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승만과 함깨 자기성공의 희생자였고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자기실패의 受惠者이다. 한국인의 幸運은 박정희 죽음의 타이밍이었고, 북한사람들의 不幸은 김일성의 長壽였다.
趙甲濟
30년 전 오늘, 朴正熙 대통령이 金載圭의 총탄을 가슴과 머리에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정확하게 관찰한 사람은 申再順 여인이다. 그는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다.
“그 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몸을 가누지 못하시거나 말이 헛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 하는 뜻이었습니다. 一國의 대통령이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분의 마지막은 체념하는 모습이었는데, 허무하다기보다는 解脫(해탈)한 모습 같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라며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朴 대통령의 피살은 그로선 불행한 일이었으나 국가와 역사의 입장에서는 꼭 그러하였다고 볼 수 없다. 10.26 사건은 朴 대통령의 위대한 리더십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몇 가지 모순을 해결하였다. 정권의 교체가 이뤄졌고, 새 정권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1980년대의 活況期를 열었으며, 이 덕분에 민주화 과정도 공동체의 틀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안에서 관리될 수 있었다. 朴 대통령이 10년을 더 살았다고 하였을 때 그런 발전과 변화가 가능하였겠는가? 나는 부정적이다.
무엇보다도 朴正熙 대통령의 죽는 모습이 좋았다. 超人처럼, 英雄처럼 죽었다. 가슴에 총탄을 맞고도 "난 괜찮아"라고 또박 또박 말하면서 죽었다. 그 장면을 신재순씨가 촬영하듯이 목격하여 증언함으로써 우리는 죽음의 美學, 남자의 美學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의 運命이 마지막 순간의 증언자로서 신재순씨를 불러다가 그 자리에 놓은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朴正熙의 死後 30년 그는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민족사의 最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높은 평가는 지식인들이 아닌 서민들의 主導에 의하여 이뤄졌다. '5000년 가난의 恨을 해결해주신 분'이란 말 한 마디 앞에서 그에 대한 識者層의 비난은 無力化되고 만다.
박정희의 화려한 復活은 두 사람의 기여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李承晩과 全斗煥. 이승만의 農地개혁, 교육확충, 韓美동맹이 근대화의 기관차가 달릴 수 있는 궤도를 깔았다. 전두환의 事後수습과 경제안정과 민주화 조치(單任, 改憲)가 있었기에 박정희의 유산은 보존, 계승, 발전될 수 있었다. 그는 前任者와 後任者를 잘 둔 분이다.
그는 이승만과 함깨 자기성공의 희생자였고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자기실패의 受惠者이다. 한국인의 幸運은 박정희 죽음의 타이밍이었고, 북한사람들의 不幸은 김일성의 長壽였다. *********************************************************
前後 30년을 결정한 10·26 사건 -趙甲濟 기자의 현대사 강좌 1:체념한 듯, 해탈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은 朴正熙(2005년 1월29일)
10·26 사건은 이미 과거완료형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요즘 또다시 朴(박) 대통령의 과거 문제가 영화를 통해서나 정책적으로 제기되면서 다시 박 대통령을 무덤에서 끌어내는 일련의 과정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10·26 사건이 하나의 쟁점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10·26 사건을 현대사 강의의 첫 번째 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10·26 사건은 그 날 하루 동안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의해 그 후 약 10여 년 간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이 결정됐습니다. 18년 간 지속됐던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라는 두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前後 30년의 現代史를 바꿔 놓았으니 가히 ‘결정적 사건’이라 할 만합니다.
권력 공백 생기면 다른 권력이 자동 진입
당시 육군참모총장 鄭昇和(정승화) 장군은 사건 당시 金載圭(김재규)의 초대로 弑害(시해) 현장에 와 있었다는 것 때문에 의심을 받게 됐습니다. 이 영향으로 그는 계엄사령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無力化(무력화) 되었죠.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던 崔圭夏(최규하) 총리 역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해 권위가 실추됐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권력공백기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공백이 없다”라는 말이 있죠. 권력에 공백이 생기게 되면 자동적으로 다른 권력이 그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 권력이라는 것은 정규 육사 출신의 장교단을 배경으로 한 전두환 그룹의 등장을 말합니다. 1993년까지 이어지는 권력체계의 씨앗이 그 날 밤에 만들어진 셈입니다.
1979년 10월 26일은 우리 현대사에서 6·25 동란과 더불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그 날 무슨 일이 있었고, 그 날 어떤 상황에서 뉴스를 접했고, 그 때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인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부산에서 사회부 기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10월 16일 부산 대학생들이 시내로 몰려나와서 데모를 하는 바람에 釜馬(부마)사태가 시작됐고, 10월 18일에는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터졌습니다. 당시 부산의 시위현장에서 제가 느꼈던 점은 “아, 박 대통령의 마지막이 시작됐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느낀 것은 그 시위가 특별히 과격했다거나 사람이 죽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유신 체제는 한 점의 물도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완벽한 것이어야 하는데, 밤에 학생들이 몰려 나가고 여기에 시민들이 합세를 하면서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시민들이 경찰차를 뒤엎고 불을 지르면서 부산 시내 한복판에서는 화염이 솟아오르고 했는데, 지금은 흔히 있을 수 있는 과격사건이지만 완벽한 철권통치 체제가 계속되고 있었던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대등하게 놓고 비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겠지만, 마치 평양에서 김일성대학 학생들이 학내에서 시위를 벌였을 경우의 충격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권위주의 체제는 강하게 보이지만 외부로부터의 타격이 오면 쉽게 허물어지는 취약성을 또 가지고 있습니다.
10월 26일에 저는 어느 살인사건 현장을 취재하느라 밤샘을 했습니다. 현장 근방의 여관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경찰에 비상이 걸리더니, 다음 날 아침 7시에 ‘대통령 有故(유고)’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제가 최초로 접한 박 대통령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별로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 날 가을 날씨가 굉장히 좋았는데, 어찌됐든 이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겠구나 하는 희망에 차 있었다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다만 무슨 인연이기에 부부 내외가 모두 이런 식으로 흉탄에 맞아서 죽을까 하는 悲感(비감) 정도는 있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후 저는 10·26 사건에 대해서 많은 취재를 하게 됐고, 그 덕에 복잡하게 보이는 10·26 사건이지만 저로서는 사건이 일어난 시간 단위나 이유 등에 대해서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실 10·26 사건은 더 이상 미스터리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미국이 조종했다는 이야기는 다 근거가 없습니다. 10·26 사건만큼 완전무결하고 100% 투명하게 조사가 진행되고, 밝혀지고, 취재된 사건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어떻게 다뤄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여기서 제가 설명하는 것 이외의 진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이 선택한 날짜와 장소에서 일어나다
10·26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날짜와 장소에서 일어났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 날 오전 揷橋川(삽교천)에서 있었던 방조제 준공 공사에 참석해서 연설을 하고 오후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날 밤 오후 7시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박 대통령의 연설을 집에서 들었는데, 목소리가 좀 이상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상하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하나”하고 돌아보니까 박 대통령이었는데, 그렇게 느꼈던 사람이 아마 많았을 겁니다. 그 날 바람이 많이 불어서 마이크를 통해 들리는 박 대통령의 목소리가 좀 이상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삽교천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도고 온천에 들렀는데, 이 때 헬리콥터 소리에 놀라서 도고 온천에서 키우던 사슴이 벽에 머리를 박아서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박 대통령의 행동이나 목소리에서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2시 30분에 박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상공을 한 바퀴 돌았는데, 이것이 마지막으로 서울을 내려다 본 게 됐습니다. 헬리콥터에서 내린 박 대통령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서 집무실에 돌아와서는 콧노래도 불렀습니다.
