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위태로운 순간 용기와 결단력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전두환 대통령! 그는 구국의 성웅인가? 구국의 성웅일 수도 있다. 아니 구국의 성웅이라야 정확할 것이다. 대한민국 11,12대 대통령 일해 전두환 장군은 정의사회구현과 보국안민을 신념으로 삼았고, 이 신념을 벗어나지 않은 소신의 지도자였다.
11,12대 대통령 전두환 장군의 주요 치적을 꼽는다면 80년 이후 북한의 계속된 도발과 침략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키고 내분을 수습하여 정국을 안정시킨 광정의 공이 크다 할 것이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경제는 연평균 10%대의 성장을 지속하였으며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철저한 사전준비와 함께 성공적으로 개최, 진행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거지와 고아의 나라, 6.25 전쟁의 폐허와 잔해 더미로 인식되던 코리아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벗겨낸 것도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일 것이다. 창업도 중요하고 중흥도 중요하다면, 수성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수성하지 못한다면 창업과 중흥의 공덕은 한꺼번에 물거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의 수성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구국의 성웅이었다. 북한은 끊임없이 적화통일을 위한 도발을 획책했다. 79년 10월 26일 10.26 쿠테타 진압, 12월 12.12 사태 진압, 80년 3월 서울 인민군 검거, 5월 서울역폭력집회, 5.18 광주폭동 사태, 83년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 83년 1차 KAL기 폭파사건, 85년 KAL기 폭파미수 사건, 87년 2차 KAL기 폭파사건, 86년 동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북한은 계속된 적화침탈야욕을 드러냈다. 김정일은 아웅산 묘소 사건과 광주폭동, 비행기 공중폭파사건 등을 통해 전두환 장군을 모해, 암살하려 했다. 김정일은 왜 전두환을 암살하려 했던가!
김정일은 끊임없이 전두환을 암살하려 했다. 83년의 버어마 아웅산 사태는 그것의 극단적인 표출이었다. 전두환 장군에 대한 김정일의 공격과 테러는 왜 자행되었을까? 차기 국가지도자를 알아본 것인가. 북한에 의한 계속된 테러와 공격이 자행되어 왔다. 83년의 버어마 아웅산 사태는 그것의 극단적인 표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혼란의 와중에도 장군은 신속한 용단을 내려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서 구하였다. 그 것이 바로 전두환 장군의 탁월한 업적이자 결단력이라 할 것이다. 역적 김정일의 비열한 테러행위를 찬양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광주폭동의 정확한 발포명령자를 누군가 찾지 못하였지만, 전두환 장군이 확실하다면 그때는 전두환 장군을 구국의 성웅으로 받들어야 할 것이다. 애초에 5월 18일 새벽6시경부터 있지도 않은 계엄군을 들먹이며 선제공격, 병기고를 탈취하고 군경을 학살한 폭도들의 행위에는 정당성이 없으며 정당화되어서도 안된다. 광주는 애초에 민주화와 무슨 상관이 있던가! 실제 계엄군과 공수들이 출현한 것은 5.18 광주폭동이 발생하고도 한참 지난 그날 아침 9시 이후였다. 만약 발포명령자가 전두환 장군이 확실하다면 그때는 구국의 성웅으로 존숭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구국의 성웅이 맞다. 폭도들이 먼저 군경을 학살하고 병기고를 탈취하는 등의 시비를 걸지 않았다면, 전두환 장군 역시 강경한 진압에 찬성하는 측에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폭도들이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북한 인민군과 내통하지 않았다면 전두환 장군이 진압측에 섰을까? 전두환 장군도 인격자인 마당에! 광주폭동의 조짐을 미리 예견한 것일까, 정체불명의 시민군이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북한 인민군과 김대중 추종세력이 사태를 확산시킨 5.18 광주폭동! 광주폭동 발생 직전 5월 17일 김대중을 체포한 것은 사태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했는지도 모른다. 자칭 시민군들은 유언비어로 군경을 학살하고 병기고를 탈취하였으며, 병기고탈취 뒤에도 폭동을 정당화, 미화시키기 위해 수많은 유언비어를 쏟아내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갔다. 혐의점이 없어서 일단 풀어주었으나 김대중은 김대중내란음모의 배후였고, 5.18 광주폭동이 김대중과 김일성, 김정일, 인민군의 합작품이 명백해지자 폭동진압 이후 다시 김대중을 잡아서 심판했다. 5.18 당시 타협을 할수 없다고 말해놓고는, 전두환에게 석방, 사면을 탄원하는 편지를 세 차례나 공개적으로 보냈다. 사면편지는 비공개로 보내도 될 것이 아니던가? 여기서 김대중의 비양심성, 부도덕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탁월한 부도덕성을 기초로 김대중은 87년과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에게 20억+a의 정치자금을 요구하여 거액을 뜯어내기도 했다. 전두환 장군은 당시 김대중에게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광주폭동 직전에만 해도 크고작은 시위들이 존재하였다. 5월 10일에는 서울역 광장 앞에 10만 명의 대학생이 모여서 기물을 파손하고, 행인들을 폭행하고 상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10만 명의 대학생들이 지상 서울역 주변에 운집하고 모인 것이다. 이 사건이 결국 계엄령 전국확대의 원인이 되었다. 계엄령은 박대통령 서거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가, 최규하 대통령 취임 이후, 수도권과 전방으로 축소되었다. 80년대 초에는 이런저런 작은 시위들도 있었다. 작은 시위들은 보통 최규하 불쌍하다, 신현확 물러가라 가 구호였다. 그런데 5.18 광주 폭동 당시에는 전두환 입을 찢어죽여라 등 격렬한 구호들이 난무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전두환을, 언제부터 알았다고 전두환 장군에 대한 극렬한 구호를 내세웠을까. 전두환을 언제 봤다고?
