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쯤에서 다시보는 越南(베트남) 패망의 亡國 스토리
명진과 같은 정치승과 천주교회등 左傾化된 종교계의 각종 煽動, 언론계, 정치계 등 사회각처의 사회분란 조장 발언과 거의 선동에 가까운 左派언론들의 선전 선동의 와중에 우리 海軍의 戰艦이 격침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과연 우리 政府와 軍은 健康한가!...
아래글을 끝까지 읽어보라.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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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최후의 탈출자, 이대용 장군 의 - 越南 敗亡 현장 목격자의 惡夢
베트남 공산화 과정을 답습하는 한반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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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이대용 육사총동창회장은 월남 패망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 담당 공사로서 월남 패망 과정을 지켜보았고, 월남 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동안 억류 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李회장은 「요즘 자꾸 사이공 함락장면이 꿈에 나타난다」면서「베트남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란성 쌍둥이」 라고 말했다.
李회장은 「대통령과 학자, 지식인들이 우리와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에서 통일의 교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월남 패망을 연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라고 말했다. 다음은 李회장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
우리와 월남의 역사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그래서 평소 나는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역사를 표현할 때 흔히 「반만년 배달민족」 이라고 하는데, 월남은 「반만년 황룡(黃龍)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국가체제를 이룬 역사적 시기도 비슷하고, 중국이 팽창하면 조공(朝貢)을 바치다가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중국의 주변민족으로서 끝까지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온 점 역시 같다.
월남이란 지명은 중국 전국시대에 월족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나라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계에서 과거제로 관료를 선발하는 문치주의의 나라는 그 제도의 본고장인 중국을 제외하면 조선과 월남이 대표적인 표본이다. 모든 역사와 인명을 한자로 기록한 것도, 중국의 주변부에서 민족이 소멸 당하지 않고 생존한 것도 양국이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한번 성립된 왕조는 그 수명이 보통 400∼500년인데 비해 월남은 120년으로 우리보다 상당히 짧다는 점이다. 그것은 월남 민족이 우리 민족보다도 분열이 더욱 심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지배권에 있다가 식민지를 경험한 것도 비슷하며,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남북의 허리가 잘려 분단된 사실, 그리고 북에는 공산정권, 남에는 자유 민주정권이 수립된 것 역시 비슷하다. 양측이 무력을 동원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 사실도 동일한 역사적 패턴을 보인다.
지역 감정이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한국은 친일파, 베트남은 친불 친일·친중파)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 세력 간의 끝없는 분파(分派)와 이합집산(離合集散), 그리고 정쟁(政爭)을 벌이는 것까지도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1954년 7월21일 프랑스 원정군이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해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17도선 이남에는 자유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越南)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越盟)이 수립됐다. 이후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하지 못해 미군의 도움을 받았고, 결국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파병돼 공산군과 싸운 것까지 한국과 비슷하다.
청렴결백했지만 독재로 기울었던 고 딘 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수차에 걸쳐 군부 쿠데타가 반복되었다. 이 와중에 정권은 부패와 내부분열을 거듭했다. 전쟁에 지친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 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직접전비(直接戰費)와 간접전비를 합쳐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미군 병력도 53만 6,000명 선을 파병할 정도로 전쟁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戰에 진저리를 쳤고, 결국 수렁에서 발을 빼기위해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 양상을 보였다. 이 선거에서 당선자인 웬반티우에게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는, 선거유세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며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이처럼 월맹에게 호의적이던 그가 공산군의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한편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69년 1월 15일부터 미-월맹 2자 회담은 미-월남-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 후에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월맹의 4자 회담으로 확대되었다.