박 대통령은 출장을 갔다 온 오후에는 외출하지 않고 청와대에 머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도 車智澈(차지철) 경호실장은 ‘이제 긴장을 풀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부하들에게 푹 쉬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오후 4시에 박 대통령이 차지철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어요. 차 실장은 전화를 받고난 후 끊으면서 옆에 있던 李在田(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오늘은 좀 쉬시지, 또 나가신다”는 식으로 약간 짜증스럽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차 실장은 행사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김재규 정보부장이었는데, 그에게 “오늘 저녁에 행사가 있으니까 참석하십시오”라고 전한 것이 그 날 오후 4시였습니다. 이 오후 4시라는 시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金桂元(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재규, 차지철, 그리고 박 대통령까지 네 사람이었습니다. 김재규는 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30여분 뒤인 4시 40분에 鄭昇和(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은 사람은 김대중 정부 시절 외교안보수석을 지냈던 黃源卓(황원탁) 부관이었습니다. 황원탁 부관은 정승화 총장에게 전화를 연결했고, 김재규는 정 총장에게 “오늘 저녁 궁정동에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초대했습니다. 이 시점이 바로 김재규의 殺意(살의)가 일어나는 때이라고 보면 됩니다. 박 대통령과 약속을 했는데도 동시에 정승화 총장을 그 쪽으로 부른 것은, 그 날 擧事(거사)를 치루는 데 있어서 정승화 총장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승화 총장과 김재규 사이에서 거사에 대해 오고 간 이야기는 일체 없었습니다. 후에 수사를 벌였던 전두환 合搜部長(합수부장) 쪽에서 정승화 총장이 마치 김재규와 무슨 공모관계가 있는 것처럼 몰아갔죠. 全 장군은 12·12사태를 비롯한 그 뒤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한 하나의 논리적인 근거로 이를 이용했습니다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정승화 총장이 본인의 뜻과는 달리 김재규에게 이용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찌됐든 오후 4시 40분에 정승화 총장을 궁정동의 정보부 사무실로 초대하는 전화를 한 시점은 김재규에게 殺意(살의)가 탄생되는 시점이 됐습니다.
박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던 김재규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 차지철, 이 네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면 당시 박 대통령 정권의 생리도 알 수 있고 여러 가지 아주 흥미로운 관계가 나타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김재규라는 사람은 잘 아시겠지만 박 대통령 고향인 善山(선산) 출신이고 나이로는 후배입니다. 나이는 박 대통령보다 아홉 살이 적은데, 박 대통령이 陸士(육사)에 굉장히 늦게 들어갔기 때문에 육사로는 2기 동기생입니다. 두 사람이 여러 가지 비슷한 것이 많죠. 키도 비슷한데, 재미있는 것은 그 날 궁정동 만찬장에 모였던 사람들의 키가 모두 164cm라는 점입니다.
김재규는 정보부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과정에서 고향 선배인 박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습니다. 김재규가 5·16 혁명 주체세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안사령관, 3군단장, 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정보부장 같은 요직들을 걸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고향 선배인 박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과 김재규의 무조건적인 충성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재규는 어떤 사람이냐.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愚直(우직)하다는 점입니다. 우직하지만 분석력이 대단히 부족한, 충성심은 강하지만 머리는 잘 따라가지 않는, 즉 정보부장 자리에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金炯旭(김형욱)이나 李厚洛(이후락) 또는 朴鐘圭(박종규) 같은 사람처럼 권력을 남용해서 주변을 괴롭히고 청탁을 받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바탕은 아주 착하고 정의감이 꽤 있는 우직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직하다는 말 속에는 어리석다는 뜻도 들어있지 않습니까? 즉 정보부장으로서 필요한 종합적이고 균형있는 사고력은 대단히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 중독자였습니다. 거의 매일 사무라이 영화를 빌려봤는데, 그것도 한 영화를 계속 반복해서 보고 감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라이 영화를 즐겨 본다는 것은 武士道(무사도)를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무사도의 핵심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죠. 즉, 어떻게 영웅적으로 죽느냐 하는 생각을 평소부터 길러왔다는 뜻입니다.
1979년은 한국 역사상 복잡한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났던 해이기도 합니다. 1979년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저는 밑바닥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초에는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호메이니가 집권하면서 석유 값이 두 배로 뛰게 됐고, 이 영향으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국에서는 일 년에 물가가 20% 이상 오를 정도가 됐습니다. 우리 경제가 상당히 휘청댔는데, 당시에 重化學(중화학)공업에 많이 투자를 한 상태여서 그 부담감이 본격적으로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신민당의 金泳三(김영삼)씨가 穩健論(온건론)을 펴는 李哲承(이철승)씨를 이기고 총재가 되면서 對與(대여) 강경투쟁을 선도했습니다. 8월에는 YH 사건이 일어났는데, 노동운동을 하던 YH社의 여성들이 신민당 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했다가 강제해산되는 과정에서 여공이 한 사람 죽는 바람에 노동계의 큰 사건이 됐습니다. 吳元春(오원춘) 실종사건이라는 일로 가톨릭계가 들고 일어나기도 했고, 도시산업선교회라는 말이 신문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韓美(한미) 관계가 나빠졌다는 점입니다. 人權(인권) 외교를 앞세운 카터 대통령의 박 대통령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고,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이 반발하면서 관계가 나빠지게 된 것입니다. 서로 성명을 통해 공개 비난하게 되면서 더 나빠지게 됐고, 9월에는 글라이스틴 주한 美 대사가 본국으로 소환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는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의 독재에 대해 미국이 개입을 해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내용은 지금 읽어봐도 문제가 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박 대통령은 화를 냅니다. 항상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보스(boss)보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더 강경하게 밀어붙여서 보스를 즐겁게 하다가 破局(파국)으로 가는 경우가 많죠. 이 경우에도 차지철이 앞장서서 10월 초 국회가 영삼 의원을 除名(제명)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집니다. 이 일은 야당을 자극하게 되는데, 특히 김영삼 총재의 지역 기반인 부산에서 10월 16일에 시위가 일어나는 쪽으로 연결이 됐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궁정동 安家(안가)에서 네 사람이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나온 대화도 부마사태였습니다. 부마사태에 대한 처리를 놓고 차지철은 强硬論(강경론)을, 김재규는 穩健論(온건론)을 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를 비난하고 아주 약을 올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중간에서 조정하는 대신 차지철 편을 들어서 김재규를 아주 궁지에 몰았습니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국장인 육사15기 출신 白東林(백동림) 대령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10·26 사건의 主犯(주범)은 차지철이고, 김재규는 오히려 從犯(종범)이라는 겁니다. 이 사건의 端初(단초)를 많이 만든 사람이 차지철이라는 뜻인데, 그 날 차지철의 眼下無人(안하무인)격인 발언이 없었으면 김재규도 마음이 누그러져서 애초에 작심했던 살의를 풀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합니다. 박 대통령이 그 술자리에서 김재규 부장을 위로한다든지 해서 따뜻하게 대했다면 아마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 며칠 전부터는 정보부장을 바꾼다는 말도 돌았는데,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그 날 김재규는 저녁자리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차지철의 무조건적인 충성
차지철은 어떤 역할을 했느냐. 차지철은 5·16 군사혁명의 핵심부대 중 하나인 空輸團(공수단)의 대위였습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박정희 소장 옆에 차지철 대위가 얼룩무늬 공수단 군복 차림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진이 많이 나오는데, 이때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부패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차지철과 관계되어 있는 부패의 증거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 때문에 건방지고 주변 사람과 아랫사람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는 많이 나오는데, 차지철이 돈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굉장히 결백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래 국회의원이었던 차지철은 1974년 8월 15일 陸英修(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朴鐘圭(박종규) 경호실장이 사임한 이후 여러 사람의 추천에 의해 경호실장이 됐습니다.
