儀軌, 文化的 自矜
국한논설문을 많이 읽어야
한자공부가 완성되고, 국어실력이 향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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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순 한글면 추가)
(1960) 儀軌, 文化的 自矜 난이도 = 4급 1,000 자를 초과한 한자 수 (58)
“外奎章閣 圖書가 返還되지 않으면 韓國人은 잠들지 못한다.” 프랑스의 代表的 日刊紙 르몽드 2007年 3月 7日 字에 실렸던 廣告文案이다. 1866年 丙寅洋擾 當時 프랑스가 掠奪해 간 外奎章閣 儀軌의 返還을 促求한 全面廣告의 寫眞은 1993年 프랑수아 미테랑 大統領이 高速鐵(TGV) 契約 成事를 希望하며 韓國에 되돌려준 ‘徽慶園園所都監儀軌’가 쇠사슬에 묶인 채, 프랑스 國旗인 三色旗가 그려진 열쇠로 채워져 있는 場面이다. 寫眞 아래엔 “미테랑 大統領이 高速鐵 契約의 條件으로 모든 外奎章閣 圖書를 돌려주기로 約束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1866年(高宗 3年) 3月 國內에 들어와 있던 파리外邦傳敎會 所屬 12名의 프랑스 宣敎師 가운데 9名의 神父가 處刑됐다. 아울러 1萬餘 名에 達하는 朝鮮 天主敎人들이 虐殺當했다. 살아남은 프랑스 宣敎師 리델 神父와 朝鮮人 信者 몇 名이 中國으로 脫出해 그해 7月에 이를 베이징 駐在 프랑스 公使에게 알렸다. 이에 같은 해 9月 18日 프랑스의 中國海 分艦隊를 이끌던 피에르 귀스타브 로즈 提督이 세 隻의 軍艦을 거느리고 江華島 海域을 거쳐 漢江을 거슬러 올라와 漢陽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碇泊했다가 몇 番의 砲擊을 加한 後 돌아갔다.
같은 해 10月 11日 로즈 提督은 다시 6隻의 軍艦을 이끌고 出航한 後 14日 岬곶이 附近 江華島에 上陸해 漢江으로 通하는 길목의 要塞를 掌握한 後, 16日 동틀 무렵 江華城을 占領하고 掠奪을 恣行했다. 우리는 이것을 1866年 丙寅年의 西洋오랑캐에 依한 騷亂이라 해 ‘丙寅洋擾’라 부른다. 當時 프랑스軍이 直接 作成한 掠奪 物目을 보면 銀塊 19箱子 外에도 ‘假綴된 큰 冊 300卷, 假綴된 작은 冊 9卷, 흰色 나무箱子에 든 작은 冊 13卷, 작은 冊 18卷’이란 대목이 눈에 띈다. 當時 로즈 提督의 日誌에는 이런 內容도 담겼다. “建物 中 한 군데에는 豪華로운 藏書들이 保管돼 있었는데… 藏書 大部分은 여러 卷으로 이뤄져 있었고 2切紙 크기에 褙接된 表紙로 裝幀되어 있었으며, 뒷면은 彫刻이 깊게 새겨진 靑銅으로 만든 틀과 이것을 支撑하기 爲한 놋쇠고리로 補强돼 있었다.” 이것이 바로 儀軌다. 그中에서도 임금이 보는 御覽用 儀軌인 것이다.
儀軌들이 保管돼 있던 建物이 바로 朝鮮王室 圖書館의 江華島 分館인 外奎章閣이다. 1866年 11月 14日 프랑스軍은 江華島를 떠나면서 外奎章閣을 包含한 江華城에 放火해서 王室의 主要 保管品 78件과 餘他 貴重圖書 804種 4730餘 卷이 불에 탔다. 불타 없어진 書籍 가운데는 歷史的 價値가 큰 唯一本 136種 235卷도 包含돼 있다. 프랑스軍이 掠奪해간 儀軌 가운데 58種도 國內엔 없는 唯一本들이다.
儀軌는 冊封, 追崇, 婚禮, 喪禮, 祭禮, 親耕, 陵園 造成, 宮闕 造營, 功臣 錄勳, 王室 印章, 國王 肖像畵 製作 等 王室이나 國家의 主要 行事의 過程과 內容을 글과 그림으로 整理한 記錄이다. 儀軌는 하나의 行事를 完結된 形態로 整理한, 世界 歷史上 類例를 찾기 힘들 만큼 具體的이고 正確한 매뉴얼이란 點에서 우리의 嚴密性, 正確性, 體系性의 象徵이라고 할 수 있다.
