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文化圈
송기중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서 설
'한자 문화권'이라는 합성어를 언제, 누가, 정확히 어떤 개념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는지 알 수 없다. 대다수의 국어한자어와 같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된 한자 차용어(漢字借用語)라는 (1) 근거를 발견할 수도 없다. 이 표현은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수시로 발생하였던 '한글전용' 대 '한자 병용'(漢字倂用)의 논쟁 과정에서, 대개 '한자 병용'과 '한자 교육의 강화'를 주장한 인사들이 사용하였던 듯하다. "우리나라는 자고(自古)로 한자 문화권(혹은 '동양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한자를 모르면 우리가 속한 문화권에서 이탈된다"와 같은 요지의 주장이다. 그 기원이 여하간에, '문자'와 '문화'의 불가분한 관계를 고려할 때, '한자 문화권'은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월남 등 역사적으로 한자가 통용되어 온 지역을 통괄하여 지칭하는 표현으로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문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發祥地)는 문자가 처음으로 사용된 지역이다.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 발상지로 인정하는 오늘날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기원전 3100년 경에 수메르인들이 사용한 상형문자후에 설형문자로 발전가 최초의 본격적인 문자이며, 그보다 1백 년 후인 기원전 3천 년 경에 나일강 유역의 문명 발상지에서 에집트 상형문자가 출현하였다. 인도의 인두스 문명 발상지에서는 기원 전 2200년 경에 여러 가지 선사 문자가 등장하였고, 황하유역 중국 문명 발상지에서는 기원전 1300년 전후에 한자(漢字)의 최고형인 갑골문자(甲骨文字)로 표기된 자료들이 다수 전한다.
원시 문자로 기록된 내용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에 대한 간단한 정보, 두 사람 사이의 약속, 하늘이나 신에게 전하는 기원(祈願) 등이다. 그러나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문자는 인간이 축적해 온 지식과 지혜를 보존하고 전수(傳受)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지난 3천여 년 간 인류가 발전시켜 온 문화의 산물인 윤리·도덕·법률 등 사회 규범과, 철학·종교·문학·역사 등의 지식과,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킨 과학 기술의 지혜는 대부분 문자에 의하여 전달되고 습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명 세계에서는 문자와 문어 교육을 교육의 기본으로 삼았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교육을 받은 사람을 '글 읽을 줄 아는 사람', 혹은 '글할 줄 아는 사람'으로 흔히 표현하였고, 서구 문명권에서도 읽기와 쓰기(reading and writing)가 과거에는 물론 현재도 교육의 기본으로 인식된다.
20세기에 들어 음성 녹음과 영상 보존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였지만, 문자와 문어의 위치는 결코 변할 수 없었다. 라디오·영화·녹음기·텔레비전 등이 발전하였다고 문자 인쇄 매체의 영역이 축소되지 않은 것이다. 또 거대한 양의 음성 정보와 화상 정보를 디지탈화하여 저장하고 검색하기가 용이한 기술이 이미 실용되고 있지만, 지식과 지혜를 문자와 문어를 매개로 전수하는 전통적 방법은 결코 변화될 수 없을 것이다. 문자화된 정보를 종이에 인쇄하여 보급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컴퓨터 모니터와 같은 전자 영상 혹은 어떤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어도, 정보를 문자로 기호화하고 문자 기호를 통하여 정보를 습득하는 그 자체는 변화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요구하는 정보의 상당 부분은 말이나 화상만으로 전달될 수 없고, 설혹 전달될 수 있어도 효과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三國史記』와 같은 역사서를 문자가 아닌 음성과 화상 등 다른 기호로 완전히 재편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설혹 가능하다 하더라도 문자 형식에 대한 요구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1+1=2"라는 '정보'는 인쇄 매체이든 컴퓨터이든 시각기호(즉 문자기호)로 전달될 때 전 세계인이 즉시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어떤 기호로는 그와 같은 전달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문자와 더불어 발달해 왔고 발달해 갈 것이다.