원래는 해병대 출신의 5·16 주체세력으로 국세청장을 지낸 吳定根(오정근)의원이 추천됐다가 갑자기 바뀌었다고 합니다.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된 이후부터 박 대통령에 대한 경호가 과거에 비해 훨씬 심해지는 바람에 박 대통령은 주변과 멀어지게 됐습니다. 박 대통령이 골프장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칠 수 없게 만드는 등 박 대통령을 국민 대중들로부터 고립시키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경호를 목적으로 한다니까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 차지철이 결국에는 경호에 실패한 셈이 됐습니다. 그 날 권총을 차고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차지철은 몇 달 전부터 권총을 차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관이 이러면 안 된다면서 갈 때마다 권총이 들어있는 작은 가방을 챙겨주면 차 실장은 가방을 놓고 갔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왜 경호실장이 권총을 차고 가지 않았을까. 만약 그 날 권총을 차고 있었으면 조금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미스터리입니다. 제 짐작으로는 박 대통령이 권총을 차고 오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말을 안 들었으면 권총을 안 차고 갈 사람이 아니죠.
차지철은 1979년부터 현실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하기 시작합니다. 왜 이런 틈이 생겼느냐. 그 전에는 金正濂(김정렴) 실장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지금도 살아계시는데, 박 대통령 때 비서실장을 가장 오래 하신 분으로 한 9년 동안을 했습니다. 그 앞이 李厚洛(이후락) 실장이었죠. 자신에게 엄격하고 外柔內剛(외유내강)했던 이 분은 비서실장을 하는 동안 경호실의 정치 개입을 차단했습니다.
공간이 권력이다
1978년 12월 12일 선거 득표율에서 야당이 1.1%를 이기게 되면서, 김정렴 실장은 책임을 지고 駐日(주일)대사로 나가게 됐고 그 후임자로 金桂元(김계원) 씨가 들어왔습니다. 김계원은 어떤 분이냐 하면,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연희전문 출신에, 음악을 아주 좋아하는 분이었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애국 집회 때 가끔 뵙기도 합니다만, 아주 순박한 분입니다. 그러나 기가 세다든지 중심을 잡는 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김정렴 실장 대신 김계원 실장이 들어오면서 청와대와 군부, 정보부와 공화당을 조정하는 기능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이 틈을 타서 차지철의 영향력이 세집니다. 권위주의 혹은 독재 정권에서는 누가 가장 힘이 세느냐. 공간이 바로 권력이라는 말이 있듯이, 권력자와 가장 가까운 공간을 유지하는 사람이 가장 큰 힘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차지철도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박 대통령을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다 보니, 김재규도 차지철의 허가를 받아야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차지철은 김계원보다 보고를 먼저 하곤 해서 뒤에 보고하는 사람이 우습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대통령에 대한 접근권을 차지철이 장악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김재규의 정보부는 여러 가지 정책 실패를 했습니다. 가장 큰 실패가 김영삼 의원이 야당 총재가 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차지철은 그 책임을 김재규에게 떠넘겼고, 그 때부터 박 대통령도 김재규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수록 차지철의 영향력은 커지게 됐죠. 차지철은 가끔씩 군 지휘관들을 불러서 사열을 받고 하는 안하무인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특히 김영삼 의원 국회제명에 대한 강경론을 선도해서 관철시키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김재규는 온건론을 주장했고 공화당 역시 가능하면 야당과 타협하려고 했는데, 차지철이 들고 일어나 강경론을 펴는 상황이 되면서 불협화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釜馬사태에 대해서도 김재규는 강경론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차지철은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兩(양) 노선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선상에서 10월 26일 오후 7시 만찬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시 그 날 상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궁정동 ‘안가’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 이후락 정보부장 시절부터 대통령을 至近(지근) 거리에서 모셔야겠다고 해서 정보부가 건물을 하나 지었고, 평소에 정보부장이 거기서 근무를 자주 했습니다. 말하자면 박 대통령과 가까운 곳에 기지를 하나 두고 근무를 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는데, 그것이 나중에는 대통령이 술 마시고 식사하는 자리로 바뀌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복잡하고 호화로운 시설이 있는 곳이 아니고, 그냥 아주 깔끔한 한식집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것이었겠지만, 요즘 일본 음식점처럼 식탁의 아래 바닥을 파서 앉을 때 다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방도 하나 있었습니다.
역사의 무대가 되는 이 궁정동 안가에 선발대처럼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김계원 비서실장이었습니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원래 그곳에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오후 5시 40분에 만났습니다.
박 대통령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 두 사람은 庭園石(정원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는데, 바로 이때부터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김계원과 김재규는 굉장히 친한 사이였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했고, 그러다 보니 敵(적)은 바로 차지철이었습니다. 김재규는 김계원을 선배로 모셨는데, 후배는 책임지고 봐주고 선배는 잘 모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차지철 때문에 되는 일도 안 된다, 오늘 해치워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김계원은 그런 이야기는 한두 번 나온 게 아니었으니까 그 날도 또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정보부장이 대통령이 있는 자리에서 해치운다 하는 말을 하는 것을 소홀히 들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죠.
그 때 궁정동의 경호상황을 살펴보자면, 궁정동은 완전히 정보부 요원들이 경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일단 안으로 들어오면 정보부 요원들의 포위 하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대통령 경호원을 데리고 들어오지만 정보부 경비원들보다는 적습니다. 즉 대통령이 정보부의 인질이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경호를 중시한다는 차지철 실장이 어떻게 경호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런 시스템을 개혁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다 결국 대통령도 悲命(비명)에 가고 본인도 죽었죠. 경호의 원칙으로 봤을 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그런 불평을 해도 거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말리는 말이 없으니까 김재규로서는 김계원이 이미 자기 편으로 들어왔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이 시작되다
저녁 6시 5분에 박 대통령이 경호원과 함께 도착했습니다. 물론 차지철도 함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후의 만찬 자리가 시작됐는데, 여기에 또 여자가 등장합니다. 심수봉, 신재순 이 두 사람인데, 심수봉은 노래를 부르러 왔고, 신재순이라는 여자는 다른 임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 날은 임무 수행이 안됐지만 말입니다. 두 여자를 데리고 온 책임자는 朴善浩(박선호)라는 사람으로, 공식적인 직함은 정보부의 儀典(의전)과장이었습니다. 궁정동 시설을 관리하고 주로 대통령이 와서 만찬을 할 때 따르는 여러 가지 절차나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이었죠. 김재규 외에 이 궁정동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박선호였습니다.
