字 표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글’에 등록된 漢字語를 보면 그 오류를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의 漢字 오류문제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10여 종 ‘문학’ 교과서 漢字語는 그 誤脫字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뜻풀이도 엉뚱하게 해놓은 것들이 있다. 예컨대, ‘赤貧如洗’는 ‘물로 씻어 낸 것처럼 집에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너무 가난함’의 뜻인데, 이것을 ‘손을 씻은 물로 국을 끓여 먹을 정도로 가난함’으로 풀이를 하였고, ‘誰怨誰咎’는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로 ‘남을 원망하고 탓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데, 이것을 ‘남을 원망하고 남을 책망함’이라고 전혀 다른 뜻으로 풀이를 하였다.
이 문제는 ‘문학’ 교과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과목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 교과서에 ‘大東輿地圖’를 ‘大東與地圖’로 ‘石城’을 ‘石成’으로 誤記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문학’과 ‘사회’ 교과만의 문제가 아니라, 漢字를 표기하는 전 교과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것이 현재 우리 학계의 수준이며, 우리 교육계의 현실이다.
이 모든 원인은 다름 아닌 漢字敎育의 不在에서 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우리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漢字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상생활에서건, 전문분야에서건, 하다못해 교과서에서도 漢字의 역할은 중차대한 것이다.
Ⅳ. 東아시아의 情勢變化와 漢字敎育
우리 나라와 중국ㆍ일본ㆍ베트남은 과거 이른바 漢文文化圈에 속했던 나라이다. 즉, 漢字를 표기 수단으로 각 민족은 자신들의 사상과 생활 감정을 표현했으며, 동일한 문화적인 기반 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근대사회에 들어오면서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화로 이들 나라는 각기 다른 역사적인 경험을 하게 되며, 문화적인 공동체의 기반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中國은 서구 열강 및 일본의 침략 속에서 결국 社會主義 국가가 되었고, 日本은 서구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근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팽창주의로 치달으며 동아시아의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일본과 프랑스의 강압적인 식민통치를 겪은 뒤, 이념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 속에 남ㆍ북 분단이라는 비극을 겪었다.
따라서 근ㆍ현대의 굴절된 역사로 인해, 과거 漢文文化圈에 속했던 나라는 이념의 대립 속에서 수십 년간 단절된 채 지내게 되었다.
다행히 20세기 후반 냉전체제의 종식과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동아시아 정세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즉, 우리나라와 중국ㆍ베트남과의 국교 수립으로 동아시아 국가는 이전과 달리 활발한 교류가 시작되었다. 더욱이 경제적인 교류가 확대되면서 동아시아는 ‘지역경제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할 정도가 되었다.
중국의 후진타오주석은 2005년 4월 개최된 아시아ㆍ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아시아경제공동체’ 건설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 속에서도 오랜 기간 異質的인 사회체제와 불행했던 역사 경험, 그리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유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漢字敎育은 과거 漢文文化圈 국가 간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복원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주지하다시피 중국ㆍ베트남과의 인적ㆍ물적 교류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있으며, 일본과의 문화적인 교류도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漢文文化圈에 속했던 나라는 아직도 漢字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漢字를 써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물론 漢字를 많이 알면 그만큼 이들 국가의 언어를 공부하는데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울러 漢字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 자연히 동아시아 상대국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漢字 교육의 현실적인 필요성이며, 최근 漢字 학습의 열기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초보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漢字敎育과 함께 동양의 전통 문화와 사상을 담고 있는 古典의 이해를 통해, 漢文文化圈에 속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 전통과 가치관을 재해석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즉, 동일한 문화적ㆍ역사적 체험위에 각 민족 간 상호 교류와 이해의 폭을 넓히며, 이를 통해 국가 간 공고한 신뢰와 진정한 유대를 기대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漢字ㆍ漢文敎育은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의 불리함을 공동으로 극복하고, 국가 간 정치ㆍ경제ㆍ문화적인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漢字敎育이 현재까지도 여전히 중요하고 유효한 이유이다.