80년 5월 18일 새벽 6시 정체를 모르는 시민군들은 군경을 습격, 병기고를 탈취하고 군경을 사살했다. 계엄군이 구성되기도 전에 계엄군이 나타나 여고생 젖가슴을 도려냈다, 계엄군이 여대생을 강간한다, 계엄군이 학생들을 구타한다, 계엄군이 대검으로 임산부 배를 갈랐다, 계엄군이 시민들 가죽을 벗긴다, 계엄군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 공장을 부순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온다 등 말도 안되는 악성 루머와 유언비어들을 날조하였다. 5월 18일 새벽 6시이면 계엄군은커녕, 계엄군을 구성하기 위한 국무회의와 국보위 조차 열리기 전인데 어디서 어떤 계엄군이 나타나서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말인가. 광주폭동은 이처럼 시작부터 정당성이 결여된 폭동이었을 뿐이다.
폭도들이 병기고를 탈취하고 군경을 사살하여 비상이 발생했다. 5월 17일 새벽0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는데 다시 사태가 터진 것이다. 18일 오전 8시 정부는 허둥지둥 국무회의와 국보위를 구성하고 계엄군 파견을 결정했으며, 31사단과 32사단 병력을 계엄군으로 정하고 계엄군 지휘관은 31사단장 정웅 소장으로 정했다. 그러나 오전 9시에 출발한 계엄군은 점심 12시가 되어서야 광주시내로 진입한다. 오던 중 광주 상무지구에서 보병학교 병력을 만나 서로 네가 광주폭도라며 교전을 벌였던 것이다. 계엄군 파견이 더뎌지자 급기야 오전 10시 3,7,11공수 등 3개의 공수부대를 신속히 광주로 보냈다. 계엄군이 사전에 광주시민들을 학살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는 좌익과 친북세력의 주장은 완벽한 거짓말이다. 사전에 조직되었다면 계엄군과 보병학교 병력은 왜 서로 네가 폭도군이라며 3시간 가까이 공방전을 벌였을까? 광주폭동의 확산과 확대에 제한을 받자, 김대중 추종세력과 인민군은 전두환 집권자설을 유포하며 전두환 찢어죽여라, 전두환 아가리를 찢자 등 듣기 거북한 구호를 붙였다. 목적과 명분이 정당하다면 왜 이런 거짓말을 날조해야 했을까?