박선호는 해병간부 후보생 출신의 대령 전역자인데, 이 사람과 저는 개인적인 관계가 좀 있습니다. 제가 1976년 당시 부산에 있을 때, 포항에서 진행되고 있던 석유 시추에서 기름이 조금 나왔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보부에서 포항 시추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내용은 다루지 말도록 각 언론사에 통보가 됐었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기사를 썼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정보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그 때 저를 조사한 사람이 바로 정보부 부산지부의 정보과장으로 와 있던 박선호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정보부 요원들 중에는 행패를 부리고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때인데, 박선호는 점잖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사받은 때가 1976년 1월이었는데, 두 달 뒤쯤 이 사람이 免職(면직)됐습니다. 당시 부산은 密輸(밀수)가 많았습니다. 이를 위해 검찰에서 지금은 변호사인 石鎭康(석진강) 과장을 부산 수사본부장으로 파견해 聖域(성역)없이 면밀히 수사를 하라고 지시했고, 수사 결과 정보부에서 밀수하는 것을 도와준 것이 드러난 사건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박선호가 석진강 검사의 전화를 도청했는데, 그것이 또 검찰에 의해서 발각되면서 면직이 됐습니다. 실직자가 된 것이죠.
실직된 박선호를 취직시켜 준 사람이 바로 김재규였습니다. 김재규는 당시 건설부 장관이었는데, 박선호를 현대 계열의 회사에 취직시켜서 中東(중동)에 근무하도록 했고, 다시 돌아온 후에는 의전 과장으로 선발했습니다. 사실 두 사람의 사이는 관계가 깊습니다. 김재규는 대구 대륜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지낸 적이 있는데, 박선호는 그 때 그가 가르쳤던 학생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이야기를 박선호가 무조건 들을 수밖에 없는 인연이 이미 쌓여있는 관계였던 것이죠. 10·26 사건은 여러 가지 인간관계에 의해서 빚어진 사건입니다. 이 사건 속에는 어떤 사람의 말은 무조건 따르는 인간관계 몇 개가 형성이 되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김재규와 박선호의 師弟(사제) 관계였습니다.
박선호는 6시 15분에 신재순, 심수봉 두 여자를 차에 태워와서 일단 박 대통령이 식사를 하고 있는 방 옆의 대기실에 데려다 놨습니다. 대기실에는 박 대통령의 경호관들인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해병대 출신입니다. 안재송은 국가대표 사격 선수였습니다. 그러니까 대기실에는 정인형, 안재송, 신재순, 심수봉 이렇게 네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식사가 시작됐는데, 대화는 처음부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습니다. 차지철이 또 김재규를 공박하는 이야기를 하고, 여기에 박 대통령은 편을 들었고, 김재규는 묵묵부답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김재규는 그 당시 간이 나빠서 술을 못 마셨기 때문에 아래만 쳐다보면서 아주 침울하게 있었습니다. 김계원도 끼어들지 못하는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김계원과 박 대통령 두 사람이 술잔을 주고받았습니다. 차지철은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고, 김재규는 술을 마실 수 있었지만 간이 나빠서 마시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시바스 리갈’ 한 병 반을 마셨는데 거의 다 김계원 실장과 박 대통령이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죠. 그러다가 두 여자가 6시 30분에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지금 10·26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 중에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 김계원 씨, 가수 심수봉 씨, 신재순 씨 이렇게 세 명입니다. 세 사람 모두 제가 만나봤더니, 제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신재순이라는 여자였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아주 담이 크고 관찰력이 뛰어났습니다. 심수봉씨는 충격 때문인지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데, 신재순의 증언은 정확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도 가끔 합니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최후를 목격하고 증언하는 역할을 맡기기 위해 그 날 그 자리에 신재순이라는 여자를 부른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박 대통령 최후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 된 신재순은 박 대통령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을 당시 다른 사람은 다 도망갔는데도 혼자서 박 대통령의 머리를 끌어안고 피를 막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재순은 박 대통령의 오른쪽에 앉았는데, 그 맞은편에 김재규가 앉아 있었습니다. 신재순의 기억에 의하면, 김재규의 얼굴이 너무 무겁고 어두워서 자기 마음까지 불안해졌다고 합니다.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김재규를 막 구박하는 분위기이다 보니 굉장히 불안해져서 자꾸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떠올리거나 그 날 나온 반찬이 뭐가 있는지 세어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재순은 대통령의 만찬이니 굉장할 줄 알았는데, 반찬이 별 것 없어서 ‘이렇게 초라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6시 35분이 되자 김재규의 초대를 받은 鄭昇和(정승화) 총장이 궁정동 安家로 들어왔습니다. 이 분은 만찬장이 아닌 별도의 사무실 건물에 있는 1층 회의실을 개조해 만든 임시 식당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그 곳에 가니 정보부장의 정치담당 보좌관인 김정섭 차장보가 김재규를 대신해서 마중을 나왔습니다.
정승화 총장은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생전에 저와 자주 만났습니다. 鄭 장군은 그 날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고 합니다. 김재규가 마중 나올 줄 알았는데 김정섭 차장보가 나와서 “오늘 대통령과 약속이 있어서 잠시 뒤에 오시겠다고 합니다.”라고 전하니까, ‘이런 결례가 어디 있나, 대통령과 이중 약속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쨌든 6시 35분에는 주역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이 도착한 것입니다.
그 5분 뒤인 6시 40분에 김재규는 식사를 하다가 중간에 슬그머니 나왔습니다. 이때가 본격적으로 시해준비를 하게 되는 때인데, 김재규는 나와서 정승화 총장이 기다리는 식당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정 총장에게 죄송하게 됐다고 사과하면서, 식사를 하고 나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2층으로 올라간 김재규는 작은 호신용 권총인 32구경 독일제 권총에 일곱 발을 장전해서 호주머니에 넣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병력 배치를 하게 되는데, 우선 박선호를 불렀습니다. 제일 믿는 사람이기도 하고 또 이 지역을 관할하는 사람이 박선호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박흥주라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현역 육군 대령인 박흥주는 김재규의 수행실장으로, 육사 18기 출신의 가난하면서도 청렴한 장교였습니다.
“오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각하까지입니까?”