Ⅴ. 南北韓 言語 異質化와 漢字敎育
"‘불멸의 이순신’ 등 남쪽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보고 있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하지만 (TV드라마 등을 통해 방영되는) 남쪽 젊은이들의 언어가 악센트 차이 등으로 인해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남북 언어 이질화를 막기 위해 漢文 공부를 많이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6월 17일 자)
올해 6ㆍ15 남북공동행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 대표단에게 한 말이다. ‘남북 언어 이질화를 막기 위해 漢文 공부를 많이 시키고 있다’는 이 말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국가 간에 서로 언어 소통이 안 되어, 과거로부터 공유해 왔던 ‘漢字’를 통해 기본적인 의사소통 또는 감정의 교류를 하고자 漢字의 필요성을 논급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분단 된지 60여년이 되는 오늘날 남북의 언어 이질화가 漢文 교육을 강화할 정도가 되었다 것은 우려할 만한 사안이다.
북한은 『朝鮮王朝實錄』 등 漢文 古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유산에 대한 가치와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따라서 漢文敎育도 지금까지 시행해 오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漢文敎育을 일찍 시작하였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漢文’교육이 아니라 ‘漢字’교육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교과서의 ‘漢文’ 문장은 <春香傳>에 나오는 漢詩 한 수 정도고, 대부분 김일성 어록과 교시를 내용으로 國漢文 混用으로 되어 있다. 즉, 漢字敎育을 통해 김일성 어록과 교시를 다시 한 번 학습하는 것으로 漢字敎育은 부수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남북의 언어 이질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漢文敎育이 강조된 것이다. 60년의 세월은 언어의 이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남북이 共有하고 있는 기본 인소인 漢字가 그 돌파구가 된 셈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우리말과 漢字의 불가분의 관계를 증명하는 셈이기도 하다.
Ⅵ. 맺음말
우리는 지금까지 왜 漢字敎育을 강화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30여 년간 한글 전용 정책은 결국 漢字를 쓰고 있고,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를 誤導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단 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먼저 학교 교육 현장에서 漢文敎育이 제 위상을 찾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漢字를 조금 알고, 기초적인 ‘漢文’ 문장을 배우고 나면 누구나 ‘漢字ㆍ漢文’에 관한 한 전문가인 양하는 풍토가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말 속에서 漢字語가 많고 친숙하게 써 왔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앞서 살핀 각 분야의 오류는 이러한 자세를 반성하고 개선하여야 함은 물론, 사회 전 분야에 걸쳐 漢字를 쓸 경우 專門家에게 적어도 한 번 쯤 諮問을 구하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그나마 최소한의 오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漢文敎育의 위상과 當爲性에 대해 自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흔히 漢文敎育의 중요 목표 중 하나를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하는데 별 이의를 제기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한글전용론자들이 말하듯 ‘전통문화는 굳이 漢文이 아니라 번역문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논리에 대응할 수 있는 반박 논리를 갖지 못했다. ‘傳統文化의 계승과 발전’은 우리에게 참으로 구체적이지 못한 막연한 논리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漢字에 대한 필요성이지 漢文에 대한 필요는 아니다’는 논리에 대해 ‘漢字는 낱글자로 익히는 것보다 문장을 통해 익히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므로 漢文을 배워야한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사실인지 현재까지 어느 누구도 이러한 논리를 학교현장에서 실제로 검증해본 적도 없다.
또한 ‘漢字를 배우면 어휘력이 좋아지고, 학력도 높아진다.’고 말해 왔지만, 이에 대해 한글전용론자들은 ‘그렇다면 중국인이 세계에서 지능이 가장 우수하다는 말인가?’라는 반박에 이렇다 할 근거를 제시할 수도 없었다.
이제 漢字敎育에 대한 사회 각 분야의 관심과 열기 그리고 나아가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와 남ㆍ북간의 언어의 이질화 경향 등 우리를 둘러싼 언어 환경의 변화에 대해 다각적으로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되었으며, ‘漢文敎育’이 시급한지 아니면 ‘漢字敎育’이 더 중요한지 그 현재적인 필요성과 의의를 심사숙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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