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88년 여름 政界와 언론이 全斗煥 전 대통령을 매도하는 가운데 여성지 '샘이깊은물'에 당시 月刊朝鮮 기자이던 필자가 기고한 것이다. 요즘도 全斗煥 씨는 동네북이 되고 있는데, 그를 변호할 정치적 대변세력이 없기 때문에 억울하게 당하는 면이 있다. 全斗煥 정권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였던 필자가 이런 글을 썼고 재록하는 것도 변호해야 할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어서이다. 그런 점에서 24년 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다. ,,,,,,,,,,,,,,,,,,,,,,,,,,,,,,,,,,,,,,,, 전두환씨를 변호한다 재판장님, 저는 이 법정에 변호인으로 나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변호사 자격이 없어서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할까 겁이 나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차피 이 법정은 실정법으로써 판단하는 현실 속의 법정이 아니고 자유, 박애, 평등이란 역사 발전의 지표를 평가 기준으로 삼는 <역사의 법정>입니다. 제가 자격이 없다는 것은 피고인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평소에 지독히도 미워한 사람이 이 변호인이기 때문입니다. 의리 없는 풍토 박정희 대통령이 非命에 간 이 나라는 '드디어 우리도 민주주의를 하게 되는구나'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고, 거의 모든 국민들은 自重自愛하고 있었습니다. 이 희망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한겨울 밤 서울의 한남동에서 울려 퍼진 총성이었습니다. 12.12사태로 불리는 이 下克相을 그때의 계엄사령관 정승화씨는 8년 뒤에 '패륜아적인 반란' 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역사의 법정>에서는 이 반란의 反역사성이 더 무겁게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제가 全씨에게 원한을 갖게 된 계기도 바로 이 사건이었습니다. 12.12사태 뒤에 5.17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드디어 광주사태가 터졌습니다. 저는 그때 광주에 있었던 몇 안 되는 경상도 기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지역 감정이 그 사태의 요인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한 요인이었고 아주 작은 요인이었습니다. 그 사태의 가장 큰 요인은 공수부대의 잔혹 행위였고 이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분노였습니다. 그때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김일성은 오판 말라'고 외쳐댔습니다. 기자로서 저는 시민과 군대 사이의 중간지대에 있었지만 정말 전두환씨를 찢어 죽이고 싶었습니다. 계엄사령부가 광주사태의 원인을 지역감정과 유언비어로 몰아붙이는 발표를 한 것은 이 사태의 진상을 왜곡시켰을 뿐 아니라 거의 잊혀져 가던 우리 사회의 지역 감정을 되살아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광주에서 취재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니 변두리에 사는 일부 시민들은 전라도 사람들의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말자는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박한 부인들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 오로지 계엄사 발표문이 언론에 보도된 것을 믿고, 전라도 사람들이 그곳의 경상도 사람들에게 얼토당토않은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광주사태의 취재가 빌미가 돼 기자직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두 달 뒤에는 국보위가 이미 회사를 떠난 저의 이름을 언론인 숙청자 명단에 다시 집어넣어 확인 사살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全斗煥 정권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저는 개관적인 입장에 서기가 힘들고, 그래서 전두환 피고인의 변호인으로서도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같은 부적격자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전두환 피고인이 변호인을 단 한 사람도 선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에 그의 그늘에서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과 그를 칭송하기에 분주했던 이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몰라 의리 없는 풍토를 통탄할 따름입니다. 변호인 자격이 없는 민정당 지금 전두환씨 내외는 모든 언론매체와 국민 거개로부터 십자 포화와도 같은 공격과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 아마도 이렇게 적은 수효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은 비난이 이렇게 오래 계속된 적은 일찍이 없었을 것입니다. 