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不亡, 中國必亡(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반드시 망한다)…대중어의 보급은 라틴화뿐이다”라고 주장했다. ..
3. 중국 내 한자의 변화 혁명-루쉰도 “漢字不亡, 中國必亡(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반드시 망한다)”이라며 “한자와 대중은 세불양립(勢不兩立)이다…대중어의 보급은 라틴화뿐이다”라고 주장했다.
백화문 운동의 소용돌이
한자 발전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세 번의 문자 변혁으로, 고대 진시황(秦始皇)의 대전(大篆)으로부터 소전(小篆)으로의 개혁과 문자 통일, 한문(漢文)과 한어(漢語)를 일치시킨 근대 천두슈(陳獨秀)의 백화(白話)운동, 공농병(工農兵)의 문자 운동인 마오쩌둥(毛澤東)의 간자화(簡字化) 운동을 꼽는다. 그중에서도 중국 현대 문화사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문학혁명의 기폭제는 역시 백화문(白話文) 운동이었다. 백화문 이전에는 한자로 한어의 단어는 정확하게 기록했지만, 한어의 구어와 한문은 일치하지 않았다.
현대 중국의 문학혁명은 천두슈가 1904년 최초로 백화문으로 쓴 신문을 발간하면서 시작됐다. 천두슈는 중국공산당의 창건자로 중공당 제1전국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됐다. 천두슈가 주재한 잡지 ‘신청년(新靑年)’이 백화문혁명의 거점이었다. 천두슈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사람으론 훗날 중국 자유주의 사상의 기수가 된 후스(胡適)와, 마오쩌둥에 의해 ‘중국공산당원이 아니었으나, 사회주의 중국의 이념적 지도자’ ‘공자(孔子)는 구 중국의 성인이요, 루쉰(魯迅)은 신 중국의 성인’으로 칭송된, 노벨 문학상 수상자 루쉰이 있다.
당시 후스는 천두슈에게 전적으로 호응하면서 문학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8개 강령을 제시했다. ‘고문(古文)을 인용하지 말 것, 죽은 문구를 사용하지 말 것, 병렬문을 사용하지 말 것, 백화언문(白話諺文) 사용을 기피하지 말 것, 문법을 따를 것,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아프거나 슬픈 듯한 글을 쓰지 말 것, 고문을 흉내내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써 나타낼 것, 진실하고 본질적인 것을 쓸 것’ 등이다.
천두슈는 후스의 8개항을 지지했다. 후스는 이에 고무되어 8개항의 사상을 상세하게 전개한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義)’를 썼다. 여기서 그는 “중국 미래의 살아 있는 문학을 위해서는 반드시 백화문이 수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2월 천두슈는 ‘문학혁명론’을 발표하면서 후스의 중국 문학에 대한 혁명사상을 지지하고 스스로 ‘문학혁명군의 기치를 올린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혁명군은 ‘소수 귀족의, 분식된 모호한 문학을 추방하고, 명백하고 단순한 인민의 문학을 창조한다. 사문화되고 가식적인 고전주의 문학을 추방하고, 신선하고 진실한 리얼리즘 문학을 창조한다. 현학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은자(隱者)의 모호한 문학을 추방하고, 대중적인 다수의 문학을 창조한다’는 3항의 슬로건을 내건다고 선언했다.
1919년 5월4일 중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받들고 일어난 5·4 운동은 천두슈 일파의 진보 사상과 그들의 선전지 ‘신청년’ 주도로 이뤄졌다. 이 운동을 계기로 신청년의 문장 방법인 백화문이 전국에 파급되면서 백화문은 중국 문장 생활의 주류가 되었다. 이에 당국은 현장의 문장 변혁을 그대로 받아들여, 1920년 봄 초등학교 교과서를 고전 문체에서 백화문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고,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도 백화문이 적용되면서 공식적인 중국 국문으로 인정받게 됐다.