6시 40분 쯤 됐으니 하늘은 어둑어둑해졌을 때입니다. 김재규는 두 사람을 뜰에 불러다 놓고 서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나라가 잘못되면 자네들과 나는 죽는 거야, 오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방에서 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육군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 너희들, 각오는 다 되어 있겠지?”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김재규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통령을 죽이는데 사전 통보도 없이, 그것도 느닷없이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입니다. 김재규의 생각은 ‘대통령 암살은 누구와 의논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다 새어나가서 안 되기 때문에 즉석에서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성공은 했죠. 그러나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집권은 할 수 없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 사람들은 일단 ‘예’라고 할 수밖에 없었겠죠. 이미 그런 인간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박선호는 당시 김재규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의리상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박흥주는 조금 달랐죠. 박흥주는 그저 군인인데다 박선호처럼 그렇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는 관계도 아니었고, 그의 역할도 별로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부하도 없었고, 그저 박선호의 지시에 따른 부하 역할 정도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됐든 박흥주 역시 느닷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박선호가 결정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는 김재규의 귀에다 대고, “각하까지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김재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박선호는 박 대통령까지 射殺(사살)한다는 것을 알고 여기에 참여한 것인데,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점입니다. 당시 40대 초반의 해병대 대령 출신이자 정보부 간부 출신인 그가 아무리 김재규를 존경한다 하더라도 박 대통령을 죽이는 일에까지 왜 가담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박선호는, “정보부는 생리상 상관이 지시하면 무조건 해야 되고, 그 지시에 대해 어떤 의문을 제기해도 안 된다, 또 그것이 해병대의 생리”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말들은 다 변명 같습니다. 제 분석에 의하면, 첫째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와 있다 하는 얘기를 듣고는 ‘아하, 이 일은 정보부와 군대가 짜고 쿠데타를 하는구나’라는 추측과 함께 勝算(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더라도 박선호가 박 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입장에 있었다면 아마 가담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박선호 입장에서는 박 대통령을 존경하지 못할 구석이 있었을 것입니다. 박선호가 일종의 ‘採紅使(채홍사)’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인만큼, 그다지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박선호는 그래도 조금 미심쩍은 마음에 김재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저녁은 좋지 않습니다. 경호원이 일곱 명이나 됩니다, 다음에 하시죠.”
이 말은 하루 늦추고 싶은 마음이죠. 그러나 김재규가 거기서 딱 끊어버립니다. 그는 “안 돼. 오늘 하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되어서 안 돼. 똑똑한 놈 세 명만 골라서 날 지원해. 다 해치우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하루를 연기했다면 아마 일은 성사되지 않았을 겁니다. 일단 이 날 진행된 일을 보면 김재규는 암살범으로서는 굉장히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박선호가 주춤한 기세를 보이자 김재규는 다시 밀어 붙입니다. “믿을 만 한 놈이 세 놈은 있겠지” 하는 말에 박선호는 엉겁결에 “예, 있습니다. 그렇지만 30분의 여유를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박선호는 실제 시간보다 더 늘려 잡은 겁니다. 딱 조치만 끝내자고 하면 5~6분이면 되는데, 30분의 여유를 달라는 것은 조금 더 생각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머뭇거린 것이죠. 어찌됐든 박선호가 “30분 전에는 절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김재규는 “알았어”하고 들어가면서 느닷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라고 중얼거리더니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기는 데 민주화 운동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전혀 기여하지 않았을 뿐더러, 김재규야말로 천하의 패륜아이자 의리도 없는 놈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투사로 다시 再顯彰
(재현창)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양쪽 다 진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라는 말에 약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재규의 행동에서 보면, 박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통해 권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라는 의문과 함께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 날의 행동을 했다고 보는 것은 비약입니다. 그가 암살을 했던 이유는 백 가지쯤 될 겁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차지철과의 불화였고, 세 번째나 네 번째쯤의 이유에나 가서야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식, 그리고 민주화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끼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상황이 끝나고 체포된 후의 이 사람의 논지를 보면, 차지철과의 불화는 거론하지 않은 채 오로지 민주주의를 위해서 박 대통령을 사살했다고 나옵니다. 그 뒤에 자기가 만든 내용이죠. 물론 김재규가 머릿속에 박정희의 정치 철학이나 그 방향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김재규가 당시 민주화 운동이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던 가운데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 되는 동시에, 또한 미국 측과 많은 접촉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박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데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과 미국과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비공개된 자료를 많이 보았는데, 미국과 김재규의 관계는 대충 이렇습니다. 당시에 정보부장이 접촉하는 對美(대미) 창구가 서너 개 됐는데, 제일 중요한 사람은 CIA서울지부장인 블루스터였습니다. 블루스터와 함께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미8군 사령관, 이 세 사람도 접촉 창구였는데, 특히 글라이스틴 대사를 자주 만났습니다. 서로 만나서 한 이야기는 주로 박 대통령의 국내 정책이었습니다. 물론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정책을 변호했지만, 그 과정에서 조금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김재규를 심리적으로 원격조종해서 박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했다는 것은 비약 중의 비약으로,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자료는 하나 있습니다. 12·12가 일어나기 전인 1979년 11월 9일, 박대통령의 國葬(국장)이 다 끝난 후 글라이스틴 대사는 국무부로 해명성 電文(전문)을 하나 보냈는데, 그 전문이 공개된 게 있습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전문 요지는 이렇습니다.
“박 대통령의 죽음에 미국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한국에 끈질기게 나돌고 있다. 일본과 미국의 언론들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비난한 것은 쿠데타 음모자들, 즉 김재규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김재규도 앞으로의 재판에서 나의 전임자들이 자신에게 박 대통령을 공격하라고 부추겼다는 주장을 하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 내 어떤 사람들이나 조직들로부터 박정희 정권이 1년 이상 유지될 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는 비난을 듣고 있지만, 나는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박 대통령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 때문에 한국인들이 우리의 비판을 오해해서, ‘박정희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다든지 그가 사라지는 것을 미국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은 있다.” 김재규의 경우 後者(후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이런 거사를 일으킨 다음 집권했을 경우 미국도 나를 밀어줄 것이라는 정도의 예상은 했겠지만 지령 같은 것은 없었다는 점을 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총재도 아닌 사람을 미국 사람들이 만난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김재규는 다시 만찬장으로 돌아왔고, 조금 있으니까 7시 KBS뉴스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참석한 삽교천 준공식이 어떻게 중계 방송되는지 확인해보자고 하면서 뉴스를 봤어요. 그 뉴스 끝부분에 당시 한국을 방문하고 있던 미국의 한 요인이 김영삼 총재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니까, 여기에 대해 박 대통령이 또 신경질을 냈습니다. 김영삼 씨가 국회의원에서 제명됐던 시기였던 만큼, 총재도 아닌 사람을 미국 사람이 만난다며 불평하는 상황이 7시에서 7시 10분쯤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때 박선호는 무슨 일을 했는가. 우선 경호원들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3명 뽑았는데, 뽑다보니 모두 해병대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암살 작전의 임무를 위한 병력 배치가 이뤄집니다. 만찬장 안은 김재규가 책임지고, 만찬장 옆방에 있는 두 경호원은 박선호가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박 대통령을 따라온 기타 대통령 경호원들은 주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의 처치는 박선호의 두 부하인 이기주, 유승옥이 책임지고, 여기에 박흥주 대령이 가담을 해서 세 파트로 나눠졌습니다. 병력배치가 다 되자, 7시 20분에 박선호가 대기실에 들어갔어요. 이 사람이 책임져야 될 경호원은 두 사람이었죠. 대기실은 굉장히 좁았는데, 정인형과 안재송이라는 두 경호원이 저녁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박선호는 그 맞은편인 텔레비전 쪽에 앉아서 신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7시 30분쯤이 되자 텔레비전 시청이 끝나고 만찬장에서 노래판이 시작됐습니다. 심수봉이 ‘두만강 푸른 물에’ 노래를 불렀고, 서로 지명을 해서 차지철이 ‘도라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후에 노래 부를 사람이 없자 신재순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습니다. 이 여자는 약간 음치였는데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인 7시 40분쯤에 박선호가 김재규 부장을 다시 바깥으로 불러내서 “이제 준비가 다 됐다”고 통보합니다.