신문, 텔레비젼, 월간 잡지, 주간 잡지, 만화, 소설 같은 모든 수단의 표현물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全 대통령 내외의 부정, 부패, 횡포에 대해서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는 만일에 전두환씨가 소송을 건다면 명예훼손죄가 성립되고 엄청난 손해배상을 물지 않을 수 없는 誤報도 숱합니다. 그러나 어느 기자가 전두환씨한테 제소를 당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며 기사를 쓰고 있겠습니까? 全씨 내외는 지금 언론의 가장 만만한 동네북입니다. '삐, 삐, 삐, 삐, 전두환 대통령은 ...'식으로 밤 아홉시 뉴스와 전파매체를 私物化하였던 이들이 全씨 내외지만 너무 빨리 그 업보를 당하고 잇습니다. 전두환씨에 대한 지금의 보도 태도를 보면 그 이가 대통령으로 한 일은 나쁜 짓 뿐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김대두나 박철웅 같은 희대의 살인마도 평생을 나쁜 짓만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글 쓰는 사람의 한 도리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칭찬할 때는 기자는 비판해야 하고, 대다수 사람들이 비난할 때에 기자는 변호해야 한다' 어느 기자들의 모임에서 이런 농담이 나왔습니다. '요즈음 전두환씨를 변호하는 것은 김일성이를 변호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인 것 같아' 저는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몇 달 전에 대통령 전용기 보잉737기를 두 대 사들였는냐, 한 대 사들였느냐로 외국 언론과 야당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 또 전두환 前 대통령의 연희동 집에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지하실에는 주로 軍 부대와 연결되는 비상 전화망을 갖춘 상황실이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기자도 있었습니다. 대통령 전용기를 타 보았고, 연희동 집에도 가 보았던 많은 기자들은 전용기는 한 대이고 상황실과 에스컬레이터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기사로써 해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석에서 ' 그게 아닌데...'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기자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世論을 의식하여 침묵해 버린 경우는 이것이 처음은 아닙니다. 부도덕한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였던 우리 언론이 지금은 잘못된 世論의 눈치를 보면서 사실 은폐 및 왜곡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살인범을 변호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에 찬성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법정이란 것은 경기장과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피고인과 검사가 대등한 위치에서 攻防을 펼쳐야 합니다. 재판장은 경기 심판처럼 높은 데에 앉아서 그 공방을 통해 법정에 나타나는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판결을 내리는 것임으로 공방은 정정당당하게 진행되어 많은 자료들이 제시돼야 합니다. 막강한 공권력을 등에 업은 검사에 비교하여 피고인은 아무래도 불리한 처지이기 때문에 변호사를 붙여 주고 있습니다. 전두환씨에 대해 검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언론과 야당입니다. 변호사의 역할을 맡은 것은 민정당입니다. 그러나 민정당은 全씨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인인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당 자신을 변호하는 데에 더 급급하고 있는 듯합니다. 勢가 불리해지면 피고인을 희생시켜서라도 保身을 해야겠다는 눈치가 역력합니다. 그래서 全氏는 민정당을 변호인으로 선임하는 것을 거부한 지 오래입니다. 스물 네 시간 독재만 했나? 저는 개인적으로 지나간 한국의 現代史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뭐래도 지난 사십 몇 년의 한국 현대사는 발전의 역사이자 찬란한 성취의 역사였다고 믿습니다. 한국전쟁, 3선 개헌, 유신, 12.12사태, 광주사태 같은 불행도 많았지만 우리의 성취가 그것을 덮고도 남았기에 지난 사십 몇 년의 결산이 흑자인 것입니다. 흑자라는 근거는 사십 몇 년 전에 비해 우리가 경제적으로는 훨씬 더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으며, 정신적으로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국제적으로는 같은 수준에서 출발한 어떤 나라보다도 우리나라가 거의 모든 면에서 앞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중국의 오늘날 생활수준이 60년대의 우리나라 수준이라는 것은, 요사이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 온 한국인들의 거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분입니다. 조선조의 임금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이 세 사람을 설명하는 공통어는 <독재자>입니다. 