한쪽에선 평화회담, 다른 쪽에선 대남(對南)공작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 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달러(20억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美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 위원단온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한편 월맹에서는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일종의 인질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믿지 못한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4+4+4 즉 무려 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그리고 월남과도 방위조약을 체결, 이제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수년간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트 정책과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으로 세계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파리 휴전협정의 성과로서,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는 197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런데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세계인들은 그가 월맹의 당 서열 5위였기 때문에, 자신의 위에 있는 지도자들을 염두에 둔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다. 결국 키신저 혼자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나머지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나, 그것은 전략은 변함이 없은 채 전술만 바꾼 셈이었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남 기본전략이 더욱 공고히 다듬어졌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도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월남의 90%를 정부가 지배했지만…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 국토 44개 성(省) 중 12개 성의 곳곳에만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 지역, 그리고 4.5%는 공산측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내(內)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그들은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월맹 경제 원조도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전 국토를 휩쓸었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 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결국이 선거가 최후의 자유선거가 되고 말았다.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위장휴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나는 군재직 시절,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훗날 월남대통령이 된 티우씨와 만난일이 있었다. 그후 주월대사관 무관(武官)으로 파견 됐을 때, 티우는 대령으로서 사이공 부근의 사단장으로 재직 중이였다. 그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다시 월남으로 보낸 것이다. 그래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티우 대통령과는 속 깊은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비록 독재로 기울기는 했지만 대단히 청렴결백했던 고 딘 디엠 대통령 시절, 월남군은 용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덕택에 휴전당시 월남은 전 인구의 90%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대통령 사위가 그럴 정도였으니,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등한시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 기회가 날 때마다 사회 지도층 인사와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사례가 언론에 공개되는 모습은, 25년 전 월남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공산군에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군대가, 식량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원인이다.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한편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에 기울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레준 서기장은 당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어수선한 미국이, 월맹이 남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침 전쟁의 결정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 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 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하도록 했다. 반띠엔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 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치밀하게 철저한 위장을 했다.
그러나 이미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이 무렵 나는 월맹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티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당시 월남군 정예부대는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이었다. 나는 티우 대통령에게 「지금 월남은 자유라는 미명하에 게릴라들 전쟁터가 됐습니다.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한데 정보기관에서는 이렇다할 아무런 보고가 없으니, 일단은 도지사 소속으로 되어 있는 민병대 병력을 무장시키고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을 각각 군단으로 강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 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며 완곡히 거절했다. 티우 대통령은 확고한 반공 지도자였지만 평화에 눈이 멀어 유비무환을 잊었던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월맹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우습게 보았던 것이다.
우익 ·애국인사 암살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은 대통령직에 눈이 먼 인사들의 탈당으로 분열,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담았던 당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내가 월남에서 체험했던 정쟁과 어찌 그리도 닮은꼴인가.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홍,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이 와중인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각지에 분산·고립된 채 총체적 부패와 전의 상실에 빠져 있던 월남군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티우 대통령은「즉각 정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 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공산군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 하나 이행되지가 않았다. 티우 대통령의 간곡한 대국민 호소가 발표되자 「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인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짠후탄 신부는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월맹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티우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고 몇 개월 후 실시될 대선에서 자기들이 미는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다른 야당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월맹을 이용한다며 격렬히 비난했다. 이 와중에 웬까오끼 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반체제 운동가들 - 통일 후 감옥으로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해 버렸다.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유령 군인」과 「꽃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재야(在野) 정치인 정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남침 후 한 달이 지난 이때까지도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 중이던 월남군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월맹군 포위망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던 월남군 제5사단은 월맹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 항전을 벌이다 궤멸 당했다. 레웬비 장군은 조국의 패망을 비통해 하면서 권총으로 자결, 나라와 운명을 함께 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 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월남군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원비 준장, 제7사단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무너지는 군대를 보면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망명 거부, 모두 권총 자결했다.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월남의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이중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공산 정권은 수많은 공무원들을 잡아넣는 형무소가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부대 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를 수용하기도 했다.
반정부·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모조리 체포 처형됐다. 그들의 수감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것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층(下層)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나는 이 참혹한 패망의 역사를 그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강대국과 맺은 방위공약이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나는 티우 대통령이 미국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무질서와 공산 프락치들로 인한 국론 분열에 빠진 월남에 고개를 가로 저었던 미국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자기 국가의 안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안보는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휴전협정도 아닌, 오직 자국(自國)의 군사력이 담보할 뿐이다.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외교관이었던 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놀라운 사실은,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는 점이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월남군과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파리 휴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외국의 몇 및 언론은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휴전협정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걱정스럽게 지적했었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무시한 키신저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은 결국 자유월남의 시체 위에서 얻은 비극의 노벨상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월남의 패망과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빠진 월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http://cafe.daum.net/rotcguguk/DOo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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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獨의 첩자들·越盟의 프락치들 |
written by. 정준 <juunjuly@hanmail.net> |
이철우(李哲禹) 의원의 조선노동당 가입 논란이 여야간의 전면전으로 치닫을 기세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과도 맞물려 있어 자칫 당의 정체성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진실 게임'과 '색깔 공방'은 앞으로도 한동안 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독일과 월남은 한반도와 함께 과거 냉전시대의 표징으로 남아있던 분단지역 이었다. 이들 국가의 과거 정보활동과 첩자 또는 프락치전술이 '통일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독일과 월남이 겪은 '과거'는 탈(脫)냉전시대에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에게 거울이 될 것이다.
