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委, 장준하 失足死 목격자를 2期에 걸쳐 서른 번이나 조사하고 '진상규명 불가'
김현희 가짜몰이와 張俊河 실족사 목격자 김용환 괴롭히기는 동시에 진행되었다! 남동생과 작은 아버지도 조사.
趙甲濟
1975년에 등반중 실족사한 張俊河씨가 타살당하였다는 주장을 하는 정치인과 언론인이 또 다시 등장하였다. 이들이 백 년을 떠들어도 진실은 변할 수가 없다. 유일한 목격자 金龍煥씨를 살인범으로 조작하지 않는 한. 金씨는 張씨와 함께 등산을 하다가 그가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를 인공호흡시켜 살리려 하였던 사람이다. 좌파정권 시절 親정부 및 좌파 세력으로 구성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2期에 걸쳐 조사를 하였으나 '진상규명 불능' 판정을 내렸다. 이는 아무리 트집을 잡으려 해도 타살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장준하 변사 사건 수사 검사도 "추락사가 명백하였고, 가족들도 부검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이번에도 37년만에 캐낸 장준하의 머리 뼈에 난 골절상을 공개하면서 타살의 증거라고 우기는데 절벽에서 떨어질 때 난 상처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김용환씨의 명예를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는 타살 주장을 하려면 최소한 누가(또는 어느 조직이) 어디서 어떻게 죽였다는 정도의 구체적 의혹은 제기해야 하는데 저들은 삼류 소설보다도 못한 막연한 주장을 되풀이해왔다.
의문사 위원회가 교감 출신의 교육자 김용환 씨를 피의자처럼 다루면서 얼마나 괴롭혔는가는 그가 月刊朝鮮과 한 아래 인터뷰에 생생하게 나와 있다. 이제는 김용환씨를 괴롭힌 자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될 차례이다. 아무런 의혹도 없는 사건을 두고 무고한 시민을 이렇게 다루고도 무사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도, 法治국가도 아니다.
좌파정권이 장준하의 죽음을 의문사로 몰고가려 하던 바로 그때 '김현희 가짜 몰이'가 동시 진행중이었다. 김현희 씨에 대한 국정원과 진실화해위원회의 집요한 압박과 김용환씨에 대한 1, 2期 의문사 위원회의 압박은 닮았다. 1차 시도에서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재조사를 한 점에서도 같다. 김현희와 김용환 가짜 몰이는 가장 악질적인 고문이고 인권유린이며 反인류범죄이다. 무고한 김용환 씨를 형사피의자처럼 취급, 그의 남동생과 작은 아버지까지 조사하였다니!
뉴데일리에 따르면 <정세균 후보는 “황토색 두개골, 선명한 망치 자국이 2012년 세상에 꺼내진 것은 역사의 심판”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선생님을 내려쳤던 친일, 허위, 독재에 대한 심판이고 지금도 국민의 고통은 외면하며 권력과 돈을 탐하는 불의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다. 2012년 그 심판을 반드시 해내라는 명령과 호통이다. 그 말씀 저희가 받들겠다.” “친일파 박정희에 의해 독립군 장준하가 타살됐다면 일본군이 독립군을 살해한 것이고, 허위가 진실을 살해한 것이고, 불의가 정의를 살해한 것이고, 독재가 민주주의를 살해한 것이다.”라고, 이미 타살 로 밝혀진 것 마냥 단정 지었다고 한다. 민주통합당의 다른 의원들도 ‘박근혜 깎아내리기’에 열을 올렸다는 것이다.
이석현 의원은 “정부는 살해 지시를 내린 사람이 누군지 밝혀내야 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장준하 선생이 타살된 경위를 정부가 규명해주길 바란다”고 했고, 유기홍 의원은 나아가 “정부가 타살의혹 규명에 나서지 않는다면 75년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씨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두려워 한 소극적 대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란 자들과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끔찍하게 느껴지지만 이런 막말의 代價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투지도 솟는다.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김용환 씨는 이렇게 말한다.
