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花[목화]를 中國[중국]의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金世煥
釜山大學校 敎授 / 本聯合會 指導委員
圃隱(鄭夢周 ; 1337~1392) 선생께서 9세 때 친척집 여자 하인이 찾아 와서 자신의 남편에게 보내는 글의 대필을 부탁했다. 선생은 아주 간명한 글을 써 주었다.
雲聚散, 月盈虧, 妾心不移.
구름은 모이면 흩어지고, 달은 차면 기웁니다.
그러나 첩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마음에 비해 글이 너무 짧음을 아쉬워했다. 선생은 다시 봉투를 열고 글을 좀 늘렸다.
緘了却開添一語, 世間多病是相思.
봉했다 다시 열어 한 마디 덧붙임은
세간에 많은 병이 相思인가 합니다.
이 글은 당시의 서울인 개성 일대에서 相思曲으로 널리 유행했다 한다. 선생은 9세의 나이에 믿을 수 없는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표현으로 한 아낙네의 가슴을 부족함 없이 전해주었다. 아주 일찍부터 문자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여 자유롭게 구사하는 선생의 능력은 참으로 경탄할 만하다.
당시의 이 문자는 우리가 만든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만 세상(다른 나라)의 문자를 取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圃隱 선생 생존 때에 우리가 남으로부터 취한 것이 하나 더 있다. 日新(文益漸 ; 1329~1398) 선생께서 당시 우리 나라에 없던 木花의 씨앗을 中國에서 가져오신 것이다. 그 방법이 당시 중국의 법에는 적절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빌리거나 훔쳐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 세 알의 씨앗으로 이 땅에 목화를 전파하여 옷을 지어 입게 한 선생의 勞苦와 功勞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목화는 우리에게 가장 쾌적한 옷감 소재가 되었다. 그 기여도는 가히 중국문자와 견줄 만하다.
우리에게 없던 목화를 가져다 재배한 것처럼 우리는 오래 전부터 中國의 文字를 가져다 사용해 왔다. 남이 먼저 만들어놓은 文字를 갖다 사용한 것은 지극히 현명한 일이었다. 그것의 원산지를 따질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文字는 목화와 달라 쉽게 우리에게 토착화시킬 수가 없었다. 圃隱 선생 때에는 이미 천여 년이 넘게 中國의 文字를 사용해 왔지만 우리는 매우 큰 불편을 감수하고 있었다. 즉 당시 이 문자는 표준화된 讀音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口語에는 언제나 혼란이 따라붙는 문자였다.
가령 우리는 지금도 ‘다방(茶房)’에 가서 ‘차(茶)를 마신다고 한다. 왜 같은 글자인데 ‘다’와 ‘차’라는 서로 다른 音으로 읽는가?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를 다르게 읽어야 될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漢字音의 전래 시기 또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게 쓰인 것이 지금까지 계속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하지만 이미 너무 오래 쓰였기 때문에 바로 잡을 수가 없다. 당시 中國 文字의 發音은 그것을 가져온 사람에 따라 발음이 千差萬別로 다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것은 중국 자체의 발음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中國의 文字는 象形字 즉 表音文字가 아니고 表意文字이기 때문에 글자에 발음체계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가령 한글은 처음부터 명확한 발음체계의 틀 속에서 만들어진 音素文字이기 때문에 한글의 발음이 지역에 따라 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한자는 표의문자의 속성에 따라 그 뜻은 어디에서나 통일되어 사용하지만 발음은 그렇지 않다. 論語를 읽는다면 지방마다 모두 다른 독음이었다. 일상언어에서도 北京사람은 廣東사람과는 단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다. 이렇듯 글로는 통하지만 말로는 통하지 않는 언어는 수천 년 동안 중국의 모든 일에 장애요인이 되었다.
中國文字의 발음과 관련된 단서는 唐나라 前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韻書가 있을 뿐인데, 이것으로는 이미 달라진 각 지역의 발음을 통일시킬 수가 없었다. 즉 ‘東’의 발음은 ‘德紅切’이라 표시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를 따라 사용하였으니, ‘德’에서 초성을 취하고 ‘紅’에서 중성과 종성을 취하여 ‘동’이라 읽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德’과 ‘紅’의 발음이 이미 다른 지역에서는 지역마다 또 다른 발음체계를 만들뿐이다.