外奎章閣은 2003年 불타 없어진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그 안은 비어 있다. 그 안을 채워야 할 儀軌는 國家의 命運을 걸고 마땅히 되찾아야 한다(本欄 2009年 11月 7日字 ‘外奎章閣 圖書’ 잊었나? 參照). 그것은 우리가 便히 잠들기 爲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大韓民國 르네상스’를 闡明하며 다시 깨어나기 爲해서다. 그래야 ‘經濟는 크나 文化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經濟도 크고 文化는 더욱 큰 나라’ 大韓民國이 되지 않겠나.
中央 100206 [소프트 파워] 鄭鎭弘 論說委員
(國漢混用文普及會 kukhanmoo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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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문화적 자긍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되지 않으면 한국인은 잠들지 못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일간지 르몽드 2007년 3월 7일 자에 실렸던 광고문안이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을 촉구한 전면광고의 사진은 1993年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고속철(TGV) 계약 성사를 희망하며 한국에 되돌려준 ‘휘경원원소도감의궤’가 쇠사슬에 묶인 채,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가 그려진 열쇠로 채워져 있는 장면이다. 사진 아래엔 “미테랑 대통령이 고속철 계약의 조건으로 모든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기로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1866년(고종 3년) 3월 국내에 들어와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가운데 9명의 신부가 처형됐다. 아울러 1만여 명에 달하는 조선 천주교인들이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몇 명이 중국으로 탈출해 그해 7월에 이를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알렸다. 이에 같은 해 9월 18일 프랑스의 중국해 분함대를 이끌던 피에르 귀스타브 로즈 제독이 세 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강화도 해역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정박했다가 몇 번의 포격을 가한 후 돌아갔다.
같은 해 10월 11일 로즈 제독은 다시 6척의 군함을 이끌고 출항한 후 14일 갑곶이 부근 강화도에 상륙해 한강으로 통하는 길목의 요새를 장악한 후, 16일 동틀 무렵 강화성을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우리는 이것을 1866년 병인년의 서양오랑캐에 의한 소란이라 해 ‘병인양요’라 부른다. 당시 프랑스군이 직접 작성한 약탈 물목을 보면 은괴 19상자 외에도 ‘가철된 큰 책 300권, 가철된 작은 책 9권, 흰색 나무상자에 든 작은 책 13권, 작은 책 18권’이란 대목이 눈에 띈다. 당시 로즈 제독의 일지에는 이런 내용도 담겼다. “건물 중 한 군데에는 호화로운 장서들이 보관돼 있었는데… 장서 대부분은 여러 권으로 이뤄져 있었고 2절지 크기에 배접된 표지로 장정되어 있었으며, 뒷면은 조각이 깊게 새겨진 청동으로 만든 틀과 이것을 지탱하기 위한 놋쇠고리로 보강돼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의궤다. 그중에서도 임금이 보는 어람용 의궤인 것이다.
의궤들이 보관돼 있던 건물이 바로 조선왕실 도서관의 강화도 분관인 외규장각이다. 1866년 11월 14일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떠나면서 외규장각을 포함한 강화성에 방화해서 왕실의 주요 보관품 78건과 여타 귀중도서 804종 4730여 권이 불에 탔다. 불타 없어진 서적 가운데는 역사적 가치가 큰 유일본 136종 235권도 포함돼 있다.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의궤 가운데 58종도 국내엔 없는 유일본들이다.
의궤는 책봉, 추숭, 혼례, 상례, 제례, 친경, 능원 조성, 궁궐 조영, 공신 녹훈, 왕실 인장, 국왕 초상화 제작 등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과정과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의궤는 하나의 행사를 완결된 형태로 정리한,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구체적이고 정확한 매뉴얼이란 점에서 우리의 엄밀성, 정확성, 체계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외규장각은 2003년 불타 없어진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그 안은 비어 있다. 그 안을 채워야 할 의궤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마땅히 되찾아야 한다(본란 2009년 11월 7일자 ‘외규장각 도서’ 잊었나? 참조). 그것은 우리가 편히 잠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대한민국 르네상스’를 천명하며 다시 깨어나기 위해서다. 그래야 ‘경제는 크나 문화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경제도 크고 문화는 더욱 큰 나라’ 대한민국이 되지 않겠나.
중앙 100206 [소프트 파워] 정진홍 논설위원
(오.탈자가 보이시면 연락주십시오. kukhanmoo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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