『1기·2기 의문사委 합쳐서 한 30번은 제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의문사委에서 출두 통지서가 오면 출두할 때까지 1주일이건 보름이건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살겠어요? 죽을 지경이죠. 혈압도 있는데다가 요즘은 손이 저려서 약을 먹고 있어요』
『제 남동생하고 경기도 안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작은 아버지하고 그렇게 받았어요. 우리 집사람도 조사를 하려고 했는데 제가 못 하게 했어요. 도대체 우리 가족과 이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느냔 말입니까. 나 하나만 시달리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왜 가족까지 끌어들이냔 말입니까.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니까 내 사생활을 들쑤시는데, 야비해요. 국가기관이라는 곳이 너무 야비합니다』
『정보기관하고 나하고 둘을 놓고서 장난을 친다는 거죠. 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니라고 하면 정보기관의 개입과 의문이 없어지는 거고, 정보기관의 부도덕성을 계속 주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계속 혐의자로 남아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나를 희생양으로 삼는 거죠』
『또 있죠. 선생님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주변에는 있죠. 張선생님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면 그 자체로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확보하고 매스컴도 타고 그러는 거니까.
張俊河 선생님을 우상화하면 할수록 자신들에게는 좋은 거죠. 하지만 그것은 선생님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의문사가 아니더라도 張선생님이 살아 생전에 남긴 업적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겁니다. 나는 그런 진정성마저 훼손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안타깝습니다』
*박성현의 뉴데일리 기고문중 일부: <이번 ‘2012 음모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머리 뒤통수 쪽에 생긴 직경 6센티쯤(찐빵 크기의 직경) 되는, 거의 완벽한 원형으로 생긴 실금이 ‘타살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 정도 크기에 그 위치라면 반드시 해골의 봉합선(grove)을 지나서 생겨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게 왜 문제냐고?
해골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개의 판이 모여서 구성되어 있다. 해골을 흉기로 내리치면 봉합선을 따라 깨질 뿐 봉합선을 넘어 완벽에 가까운 원형 모양으로 깨지지 못 한다. 이 같이 봉합선을 넘어서는 원형의 실금은, 땅에 묻힌 지 오래 되어 완전히 딱딱하게 경화된 해골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막말로, 이장하러 유골을 수습하다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또한 해골을 검안한 서울의대 법의학 교수 이윤성은 “추락 충격인지 흉기 충격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야권 및 가짜진보 진영은 “타살 혐의가 짙다”라고 주장한다.>
*김용환씨가 월간조선에 기고한 수기의 일부
<암석 사이로 나무도 나 있고 해서 나는 그 잡목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를 내려오니 병풍같이 펼쳐진 단애가 있었다. 단애 밑에는 소나무가 나 있어서 나는 그 나무를 잡고 단애를 뛰어 내렸다. 그 단애의 높이는 1.5m 정도 된다고 생각된다. 단애의 밑은 평평한 지형이었다. 게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니 선생님께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허겁지겁 선생님이 떨어진 쪽을 향해 내려갔다. 선생님은 그곳에 누워 게셨다. 의식은 없었으나 호흡을 몰아쉬고 계셨다. 선생님을 반듯이 눕히고 손을 대고 인공호흡을 하면서 『선생님, 선생님 정신차리세요. 선생님 정신차리세요』라고 외쳤다. 그러나 선생님의 호흡은 점점 약해져갔다. 호흡이 멎는 순간이 왔다. 입으로 인공호흡을 계속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호흡을 다시는 하지 못했다. 아! 이것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이제는 일행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일행이 있는 식사준비 지점을 향해 달렸다. 어떻게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돌에 미끄러지고 물에 빠지면서 달려갔다. 산악회 회장 金容德씨에게 『선생님께서 떨어지셨어요. 빨리 갑시다』라고 말했다. 金씨와 김희로, 김용봉씨(金容德씨의 동생)와 함께 그곳으로 달려갔다.
다시 인공호흡을 하였으나 회생하시지 못했다. 그곳에 계신 분들과 상의하여 길 옆으로 선생님을 모시기로 하였다. 옷을 벗어 들것을 만들어서 선생님을 길 옆으로 모시고 점퍼를 벗어서 선생님의 얼굴을 가려드렸다. 金容德, 김희로씨와 상의하여 군부대에 협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김희로씨가 군부대에 가서 군의관과 위생병을 데리고 왔으나 회생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파출소로 가고 그곳에서 포천 경찰서로 가 그곳 구치소에서 하루저녁을 자고 다음날 오후 의정부 검찰지청으로 가게 되었다. 張선생님 사모님께서 신원보증을 해주셔서 의정부 검찰지청을 나오게 되었다. 의정부 검찰지청을 나와 이문동 집에 들렀다가 선생님댁으로 갔다.