5월 21일부터 대검을 사용하게 되었고, 22일부터 발포가 시작되었다. 이때 발포명령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의혹이 존재한다. 당시 전두환 장군이 발포명령자라는 루머도 확산되었는데, 전두환 장군은 발포명령권자는 아니다. 당시 전두환은 계엄사령부 총사령관(이희성 중장)이나 계엄군사령관(정웅 소장)의 상관도 아니며 집권자도 아닌데 광주폭동 진압군에게 발포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 전두환 장군은 지휘관이 아니었다. 전두환 장군은 당시 계엄사령부의 상급부대인 육군본부의 참모부서였던 보안사령부의 장이었다. 결코 발포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전두환 장군이 집권자였다는 주장 역시 터무늬없다. 전두환 육군 소장은 당시 집권자로 보기는 힘들다. 당시 전두환 소장은 중앙정보부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중정부장은 정치적 직책으로도 최규하 대통령, 신현확 국무총리, 서석준 부총리, 주영복 국방부장관에 이은 행정부상으로도 권력서열 4순위였다. 군부 내에서는 대통령, 국무총리, 부총리, 국방부장관, 참모총장, 참모차장에 이은 7순위이다. 전두환 소장을 당시 집권자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전두환은 폭동이 끝나고 80년 8월 22일에야 전역하고, 출마하여 8월 29일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 유치송을 2500여 표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광주폭동이 터지고도 3개월이 지난 뒤에 집권한 전두환을 어떻게 당시 집권자로 볼까? 당시의 집권자라면 대통령 최규하나, 국무총리인 신현확을 집권자로 봐야 될 것이다. 결코 전두환이 집권자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두환 발포명령설 등 유언비어들이 난무하였다. 과연 김대중을 체포, 조사하지 않고 18일 당일 거리를 활보하게 놔두었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1,12대 대통령 전두환 장군은 내치에도 힘을 쏟았다. 정의사회, 보국안민을 구현하기 위해 각종 극성 흉악범죄자들을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정의사회 구현에도 힘을 쏟았고, 범죄에 대한 철저한 단속으로 정의사회 구현과 보국안민의 의지를 드러냈다. 제5공화국 기간에는 각종 극성 흉악범죄들이 적었다. 11,12대 대통령 전두환 장군의 정의사회 구현과 보국안민의 의지는 극성 흉악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응징으로 나타났다. 살인범, 강간 성추행범, 인신매매범, 깡패, 조직폭력배, 패륜아, 음주운전자, 뺑소니 등을 잡아들여 계도 후 사회로 내보냈고, 계도가 불가능한 자들은 삼청교육대로 보내 노동봉사와 인간성 개조를 시켜서 사회로 되돌려보냈다. 그 결과 각종 반인륜적, 비인간적인 범죄는 사라졌고, 국민들은 야밤에 아내와 딸, 누이를 내보내고도 안심하고도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자유주의자였다. 전두환 장군은 11대 대통령 취임후, 80년 9월 1일부로 야간 통행금지령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안심하고 야밤에 통행이 가능하였다. 극성 흉악범죄자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거나 인간성 개조를 시켜서 내보낸 결과 야밤에 아내나 딸, 누이를 내보내고도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범죄단속을 느슨히 한 6공화국 이후, 인권을 빙자한 문민정권들 출범 이후 반사회적 범죄와 각종 폭력사건 등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흉악범죄자의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해괴하고 참혹한 흉악범죄자를 감싸주는 반사회적인 면모도 근래들어 계속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인권은 인간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 인권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에게는 적용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교육을 없애 가정경제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었다. 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의무교육을 확산시키고자 교육 평준화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평준화의 부작용으로 학원과 사학이 유행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평준화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평준화와는 다른 점은 무조건적 평등이 아니라, 실력있는 인재에게는 그만큼 기회를 더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특혜를 주었고, 연수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초 고루 교육의 기회를 주려던 교육평준화를 희망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설과외 등으로 변질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81년부터 불법과외와 학원들을 정리하고 사교육, 고액과외를 단속하였고, 사교육, 과외 없이도 학교 수업만으로 대학에 진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사교육 금지의 혜택을 본 것이, 297세대도 있지만, 386 주사파 후반세대(60년대 후반세대)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총기소지에 대한 규정도 강화하여, 범죄를 사전방지하였다. 83년의 우순경 사건은 광주폭동 이후 최대의 총기난사사건이다. 우순경 사건은 애인에게 버림받은 교통경찰관이 총기를 들고 마을로 들어가 60여명의 마을주민을 학살하고 자신도 자폭한 사건이다. 우순경 사건은 광주폭동 이후 최대의 총기난사사건으로 기록된다. 우순경 사건 이후 2차례의 총기난사 사건이 더 있었다. 이후 총포소지법을 엄하게 제정, 군인과 경찰관의 총기난사와 외부반출사건이 수시로 있었으나 철저하게 단속, 처벌하고 총포류 소지에 대한 기준을 강화하여 범죄율을 낮추었다.
교통사고, 교통범죄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교통사고 범죄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했고, 81년 9월, 교통사고나 음주운전을 한 자는 면허취소에 3년간 면허정지 및 응시를 불허하였다. 1983년에 고속버스 운전수가 음주운전 단속중인 경찰관을 매달고 시속 200km로 달려서 충격을 준 사실이 있었다. 운전수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교통범죄에 대한 단속은 한층 강화되었다. 지금과 같은 허술한 면허관리제도는 교통사고와 음주운전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음주운전자와 뺑소니범에 대한 철저한 단속과, 교통범죄자의 면허취소와 면허취소자 재취득 기간을 3년, 심사과정을 엄격히 하여 음주운전자나 과속, 뺑소니 운전자, 교통사고 범죄자들의 면허 재취득과 교통사고 재범발생률을 사전에 엄격히 차단하였다. 대한민국은 교통사고 세계 1위국,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국이라는 부끄러운 오명을 쓰는 현시점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철저한 교통사고 범죄자 단속의지는 본받을 만 하다.
