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敎育의 復活
朴衡圭
大韓民國憲政會 理事 / 本聯合會 指導委員
얼마 전에 서울特別市 江南區와 瑞草區 등 두 區에서는 初等學校에서 900자 정도의 漢字를 교육시키도록 方針을 정했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그 敎育課程을 6段階로 區分해서 3권의 책자로 된 自律學習書를 만들어 今年 10월 1일부터 원하는 학교에 무료로 配布하기로 했다고 했다.
우리 나라에서 한글 專用化 政策을 强行하면서 初等學校에서 漢字敎育이 全面 廢止된 것은 1970년도부터이다. 이에 대해 당시도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漢字敎育의 復活을 요구하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줄기차게 계속되어 오고 있다.
나도 漢字敎育의 必要性을 强調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강남 및 서초의 敎育廳에서 初等學校의 漢字敎育을 부활시키는 결단을 내린 것을 雙手를 들어 환영하고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런 결단은 진작 내렸어야 했을 것인데, 오히려 晩時之歎이 없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漢字敎育의 바람이 강남구와 서초구 등 두 개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이것이 始發點이 되어 全國的으로 세차게 일어나 國家施策으로 確固하게 定着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漢字敎育에 대해서는 兩論이 있을 수 있다. 특히 한글전용을 지지하는 일부 한글학자들과 漢字를 배우지 못한 소위 ‘한글세대’들 중에는 漢字敎育을 부활시킨다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斟酌한다. 그들은 漢字를 배우지 않더라도 공부를 얼마든지 훌륭하게 잘했으며, 석사 박사도 되었노라고 抗辯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아무런 不便을 느끼지 않고 근 40년간을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왜 역사를 되돌려 후퇴시키느냐는 비판과 反撥이 없지 않을 것이다.
우선 한글세대인 우리 집 자식들부터가 拒否反應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글 전용으로 교육을 받은 자신들도 나름대로는 어엿한 사회인으로 제법 文化人의 긍지를 가지고 있는데, 漢字混用時代가 되면 소위 ‘漢字文盲’인 자신들의 體面이 말이 아니며, 그런 거북한 處地를 謀免하려면 이제라도 漢字를 다시 배워야 하는데, 벌써 40~50대에 접어든 자신들이 어린 자식이나 孫子들과 함께 새삼스럽게 ‘하늘 천, 따 지’하며 漢字를 배우자니 그것도 自尊心 상하고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 점을 생각할 때 나도 漢字敎育의 부활에 대한 拒否反應을 全的으로 그르다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글 전용정책이 우리 나라의 國民啓發을 위해서는 크게 기여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敎育을 받지 못한 이른바 ‘文盲者’들을 해소시키는 데는 絶對的인 貢獻을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우리도 한글 전용정책의 功勞를 높이 評價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漢字敎育의 復活을 찬성하는 이유는 한글 專用보다는 漢字를 교육시켜 混用하는 것이 敎育的으로나 우리 나라 文化發展을 위해서나 有益한 점이 절대적으로 많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는 漢字敎育의 長點을 여기서 새삼스럽게 일일이 羅列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漢字敎育을 주장하는 斯界의 權威者들이 그 점은 너무나 많이 지적해서 강조해 왔고, 또한 漢字敎育을 찬성하는 대다수 국민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言語를 表現하는 글자의 種類가 100여 가지가 넘는다고 듣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機能面에서 大別하면 뜻을 나타내는 ‘뜻글자(表意文字)’와 音만을 나타내는 ‘소리글자(表音文字)’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前者에 속하는 것으로는 고대의 象形文字나 漢字가 그 대표적인 文字이고, 우리의 ‘한글’을 비롯해서 일본의 ‘가나’와 서양의 ‘알파벳’ 같은 글자가 後者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兩者 중 어느 것이 더 발전한 글자이고 우수한 문자냐 하는 것은 斷定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말이란 소리인데 글자가 말소리를 視覺的으로 表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表音文字가 優秀하고 보다 더 발전한 글자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은 겉으로 표현하기 이전에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認識한 것을 表象하는 手段이라고 생각한다면, 말 이전 단계인 마음의 의도를 표현하는 表意文字야 말로 인간언어의 源泉的 內面性을 표상하는, 더 깊이 있는 우수한 문자가 아니겠느냐 하는 주장도 充分히 일리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글專用의 주장과 漢字混用의 주장이 平行線을 긋고 있는 것은 이런 原論的인 差異에 立脚해서 어느 쪽에 더 比重을 두느냐 하는 점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이런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우리 民族이 數千年 동안 表意文字인 漢字를 사용해 오면서 그 漢字文化가 體質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漢字 사용의 歷史性과 傳統的 慣習이 民族文化는 물론, 생활 全般에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日常用語의 70% 以上이 漢字語로 되어 있는 사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 文化傳統과 慣習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언어 속에 깊은 뿌리를 내려 그 習性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한글 專用시대인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한 것이 사실이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한글을 專用한다고 하면서도 새로운 문화나 生活樣式에 따른 各種 事物이나 事象 등이 새로 開發되거나 수입되어 그것을 우리말로 命名할 경우에는 거의 90% 이상을 漢字式의 名稱을 만들어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漢字語가 뜻을 나타내는 글자이기 때문에 그 사물이나 事象의 개념을 보다 더 정확히 表象할 뿐 아니라 한층 簡潔하고, 개념의 混同을 피할 수 있고, 또한 ‘造語能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70%이상이 漢字語라는 것은 그것이 우리말의 뿌리라는 뜻