독일 통일 이전 동독(東獨)에는 슈타지(=Stasi·Staatssicherheit: 국가안전부)라는 정보기관이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에 대한 정보공작을 위해 별도로 HVA(중앙정보본부)라는 담당기구를 두고 있었다. HVA는 서독의 정치인을 매수하여 서독의 주요 정책을 동독에 유리하게 이끌고 재계와 노동계 학계 종교계 학생운동세력 등에 효과적으로 침투하여 그 영역을 확대 또는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해왔다.
통독 후 슈타지의 비밀문서를 분석한 결과는 놀라웠다. 서독(西獨)에서 활동한 동독의 고정간첩은 약 2만∼3만명으로 추산됐으며, 이들의 활약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서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였다. 통독 이전의 과거청산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서독 총리 브란트의 보좌관으로 들어가 암약했던 위장간첩 기욤은 동독의 현역 육군 대위였다. 그는 서독으로 탈출한 것처럼 가장한 후 장기간의 잠복기를 거쳐 당국의 감시망을 벗어난 후 관계에 진출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빌리 브란트는 서독총리직을 도중하차했다. 74년 4월의 일이다.
브란트가 동서독 정상회담을 갖고 양독(兩獨)관계의 물꼬를 튼 지 4년만의 일이었다. 그는 서독역사상 동독정권에 가장 호의적인 지도자였는데도 동독은 그의 최측근에 간첩을 심어두고 있었다. 당시 서독 내 동독 첩자는 약 1만1천명이었다. 브란트는 동독의 배신에 뒤늦게 치를 떨어야 했다.
독일 의회에는 한때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의원들이 슈타지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 정치인들의 나치 전력(前歷) 축첩(蓄妾) 부정축재 등에 연루된 약점을 잡아 협박하거나 매수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프락치로 만들었다.
문제는 슈타지의 활약상- 그 자체보다 이 같은 활동이 가능했던 서독 사회의 전체적 분위기에도 있었다. 당시 서독 지식인사회는 동독 편을 들어주고 동독을 인정해야만 '진보적인 인사' 또는 '진보적인 사고'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독일은 1969년부터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에 대해 '접근을 통한 변화'를 목표로 동방(東邦)정책을 채택해왔었다. 우리의 '햇볕정책' 모델이 바로 이 정책이었을 것이다. 이 동방정책으로 동독에 대한 경계가 풀려나면서 동독은 서독의 관계와 산업계 전반에 프락치를 침투시켜 폭넓은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슈타지'(Stasi)는 94,000명의 직원 외에 174,000명의 비밀 첩보원들을 거느리고서 6백만명을 사찰해온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체였다. '슈타지'가 도청한 전임 독일수상 콜에 대한 전화통화 기록(집무실 및 사적공간 포함)만도 7천 페이지에 달했음이 이를 잘 말해준다.
월맹(越盟)에 패망하기 이전의 월남(越南)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월남전 당시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여론을 자극한 명연설이 있었다.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前)해인 1967년 9월3일 월남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11명의 입후보자 가운데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그 명연설의 주인공이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는 선거유세에서 이렇데 외쳤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 메시지인가. 미국 내 반전(反戰)운동의 불을 지핀 것은 이 연설이었다. 그가 월맹측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 등 수많은 정치인·관료들도 같은 프락치였다.
호치민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공산당 프락치들을 월남 곳곳에 심어나갔다. 이들 프락치는 호치민의 베트남 공산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에 의해 1962년 1월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월남공화국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 각 기관과 군 최고사령부 및 일선 전투단위 부대에까지 베트콩의 조직과 정보망이 거미줄같이 구성되어 국가최고기밀까지 베트콩과 하노이정권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월남정부의 정치 외교 군사전략은 이들 프락치에 의해 허점이 찔리면서 결국 베트콩과 월맹군의 대공세로 이어졌던 것이다.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때마다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다시피 했다. 그 여파로 대공(對共)전문가들이 대거 쫓겨나고 말아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물론,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도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통독 이전 서독 사회 도처에 동독의 첩자들이 침투하여 정책결정을 오도했고, 월남 역시 결국 외적(外敵)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내부의 갈등과 반란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바로 이 대목이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이다. (konas)
정 준 (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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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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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南(베트남)敗亡을 쌍둥이처럼 똑같이 따라가는 21세기 大韓民國의 亡國스토리! 눈이 있으면 읽어보라! 똑같다!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농간과 左派의 선동에 의해 文盲退治라는 명목으로 조상들이 수천년 써온 漢字를 완전히 버린 越南(베트남)민족,
그 후 民衆들의 의식수준이 單純化, 우둔화되어 선동적, 투쟁적으로 되고 좌파의 선동에 이리저리 휩쓸려 가면서 政爭과 피의 鬪爭만을 일삼다가 漢字를 완전히 버린지 불과 70여년도 안되어 共産化, 赤化의 길로 自滅하였다.