밖으로 나갔던 김재규가 돌아와 보니 상황은 노래 부르는 분위기로 아주 부드럽게 변해 있었습니다. 신재순이 부르는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에 심수봉이 반주를 하고 있었는데, 음치여서 반주가 따라가지 못하자 잠시 기타 치는 걸 멈췄답니다. 그 때 박 대통령이 “나도 저 노래 아는데” 하면서 ‘사랑해 당신을’을 콧노래로 부르더랍니다. 그래서 “사랑해 당신을”하고 넘어가는 그 순간에 김재규가 권총을 빼서 자기 자리 바로 맞은편에 있었던 차지철을 쐈습니다. 車 실장이 손짓을 하는 바람에 오른쪽 손목에 맞았습니다.
“각하, 버러지 같은 놈을 두고 무슨 정치를 합니까?”
이 때 김재규가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김재규는 “각하, 버러지 같은 놈을 두고 무슨 정치를 합니까?”라는 서릿발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차지철이 총을 맞는 순간과 거의 동시에 박 대통령은 “뭣들 하는 거야”하면서 고함을 질렀고, 김계원 씨는 왼손으로 옆에 있던 김재규를 쳤다고 합니다. 총을 맞은 차지철은 오른손에 피를 흘리면서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차지철이 비난을 받는 점입니다. 총을 맞은 상태로 대통령을 옆에 두고 달아났다는 사실입니다.
김재규는 일어서서 달아나는 차지철을 쏘려고 하다가 잠시 자세를 바꿔서 앉아있는 박 대통령을 쐈습니다. 위에서 밑으로 내려서 쐈는데, 박 대통령은 가슴 관통상을 당했습니다. 탄도의 각도를 보면 제1발과 제2발 사이에 약 3초 정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3초는 아주 긴 것이 아닙니까? 제 짐작으로는 그 3초 동안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쏘려고 하다가 머뭇거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재규는 후에 진술하기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려고 하니까 총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때 바로 옆의 대기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느냐. 박선호는 옆방에서 총소리가 나는 즉시 자기도 두 사람을 처치해야 된다는 생각에 미리 준비하는 마음으로 손을 권총에 대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총을 먼저 뽑을 수 있었죠. 완전히 서부 결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총을 잘 쏜다는 두 경호원은 밥을 먹고 있다가 엉겁결에 당했습니다. 총을 못 뽑은 것이죠. 총을 먼저 뽑은 박선호는 바로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으니 두 경호원을 쏴서 맞추는 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 같이 살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도중에 박 대통령을 쏘는 제2발의 총성이 들렸습니다. 두 사람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은 상태였는데, 둘 중 안재송이라는 사람이 총을 뽑기 위해서 손을 총 쪽으로 가져갔습니다. 그 때 박선호는 안재송을 먼저 쐈는데 현장에서 絶命(절명)을 했고, 그 장면을 목격한 정인형 경호처장 역시 결심을 하고 권총을 뽑으려고 했을 때 박선호는 자신의 친구이자 해병대 동기인 정인형을 쐈습니다. 딱 두 발의 총알로 두 사람이 현장에서 절명을 했습니다.
박선호에 의하면 “같이 살자”고 말했던 것은 상황이 끝났으니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만약 한 발이라도 실수를 했다면 자기도 당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박선호에 의해 대기실 상황이 먼저 끝나게 됐습니다.
또 다른 세 명의 경호원은 주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호원이 왜 식사를 하고 있었느냐. 아시다시피 김재규의 부하인 박선호와 대통령 경호실의 경호원들은 모두 친구 사이입니다. 친구도 보통 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 오면 대통령 경호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시간을 때우고 가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기 임무는 생각도 안 하고 정보부 식당에서 마련해준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밥을 먹고 있는 경호원들을 아까 배치된 세 사람, 즉 이기주, 유승옥, 박흥주가 바깥에서 덮쳤는데, 바깥에서 쏜 권총 열다섯 발 정도에 두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사람은 朴相範(박상범)이라는 이로, 고려대학 출신인데 사격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박상범싸는 살아서 이후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경호실장과 보훈처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상황은 한 10여초 사이에 모두 끝났는데, 모든 상황이 끝난 후에도 안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박 대통령이었어요. 박 대통령은 총을 맞자마자 “난 괜찮아”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만, 제가 10·26 사건을 취재하고 싶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과연 합수부에서 발표한 대로 박 대통령이 총을 맞고도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데 대한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한 번 규명해 보자, 사람이 어떻게 총을 맞고도 “난 괜찮아”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과장한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이 전해주는 것을 그냥 확인도 안하고 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말은 “난 괜찮아”
박 대통령은 “뭣들 하는 거야” 하는 말을 하고 나서, 가슴에 총을 맞고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심수봉 쪽이었죠. 쓰러져서 머리가 식탁에 닿았는데, 피하려는 행동이나 고함지르는 행동은 일체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김계원은 바깥으로 나가 버렸고, 마지막에는 결국 모두 박 대통령을 다 버렸습니다. 차지철도 실내 화장실로 도망가 버렸고 남은 이는 여자 둘 뿐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도망가지 않았어요.
가슴을 관통당한 박 대통령은 등에서 피가 솟구쳤습니다. 신재순은 손수건도 없고 해서 그냥 손으로 등에서 콸콸 피가 솟는 것을 막았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샘솟듯이 나왔다고 합니다. 피를 막으면서 신재순이 “각하, 괜찮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에 화장실로 피했던 차지철이 문을 빼꼼히 열고는 “각하, 괜찮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차지철의 물음에 박 대통령이 “난 괜찮아”라고 대답했습니다. 옆에서 다시 신재순 양이 “각하, 정말 괜찮습니까?” 하니까 박 대통령이 다시 “난 괜찮아”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말이었죠.
“난 괜찮아”라는 말이 무슨 뜻이었느냐. 신재순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난 괜찮으니까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 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김계원 씨는 박 대통령의 “난 괜찮아”라는 말을 바로 마루에 나와서 들었다고 해요. 김계원 씨 역시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괜찮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난 괜찮으니까 어서 나가게, 피하게“ 하는 그런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김재규는 바깥으로 나와서 불발된 총을 땅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방에서 나오는, 두 경호관을 처치한 박선호와 마루에서 딱 마주치자 박선호가 들고 있던 총을 뺏어서 다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에 실내 화장실에 숨어있던 차지철이 도망가기 위해 나오다가 방으로 들어오는 김재규와 딱 마주치게 됐습니다. 차지철은 문갑을 들고 막았습니다만, 문갑으로 총알을 막을 수는 없죠. 김재규는 총을 쏴 버렸고, 차지철은 복부에 총을 맞고 바로 쓰러졌습니다. 그 후 김재규가 왼쪽으로 돌아서 박 대통령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심수봉은 도망을 가 버렸죠. 그래도 끝까지 남아있던 여자가 신재순이었는데, 수사기록을 보면 그 순간이 아주 현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조서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차지철을 꼬꾸라트리고 앞을 보니 박 대통령이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대통령에게 다가갔고, 여자는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권총을 각하의 머리에서 50센티 거리에 대고 쐈습니다.”