漢字語가 간결하면서도 사물이나 事象의 개념을 혼동 없이 表象할 수 있는 글자라는 것, 바로 이 점이야 말로 漢字敎育의 必要性을 강조하는 核心的 要素라고 할 수 있다. 漢字는 音보다는 뜻에 重點을 둔 글자이기 때문에 漢字語에는 同音異議語가 상당히 많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그런 漢字語가 그대로 녹아 들어와 있어서 개념의 혼동을 가져오는 예가 하나 둘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經驗하고 있는 바다. 그래서 우리가 글을 쓸 때 아무래도 筆者의 의도가 歪曲될 염려가 있다 싶으면 萬不得已 괄호를 하고 그 안에 漢字를 倂記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앞뒤의 文脈을 통해 그 개념이나 뜻을 확연히 識別할 수 있지만, 앞뒤 문맥의 연결이 없을 경우에는 그것이 무엇을 指稱하고 의미하는 것인가를 혼동하는 예가 적지 않다.
우선 卑近한 예로 앞에서 나는 事象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이 ‘사상’이란 음을 가진 어휘가 얼마나 다양하게 각기 다른 뜻을 가진 말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면 漢字混用이 왜 필요한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歷史에 있는 바라는 ‘史上’, 네 가지 형상이라는 ‘四相’, 日月星辰을 지칭하거나 四象醫學에서처럼 인간의 네 가지 체질을 말하는 ‘四象’, 거의 죽게 된 상태를 말하는 ‘死傷’, 공무중이 아닌 때의 부상이라는 뜻의 ‘私傷’, 개인이 경영하는 상업이라는 ‘私商’, 개인적으로 채무를 갚는다는 ‘私償’, 모래밭 위라는 ‘砂上’, 일의 상태라는 뜻의 ‘事相’ 또는 ‘事狀’, 형체로 나타나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라는 뜻의 ‘事象’, 사람의 깊은 생각이란 말의 ‘思想’, 실 모양이라는 뜻의 ‘絲狀’, 사진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을 말하는 ‘寫像’, 철학에서 어떤 형상의 특징을 抽象化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捨象’ 등등 참으로 많다.
이래서 漢字는 어렵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漢字는 반드시 배워서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漢字를 알면 미처 배우지 않은 語彙라 하더라도 漢字가 갖는 뜻을 이용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도 있고, 또한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도 있어서 漢字의 학습은 可謂 聞一知十하는 지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數學의 公式이나 ‘九九法’과 같이 한 번 익혀 놓으면 그 活用度는 참으로 다양하고 여간 便利한 것이 아니다.
漢字는 數學의 公式이나 九九法과 같이 한 번 익혀 놓으면 聞一知十하는 應用力과 創意力을 발휘할 수 있다
말이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없이 變化하는 것으로 生命이 있는 일종의 有機體와 같은 特性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表音文字로 기록한 언어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 뜻과 개념이 이해될 수 없는 말로 變質되거나, 혹은 死語가 되어 없어지는 경우가 許多하다. 이 말은 곧 表音文字는 그 保存性이 稀薄해서 古典으로서의 가치가 극히 稀少하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表意文字인 漢字는 글자 한 자로써 사물이나 事象의 개념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그 사물과 사상에 대한 言語的 變化가 있다 하더라도 그 사물과 사상의 本質的 개념을 表象하는 것만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2천년 전 이나 지금이나, 또는 앞으로 몇 천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그 글자가 의미하는 실체나 내용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漢字는 不變하는 保存性의 本質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漢字가 표현한 언어는 永久不變의 古典的 價値를 지니고 있어서 2천년 전에 孔子께서 말한 『論語』 등의 내용을 오늘날에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래도 理解할 수 있는 長點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물을 認知하고 언어를 통해 思考한다. 따라서 언어는 精神이며 魂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漢字만큼 우리의 精魂을 表象해주는 글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漢字는 文字인 동시에 인간의 內面世界를 밝히는 哲理까지도 含蓄하고 있어서 상당한 漢字知識만 蘊蓄되면 여러 가지 새로운 哲理까지도 啓發하고 創造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漢字는 가위 知性啓發의 寶庫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漢字를 익혀 놓으면 문장의 이해나 讀解力도 向上될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豊富한 想像力을 發揮할 수 있어서 創意力을 啓發 발전시키는 效果도 월등히 높아진다.