모든 언어가 다 그렇듯이 <독재자>란 표현은 편의로 사용하는 한 부호일 따름이지 완전무결하게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독재자라고 해서 세 대통령이 하루 스물 네시간씩 독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는 독재를 할 때도 있었고, 민주주의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독재만 하는 독재자도 없고 민주주의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이란 나라의 꼴을 만들었고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國體를 지켰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고도 경제성장을 주도함으로써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었고, 한국 만족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두 사람을 비판하는 논리는 거의가 당위론에 머물러 왔습니다. 이승만에게는 '왜 좀 기다려 통일 국가를 세우지 않았나' 박정희에게는 ' 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지 못했나'라고 비난합니다. 자유와 빵을 함께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 개인의 자유지만 그 비난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당시의 상황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시간, 人力, 돈, 자원은 한정돼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집중으로 투입하느냐 하는 우선 순위의 결정이 늘 문제가 됩니다. 이승만은 나라의 틀을 갖추고 지켜 가는 데에, 박정희는 경제 발전에 이 有限한 자원을 가장 많이 투입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정치 정의 민주주의에는 소홀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때에 한국의 가장 큰 문제를 배고픔으로 파악하였고, 한국인에게는 자유보다는 빵을 먼저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빵으로써 육체의 자유를 먼저 얻어야 정신의 자유를 찾을 여유도 생기게 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민주화의 방향을 확실하게 잡고 자유를 이쯤이라도 누릴 수 있게 된 데는 경제가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준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경제발전이 그때에는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경제가 민주주의의 실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유월 한 달 동안 全國이 반정부 시위로 들끓고, 칠월과 팔월에는 홍수와 노사분규로 시끄러워도, 또 가을과 초겨울에는 대통령 선거의 바람이 휩쓸어도 이 나라를 끄덕없이 굴러가게 했던 것은 기업인과 노동자였습니다. 이 전환기에 경제불황이 왔다면 민주화는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지킨 정치인 저는 한 정치인을 독재자라고 규정함으로써 그의 實積을 몽땅 독재적이고, 부정한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아주 비과학적인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역사는 전두환씨를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저는 훗날 역사책에 全씨가 이렇게 기록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고 한 사람. 그러나 약속을 지킨 정치인'. 전두환씨는 12.12사태와 5.17 군사 쿠데타로써 역사의 대세를 뒤집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국군보안사를 시켜 공장 하나 짓는 것보다도 더 빨리 급조한 정당 이름에는 <정의>란 이름을 넣도록 했고 스스로를 <개혁 주도세력>이라 불렀습니다. 을사보호조약의 <보호>가 사실은 <강탈>이었고 경찰의 보호실이 때로는 人權 침해실 역할을 했듯이 전두환씨의 '정의'는 '부정', '개혁'은 '부패'를 의미한 것이었음은 그 결과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전두환 군사정부의 가장 큰 공은 그 참담한 실패로써 '군사정부는 이제 그만'이란 국민적인 합의를 만들어 낸 점일 것입니다. 이런 전두환씨가 잘한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물가를 잡고, 그와 함께 고도 경제성장을 이룬 점이 첫째이고, 단임의 약속을 지킨 점이 둘째입니다. 1965년에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한국이 몸살을 앓고 있을 때에 한국에 와서 미국 월간 잡지 <어틀랜틱>에 <오 마이 코리아>라는 르포 기사를 기고했던 在美 소설가 김은국씨는 그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행세해야 한다. 이 겉치레는 한국인들이 즐기는 놀이인 바, 아주 의식적으로 연출되고 있다. 