“일어나서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이 김재규가 본 상황이었다면 신재순 씨가 본 상황은 어땠느냐. 신재순 씨는 저에게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그 때 김재규의 눈과 마주쳤는데 저는 그 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짐승의 눈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다고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서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이 박 대통령의 머리에 쏜 총성이었죠. 신재순은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도 무서워서 문의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습니다. 한참 있다 바깥이 좀 조용해졌습니다. 조용해진 그 때 김계원 씨가 들어와서 “각하를 모셔”라고 말한 후, 박 대통령을 등에 업어서 국군병원 분원, 즉 지금 보안사가 있는 자리 쪽으로 박 대통령을 싣고 갔습니다. 나중의 검시 기록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그 차 안에서 절명을 했습니다.
그러다 잠시 조용해졌어요. 그래서 신재순 씨가 화장실 문을 열고나오니까 문 앞에 차지철 실장이 하늘을 보고 누운 상태에서 신음을 하고 있었어요. 사람이 보이니까 차 실장이 불렀어요. 이 이야기도 신재순 씨의 수사기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신재순 씨가 차지철을 일으키려고 했던 순간을 증언한 내용입니다.
“차 실장은 몇 번 힘을 써보다가 포기하는 눈빛을 하고 말했습니다.
‘난 못 일어날 것 같아’하고 다시 쓰러져 신음하는데, 그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밤 차 실장은 김재규 부장을 자극하고 약을 올리듯 막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차 실장이 고마운 것은 그 날 제가 대기실에서 면접을 할 때 술을 못 마신다고 했더니 옆에 깡통을 갖다 놓을 테니까 거기에 부어버리라고 말하더군요”
신재순 씨의 박 대통령의 마지막에 대한 기억이 워낙 명료하고, 마치 그림을 보거나 사진을 찍은 것 같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듯해서 제가 다시 물어봤더니, 그 날 밤의 상황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 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몸을 가누지 못하시거나 말이 헛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 하는 뜻이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분의 마지막은 체념하는 모습이었는데, 허무하다기보다는 解脫(해탈)한 모습 같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라며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해탈한 모습으로 죽다!
신재순 씨는 그렇게 표현력이 좋은 분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참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아등바등하게 피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체념해서 허무하게 되어버린 게 아니라 해탈한 모습이었다는 말입니다. 해탈한 모습이라는 표현은 불교 용어 아닙니까? 生死를 넘어서 ‘아, 이건 나의 운명이구나. 이 순간에 내가 피하려고 해봤자 소용없는 것이다. 운명처럼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이 해탈한 모습이었다는 표현이 저는 아주 정확하면서도 박 대통령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朴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준 신재순이라는 증언자가 있었다는 것은 朴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복이라고 말입니다. 朴 대통령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다행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朴 대통령이 그 날 보통 사람처럼 행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차지철, 김계원 씨의 행동은 보통 사람이 하는 행동입니다. 차지철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김계원 씨를 어느 정도 비난할 수 있을지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총성이 나고 옆에서 사람이 피를 쏟고 쓰러지면 도망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조건 반사적인 행동이죠. 계산해서 하는 게 아니라 총소리가 나면 모두 몸을 낮추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朴 대통령만이 그 날 옆에서 총성이 나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담담하게 있었습니다. 딱 앉아서 피하지도 않고 그냥 담담하게 있었습니다. 만약 朴 대통령이 보통 사람처럼 행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예를 들어, 朴 대통령이 실내 화장실로 박차고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 살해됐다면, 朴 대통령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나마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우리가 朴 대통령을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오늘 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야겠습니다.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빨갱이들의 어문정책인 한글전용을 따라하는 똥고집이 이나라 국민의 水準과 思考를 低級하고 淺薄한 초등수준화로 끌어내려 결국은 左翼들의 사탕발림 선전,선동에도 쉽게 속아 넘어가는 베트남식 左傾化로 내조국을 망하게 하느니!
끝까지 한번 보시길...
-이런 위대한 나의 祖國, 大韓民國을, 昨今과 같이 淺薄한 低質과 생떼가 판을치는 개판으로 만드는 主犯은 바로 盲目的인 '한글전용'이다!
-이 사회 모든 低級한 사회현상과 혼란은 모두 한글전용 탓이다. 빨갱이들의 어문정책인 한글전용이 우리국민을 쉽고 천박한 말만 쓰게 만들고 언어생활 전반이 뜻을 모르는 소리글자만으로 표기되니 매사 숙고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 천박하고 단순한 저수준의 국민으로 愚民化, 單純化시켜 전국민을 좌파들의 즉흥적이고 선동적인 선전선동에 취약한 단순 左傾化된 低質국민으로 만든다. 좌파정권 10년동안에 社會底邊으로 급속하게 擴散,定着되어버린 '盲目的이고 極端的인 한글전용'이 이나라를 망친다.
빨갱이 어문정책인 한글전용이라는 개미지옥에 빠져 한글迷信敎에 취해 漢字를 排斥한 결과로 韓國語의 高級어휘가 사라져가고 있고 이로 인해 韓國語는 쉬운단어와 어휘만 쓰는 淺薄한 초등수준의 언어가 되어 그 사이를 외래어,외국어가 차지하는 사망 5분전의 참으로 참담한 저급언어로 전락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30년 후, 韓國人 두사람의 대화는 필경 이리될터인즉...
빨갱이들 어문정책인 한글전용을 똥고집처럼 맹목적으로 따라해 전국민이 英語혼용은 괜찮고 漢字혼용은 안된다는 가히 精神病的 漢字被害妄想症과 한글미신교에 빠져 漢字를 죽이고 전통을 부정하는 左派들 천지로 변해가니 한국어는 高級語彙가 死藏된 단순하고 쉬운 언어로 初等水準化 되어 우리의 國語辭典이 초등학생의 노트두께로 얇아지고 있다. 아프리카 미개국 국어사전도 이보다는 두꺼우리라...
이로인해 국민들의 知的水準과 思考가 갈수록 천박하고 단순해져가 전통단절을 통해 새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좌파들의 선전 선동에 극도로 취약한 국민들이 되어가고 이북 빨갱이들의 전통단절의 무기인 漢字폐기(한글전용의 똥고집), 戶主제도 폐지(전통가족제도 붕괴)등등의 左派정책을 멍청하게 따라하니 그들이 만드는 "새세상"이 "개나소나 모두 못사는 새세상"이라는 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이 되어간다.
한글전용이 생각하고 熟考하기 싫어하는 단순무식한 국민들로 만든다! 한글전용이라는 惡魔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韓國은 반드시 망한다! 한글미신교라는 전민족 愚民化 개미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한민족은 반드시 歷史에서 사라진다!