이것은 그동안 意慾的이며 先見之明이 있는 여러 초등학교 교장들이 課外敎育이나 特別活動敎育으로 漢字敎育을 실시한 다년간의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漢字敎育을 받은 학생들의 成績이 漢字敎育을 받지 않은 학생들보다 월등히 향상되었다는 통계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漢字文化圈의 나라인 日本에서는 근대교육인 學校敎育이 시작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初․中․高等․大學校에서 단 한 번도 漢字敎育을 중단한 일이 없다. 2次大戰 후에도 초등학교에서 基礎漢字 900字,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1,880여자인가의 漢字를 학습하도록 해왔다. 그런데 今年부터는 고등학교에서 履修해야 할 1,800여자를 初等學校에서 이수하도록 漢字敎育을 加一層 强化하겠다는 보도에 접한 일이 있다. 거기에는 어떤 다른 목적이 부수돼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漢字敎育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 사실을 우리는 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漢字敎育을 부활 실시한다는 마당에 나는 한 가지 付託하고 勸告하고 싶은 게 있다. 이제까지 漢字敎育이라고 하면 거저 낱말의 漢字나 漢字熟語를 학습시키는 예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單語爲主의 학습으로는 漢字敎育뿐 아니라 어떠한 言語의 교육도 그 實效를 거둘 수 없는 것이다.
단어는 말의 連結을 이어주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언어의 素材因子이기는 하나 독립된 단어만으로는 그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언어는 말의 연결 속에서 학습해야 그 眞意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漢字敎育은 반드시 文章 속에 섞어서 混用해야만 산 漢字敎育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는 漢字敎育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모든 敎材에 필요한 漢字를 混用해서 활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漢字敎育은 國漢字混用의 문장을 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漢字敎育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반대이유는 이미 쓸모도 없는 舊時代的인 ‘漢文’을 가르치려는 것은 時代錯誤的인 發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漢字敎育은 어려워서 그것을 習得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데도 한글의 몇 배나 시간이 걸려 이 바쁜 시대에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漢字를 교육하려는 것은 구시대적인 漢文을 습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日常的으로 쓰고 있는 우리 말 중에서 혼동하기 쉽거나, 뜻과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漢字語만을 익혀 우리의 언어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제대로 사용케 함으로써 교육 전반의 학습효과도 높이고 우리의 민족문화의 발전에도 기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분야의 교육은 우리말의 正確하고 豊富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銘心해야 한다. 우리의 언어, 즉 國語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다른 어떤 것도 제대로 익히고 발전시킬 수는 없다.
漢字敎育이 어려워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 그 非效率性이 높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할 말이 있다. 10년 20년씩 힘들여 배워도 말 한 마디, 문장 한 줄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英語工夫는 기를 쓰고 가르치려 하면서 제 나라 말의 源泉인 漢字語의 교육은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려 非效率的이라는 말이 될 법이나 한 말인가? 漢字敎育을 오늘의 영어교육의 절반만큼만 힘쓴다면 아마도 모두가 漢字의 學士, 博士가 될 것이다.
영어 이야기가 나온 김에 論題와는 다르지만 필자는 꼭 한마디하고 싶은 게 있다. 요즈음 제 나라 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어린 자식들에게 英語를 교육시키겠다고 早期留學을 보낸다든지, 또는 국내에 영어만으로 교육시키는 國際學校를 만들어 입학시키려고 血眼이 되어 있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외국인을 만들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再考해야 한다. 제 나라 말을 모르면 제 나라를 모른다. 자기 나라를 모르는 사람이 자기 祖國을 위해 어떻게 忠誠을 다하고 그 민족과 문화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겠는가? 참된 한국인으로 키우려면 우선 우리말부터 徹底하게 교육시켜야 한다.
우리가 漢字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後世國民들을 참된 韓國人으로 기르는 한 수단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남의 나라 글자인 漢字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이 참된 韓國人을 기르는 것이 되느냐고 批判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漢字는 비록 남의 나라 글자일지언정(우리의 조상인 東夷族의 창작이라는 學說도 있음) 우리 민족은 그것을 數千年 동안 우리의 글자로 使用해 왔기 때문에 우리 문화의 전통 속에는 그것이 우리 글자로 完全히 同化되어 있으므로 우리 글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남의 나라가 개발하고 발전시킨 여러 가지 과학과 文明의 利器 등을 수없이 利用하면서 그것들을 우리 것으로 완전히 同化시켜 활용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이제 그것들을 남의 나라 것이라고 해서 排斥하고 拒否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賢明한 일인가 생각해 보면 漢字라고 해서 남의 나라 글자라고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어느 누가 創案하고 발전시켰든지 간에 우리가 우리 것처럼 이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 것인 것이다. 그것이 人類文化와 文明의 본질이요 屬性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