2. 문어(文語)와 구어(口語)
문자는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 과정에서 음성으로 표현되어 청각으로 전달되는 단계를 시각(視覺)으로 전달하는 기호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말하는 사람의)음성→(듣는 사람의)청각'의 단계가 '표기문자→시각'의 수단으로 대치되고, 시각으로 감지된 기호는 다시 문장·단어·형태소·음소 등과 같은 음성언어 단위로 복원되어 이해된다. (3)
이와 같이, 문자는 본원적(本源的)으로 음성언어를 '표기'하는 시각기호이지만, 사실은 어느 언어에서나 음성언어(구어, 口語)와 문자로 기술된 언어(문어, 文語)는 상당히 다르다. 사람들은 흔히 '구어체 문장'이 구어와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누구와 나누고 있는 대화를 몇 마디만이라도 적어 보면, 문어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구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어디 갓따 완니? (갔다 왔니?)] [응, 저-기. 넌?] [나? 아무데도 안가써(안 갔어)]와 같은 대화는 어떤 소설에 나타나는 대화문에서 혹시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일반 문어에 나타날 가능성은 없다. 그러한 구어 표현들의 발음을, 맞춤법을 무시하고, 그대로 옮겨 적어 놓으면 오히려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다. 구어는 문자로 표기되는 순간부터 이미 본래의 구어와는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강연이나 연설, 구전(口傳)되어 온 판소리의 가사나 무당의 사설(辭說) 같이, 구어의 일반적 형식인 대화체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일방적인 설명'인 경우는 문어와 근접된 형식이지만, 적어 놓고 보면 역시 문어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지 않고라도, 강연이나 연설 혹은 판소리 실연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인 고저·억양 등이 문어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상 현대국어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구어와 문어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불가피하여, 구어와 완전히 일치하는 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구어체' 또는 '어문일치'(語文一致)의 문장으로 부르는 문어는 "구어를 이해하고 표기문자가 실현하는 음가(音價)만 파악할 수 있으면 이해 가능한 문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글로 기술된 현대국어 문어가 대개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본고에서 필자가 쓴 문장은 대다수가 현대국어 구어로는 들을 수 없는 긴 구조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국어 구어를 이해하고 한글의 표기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글의 문장들을 대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4)
'구어체' 문어는 현재의 시점에서만 구어체이다. 구어는 항상 변하고, 문어 역시 구어와 더불어 변하기 때문에, 오늘의 구어체가 영원히 구어체일 수 없다. 요즈음 발행된 일간지의 기사를 30년 전의 기사와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 차이를 느낄 수 있고, 60년 전의 기사와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를 발견한다. 1920년대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소설에는 오늘날 사용하지 않는 어휘와 문체가 다수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기는 과히 어렵지 않다. 그러나 2백 년 전에 필사된 홍길동전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극히 어렵다. 국어가 변하였고, 국어 문어가 변하여 왔기 때문이다.
위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인류의 지식과 지혜는 문자로 표기되어 전수되어 왔다. 선현(先賢)의 지혜가 애초에는 구어체로 표기되었어도,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구어와 현격한 차이가 발생함으로써, 후인(後人)은 구어 지식만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자연적 현상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문명 세계에서는 선인(先人)들의 기록을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의 구어와 현격한 차이가 있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선인들의 문어를 습득하였고, 습득된 문어는 일상의 문어로 이용되었다. 현실 구어와 전혀 다른 언어를 근간으로 형성된 문어가 습득되고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문어(漢文語)가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일본·월남 등지에서는 물론 중국 자체 내에서도, 한문어는 사용자의 구어와 별개의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2천여 년 간 계속 습득되면서 한편으로는 선현의 지혜를 이해하는 도구로,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아래 더 언급한다). 유럽에서 라틴어는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다른 언어 사용자들이 습득하였다. 라틴어는 구어로도 사용되었지만, 구어가 완전히 소멸된 9-10세기 이후 라틴어를 읽고 쓴 모든 사람들의 라틴어는 일상어가 아니었다.
구어와 문어의 차이는 불가피하고, 양자는 전혀 별개의 언어일 수도 있다.