이러한 발음이 통일된 것은 현대에 와서이다. 萬里長征을 통해 온갖 불편을 겪은 毛澤東은 바로 표준음을 정하라는 강력한 주문을 했다. 그러나 字音을 통일시키려면 우선 글자마다 標準音을 나타낼 수 있는 表音符號가 따로 필요했다. 고대 韻書의 방식으로는 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漢語拼音方案’이라는 것을 창안하였다. 이는 漢字에 注音, 즉 音標를 만들어 발음 표기를 하는 것이다. 1918년에 교육부는 聲母 24개와 韻母 16개로 된 注音字母를 반포 시행했다가 후에 漢語拼音方案으로 대체하였다. 현재는 中國에서는 漢語拼音方案을 쓰고 있고, 臺灣에서는 注音符號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표기 방식만 다를 뿐으로 대만도 발음은 北京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음으로 통일되어 있다. 한어병음방안은 로마자로 漢語의 발음을 표기하는 방식이며, 1985년 國家語言文字工作委員會에서 공포한 <普通話異讀詞審音表>가 가장 최근의 표준이 되었다.
이제는 中國뿐만 아니라 세계의 中國人 모두가 의사소통에 거의 지장이 없는 표준음으로 통일된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자의 완벽한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다만 漢語拼音方案은 英語의 알파벳을 차용하고 있다. 중국 문자의 역사가 최소 수천 년이 넘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존심에 상처받을 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했는가? 中國의 文字를 그대로 가져다 쓴 우리는 중국보다 더 심한 불편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과는 달랐다. 중국이 현대에 와서 가능했던 것을 우리는 오백여 년 전에 이루었다. 즉 世宗大王의 訓民正音 창제는 곧 모든 중국 문자에 표준화된 독음을 부여하는 것이었으며, 이로부터 우리는 전국이 지금까지 하나의 통일된 발음체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世宗大王은 당시 사용하던 中國의 文字를 우리의 문자로 토착화시키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제까지는 우리의 말에 들쑥날쑥한 중국의 발음을 끼워 사용하는 것이어서 매우 혼란스러운 언어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中國文字에 대해 우리의 표준화된 독음을 정하여 口語에서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다. 학자들은 수시로 중국에 다니면서 韻書를 연구하여 정확한 音價를 밝혀냈다. 이제는 이 음가를 표기할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렇게 訓民正音이 탄생한 것이다.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諺文 28字를 지었는데, 글자는 古篆을 모방하였다. 初聲․中聲․終聲으로 나뉘었으며 이를 합하여 글자가 되었다. 무릇 文字와 우리 나라의 日常語를 모두 표기할 수 있으니, 글자는 비록 간단하지만 轉換의 쓰임이 무궁하였다. 이것을 訓民正音이라 하시었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世宗實錄』 25년(1443년) 12월 30일의 기록이다. 『訓民正音』 頒布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正史의 기록이다. 매우 간략한 기록이지만 訓民正音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장점에 대해 단 몇 마디로 요약하였다.
訓民正音의 기능(창제의 목적)을 여기에서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즉 하나는 ‘文字’를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나라의 일상어(俚語)’를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文字’는 곧 중국 문자를 말한다. 訓民正音은 ‘諺文’으로 구별하여 지칭하였다. 여기에서 ‘諺文’은 비하의 명칭이 아니다. 단지 통속적인 글 즉 입말의 글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아무리 史官의 史草를 임금이 볼 수 없다 해도 대왕께서 친히 창제하신 訓民正音을 비하의 뜻으로 지칭할리는 없는 것이다. 諺文은 중국문자와 우리말을 모두 표기할 수 있는 기능을 한다는 의미이다.
文字를 표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까지의 문제는 文字(중국문자)의 讀音을 표기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讀音이 지역과 사람에 따라 다르니 그 혼란이 막심하다는 것이다. 이제 訓民正音으로 標準化된 讀音을 표기하면 곧 文字는 정해진 讀音으로 읽히게 될 것이다. 중앙에서 표준화 하면 지방의 어디에서도 같은 讀音으로 읽힌다. 訓民正音은 당시의 문자에 대해 正音 표기 기능을 함으로써 1000년에 걸친 文字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조금 더 敷衍한다면 이렇다.
訓民正音은 單音節語인 문자의 발음을 우리말의 多音節語 체계로 변환시키지 않고 單音절로 변환시키도록 만들었다. 예로 中國語의 ‘來’를 우리말로 그대로 옳기면 ‘라이’가 되어 두 음절로 표기되어야 한다. 만일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말 속에 中國語를 넣어 말하는 결과가 되어 우리의 말은 그 기능이 마비될 만큼 混亂스러울 것이다. 우선 中國語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도대체 우리의 말 사이에 外國語를 끼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訓民正音의 初聲․中聲․終聲으로 된 音韻構造는 중국어의 어떤 음운체계도 간결하고도 정확하게 한글로 轉寫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즉 예를 들면 ‘라이(來)를 ’래‘로 표기하여 音韻을 간화시킨 것이다.