한자는 박물관으로…
당시 후난(湖南) 성립(省立) 제1사범학교 학생이던 마오쩌둥은 1918년 4월18일 장사(長沙)에서 8명의 동지와 함께 신민학회(新民學會)를 결성했다. 마오쩌둥은 당시 사정에 대해 “이러한 학회의 대부분은 규모와 관계없이 천두슈가 편집한 문학 르네상스의 유명한 지도자인 ‘신청년’의 영향 아래서 결성됐다. 이 잡지를 읽기 시작할 무렵 나는 사범학교 학생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천두슈와 후스의 글을 존경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오쩌둥은 “그들은 이미 나를 실망시킨 량치차오(梁啓超)와 캉유웨이(康有爲)를 대신해 나의 모범이 됐다”고 했다. 이후 마오쩌둥은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사범학교 시절 스승으로 당시 베이징대 교수이던 양창지(楊昌濟)의 추천을 받아, 1918년 9월 리다자오(李大釗)가 관장으로 있던 베이징대 도서관의 사서(司書)가 됨으로써,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본류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리다자오는 베이징대 안에 마르크스주의연구회를 조직했다. 마오쩌둥은 1919년 봄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上海)를 거쳐 장사로 갔다.
한중일 3국 학자들이 참가한 ‘한자문화권 내 생활한자 국제토론회’.
장겅(張庚)은 1934년 “한자는 죽은 글자, 문언문(文言文)의 글자, 봉건의 글자”라고 했고, 루쉰도 “漢字不亡, 中國必亡(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반드시 망한다)”이라며 “한자와 대중은 세불양립(勢不兩立)이다…대중어의 보급은 라틴화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중국의 대표적 진보(#左翼#) 사상가였고, 특히 루쉰은 ‘아큐정전(阿Q正傳)’으로 동아시아에선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들은 한자가 익히기 어렵다는 점을 문제시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자를 중국 봉건사상의 축적·전달 도구로 보았다. 그래서 중국의 뿌리 깊은 봉건사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폐기하고 중국 문자를 라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공(中共) 문자개혁을 주도한 궈모뤄는 그 자신이 한자학의 대가로 은·주대(殷周代) 갑골문과 금문 연구에서 최고의 권위자였다. 1933년에는 갑골문 연구의 고전인 ‘복사통찬(卜辭通簒)’을 편찬한 바 있다. 이는 갑골문을 중국 사회경제사 연구의 기초 사료로 분류해 집성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궈모뤄는 당시 입수할 수 있었던 고고학적 실증과 갑골문의 복사(卜辭)를 종합하고 분석해 베이징대에서 ‘중국 노예사회’라는 제하의 강연을 했다. 이 강연 초고를 정밀하게 보완해 1952년 노작 ‘노예제시대(奴隸制時代)’를 출간함으로써, 고대 중국의 사회 발전사에 노예제 시대가 존재했음을 논증했다.
이와 같이 중국 고대사 연구, 나아가 중국사 일반과 중국 현대사 연구 및 문학과 문필 일반에서도 발군의 업적을 세운 궈모뤄였지만 한자 문제에서는 시대 풍조에 영합해 큰 착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는 1964년 5월3일 ‘인민일보(人民日報)’에 발표한 논문 ‘일본의 한자개혁과 문자의 기계화’에서 “한자는 우리 중국 이외에 월남, 조선 및 일본에서도 사용됐다. 그런데 베트남은 벌써 19세기 말에 라틴화를 실현했다. 조선에서도 북조선에서는 1948년에 한자 사용을 전면 폐지하고 조선 고유의 글자로 고쳤다. 1958년 말 내가 중국 인민대표단에 참가해 북조선을 방문했을 때 북조선 지도자는 ‘조선어의 로마자화는 쉬운 일도 아니지만, 남북이 아직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당장 실시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북조선과 월맹, 두 형제 국가는 이미 한자의 일반적인 사용을 폐지해 문맹을 없앴다. 그리하여 중국·일본과 남조선만이 한자를 아직 사용하게 됐다”고 했다. 이어 ‘인민일보’ 기자의 “한자는 장차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에 “영원히 보존된다”고 답했다. 다시 “어디에?”라고 질문하자 “박물관에”라고 했다.
‘간화(簡化)에서 성화(聲化)로!’
이에 앞서 1951년 마오쩌둥은 ‘文字必須改革, 要走世界文字共同的 音方向(문자는 반드시 개혁해야 하며, 세계문자 공동의 표음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방침을 발표했다. 이 방침에 따라 중국은 1952년 중국문자개혁위원회를 발족하고 문자개혁에 돌입했다. 이때 중국은 한자 개혁의 방향을 궁극적으로 한자 폐기로 정하고, 순차적으로는 한자의 간화(簡化), 한어의 병음화(?音化), 보통화(普通話) 보급이라는 3항 운동으로 정했다. 간화는 한자를 형체와 획수를 줄여서 간단하게 하는 것이고, 보통화 운동은 한어를 어문일치의 표준어로 발전시키는 운동이다.