그날 저녁 선생님 댁에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사고 상황을 말씀드렸다(함석헌 선생님, 계훈제 선생님, 張선생님의 숙부님 그리고 한두 분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통일당 주도의 영결식이 명동 성당에서 있었다. 영결식이 끝난 뒤 전세 버스를 타고 장지로 가서 하관식에 참석했다. 제일 뒤에서 몸둘 바를 몰랐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 고향 당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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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張俊河 失足死의 유일한 목격자인 前職 고등학교 교감 金龍煥씨 (2004년 8월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활동기한 연장을 위해 張俊河 선생님 사건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들의「밥통」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내 인권을 짓밟고 있다』 『張俊河 선생님은 정권에 의해 타살되지 않았더라도, 살아 생전에 남긴 업적으로 충분히 위대한 분입니다. 선생님을 있지도 않았던 의문사로 몰아붙이는 일은 그분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그가 인터뷰에 응한 이유
지난 6월28일 오후, 月刊朝鮮 편집부로 한 노인이 찾아왔다. 젊었을 때는 대단히 호남형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노인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다. 그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委)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의문사委의 주선으로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소재 약사봉 등반길에 사망한 故 張俊河(장준하)씨의 미망인인 金熙叔(김희숙·79)씨를 만날 예정이었다고 한다. 『김희숙씨가 몸이 불편해 나올 수 없다』는 의문사委의 연락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문사委에 갔다가 헛걸음하고 집(충남 당진)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의문사委는 「張俊河 사망사건」을 의문사로 규정, 조사를 벌였으나 1기·2기 의문사委 모두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張俊河 사망사건」이 거론될 때마다 언론에 「金모씨」로 등장하는, 당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바로 이 노인 金龍煥(김용환·69)씨다. 운명의 그날 金씨는 선생님으로 따르던 張俊河씨와 약사봉을 등반했다.
『張俊河씨의 죽음에 국가 공권력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金씨가 중앙정보부의 사설 정보원이거나, 죽음을 목격하고도 국가 공권력이 두려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張俊河 타살」을 입증하려는 의문사委의 2년에 걸친 조사와 자료수집, 사고현장에서의 추락 시뮬레이션은 「목격자 金龍煥」이라는 벽에 번번이 부딪혔다.
金씨는 1967년 7代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한 張俊河씨를 도우면서 인연을 맺었다. 張씨의 지구당(동대문乙구) 간사직을 맡는 등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일하다가 1975년 초에 낙향했다.
기자는 약사봉 현장의 헬기 촬영 등 1기 의문사委의 「張俊河 사망사건」 조사가 한창이던 2001년 7월 金龍煥씨 인터뷰를 위해 충남 당진에 있는 그의 집을 무작정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고, 대신 하룻밤 묵고 가라고 했다. 밤이 깊도록 그는 하소연을 했다.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그의 하소연 가운데 몇 번이고 되풀이 되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張俊河 선생님은 약사봉 등반 중에 실족하셔서 추락하셨고, 그래서 돌아가셨다. 그걸 내가 현장에서 봤다. 무얼 더 얘기하라는 것인가』
金씨는 다음날 아침 집을 나서는 기자에게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놨더니 어쨌든 후련하다』고 했다. 기자가 그에게 한 말은 『그러시다가 홧병 나시겠습니다』였다.
金龍煥씨를 다시 만난 것은 1기 의문사委의 활동이 마무리되던 무렵인 2002년 여름이었다. 그는 손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의문사委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격분, 책상을 내리쳤는데 손에 금이 갔다는 것이다.
그와 차를 마시며 『이번에는 인터뷰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지하에 계신 張俊河 선생님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累(누)를 끼치는 일이 된다』는 이유였다.
金龍煥씨는 月刊朝鮮 1993년 6월호에 실린 「죽음으로의 下山, 그 뒤」 題下(제하) 手記(수기)에서 심정을 다 밝혔고, 그 이상 새로 나올 이야기가 없다고 했다.