뜻글자인 中國文字는 無窮無盡한 造語力을 갖고 있다. 訓民正音은 또한 ‘轉換無窮’ 즉 무한한 표기력을 갖고 있으니 이 두 글자가 함께 하면 天上天下에 이보다 더 완벽한 文字는 없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중국보다 훨씬 일찌부터 正確하고도 풍요한 言語生活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취가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吏讀나 鄕札 또는 口訣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참으로 오랜 세월에 걸친 至難한 노력 끝에 이러한 결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訓民正音이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中國文字의 표준화된 음을 訓民正音으로 표기하여 이를 전국에 반포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東國正韻』을 간행하였다. 『世宗實錄』 29년(1447) 9월 29일에 『東國正韻』이 완성되어 이를 刊行하라 命하시었다는 기록이 있다.
東國은 우리나라를 지칭한 것이며, 正韻은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訓民正音에서의 正音과 마찬가지로 바른 音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中國의 音韻과 구별되는 우리나라의 音韻을 뜻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中國의 音韻(發音)을 차용하였지만 이것을 우리의 언어에 알맞도록 재정비하여 『東國正韻』이라 한 것이다. 즉 당시 中國에서의 聲母는 36개였으며, 韻母는 107개의 갈래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를 『東國正韻』에서는 聲母를 23개로 하고 韻母를 91개의 갈래로 고쳐 이를 訓民正音으로 표기하였다.
이어서 간행한 것은 『洪武正韻譯訓』이다. 『洪武正韻』은 明나라의 韻書였다. 世宗大王께서는 申叔舟와 成三問 등에게 명을 내려 『洪武正韻』에 訓民正音으로 중국어의 譯音을 표기하도록 했다. 이는 訓民正音의 표기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訓民正音은 크게 두 가지의 기능을 목적으로 창제한 것이다. 하나는 중국문자에 대한 우리의 正音을 표기하는 것이다. 이는 『東國正韻』으로 완성을 하였다. 아울러 中國音의 표기도 『洪武正韻譯訓』을 만들어 標準音을 나타냈다. 이것은 中國音을 쉽게 표기하여 중국어를 학습하는데 좋은 방안이 되었다. 다른 또 하나의 기능은 訓民正音을 자유롭게 文字와 병행하여 사용함으로써 言文一致의 言語生活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순전히 訓民正音만을 사용하여 글을 쓸 수도 있다. 이러한 기능은 곧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龍飛御天歌」는 그 실험의 첫 작품이었다. 世宗 27(1445)년 4월 5일 권제․鄭麟趾․安止 등이 「龍飛御天歌」 10권을 올렸다. 125章으로 이루어진 장편의 敍事 詩歌였다. 내용은 先代의 王들과 그 선조들을 칭송하면서 朝鮮의 開國을 찬양한 것이다. 125장 중에는 순 訓民正音만으로 지은 것도 있고 漢字와 병행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본다.
第一章
海東 六龍이 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시니
(海東의 여섯 龍이 날아 하시는 일마다 天福이 있으니 옛 성인과 일치하심이라)
天命의 도움으로 朝鮮의 王業을 일으켰음을 노래하였다. 訓民正音과 문자의 조화를 통해 言文一致를 실현하였다. 우리의 역사에서 中國 文字를 완벽한 우리의 문자로 사용한 첫 작품의 첫 구절이다. 한글 專用을 외치는 한글학자들은 이 의미를 잘 모른다.
第二章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
ㅣ미 기픈 무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래 가니
순 訓民正音만으로 적었다. 당시의 순수 口語를 訓民正音만으로 표기한 것이다. 당시 최고의 학자들이 訓民正音으로 우리 구어의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살려 놓은 것이다. 문자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訓民正音만으로도 文字生活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口語는 단지 소리로 전해져 온 말이기 때문에 의미상의 혼란이 없을 수 없다. 「龍飛御天歌」는 매 章마다 漢詩를 붙여 이해를 도왔다.
中國의 主音符號나 漢語拼音方案은 500여 년이나 늦게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可讀性은 訓民正音에 크게 뒤진다. 그 기능은 단지 발음표기부호에 그칠 뿐이다. 訓民正音은 그 자체로도 문자의 기능을 한다. 그러나 모든 용어를 한글로 쓰겠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발상이다. 한글은 表音의 체계인 것이다.
木花의 원산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文字에 原産地 표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쓰는 것이다. 우리는 中國의 文字를 우리의 文字로 土着化하는 데에 약 1,0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로부터 우리의 문자로 사용한 지가 다시 1,000년을 바라본다. 학자입네 하면서 世宗大王의 뜻을 왜곡시키는 몰지각한 인사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온몸에 병환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오직 우리나라의 편리한 文字生活을 위하여 한 평생을 바치신 世宗大王의 숭고한 뜻을 훼손시키지 말아야 한다.
大王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는 세계에서 造語力과 表記力이 가장 우수한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