보통화라는 용어를 공식화하면서, 장시뤄(張奚若) 교육부장은 1955년 제1차 전국문자개혁위원회에서 “보통화의 보(普)는 보편성(universality)을 뜻하고 통(通)은 모두의 공동소유(common possession)를 뜻하는 것이지, 결코 평범(ordinariness)이나 통상적 습관(usual habits)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보통화는 보편적인 중국 무산계급의 공동어(共同語)라 규정했다. 또 1959년 라틴 자모 26개를 택해 만든 병음화를 문자개혁의 필연적 방향으로 내세웠다. 당시 중국이 궁극적 목표로 삼은 것은 표의한자를 소멸하고 순수 표음문자에 도달하는 것(병음화)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한자개혁 구호는 ‘간화에서 성화(聲化)로!’였다. 한자개혁은 간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화, 즉 표음문자화가 궁극적 목표라는 것이었다. 단순한 한자 개혁이 아니라 한자의 전면 폐기와 한어의 로마자화를 추구한 것.
1955년에 열린 현대한어규범문제학술회의는 “민족의 공동어인 보통화는 ‘첫째 베이징어를 발음체계의 표준으로 한다(以北京語音爲標準音), 둘째 북방 방언을 기초 방언으로 한다(以北方言爲基礎方言), 셋째 모범적인 현대의 백화문 저작을 어법의 규범으로 한다(以典範的現代白話文著作爲語法規範)’”고 규정했다.
중공 문자개혁 운동의 진행방법은 ‘군중으로부터 나와서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인민은 바로 혁명의 무한하고 풍부한 원천이다’라는 군중노선에 의거했다. 이러한 원칙을 토대로 군중이 사용하는 간화자(簡化字)를 널리 수집해 정리한 다음, 이를 기초로 초안을 작성·공포해 공농병(工農兵) 및 각계 인사의 토론에 부쳤다. 토론을 통해 이들의 의견을 종합·수정한 후 조정을 거쳐 의견이 통일되면 이를 새 간자로 확정하는 방식을 따랐다.
중국은 1952년 마오쩌둥의 노선에 따라 중국문자개혁위원회를 발족했다. 1955년 이체자(異體字) 정리 과정에서 1053자를 폐지하고, 1956년 ‘한자 간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뒤 4단계에 걸쳐 간자화(簡字化)를 추진해오다가, 그 성과를 결집해 1964년 ‘간화자 총표(簡化字總表)’를 확정해 간체자 체계를 확립했다. 한편 1957~58년에는 ‘한자 병음 방안’을 확정해 한자의 음을 알파벳 철자로 표기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77년 말에는 유엔이 중국 지명의 중공식 알파벳 표기를 국제표준으로 인정했다. 이렇게 중국의 한자 개혁 작업은 1952년에 시작해 1964년에 일차적으로 완료됐다.
읽고 쓰기 편한 간체자(簡體字)
1964년의 간화자 총표 중 사용빈도수가 낮은 137자를 1977년 폐지해, 폐지된 한자는 1955년의 1053자에서 1190자로 늘어났다. 1977년 만들어진 간화자 총표는 1986년에 다시 조정됐다. 조정된 간화자 총표에 수록된 간자는 총 2235자. 중국은 한자개혁 작업에서 뜻과 음이 같고 글자의 형태만 다른 이체자 등 1000여 자를 폐지했다. 또한 필획수가 많아 학습과 사용에 불편한 번잡자(煩雜字)의 필획을 줄여 2000여 자를 간화했다. 이 과정을 거친 간자는 읽고 쓰는 데 훨씬 간편했다. 이런 작업은 군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권력을 가진 혁명정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중국은 1956년부터 간체자를 사용하는 동시에 맹렬한 문맹퇴치 운동을 시작해 1982년에는 문맹률을 23%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1950년대 문맹퇴치운동을 시작할 때 문맹률 80%와 비교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중국의 문자 간화 개혁은 공농병 대중의 군중투쟁·계급투쟁·무산계급전정(無産階級專政,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고화 투쟁과 더불어 진행되었는데, 우여곡절을 겪으며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예컨대 1975년 산둥사범학원 중문계(中文系) 74급 공농병학원 및 교사의 이름으로 된 글은 재(戴), 대(帶), 대(袋)자를 일일이 구분해 쓰는 것이 번거로우니 대(代)자로 통일하자고 했고, 장쑤성 타이싱(泰興)사범학교 실습조는 자형이 복잡한 농작물과 농기구의 이름을 공농병이 번거로워하니 부족한 점이 있어도 무조건 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6년 8월1일 신장(新疆)성 자치구의 소수민족인 위구르 족과 허사커 족은 쭉 써오던 아랍 정통문자를 폐기하고 중국어 라틴 문자를 채용했다. 