(月刊朝鮮 1993년 5월호에는 張俊河씨의 국가기관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 SBS의 방송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誤報(오보)를 지적한 기사가 실렸었다─편집자 注)
그러던 그가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 응하기로 한 것은 의문사委의 조사를 받으면서 느꼈던 울분과 함께 「張俊河씨 사망사건」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정부기관 및 일부 인사들의 행태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月刊朝鮮 1993년 5월호에 실린 金龍煥씨의 手記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 注」가 실려 있다.
<월간조선은 金龍煥씨의 수기를 게재하면서 그의 사진을 함께 실으려 했다. 이미 그의 이름과 직업이 공개됐기 때문에 그의 얼굴도 공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金씨는 사진이 공개되는 것은 결코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에도 金씨는 사진 게재를 한사코 거부했다. 사건 발생 18년 후나 29년 여가 지난 지금이나 그의 주변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그가 더 늙었고, 세상의 의혹에 대응할 기력이 점점 약해진다는 것뿐이다.
『張俊河 선생님 사건은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요』
지난 7월8일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가 가져온 검은색 가방에는 각종 자료들이 수북했는데 자신에 대한 잡지 및 신문 기사와 法典(법전), 그리고 약봉지가 담겨 있었다.
―法典은 왜 갖고 다니십니까.
『틈틈이 법에 대해 공부하려구요. 의문사委라는 게 초헌법적 기구거든요. 그 문제점을 공부하고 있어요』
―어디가 편찮으셔서 약을 먹는 겁니까.
『1기·2기 의문사委 합쳐서 한 30번은 제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의문사委에서 출두 통지서가 오면 출두할 때까지 1주일이건 보름이건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살겠어요? 죽을 지경이죠. 혈압도 있는데다가 요즘은 손이 저려서 약을 먹고 있어요』
―30회 이상 조사를 받아야 할 만큼 진술할 내용이 많습니까.
『그 사건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단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10분이면 조사가 끝나요. 그렇게 길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반복에 반복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의문사委에 자꾸 출두를 하십니까.
『자꾸 출두를 요구하니까. 그리고 나는 떳떳하니까. 내가 숨기는 게 없으니까. 조사를 받으면서 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사관들은 내가 거짓말을 안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다 하다 더 조사할 게 없으니까 내 뒷조사를 다 했어요. 가족 사항, 친구 관계, 軍생활까지. 도대체 내 가족 사항과 張선생님 사망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의문사委가 金선생님에게 자꾸 출두 요구를 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들의 조직 수명 연장을 위해서예요. 공명심도 있겠죠. 張선생님 사건 만큼 의문사委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데 더 좋은 사건이 어디 있겠어요? 의문사委의 사무실에 가 보세요. 1기 때보다 2기 때 인원이 훨씬 더 늘었어요』
3기 의문사委가 출발해도 사건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3기 의문사委의 출범이 확실시되고 있는데요.
『그게 문젭니다. 그런다고 張俊河 선생님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이 안 나오리라는 것은 의문사委 관계자들이 더 잘 알 거예요. 또 판정불능이 나올 거고, 그러면 또 張俊河 선생 팔아서 4기 하자고 그럴 건가…』
―3기가 출범하면 국정원, 기무사 등에 자료제출 명령권이 부여되는 등 의문사委의 권한이 강화될 것 같던데요.
『권한이 강화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 사건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데. 난 차라리 국정원이 張俊河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면, 다 공개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사실도 없겠지만 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내 인생은 모두 정지됐어요. 떠나가시면서 나를 꼭 붙들고 가신 거예요. 이렇게 30여 년을…』
金龍煥씨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올해 만으로 예순아홉입니다. 張선생님 사건으로 철든 후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인 30여 년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는 슬하에 4녀1남을 두고 있다.
―가족들은 어떻습니까.
『가족들의 심적 고통이야 말하나 마나죠. 다만 나는 가족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해요.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 애들은 관련 기사가 나오면 신문을 스크랩해서 주고 그러죠. 그 속이 편할 리야 없겠지요』
金龍煥씨는 張俊河 사망사건이 발생한 해인 1975년 초에 고향인 당진으로 내려가 당진중학교 강사로 교직생활을 시작, 1999년 3월에 호서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퇴직했다. 그가 담당했던 과목은 「윤리」·「사회문화」·「정치경제」 등 주로 사회 과목이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金선생님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까.