1->全國民 언어,어휘구사능력의 초등수준화(漢字忌避로 쉽고 單純한 單語만을 使用, 高級語彙의 死藏) 2->全國民 지적수준의 하향평준화 (讀書率의 低下, 知的欲求의 下向平準化) 3->全國民 지적수준의 양극화 (指導層의 西洋留學, 庶民層의 知的劣勢 加速) 4->思考의 단순,愚民化(小說,雜誌外의 高等水準의 冊을 안읽으려 한다.知的水準의低下) 5->左派의 蠢動과 煽動의 日常化(思考가 單純無識化된 愚衆이되어 左傾 社會團體의 위선적인 선전,煽動이 잘 먹힌다) 6->全國民의 좌빨, 左傾化의 一般化 (국민모두가 左翼,좌파들은 위선적으로 愚衆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빨갱이임을 망각하고 좌파는 진보이며 善인줄 착각한다) 7->社會의 理念對立 투쟁과 政爭, 혼란의 연속 (아마 現在의 우리상황 아닐까) 8->彼我 區分 없이 빨갱이化의 加速 (이쯤되면 누가 진짜빨갱이인지 피아구분도 안된다) 9->거의 거지수준의 빨갱이 軍隊에게 瞬息間에 赤化 (내부분열 및 프락치의 준동으로 인한 내부混亂을 틈타 經濟,軍事力으로는 比較도 안되는 劣勢인 거지수준의 빨갱이軍隊에게 거의 束手無策으로 순식간에 占領 당한다) 10->大殺戮의 시작 및 內部分裂의 先導役割을 했던 프락치 및 좌빨들의 處刑.(한반도 인구의 절반가까이가 처형되는 大殺戮의 시작은 물론 이북의 聖骨빨갱이들이 아닌 남한내 좌빨 및 프락치들도 모두 죽창으로 처형당해 全滅한다.)
월맹이 남베트남을 점령해 赤化를 완료한 후 남월남내서 암약하던 모든 프락치 및 내부 빨갱이들을 상을 주기는커녕 "한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다. 저런자들은 사회주의에서도 혼란과 분열을 惹起한다. 총알도 아까우니 죽창으로 모두 죽이라."하여 거의 모두 교화소등에서 죽창으로 처형, 전멸된 사실은 歷史가 증명해 준다. 이런 수순을 빨갱이들은 불과 수십년 전 베트남에서 겪어보았고 赤化에 성공했다.
그간 교육현장에서 사라진 漢字로 인해 천박하고 저열한 문자생활과 언어생활로 熟考하지 않는 단순무식하고 천박한 思考로 자라난 한글전용세대들로 인해 급속히 사회저변이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무뇌아천지로 좌경화되어 정권이 좌파에게 넘어가게 되었고...좌좀신문인 한걸레신문이 시작했던 한글전용과 가로쓰기가 확산되어 90년대말 조선일보마저도 마지막으로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꾸면서 신문지면도 거의 한글전용으로 변해버려 수많은 인쇄매체들에서 한자가 사라졌고 급기야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급속도로 한글전용이 실생활에 뿌리내리고 한자가 사라지기 시작한 불과 십수년전부터 이 나라는 전국민의 단순무식 愚衆化로 淺薄한 생떼와 좌파의 사탕발림 선전선동이 판을 치는 低質, 저급한 사회로 변해가며 위와같이 漢字를 버린후 비참하게 된 베트남의 사례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니....
그런데 한자혼용논란시 꼭 한자병용을 그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愚鈍하고 灰色的인 멍청한자들이 많다. 아..그러나..읽을 때 漢字竝用(한자병용)은 한글전용보다도 더 눈을 混亂스럽게 만들고 可讀性을 떨어뜨리는데.. 어떤면에서는 한글전용보다 더 나쁜, 더 비열한 漢字竝用(한자병용)이다.
세상의 어느나라도 자신들의 言語를 표시하는 文字(로마자,漢字등)를 적고 옆에 괄호( )를 치고 그 발음기호나 다른문자를 二重으로 또 적는 나라는 없다. 유독 지구상에서 바보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에서만 한글전용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미명하에 괄호를 치고 漢字 또는 한글을 竝記하는 바보들이 있다. 糊塗策이다..
漢字語에 있어서는 漢字는 원표기문자이고 한글은 고유어를 표기하거나 발음기호를 표기하는 문자일뿐이다. 편의상 한자어를 적을때 한글로만 적을수는 있다. 그러나 漢字를 표기하고 그옆에 이중으로 괄호치고 한글로 발음기호를 이중으로 다시 표기하거나 또는 그반대라도 그 것은 便法이고 糊塗策이다. 세상의 어느나라도 초기 유치원생 문자교육때를 제외하고는 모국어를 적고 그 옆에 발음기호를 병기하는 나라는 없다. 영어문장중에도 혹여나 어려운 단어가 쓰여졌다고 못읽을까봐 그 옆에 괄호치고 발음기호를 적어주는 나라가 있는가!
文字를 모르면 못읽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하다. 모르면 못읽어야 알기위해서 찾아보고 공부하고 생각하고 記憶한다. 그 원문자인 漢字문자를 모르는데 발음기호인 한글로 읽어봤자 그 의미도 모르므로 읽으나마나이다. 한글전용의 확산이 깊이 생각하거나 熟考하지 않는 천박한 族屬으로 만드는것이 큰 문제인데 그것은 한자병용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漢字竝用은 한글전용보다 더 눈을 混亂스럽게 하는 糊塗일뿐 좋은 방법이 아니므로 漢字混用을 해야한다. 단 10%~20%의 混用이라도 混用이 의미가 있지 竝用은 無意味 그 자체이고 오히려 가독성을 해쳐 漢字에 더욱 敵愾心을 갖게하고 불필요하다고 느끼게하는 逆效果를 보인다.
읽을 때 한자혼용이 훨씬 부드럽게 읽기 좋다. 한자병용은 可讀性이 상당히 좋지 않으며 글을 쓰기에도 二重으로 중복입력해야 해서 무척 힘들뿐더러 가독성도 안 좋은 漢字竝用(한자병용)은 한글전용의 일부이며 그 부작용을 가리기 위한 호도책일뿐이다..
漢字竝用은 괄호안에 二重으로 중복표기가 됨으로써 可讀性이 많이 떨어지는 逆效果가 있고 글을 쓸 때도 이중입력으로 무척 힘들고 글을 읽을 때도 이중으로 중복표기 때문에 부드럽게 읽기에 무척 방해가 되는바, 한자병용은 입력방법과 눈을 피로하게 하여 不必要하고 가독성을 떨어뜨려 부드러운 독서에 더욱 해롭다.
한자병용은 한글전용의 문제점을 糊塗하기 위한 彌縫策에 불과할 뿐, 근본적으로 한글전용과 같으며 오히려 가독성을 저해하여 漢字에 대한 盲目的인 敵愾心만 더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수 있어 오히려 더 해로울 수 있다....
★ www.interOK.kr /大韓國人의 復活! 나의祖國이 한글전용이라는 개미지옥의 陷穽에 빠져 서서히 淺薄하게 망해가고 있음을 痛歎하면서../많은 세월을 왼손잡이가 正義라 믿고 살아왔으나 그들의 詐欺的인 僞善과 左派獨裁의 惡魔性에 幻滅을 느끼고 錯覺에서 깨어 지금은 徹底한 오른손잡이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