이는 한국인들이 그 놀이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하며 하나의 습관으로 만들어 즐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幻想과 자기 기만에서 이상한 기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제5공화국에서도 전두환씨는 자유 민주주의란 간판을 버리지 않고 '놀이'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單任 정신>이란 말을 자주 썼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하루라도 더도 덜도 않고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겠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마 재판장님께서도 믿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태 전까지만 해도 아니, 6.29 선언 뒤에도 全씨가 절대로 정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과 추측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어쨋든 전두환씨는 單任 정신을 입버릇처럼 강조함으로써 單任을 그의 순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느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겠다고 공언한 사나이의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두환씨는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친구인 육사 동기생에게 정권을 넘기면 나를 끝까지 봐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해 보니까 권력이란 것은 새로 정권을 잡는 사람은 前任者를 격하해야 정권의 기반을 굳힐 수 있는 것이다. 나도 그같은 각오를 하고 있다' 퇴임 후에 格下운동이 이처럼 빨리, 크게 이루어질 줄이야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상당한 부작용을 내다보면서 그는 큰 약속을 지켰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약속 지킴>은 희귀한 사례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극적인 최후는 3選 개헌과 유신 선포라는 두 번의 약속 어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은 아마도 수 백번에 걸쳐서 '나는 무엇이 되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마음을 비웠다'고 하면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약속했으나 끝내 그 약속을 '가장 큰 거짓말'로 만들었습니다. <약속 지킴> 부분에선 지금 검사의 자리에 앉아 있는 저 두 金 선생은 全 선생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민주화를 한 걸음 진전시키는 데는 두 김씨의 줄기찬 反독재투쟁, 노태우 현 대통령의 6.29 선언과 함께 전두환씨의 단임 약속 실천이 큰 뒷받침이 되었다고 한다면 全씨에 대한 평가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 사람'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개막식에 나오게 했어야 남을 공격하는 데는 엄격한 원칙이 요구됩니다. 남의 人格을 더럽히는 공격일수록 공격의 근거가 사실에서 출발해야 하고, 공격의 방법은 이성적이어야 하며, 상대에게는 反論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공격은 보복이나 속죄양 만들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열 다섯 해 전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샤론 테이트라는 여자 배우와 그의 친구들을 기괴한 방법으로 죽인 광신도 찰스 맨슨이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살인범 맨슨'이라 말했다가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고는 사과하였습니다. 확정 판결 전에는 그 누구도 無罪人으로 추정한다는 원칙에 비추어 닉슨의 발언이 비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전두환씨는 지금의 여론재판에서는 이미 유죄가 확정된 듯합니다.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그것을 준비한 대통령이 개회식에 나오는 데 대하여 많은 신문이 거부감을 표시했고 전두환씨는 이 논조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참석을 포기했습니다. 그 장대한 개회식을 본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전두환씨 내외가 참석했을 때에 과연 그 관중들이 야유를 보내겠습니까. 한국전쟁 때에 한반도 통일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수십만 군대를 보내 재통일의 꿈을 좌절시킨 책임이 잇다는 중국, 대한항공기를 격추하여 민간인 269 명을 죽인 소련의 팀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 준 넉넉한 한국인들이 全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전직 대통령에게 야유를 하는 그런 유치한 행동을 하였겠습니까. 또 '우 --'하고 소리쳤다 한들 그게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야유는 세계 만방에 한국의 민주화를 알리는 증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전두환씨의 참석 포기를 유도한 신문의 논조는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못할 짓을 한 것입니다. 