『제가 이런 상태였는데 제자들도 대충은 알고 있었겠죠. 제가 수업 시간에 張俊河 선생님의 사상 이야기도 해주고 그랬는데 그게 잘한 일인지 가끔 후회될 때도 있어요. 사회에 나갔을 때 그런 영향을 받아서 희생이 될지, 출세를 할 때 저해가 된 사람은 없는지 걱정이 돼요』
―張俊河 선생의 사상은 어떤 겁니까.
『「無저항, 非타협」 간디의 사상이죠. 물론 張선생님은 도시 게릴라戰도 생각하는 등 간디의 사상과 다른 점도 있었지만 간디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던 것만은 확실해요』
―1기 때와 2기 때의 의문사委 조사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크게 다른 건 없어요. 사건이 워낙 간단하니까. 2기 때 달라진 건 제 주변을 많이 조사하더라구요. 사건 당시 나를 조사했던 당시 검사와 경찰 등과 대질 신문도 있었구요. 그런데 분명한 건 시간을 끈다는 인상이었어요. 물은 것 묻고, 또 묻고. 말꼬투리나 잡고』
―말꼬투리를 어떻게 잡았는데요.
『진술을 하다 보면 표현 방법에 따라 단어가 다르게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먼저는 이런 말을 해놓고 이번에는 왜 이렇게 표현하느냐고 따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 張선생님이 추락하실 때 나는 앞서 갔기 때문에 떨어지는 장면은 못 보고 소리 같은 느낌만 있었던 것 아니에요? 그걸 표현할 때 「휙」 하는 소리라고도 할 수 있고, 나무 소리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때는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등 내가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소리들이 있었을 테니까. 진실은 張선생님이 실족했다는 것, 그것 하나인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를 갖고 물고 늘어지는 식이에요』
조사 중 자일에 매달려 바위에 부딪히기도
―무리한 요구나 조사도 있었나요.
『1기 때였는데 아마 그때가 2002년 5월31일이었을 겁니다. 약사봉 현장 조사를 가서 선생님이 떨어진 장소를 찾는데, 나는 의문사委가 떨어진 곳이라고 얘기하는 곳이 내가 보기에는 아니었어요. 나는 다른 쪽을 가리켰더니 그곳으로 내려가라는 거예요. 내 나이도 있고 혈압 때문에 건강도 안 좋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일을 타고 내려가라는 거예요.
산악회 회원 4~5명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산악회 회원 한 명과 함께 자일에 매달렸는데 흔들리면서 그 사람은 팔을 다치고 나는 바위에 부딪혔어요. 거기서 죽을 뻔한 거죠. 내가 다른 쪽이라고 소리를 쳐도 의문사委 사람들은 절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그 지역을 찾느라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모릅니다. 그날 등산화 끈이 다 끊어졌어요. 집에 돌아와서 탈진했어요』
―가족들은 왜 조사를 받았습니까.
『제 남동생하고 경기도 안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작은 아버지하고 그렇게 받았어요. 우리 집사람도 조사를 하려고 했는데 제가 못 하게 했어요. 도대체 우리 가족과 이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느냔 말입니까. 나 하나만 시달리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왜 가족까지 끌어들이냔 말입니까.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니까 내 사생활을 들쑤시는데, 야비해요. 국가기관이라는 곳이 너무 야비합니다』
―의문사委 1기가 끝날 무렵 깁스를 하고 오셨는데요.
金龍煥씨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화를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결국 그의 언성은 높아졌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한 조사관이 있었는데, 그는 「이전의 조사관들은 잘 몰라서 봐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통한다」면서 「뱃속에 있는 창자까지 꺼내서 밝히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왔는데 1기 끝날 무렵 그 사람하고 한 네 번은 싸웠어요. 중앙정보부원의 이름을 대면서 계속 「너는 그 사람을 아느냐」, 「너는 정보부원이다」, 「네가 선생님을 죽이지 않았냐」해 서로 격해졌는데, 내가 약이 오르니까 책상을 쳤다가 뼈에 금이 간 거죠. 나는 맹세코 정보부의 끄나풀도 아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정보부에는 아는 사람조차 없어요. 나는 張선생님이라면 하늘과 같이 모신 사람이에요.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상으로 나는 張선생님을 아꼈고 사랑했어요』
―당시 중앙정보부에는 정말 단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었나요.