그 결과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經濟的 貧國, 조상의 문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文化的 貧國 , 조상의 歷史와 글은 물론 자신들의 이름의 뜻도 번역,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 의미도 모르는 言語的 貧國 중 하나로 전락했다..
그리고 지금은 中國에 뒤지지 않았던 옛 찬란한 文化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으나 知的, 文化的 수준의 劣勢는 쉽게 극복이 안되어 漢字復活의 논의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는데...
...
語文政策은 그 사회의 理念,思想의 형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베트남이 共産化된 根本的인 원인은 漢字의 全面‘廢棄’(로마자표기전용)에 따른 전국민의 단순화, 우민화에따라 좌파의 선동전술이 蠢動에 성공해서 이고,
中國이 共産化된 원인은 베트남과는 반대로 漢字의 全面‘專用’ 에 따른 높은 문맹률로 전국민의 원래 단순, 우민화된 상태에서 당시 세기를 풍미했던 좌파가 得勢에 성공해서이고,
日本에서 공산주의자 및 좌파가 맥을 못 추는 원인은 漢字의 相互‘混用’ 에 따라 전국민이 높은 독서율과 독해율로 높은 의식수준을 유지하기 때문에 左翼의 선동이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 이래 줄곧 漢字를 혼용해 사용하고 있는 日本은 문맹율이 1%에도 못미친다고 하며 과거 世紀的으로 좌익천지였던 시절은 물론 現在까지도 그 사회에서는 단 한번도 좌익사상이 得勢한 적이 없으며 현재에도 좌익사상이 맥을 추지 못하는 극소수에 불과한 것을 보더라도 文字, 言語 교육정책과 그 사회의 理念 형성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이 증명된다.
반면 한국은 문맹률은 낮으나 편하기는 한글전용이 무진장 편하다. 는 이유 하나만으로 漢字를 의도적으로 배척하여 文解율은 최저수준으로 高學歷의 低學力자가 제일 많아 實質文盲率은 OECD최고수준으로 전인구의 97.6%가 눈뜬 장님들 천지라 하니 전 國民이 한글전용으로 詐欺당하는 줄도 모르고 사기 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위 '漢字와 理念과의 상관관계'는 漢字와는 상관없는 西歐諸國과는 관계없는 말이고 역사적으로 수천년간 漢字를 사용해 와 그 민족의 言語에 漢字가 큰 영향을 끼쳤던 中國, 日本, 韓國, 越南(베트남)등 동아시아 4국에 한정되어 비유되는 말이다.
4國중 중국, 월남, 북한등 2.5國은 이미 赤化의 경험을 하였고 0.5인 韓國만이 유독 20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내내 혼란스런 左派와 右派의 理念鬪爭의 난장판이 지속되고 있다.
줄곧 漢字混用을 하고 있는 나머지 한나라인 日本만이 굳건히 빨갱이 걱정 없이 자타가 공인하는 先進 一流國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 혼란의 연속은 베트남에서 이미 겪은바 있는 아래 수순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고 이미 그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자폐기(한글전용)의 고집은--->필연적으로,
-->전국민 지적수준의 下向平準化 (독서율의 저하, 지적욕구의 하향평준화)
-->전국민 지적수준의 兩極化 (지도층의 서양유학, 서민층의 지적劣勢 가속)
-->전국민의 愚民化 (소설,잡지外 고수준의 책을 안읽으려 한다. 수준저하)
-->左派의 蠢動 및 煽動의 일상화 (좌경사회단체의 蠢動으로 선동이 잘먹힌다)
-->전국민의 좌빨, 左傾化의 일반화 (전국민이 左派가 善인줄 착각한다)
-->사회의 理念對立 투쟁과 混亂의 연속 (아마 현재의 우리상황 아닐까)
-->彼我 구분 없이 빨갱이化의 가속 (이쯤되면 누가 진짜빨갱이인지 피아구분도 안된다)
-->거의 거지수준의 빨갱이 군대에게 순식간에 赤化
(내부분열 및 프락치의 준동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경제,군사력으로는 비교도 안되는 劣勢인 거지수준의 빨갱이군대에게 束手無策으로 순식간에 점령 당한다)
-->내부분열의 선도역할을 했던 프락치 및 좌빨들의 처형.(좌빨 및 프락치들은 죽창으로 모두 처형당해 전멸한다.