3. 공통 문어권(共通文語圈)과 공통 문자권(共通文字圈)
상이한 구어를 가진 여러 민족들이 동일한 문어를 사용할 때 '공통 문어권'을 형성하였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까지 동양에서는 중국·우리나라·일본·월남이 한문어권(漢文語圈)을 형성하였었고, 서양에서는 '라틴문어권'이 존재하였었다. 공통 문어권은 현대에도 존재한다. 아랍문어는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리비아·모로코 등 여러 아랍 국가에서 통할 수 있지만 이들 국가에서 상용되는 구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현대 중국어 역시, 문어는 어느 지역의 중국인이나 이해할 수 있지만, 구어는 통하지 못한다. (5)
역사적으로 볼 때, 문어와 함께 소개된 외래 문자로 자민족의 구어를 표기함으로써 문어가 형성되는 일이 일반적이다. 국어·일본어·월남어는 한자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6) 사정은 중국 자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문어와는 다른 당대(當代)의 중국어가 한자로 표기됨으로써 구어체 문어, 즉 백화문(白話文)이 형성되었다. 라틴문자는 르네상스 이래 유럽의 대다수 민족들이 자민족어를 표기하는 문자로 채택함으로써, 통칭 통속문학(通俗文學 vernacular literature)의 문어가 이루어졌다. 아랍문자는 튀르크어(1928년까지)·페르시아어 등의 표기문자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상이한 언어가 같은 문자로 표기될 때 '공통 문자권'을 형성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구어체 문어가 등장한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공통 문어'는 공식(公式) 문어의 위치를 누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삼국시대에 이두문과 향가와 같은 구어체 문어가 출현하였으나, 한문은 19세기 후반까지 공식 문어로 사용되었다. 일본도 8~9세기에 한자로 자국어를 표기한 문어, 통칭 만요가나(萬葉假名)가 등장하였으나, 19세기까지 한문이 공식 문어로 이용되었다. 유럽에서도 라틴어가 여러 세기 동안 계속 공식 문어의 자리에 있었고, 아랍 세계에서는 수백 혹은 수천 가지 언어 혹은 방언의 사용자들이 자신들의 현실 언어와 판이하게 다른 아랍문어를 공식 문어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7)
문어와 현실 구어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 실용성의 감소, 민족적 각성 등의 이유로 전통적인 '공통 문어권'은 해체되었으나, 그 공통 문어를 표기한 문자를 사용하는 '공통 문자권'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지난 1백여 년 간에 유럽과 미국의 문명이 전세계적으로 보급됨에 따라 여러 언어들이 라틴문자로 표기됨으로써 라틴문자권에 속하게 되었고, 구소비에트연방에 속한 여러 민족의 언어들은 씨릴문자로 표기됨으로써 씨릴문자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공통 언어권이나 공통 문어권이 아니라 공통 문자권에만 소속되어도, 상이한 언어 사용자 간에 의사 소통의 정도가 월등히 높아지는 것으로 관찰된다. 예를 들어, 영어만 이해하는 사람이 영어와 같은 로마자로 표기된 프랑스어·독일어·스웨덴어 단어를 접하였을 때, 한글로 써진 한국어 단어, 혹은 타이문자로 표기된 타이어 단어를 접했을 때 보다, 비록 단어의 의미를 모르기는 마찬가지라도, 친숙감을 느낀다. 공통 문자권에 속하는 언어 상호 간의 영향은 앞으로 연구할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국어생활 제9권 제2호('99년 여름)
4. 한문 문화권(漢文文化圈)
'한문 문화권'은 위에서 서술한 '공통 문어권'으로 한문어가 공통 문어로 사용된 지역을 포괄·지칭하는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역사적으로 한문 문화권에는 중국 자체와 우리나라, 일본, 월남이 속하였다.
한문어가 정확히 언제 어느 지방 중국어 방언을 모태로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현전하는 최고의 기록들은 기원전 1300년 전후에 제작된 갑골문(甲骨文)이다. 거북이 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대개 점괘(占卦)를 묻는 간단한 문장을 새겨 놓은 것들이다. 어순 등 문법적 성격이 후세의 표준 한문과 다른 예들도 간혹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한문어와 동일한 언어로 이해하여 왔다. 한문어는 기원전 720년부터 220년 사이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이루어진 사서오경(四書五經) 및 후세의 사서(史書) 등 기타 서적들과 더불어 중국 및 인접 지역에 전파되었다.
한자도 문자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떤 언어를 한자로 표기하였든 개별 한자에는 표시하는 특정 음성이 있었다. 한문어가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때, 표기문자가 시현하는 음가는 당시의 중국어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단 수입된 한자음은 본래의 대표음과 상관없이 수입한 지역의 언어에 따라 변하였다. 그 결과, 한문어는 구어로는 통할 수 없고 문자로만 통할 수 있는 언어로 정착되었다. '필담'(筆談), 즉 음성이 개재되지 않고 순전히 시각으로만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언어였다. 18세기 말에 청나라를 여행한 연암 박지원은 중국어를 전혀 몰랐어도 필담으로 중국의 학자 곡정(鵠汀)과 토론할 수 있었다.