『거듭 이야기하지만 나는 정보부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2기 의문사委 조사 때 한번은 조사관이 조그만 종이에 적힌 문건을 보여 주더군요. 「당신이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정보부에 보고한 문건이다」고 해, 「나는 그런 적 없다」고 했어요. 그런 일이 없으니까. 설사 내가 정보부 끄나풀이라고 할지라도 당시 그 현장에서 어떻게 보고를 합니까. 핸드폰이 있습니까, 주변 가까운데 전화가 있습니까.
「그 문건이 사실이라고 믿으면 당신들이 확인해라,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느냐」 그랬더니 그 문건을 보여 주더군요. 내가 張선생님의 죽음을 보고한 걸로 돼 있더라구요. 문건을 보여 주면서 하는 말이 「그러면 국정원을 고발하라」는 것이었어요. 국가기관이 국가기관 고발을 부추기는 거죠』
―국가인권委에 의문사委를 고발할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그런 생각도 해 봤죠. 그런데 내가 가서 국가인권委에 얘기한들 무엇을 얼마만큼 얻을 수 있겠어요. 의문사委나 국가인권委나 나한테는 별로 달라보이지 않아요』
언론이 소설을 쓰면서 의문 만들어져
―의문사委의 주장에 따르면 1975년 초 당진으로 낙향할 때 張俊河 선생님 주변에다가는 아무 연락 없이 낙향하셨다면서요.
『당시 아버님이 병환 중이셨고, 나는 장남으로서 고향으로 안 가면 안 될 입장이었어요. 내가 취직하러 내려간다고 할 수도 없고, 張선생님의 정치적 상황도 안 좋은 상태였고…. 하여간 내가 한 모든 일은 의문스럽게 보는 거예요』
―고향으로 내려간 후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사건 발생 전날인 8월16일에 서울에 올라온 것도 의심을 받고 있는데요.
『그것도 말이 안 돼요. 내가 교직에 있으면서 농사일도 있고, 가축도 기르고 해서 바빴어요. 그래서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인 8월16일에 올라와 張선생님과 자주 등반을 하는 호림산악회를 찾아간 거죠. 마침 호림산악회 회장이자 張선생님의 지구당 상임위원회 의장직도 맡았던 金容德(김용덕)씨를 찾아가 張선생님 댁에 함께 가자고 했더니, 다음날 張선생님과 함께 산행을 하기로 했다고 해서 그때 인사를 드리기로 했던 거예요. 金容德씨는 지금도 가끔 만나는 사이입니다』
―사건 발생 당일 張俊河 선생이 몸이 아파서 못 간다고 하는 걸 金선생님께서 억지로 모시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러니까 언론들이나 진상조사단이다, 뭐다 하는 사람들이 소설을 쓴다는 거죠. 그 당시 제 위치가 싫다는 선생님을 억지로 모시고 갈 수 있는 위치입니까. 오히려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산에 가신다고 하면 말려야 할 처지죠. 그리고 내가 마치 강제로 버스에 선생님을 태운 것처럼 당시 상황을 보지도 못한 재야인사들 몇몇이 이야기하는데 내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그날 버스 안에서였어요』
―張俊河 선생이 사망한 직후 金선생님의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의문도 있는데요.
『무슨 얘기인지 아는데, 나는 사건 당일 날 포천경찰서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에는 의정부 지청으로 가서 조사를 받았어요. 그때 내가 사는 집이 서울 이문동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문동 집에서 하루 자고 의정부 지청으로 갔다고 하더군요. 당시 언론들이 그렇게 소설들을 썼어요. 소설이 소설을 낳는 식으로 그렇게 의문이 만들어진 겁니다』
―張선생의 시신이 너무 깨끗했다는 것도 항상 제기되는 의문인데요.
金씨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10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사람이 멀쩡하게 사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과학적으로는 10층 아파트에서 떨어지면 죽어야 하잖아요?』
金龍煥씨는 張俊河씨의 의문사를 제기하는 측에서 제시하는 의문들에 대한 답변은 더 이상 하기 싫다고 했다. 月刊朝鮮 1993년 5월호만 보면 다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의문사委에서 지금까지 한 진술만으로도 족하다고 했다. 양해를 구하고 하나만 더 물어보았다.