이 두 소수민족은 병음화 방침에 따라 중국식 라틴화를 실행한 것이다. 싱가포르는 1967년 교육성이 간화자를 공식 승인하고 1975년에는 사용을 확대했다. 그 결과 지금 싱가포르의 간화자는 중국 대륙의 것과 같고 사전도 번안한 대륙판 신화사전(新華字典)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문자개혁의 지나친 일방화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78년 6월16일자 ‘광명일보(光明日報)’에서 문자개혁위원 저우유광(周友光)이 주장한 내용이다. “1978년 2월 이래 내가 만난 공농병 및 각 방면 인사들은 한결같이 새 방안이 많은 결함을 갖고 있어 그 시행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1차 방안을 20년간 시행하는 동안 문맹은 사실상 퇴치됐으므로 이제 인민 군중은 구태여 모르는 문자를 다시 만들어 익히기를 싫어한다. 그들은 이제 문자의 변화가 아닌 안정을 원하고 있다”는 것. 동시에 그는 6000자의 한자 중에서 3000자를 선택해 표준 상용문자로 정하고 병음 자모를 보조언어로 쓰는 방법을 제의했다.
한중일 한자의 변증법적 종합
1952년 마오쩌둥의 발의로 중국문자개혁위원회가 발족되고 30여 년의 혼란과 개혁을 거친 뒤 1986년, 이를 총결산하는 ‘전국어음문자공작회의(全國語音文字工作會議)’가 열렸다. 이 회의 폐막식에서 한자의 표음문자화안(案)은 무효라는 선언을 한다. 이로써 마오쩌둥이 중국 문자개혁의 목표라고 선언했던 성화(聲化)는 한자병음자모(한자의 로마자음 표기체계)의 확립으로 끝맺게 된다.
중국 근대화 운동과 더불어 휘몰아친 한자 폐기 운동과 중국 문자의 라틴화 운동은, 중국 민중의 저항과 국가 지도부의 이성적 수정에 의해 제동(璪)됐고, 간자화로 종결됐다. 만일 라틴화 노선이 채택되어 중국이 한자를 완전히 폐기하고 베트남처럼 알파벳을 사용했다면 동아시아 문화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의 뿌리인 중국 고전문화 전통이 초토화됐을 거라는 말이다.
원래는 한뿌리였던 한국·중국·일본의 한자는 중국의 간자화, 일본의 일본식 약자 채용, 한국의 한국식 특수 한자 창출로 차이가 생겼다. 이것은 한중일의 사상·학술·문화 교류에 있어 약간의 장애로 작용한다. 오늘날 세계는 민족의 주체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이미 협애(狹隘)한 국수주의의 세계는 아니다. 이미 세계화에 대한 적응은 생존 조건이 됐고, 그 세계화의 전제요 가교는 민족 주체를 기반으로 한 지역화다.
세계화와 세계화의 전제인 동아시아 지역화에 조응(照應)해 한중일 동양 3국간에는 정치·경제·군사뿐 아니라 사상·학술·문화의 교류와 그 변증법적 종합이 필수다. 이를 위해서 3국이 상용하는 한자 자형의 통일이 요구된다. 한자의 통일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간자화를 폄하하기보다 긍정적인 성과를 본받아야 한다. 중국도 그간의 업적을 고수하겠다는 독단을 버리고 간자화의 부정적인 측면은 합리적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간자화에는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훨씬 많으며, 문자를 간단명료하고 알기 쉽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민주시대의 과학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정리/글 : 최지현
참고/출처: http://gall.dcinside.com/list.php?id=language&no=10378&page=1&search_pos=-10057&k_type=0110&keyword=%EB%9D%BC%ED%8B%B4%EC%96%B4 /네이버 지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