전두환씨가 유죄 확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다 하여도 개막식에만은 가출옥을 시켜서라도 참석하게 하는 것이 동양적인 윤리일진대 유죄의 증거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사람에게 화합이란 정신을 깔고 있는 올림픽 개막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하게 유도한 것은 全씨의 불행이기 전에 한국 신문의 불행이었습니다. 올림픽 개막 행사에 전두환씨 내외가 스탠드에 앉아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날 그 스탠드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이 결백 인간들이 아닌 다음에야, 상처받고, 때 묻고, 욕심 많고, 불행한 사람들까지도 서로 같이 쓸어 안고 짧은 순간이지만 함께 눈물 흘리는 그런 모습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언론학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신문이 앞장서서 노태우 대통령 쪽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준 셈이라고 비꼬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이 법정의 검사역을 맡고 있는 한국 언론의 비열한 행태를 엿보게 하는 상징적인 일화라고 믿습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했을 때에 '괴물 탈출'이라고 보도했던 프랑스 신문이 그가 파리에 입성할 때에는 '황제 돌아오시다'라는 제목을 달았다고 합니다. 언론은 현실의 역할 관계를 거울처럼 예민하게 반영하는 점에는 천부적인 현실 적응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전두환씨를 난도질하고 있는 오늘의 언론은 겨우 일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두환' '전경환' '이규동' '이순자'란 이름에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요즈음에 문제가 된 5공비리의 거의 전부는 언론이 알고 있었거나 취재 의욕만 있었다면 캐낼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적어도 언론은 5공비리의 방조죄를 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언론이 지나간 과오에 얽매여 5공비리의 추궁을 자제하라는 뜻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니 그때 그때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다만 배신자가 과거의 동료를 더욱 심하게 매도함으로써 새 주인의 신임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듯한 식이 되어서는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언론이 지난날의 잘못을 씻을 수 있는 길은 저널리즘의 原型을 되찾는 것 전두환씨를 당장 요절내야 할 급박한 사유가 없다면 그 자신이 바로 제5공화국의 역사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物證인 전두환씨를 두고두고 연구하여 후세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평상심으로 돌아가 진상 규명을 올해에 끝낼 것이 아니라 몇 십년이 안되면 몇 백년에 걸쳐서라도 하겠다는 느긋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엄정하고 집요한 사실 확인과 거기에 바탕을 균형 있고, 공평한 자료의 배열이 전두환씨를 다루는 원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수를 위한 채찍질인지 책임 회피를 위한 과잉 비방인지는 맞는 사람이 잘 알고, 때리는 사람이 더 잘 알 것입니다. 머리 좋은 언론인들이 독자는 속일 수 있겠지만 자신의 양심이야 어떻게 속이겠습니까. 제5공화국의 칠년 역사는 전두환씨가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4천만 국민들이 함께 만든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뛰어난 점에도 그 잘못된 점에도 우리 모두 공동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책임의 질과 양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이 시대의 과오에서 완전히 면책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법정에 나온 검사는 한 시대의 잘못들을 몽땅 <5공非理>라는 보따리에 싸 가지고 전두환씨한테 '이것은 당신 몫이요'라면서 안겨 주고 ' 아 시원하다. 이제야 무거운 짐을 벗었다'고 홀가분해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 식이라면 제5 공화국 시절의 경제안정이나 자유의 확대라는 功도 전두환씨한테만 돌려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의 재판에서 그때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김민석씨는 '광주사태에 대해서 전두환씨는 학살의 책임을, 양김씨는 단합하지 못해 그런 사태를 막지 못한 책임을, 국민은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자세가 전두환씨를 추궁하는 데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해 재단의 反강제성 기부금 징수가 非理라고 한다면 거둔 사람 뿐 아니라 돈을 낸 사람들도 제 몫의 책임을 저야 합니다. 