한문이 언제 우리 민족에 전해졌는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다. 기원전 108년 한(漢)의 무제(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면, 당시 고도의 문화를 발전시켰던 한조(漢朝)에서 파견된 사군의 통치자들이 한문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그들에 의하여 우리 민족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한사군이 설치된 후 50-90년 뒤에 수립된 신라·고구려·백제에서 초기부터 한문/한자가 상당한 수준으로 사용되었던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삼국 초기 관직명과 인명 등에서 엿볼 수 있다. (8)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근구수왕 때(재위 375-384년) 학자인 왕인(王仁)이 왕명에 의하여 논어·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가르침으로써 일본에 한문이 전해졌다. 월남은 고조선 보다 3년 앞선 기원전 111년에 한무제(漢武帝)의 침략을 받은 후 939년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 기간 중에 한문이 월남에 당연히 소개되었고, 근대까지 문어로 사용되었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한문과 유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서, 한문권 즉 유교 문화권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월남의 경우는 1천 년 이상 중국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유교문화로 대표되는 중국문화의 영향이 불가피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와 일본은 독립된 나라 형태로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유교문화를 수용하였다. 반면에, 기원전 3~4세기에 발흥한 흉노로부터 16세기 말의 만주족까지, 2천여 년 간 끊임없이 한족(漢族)과 대치하며, 때로는 한족을 지배하고 때로는 한족의 지배를 받으며, 역사상 명멸해 간 여러 북방 민족들은 하나 같이 한문과 유교문화를 거부하였다. 저들이 초원지대에서 할거하던 시기는 물론, 중원을 정복하여 제국을 통치한 기간에도 유교문화를 수용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렇다고, 유교문화를 억제하지도 않았다.
한문-유교문화권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중국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수용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한 시기는 대략 기원 전후, 즉 전한 말에서 후한 초에 이르는 기간이다. 중국에서 한층 발전한 불교는 고구려·백제·신라 등 3국과 일본 및 월남에 전파되었으나, 그 외 지역에는 보급되지 않았다. 몽고·만주 등 후세의 북방 민족들은 대승불교의 일종이지만 중국 불교가 아닌 티베트 라마교를 수용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동남아 제국은 전통적으로 소승불교(小乘佛敎)가 전파된 지역이었다.
5. 한자 문화권(漢字文化圈)
한문 문화권의 제국(諸國)에서 한문어가 공식 문어의 위치에서 밀려난 때는 대개 19세기 후반이다. 그때까지 한문어로 기술되던 공식 문서들이 구어체 문어 혹은 구어체 문어와 혼용된 한문어로 기술되기 시작하였다. 서구 문명의 급속한 유입으로 전통적인 한문-유교문화의 효용가치가 상실되었던 데 근본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일본·중국·한국 등 한자 문화권의 일부 지식인들은 동양 문화가 서구 문화에 비하여 낙후된 원인을 한자-한문으로 지목하고, 한자 폐지론·로마자 채택론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한문어가 공식 문어의 위치에서 물러나게 된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표기문자로서 한자는, 월남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 계속 사용되어 왔다. 그리하여, 비록 불완전하지만, 한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공통 문자권'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대만에서는 아직 한자의 원자(原字)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중국 본토에서는 1950년대 중반부터 국가 사업으로 한자의 간소화를 추진하여 수천 자의 간화자(簡化字)를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중 다수가 전통적인 한문 문화권에서 통용되지 않던 자형(字形)이기 때문에 생소하지만, 한자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습득하는데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일본에서는 상용한자를 한정하고 획수가 많은 한자의 약자를 만들어 사용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자의 사용을 축소하여 왔고, 1948년 건국 이후 궁국적으로는 한자를 폐지하지만 잠정적으로 한자를 한정하여 사용하는 법령에 의하여, 비록 제한적이지만, 한자가 계속 사용되어 왔다.
월남에서는 전통적으로 한자와 월남 한자, 통칭 쯔놈[字喃]을 표기문자로 사용하였으나, 이미 17세기 중에 가톨릭 선교사들에 의하여 로마자에 의한 표기법이 고안되었었다. 1858~83년 간에 발생한 나폴레옹 3세의 정복으로 월남은 1939년까지 프랑스의 식민통치 하에 들었다. 이 기간 중에 프랑스 통치자들은 17세기 이래 존재하였던 로마자에 의한 월남어 표기법을 보급시킴으로써, 20세기 초부터 월남에서 한자의 실용적 사용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9) 물론 오늘날까지도 대학의 동양 문화 전공자들은 한자를 습득한다. 월남은 과거 한문 문화권에 속하였던 나라 중에서 현재 한자가 거의 사라진 나라인 듯하다. 오직, 노년층에 한자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간혹 생존하여 있다고 한다.