86 아시안게임을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진행하였고, 88 서울올림픽 역시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86 아시안게임도 큰 축제이지만 올림픽은 세계적인 축제이다. 올림픽은 비단 국가의 축제이지만 세계적인 축제이기도 하다. 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 진행하였던 것이다. 박정희 전임 대통령이 어렵게 유치한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 진행하여 국위를 선양시킨 것도 전두환 장군의 주요 치적이다. 아시안 게임과 월드컵에 대한 사전준비는 그의 주요 치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국위를 선양시킨 것 역시 전두환 장군의 업적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공중도덕법과 깨끗한 거리 만들기 운동을 추진했다. 공중도덕법을 제정하여 거리에 침을 뱉고, 껌을 뱉는일을 근절시키고 노상방뇨, 가래침 뱉기, 쓰레기 투척 등을 엄금하고, 그에 대한 범칙금을 부과하여 거리를 깨끗한 거리로 만들고, 공중도덕 질서를 지킬 것을 적극 권장, 장려하였다. 그 결과 무질서와 쓰레기로 넘쳐나던 서울의 거리는 하루아침에 깨끗한 거리로 변신했다. 깨끗한 거리는 86 아시안게임이나 88 서울올림픽 당시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세계시민들의 경탄과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대한민국이 어디에 붙은 나라인가도 몰랐던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홍보를 확실히 하였고, 그나마 대한민국의 존재를 알더라도 6.25 동란과 거지와 고아로 들끓던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것 역시 전두환 대통령 최대의 치적이라 하지 않을수 없겠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는 심하게 폄하, 저평가되어 왔다. 지도자에게는 공과가 상존하기 마련이나 전두환 장군과 같이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만 심하게 부각된 비극의 지도자, 영욕과 비운의 정객은 드물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다른 치적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는 우리 모두에게 연구 과제로 남는다. 전두환 장군에 대한 베일을 벗고, 5.18측과 친북좌경세력이 덮어씌운 오명을 벗겨야 될 때다. 광주폭동 하나 때문에 평판이 부정적이다. 그러나 폭도들은 5월 18일 새벽부터 군부대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병기고를 탈취했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다음날 이런 폭동사태를 일으킨 것은, 충분히 정부와 관계기관을 자극하고도 남을 일 아니던가. 국가공권력에 선제 습격을 하고, 병기고를 탈취하고 군경을 학살한 뒤 온갖 유언비어를 날조해온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가 없는 것이다. 부당한 시비에는 당연히 맞서야 된다. 5.18은 시민군 폭도들이 국가공권력에 먼저 도전하였다. 자칭 시민군이 5월 18일 새벽부터 예비군 부대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경을 학살한뒤 병기고를 약탈하였던 것이다. 군경을 학살하고 총포류가 탈취당하였는데, 어떻게 비상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시킨 지 불과 하루만에 벌어진 참극인데 말이다. 5월 10일 대학생 10만명의 서울역 난동으로, 17일 0시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상태이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상태에서 폭도들의 군부대, 경찰서 습격과 병기고 탈취는 미친 짓으로 밖에는 해석이 불가능할 것이다. 폭도들이 먼저 5월 18일 새벽부터 예비군 부대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경을 학살한뒤 병기고를 약탈하는 등 국가공권력을 향해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면 전두환 대통령인들 강경대응에 찬성하였을까? 전두환 장군도 인격자인데...
전두환 대통령은 일각에서 주장하듯, 악인이나 역적이 아니다. 시대의 불행을 그가 스스로 감내하였을 뿐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테니 다른사람들에게 정치보복을 하지 말라던, 88년의 그의 성명서 역시 그런 그의 비상한 각오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사물에게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양면이 공존함에도 11,12대 대통령 전두환 장군에 대한 이미지는 악의와 부정과 오명으로 첨철되어 있다. 그러나 동전에 양면이 존재하듯, 정치지도자에게도 부정적인 면이 있다면 긍정적인 업적과 치적도 공존하는 것이다. 한편의 편향된 시각만을 고집할 때는 지났다고 본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용가치가 있으니까 띄우고, 전두환 대통령은 부정적이라서 버리는 것은 지극히 야비하고 얄팍한 잔머리일 뿐이다. 이제는 전두환 대통령을 바로 보자! 전두환 대통령을 바로 볼 때 역사도 바로 보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