권총을 들이대고 빼앗은 돈이 아닐진대 몇 십억원을 내놓아야 할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약점 때문인지 政權의 특혜와 맞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이 바뀌어졌다고 해서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은 걸맞지 않습니다. 이같은 이치로 제5 공화국 언론 탄압의 가장 큰 책임자는 전두환씨였겠지만 그렇다고 기자들의 책임이 탕감될 수는 없습니다. 불행의 탓을 남에게만 돌릴 때에, 그리하여 진정으로 뉘우치고 고민하는 것을 회피할 떼에 불행은 고쳐지지 않고 인간성은 삐뚤어지는 법입니다. 저는 전두환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두환씨가 그 짓을 할 때 나는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가? 비열한 매질 10.26사건과 12.12사태 때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씨는 지난해에 펴낸 <12.12사건 - 정승화는 말한다>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전두환 합동수사 본부장이 어느 날 '김계원 비서실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비서실을 수사하다가 아무 데도 기록되지 않은 돈 9억원이 나왔습니다. 그 돈 가운데 6억원은 박근혜양에게 주고 1억원은 합동수사본부에서 수사비로 쓰도록 빼놓고 2억원은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고 보고해 왔다. 나는 전두환장군에게 '앞으로는 법적 절차를 밟아서 하라'고 주의를 준 뒤에 2억원을 비서실장에게 건네 주어 예금시켰다. 며칠 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더니 그는 '나에게도 5천만원을 가져 왔기에 해공군 참모총장에게 2천만 원씩 나누어주고 1천만원은 국방부에서 썼다'고 하면서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장군은 또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낸 사실을 보고해 왔다.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으면서 서울 주변에 있는 주요 지휘관들에게 지난 추석에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꽤 많은 돈을 뿌렸다는 것이다. 그 보고서에는 해공군 참모총장에게 1백만원씩, 3군 사령관 이건영 중장에게 몇 백만원, 수고경비사령관 전성각 소장에게 몇 백만원, 신현수 군단장에게 몇 백만원 등등 수도와 수도 주변에 있는 주요 지휘관에게 돈을 준 것이 적혀 있었고 全장군은 '김재규가 擧事를 위해 쓴 돈 같지는 않습니다'고 했다. 나는 나에게도 3백만원을 보내왔던데 全장군에게는 안 보내왔어요'하고 물었다. '예, 저에게는 5백만원을 보내 와서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저도 좀 썼습니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내가 받았던 3백만원은(12.12사태 뒤에는)합동수사본부에 의해서, 내가 김재규로부터 자금을 받아 그의 擧事를 도우려 했다는 내용으로 둔갑되었다' 이 두 가지 일화에서 우리는 장군 시절 전두환씨의 인격에서 벌써 법적인 절차에 대한 놀라운 무시와 無知, 힘만 있으면 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고 방식, <의리 없음>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인 없는 돈이니까 멋대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 뒤의 사태는 오히려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분노케 하는 것은 김재규로부터 함께 돈을 받아쓰고도, 또 그 돈이 의례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도, 군의 대선배에게 擧事자금이라는 누명을 만들어 씌운 일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며 더구나 의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武人 집단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전두환씨가 변호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 의리 없는 풍토는 全씨가 정승화씨에게 저지른 의리없는 행동의 되풀이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全씨를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다만 의리 없는 인간을 의리 없는 방법으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기 검사로 앉아 계시는 지도자께서는 지난해에 이런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약한 세력이 강한 不義와 싸울 때는 不義한 수단을 써도 용서받을 수 있다' 이 말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로 바꿔 놓을 수가 있습니다. 선하고 약한 사람이 선한 방법을 버리고 부정한 투쟁 방법을 선택했을 때부터 그는 약하고 惡한 사람으로 변함으로써 그의 가장 큰 무기인 도덕적인 우월성을 잃게 됩니다. 그런 일이 지난 해에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로 변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는 어느 서양철학자의 경고를 외면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상대가 전두환씨인데 우리가 좀 과장하고 야비하게 대해도 누가 감히 불평을 하겠는가'라는 비열한 생각으로 또 너도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매질을 한다면 얻어 맞는 전두환씨가 아니라 매를 든 우리가 먼저 치사해지지 않겟습니까? 