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한 후 남월남내의 모든 프락치 및 내부 빨갱이들을 '한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다. 총알도 아까우니 죽창으로 모두 죽이라.'하여 모두 죽창으로 처형, 전멸된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이런 수순을 빨갱이들은 불과 수십년 전 베트남에서 겪어보았고 赤化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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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漢字 버리자 고등교육 붕괴, 계층갈등 심화
漢字문화권에 있다가 스스로 한자를 폐기하는 문자개혁을 실시한 나라는 越南의 사례가 유일하다. 월남은 기원전부터 1천 1백여 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독립 후에도 중국의 영향력 아래 과거제를 시행했고, 아직도 동양식 冠婚喪祭의 전통이 남아있는 한자 문화권의 나라였다. 그런데 근세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식민정부는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1910년부터 20∼30년간에 걸쳐 한자를 폐지하고 월남어의 로마자化를 시도했다. 교과서와 국가 시험에서 한자를 폐지하고 로마자化한 언어를 강제했던 것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고유어의 로마자化가 심한 반발 없이 추진된 이유는 식민정부와 독립운동 세력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식민정부는 통치의 효율성을, 독립운동 세력은 「문맹퇴치」라는 목적에서 한자 폐지와 고유어의 로마자化라는 카드를 수용했다.
월남어는 단어의 60%정도가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을 하루아침에 로마자로 바꾸다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지식수준이 올라가지 않았고 면학 의욕도 떨어지게 됐다. 그 결과 광범위한 지식 부재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회 전 분야에서 한자가 퇴출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고등교육이었다. 한자를 몰아내기에만 바빴지 고급 학문을 위한 교재를 새로 만들 방법론에 대한 고뇌가 부족했고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등교육의 붕괴는 권력층과 부유층을 대거 프랑스로 유학을 내보내는 동기가 됐고, 유학의 엄두를 못내는 하류층은 극심한 지식의 빈곤현상에 처하게 됐다. 이것이 계층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겼고, 이 와중에 하류층에 공산주의 사상이 침투하면서 복잡한 월남전으로 비화된 것이다.
1975년 월맹이 공산 통일에 성공한 후에도 학문 不在현실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하노이 종합大는 1985년까지 교수가 없어 대학 설치를 못할 정도였다. 현재 베트남 전역에서 단과대학 이상의 고등교육기관 교사가 3천여명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고급 교육의 단절로 학교 시설은 있지만 교과 내용을 가르칠 만한 지식을 갖춘 교수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법률가의 대부분은 70세 이상 아니면 40대 중반의 젊은이로서 중간 계층이 드물다. 또 70세 이상의 고령 지식인은 프랑스어, 40대 젊은 지식인은 러시아어에 익숙한 형편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사회 지도층 일부에서 다시 한자를 되살려 공부를 시작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자문화권은 아니지만 20세기 들어 문자개혁을 시도한 나라로는 터키를 들 수 있다. 터키는 케말파샤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문자개혁을 실시했다. 터키의 말은 몽골의 영향을 받은 알타이 계통이었는데 아랍 글자를 차용해 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케말파샤가 『말은 못 고쳐도 문자는 고칠 수 있다』면서 아랍어를 로마자로 개혁한 것이다.
문자개혁에서 터키가 월남과 같은 혼란을 겪지 않은 이유는 표음문자 계통인 아랍어에서 같은 표음문자 계통인 로마자로 나갔기 때문이다. 또 터키는 과거에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등 발칸반도를 지배할 때 상당부분 유럽문화가 혼합되어 유럽문화와의 동질성이 민족 심성 내부에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움말 : 孫元日(陸士 10기출신, 경제기획원, 대한항공, 아시아나 항공근무 語文연구가)>
http://www.cyberhanja.com/hansaseol/199809ho/9809ho2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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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전용이 韓國을 망친다. 우리 祖國이 愚民化,低級化로 망해가고 있다!
- 한국은 반드시 망한다!
http://interok.tistory.com/1423
- 우리 나라는 亡國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고 있다-趙淳(조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2&articleId=113934
- 한국은 실질문맹자가 전인구의 97.6% -이향애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2&articleId=113930
- 노무현政府 家族法 典型的 社會主義 革命法 [한국논단 2008년11월호] -구상진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Id=629555
- 노무현 정권의 반인륜적 호주제 폐지!-여기, 한 노부부의 가계(혈통) 단절의 비극을 보시라.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9&articleId=240591
- 북한의 共産 제도를 추종하며 따라하는 이상한 反共國家 한국 (호적제도廢止와 한글전용强制)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3406690
- ■ 북한의 南侵보다 더 무서운 漢字 배척추세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34066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