―張俊河 선생 사망 사건 후 재산은 늘었습니까.
『늘긴요, 줄었죠. 동생들 분가도 시키고 하다 보니까 오히려 줄었죠』
『일부 정치인, 재야인사들은 나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당시 張俊河 선생은 朴正熙 정권을 뒤집어엎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죠.
『그런 이야기는 더러 하셨어요. 도시 게릴라戰이라든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왜 그런 걸 안 하려고들 하나」 하는 말씀을 간혹 하셨죠』
―朴대통령이 張俊河 선생을 죽이고 싶은 라이벌로 생각할 만큼 당시 張선생의 정치적·사회적 위상이 높았다고 보십니까.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朴정권을 반드시 타도해야 한다는 張선생님의 입장은 분명했어요』
―사건 발생 다음날인 8월18일 저녁 張俊河 선생 댁을 찾아가 사고 상황을 전할 때 咸錫憲(함석헌), 桂勳梯(계훈제)씨 등의 재야인사들이 있었죠.
『계셨어요. 그분들한테 저는 많이 서운해요. 그분들은 제가 결백하다는 걸 다 아는 분들이에요. 그래도 끝내 침묵을 지키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분들에게 서운합니다. 물론 그분들뿐만 아니라 張선생님 곁에 있던 분들은 제가 결백하다는 거 다 알 겁니다』
―다 아는데 왜 의문사라는 주장을 한다고 보십니까.
『정보기관하고 나하고 둘을 놓고서 장난을 친다는 거죠. 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니라고 하면 정보기관의 개입과 의문이 없어지는 거고, 정보기관의 부도덕성을 계속 주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계속 혐의자로 남아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나를 희생양으로 삼는 거죠』
―단순히 정보기관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만이라는 겁니까.
『또 있죠. 선생님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주변에는 있죠. 張선생님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면 그 자체로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확보하고 매스컴도 타고 그러는 거니까.
張俊河 선생님을 우상화하면 할수록 자신들에게는 좋은 거죠. 하지만 그것은 선생님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의문사가 아니더라도 張선생님이 살아 생전에 남긴 업적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겁니다. 나는 그런 진정성마저 훼손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안타깝습니다』
『나도 이제부터는 움직일 것』
―그래도 張선생님에 대한 존경에는 변함이 없으시죠.
『그럼요. 선생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그 밑의 사람들이 잘못이죠』
―그동안 인터뷰를 극구 사양한 이유는 뭡니까.
『앞서도 말했지만 張선생님한테 累가 될까 봐서요. 그냥 나는 내 이런 처지를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가슴에 안고 삭이며 남은 生을 마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지는군요.
이제는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공개 청문회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나도 이제는 그동안 웅크리고 있었지만 움직이려고 합니다. 의문사라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을 찾아가서 만나 토론도 하고 그럴 생각입니다』
4시간 여에 걸친 인터뷰가 끝난 후 金龍煥씨는 3년 전 기자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말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 주시니까 어쨌든 속은 후련합니다』● ,,,,,,,,,,,,,,,,,,,,,,,,,,,,,,,,,,,,,,,,,,,,
*2004년 6월28일 연합뉴스
<70년대 유신정권에 저항한 대표적 재야 운동가였으나 의문의 추락사로 숨진 고 장준하 선생 사건에 대해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가 1기에 이어 또 다시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장 선생의 의문사 사건 해결은 여야가 공동으로 추진 중인 3기 의문사위의 몫으로 다시 넘겨지게 됐다.
의문사위는 28일 제31차 위원회 회의를 열어 장 선생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의문사 인정 여부를 논의했으나 위원 7명 가운데 진상규명 불능 4, 인정 3으로 의견이나뉘며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의문사위는 “장준하 선생에 대해 사망 이전 민주화 운동을 한 사실은 인정되나 사망에 위법한 공권력이 직.간접으로 개입했는지 판단하기 어려워 이 같이 결정한다”고 밝혔다.
장 선생 사건에 대해선 이미 1기 의문사위도 민주화운동 관련성은 인정하면서도진상규명 불능이란 결론을 내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