의리없는 전씨에게 우리는 의리가 무엇인지를 실천으로써 가르쳐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 돈 타 쓴 사람은? 전두환씨는 지난해에 중소기업인들을 청와대로 불러모아 놓고는 '여러분 정치자금 좀 내십시오. 나한테 돈 달라는 사람이 많아 큰일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중소기업인들에게 그런 요구를 할 정도였으니 대기업인들에게는 어떠했겠습니까? 독재정권의 유지에는 검은 돈이 많이 드는 법입니다. 무허가 술집을 경영하려면 관계 기관에 돈을 많이 뜯기는 것과 같은 이치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은 武力에 의한 위협과 검은 돈에 의한 매수로써만 지킬 수 있기에 전두환씨는 그런 유지비를 많이 거두어야 했을 터입니다. 그는 박정희처럼 노련하지 못해 돈 거두는 惡役을 黨이나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그 모집창구를 청와대로 一元化하여 자신이 몸소 맡았습니다. 오늘날 돈과 관련된 비난이 그 개인에게 집중되고 있고 前職 고위 인사들의 이름은 별로 거론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전씨에게 검은 돈을 타서 쓴 여-야 정치인들이 있다면 자신의 죄는 자신이 가장 잘 알 터이니 全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전두환씨는 측근에게 '내가 거둔 돈은 지난 대통령 선거와 총선때 거의 다 썼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돈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민정당 출입기자들 중에는 민정당이 지난 대통령선거 때에 4천억원에서 1조원에 이르는 금품을 뿌렸을 것이라고 추산하는 이도 있습니다. 민정당은 막대한 선거자금을 全 대통령에게서 타다가 썼다는 소리도 많이 나돌았습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에도 전두환씨는 아끼는 민정당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선거자금을 수 천만원씩 보태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예산 특례법에는 '국가의 안전 보장을 위한 예비비'란 것이 있습니다. 전두환씨가 집권한 지난 80년에서 87년까지 1조원에 몇 백억원이 미치지 못하는 엄청난 금액이 예비비로 지출되었습니다. 이 돈은 국가안전기획부장이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요구하여 받아쓰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세부 용도를 밝히지 않아도 되고 영수증도 필요 없으며 감사원의 감사는 숫자 확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돈의 실제 집행자는 서류에 나타난 안기부장이 아니고 대통령이었다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어디에 썼는지 국회와 국민이 알 수가 없었던 이 예비비의 상당 부분도 민정당 지원과 노태우씨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라고들 짐작하기도 하더군요. 이런 돈의 흐름을 놓고 본다면 전두환씨는 9년 전의 정승화씨와 비슷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全씨가 거두어 들인 돈을 타 썼을 현 정권이 언젠가는 김재규에게서 정승화씨가 받았던 추석 촌지를 전두환씨가 內亂 목적의 거사 자금으로 둔갑시켰듯이, 全씨에게서 받았을 돈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고 정치자금 모집의 모든 책임을 全씨에게 전가시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씨의 변호인으로서 저는 재판장님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여권의 그러한 책략이 없다고 보지 말고, 진상을 호도하지 못하도록 꿰뚫어 봐 주십시오. 장세동씨가 입을 열면 언론이나 야당 뿐 아니라 민정당까지도 그런 식으로 전두환씨를 속죄양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政街에 파탄이 일어날 것입니다. 재판장님, 정치 보복은 꼭 전두환씨 내외를 감옥에 집어 넣어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언론의 과장 보도와 전씨를 속죄양으로 만들려는 일부의 계획, 이런 것들이 바로 정치 보복인 것입니다. 全씨 내외는 지금 자신들이 이미 보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복이 두려운 것은 그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보복행위의 감정적인 악순환은 자기 파멸의 길이기도 합니다. 재판장님, 아무리 양 날개가 떨어진 이가 전두환씨라 하더라도 막다른 골목에 몰릴 때에 조용히 항복하겠습니까? 그가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가 정치 자금의 사용처를 털어 놓을 때, 그 이를 지원하는 정부 기관 안의 수구세력들이 여-야당 인사들에 대한 지저분한 정보를 흘릴 때, 가장 많은 비밀을 알고 있을 장세동씨 같은 사람이 全씨의 편에서 폭로전을 시작할 때에, 과연 몇 사람이나 상처를 받지 않고 온전하겠습니까? 재판장님, 오늘의 민주화 과정은 민중 혁명의 길이 아닙니다. 