한문 문화권의 나라들에서 한문어가 공식 문어로 2천 년 간 사용되는 동안, 한문어는 구어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남겼다. 특히 어휘에서 한문어의 문법적 성격은 영원히 잔류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한자 '國'의 국어 한자음 [국]은 '나라'라는 의미를 가진 의존형태소로, '국어'·'국민'·'국가'와 같은 단어에서는 앞에, '한국'·'아국'·'출국'과 같은 단어에서는 뒤에 붙어서 의미를 시현한다. 이와 같이, 단어 형성에서 앞이나 뒤에 자유로 첨가될 수 있는 의존형태소가 고유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10) '대한민국'을 '한국'으로, '노동자·사용자·정부 당국자 위원회'를 '노사정위'(勞使政委), '고려대학교'를 '고대'로 축약하여 표현하는 방식의 기능이 고유어에는 없다. '서울대학교'는 절대로 '서대'로 부르지 못하고, '한빛은행'은 '한은' 혹은 '빛은'이란 말로 축약할 수 없다. '서울'과 '한빛'이 고유어이기 때문이다.
한문어권에 속하던 지역의 언어들에 존재하는 한문어의 어휘적·문법적 영향 때문에, 한문어에서 유래하는 단어는 물론이려니와 한문어의 특성에 맞게 만들어진 신조어(新造語)도 한자로 표기되었을 때 한문어권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유교 경전에 등장하는 '天地'·'父母'·'忠孝' 와 같은 단어들이 한자로 쓰였을 때 한자를 습득한 사람들은 그 개념을 쉽게 파악할 것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주로 중국에서,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들이 한문 문화권 전체에서 저항 없이 비교적 단 시간에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구어에 존재하는 한문어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19세기 말 이래 '民主主義'·'共産主義'·'思想'·'物理'·'數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구어의 개념들이 한자어로 합성되어 한자 문화권 전체에 유통되었고, 최근에는 '정보화 시대'(情報化時代)·'성희롱'(性戱弄)·'신세대'(新世代)와 같은 합성어들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어 이질감 없이 사용되고 있다. 국어에 이미 존재하는 한자어 언어 단위들―단어 혹은 형태소―의 합성이기 때문이다. (11)
6. 한자 문화권의 현실과 우리의 입장
19세기 중후반기로부터 진행되어 온 한자 배척 운동, 중국과 일본의 약체자(略體字) 제정, 각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구어식 신조어 등과 같은 이유 때문에 '한자로 표기된 정보'의 한자 문화권 내의 통용 가능 정도가 급속히 저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각 언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한문어의 문법적 특성 때문에, 한자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한자로 표기된 '단순 정보'가 상당히 통용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지명에 무수히 나타나는 '-산'·'-천'·'-시'·'-로'·'-가' 와 같은 후치어(後置語)를 -山·-川·-市·-路·-街 로 표기하면,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모두 그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또, 국어에서 전치어로 빈번히 사용되는 大-·小-·不-·前-·後- 도 한자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번역이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월남에서는 한자를 오래전부터 폐지하였기 때문에, 위의 예와 같은 '한자 정보'를 대다수 월남인들이 거의 이해할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연령과 개인의 한자 숙지도에 따라 이해의 정도가 각양각색이다. 대략, 현재 50세 이상의 세대에서는 한자로 표기된 지명·인명·직업명·사물명 등 단순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반면에, 그 이하 세대에서는 개인에 따라 이해의 정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우리의 경우도 월남과 같이 한자 문화권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 로마자가 세계 공통 문자와 같이 통용되고 있는 오늘날 한자 문화권의 존재 의의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입장에서 한자를 습득할 일차적인 필요성은 한자 문화권에 대한 향수가 될 수 없다. 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인류의 지식과 지혜는 문자에 의하여 전수되어 왔고, 또 되어 갈 것이기 때문에, 문어의 교육은 문화의 발전에 일차적이며 필수적인 요건이다. 우리 국어, 특히 문어에는 한문어에서 유래하는 특성들이 상당히 존재한다. 국어의 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한자를 습득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아니면 한글로만 습득하는 편이 경제적이고 효과적인가? 필자는 단연 전자(前者)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현대국어 문어를 효과적으로 습득하기 위하여 한자를 학습하였을 때, 한자 문화권의 일원으로 잔류하는 부수적 효과는 자동적으로 얻어질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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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rean.go.kr/nkview/nklife/1999_2/9_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