민중혁명으로 새 정권이 들어섰다면 全씨의 처단은 당연지사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권력층과 국민 사이의 타협에 의한 점진적인 민주화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6.29 선언이 그런 타협의 출발점이었고 지난 대통령 선거와 그 선거 결과를 인정한 대다수 국민들의 자세가 점진적인 민주화의 선택을 추인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 발로 청와대를 떠난 전두환씨를 實定法이란 작은 잣대로써 단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제5 공화국의 유산을 청산하란 말은 좋지만, 전두환 정권에 뿌리를 박고 있는 노태우 정권이 어떻게 자신의 뿌리를 자르겠습니까? 전두환씨의 문제는 한 정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단기간에 법률적으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큽니다. 정치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더 나아가서 종교적으로 오랫동안 두고두고 다루어야 할 소재입니다. 예수가 지금 살아 있었다면 '결백한 자 있으면 나와서 이 전두환을 돌로 쳐라!'고 했을 것입니다. 검사가 법률로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면 그 법은 전씨뿐만 아니라 여-야당 정치인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야당 총재의 직무를 한 법관이 정지시키듯 하는 정치의 황폐화가 빚어질 것입니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루어서 진상 조사와 평가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야 하며 그 時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때 <國父>란 칭송을 받았던 한 대통령은 이역 만리에서 고향을 그리며 죽어 갔습니다. 다른 대통령은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탄을 맞고 죽엇습니다. 끝까지 장기 집권을 꾀했던 사람에게는 암살이, 장기 집권을 꾀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사임한 사람에게는 그래도 망명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단임의 약속을 지켜 예고한 날짜에 정확히 권좌를 떠난 전두환씨에게는 조국에서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에도 맞지 않겠습니까? 검사께서는 진상 조사를 한 뒤에 全씨가 국민 앞에서 사과한다면 사법적인 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변호인은 全씨가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확신할 때에만, 또 여론 재판이 아니라 이성이 지배하는 분위기로 가라앉을 때에만 진상 조사에 협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 봅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는 극도로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검사님들, 제발 너무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악에 받치면 쥐가 고양이를 뭅니다. 사실 심리를 다시 해라! 재판장님, 이 역사의 법정에서 전두환씨에게 판결을 내릴 때는 두가지 점을 명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첫째는 全씨가 해외로 재산을 빼돌린 사실이 入證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르코스나 듀발리에의 예를 들것도 없이, 또 이 나라의 한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위의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비밀 구좌를 가지고 있었다는 물증을 내세울 것도 없이, 독재자나 그의 측근들이 세 불리할 때에 대비하여 해외로 재산을 유출시키는 것은 상식인데, 全씨는 그런 매국적인 행위를 한 흔적이 아직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全씨는 비록 군사 쿠데타로써 정권을 잡았지만 그 뒤의 숱한 위기 속에서 놀라운 참을성을 발휘하여 한번도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6월 사태 때에 군이 나오지 않았던 데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전두환 대통령이 6월 19일에 일단 결정했던 계엄령 선포를 그날 오후에 스스로 유보한 일입니다. 우리가, 비록 흠 많은 군사 독재의 시대인 줄이야 알지만, 전두환 시대를 이 역사의 법정에서 판단하기에는 그 시대에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제5 공화국 시절의 울분은 아직 식지 않았고, 우리의 가슴뿐이 아니라 머리는 아직 뜨겁습니다. 가슴에는 열정이, 머리에는 냉정이 자리 잡아야 후회 없는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전두환씨를 당장 요절내야 할 급박한 사유가 없으면, 그 자신이 바로 제5 공화국의 역사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물증인 전두환씨를 우리는 두고두고 연구하여 後世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 변호인은 결심 및 선고 기일의 무기 연기를 요구하는 한편으로 사실 심리의 재개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