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자를 잃지 말자
― 착각해서 공동유산을 포기하는 어리석음 ―
安秀吉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 데, 어떠한 생각이건 한 번 ‘말’로 파악이 돼서 大腦를 거치면 그 생각은 특정 낱말로 기억 속에 정착이 돼서 되풀이 사람의 생각 속에 떠오를 터이니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게 되어 과연 “말이 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화에 따라서는 사람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기피하기도하고, 심지어는 ‘말’에도 어떤 마력이 있다고 해서 ‘말하는 것’을 줄이는 사례들도 있다.
뭐 꼭 그래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도 한 단어가 ‘나타내는 뜻’을 중요시하고, 그 名目과 字義에 우선 충실하게 매달리는 편이다. 예를 들어 ‘교육감’이나 ‘통신감’ 등 ‘監’자가 달린 사람들의 부정부패를 그 직분의 ‘이름’으로 해서 더 미워한다. ‘監’이란 글자는 ‘보다, 살피다’ 등의 뜻이 있는 한편, ‘獄 : prison’이라는 뜻도 있고, 근본이 ‘거울삼는, 본보기’라는 뜻이 강하니 그 글자로 봐서 귀감이 되어야 할 當該者가 ‘不正’을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말의 뜻은 지켜져야 한다지만…
이와같이 원래 ‘이름’이란 그 본 뜻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 뜻을 잘 못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字義나 명분에 고집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철역마다 있는 승강기 내부에 게시된 “老弱者를 위한 시설”이란 말 때문에 할머니는 타고 어린, 그러나 튼튼한 손자는 못 탈 것 같지만 “노약”의 원래의 뜻은 “노소”, 즉 “늙거나 어리다”라는 것이기 때문에 년소자도 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경우 ‘弱’이라는 글자를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
같은 모양으로해서 현 시점 한국 사람들에게 ‘漢’이란 글자는 잘못 해석되고 있어서 그로 인한 악영향이 무척 크다. 많은 사람들이 ‘漢’이란 글자를 대륙에 있었던 ‘漢’나라를 뜻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어서 이 ‘漢’이란 글자가 달려 있으니까 ‘漢字’는 중국의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漢’이라는 글자는 그 옛날 중국에 있었던 ‘漢나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서 ‘漢’이란 글자의 오른 편 字義 설명부분, 즉 ‘풀이’부분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것은 劉邦이 시작(B.C. 202)한 ‘漢’나라에 관련되는 것이지만 나오는 순서로 봐서 이 글자의 가장 중요한 뜻은 ① ‘한강’이란 가람의 고유명사이고, ② 둘째로는 ‘은하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실은 晉나라, 韓나라 등 東夷族이 대륙의 中原땅을 지배하고 있던 戰國시대에(당시는 물론 마지막 제국인 淸나라 때까지 대륙은 역사를 통해 대부분 東夷系가 지배) 양자강 지류에 있던 ‘韓’나라가 자기 조상을 하늘과 연결시켰던 天孫族의 입장에서 ‘은하수’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나라의 ‘主된 가람’인 상기 지류의 이름을 ‘漢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상고 때 대륙에서는 ‘Han/Khan’, 즉 ‘汗/干’을 畏敬
上古史學會 李重宰 회장의 연구에 의하면 漢나라는 권력을 잡은 劉邦으로부터 7대까지는 ‘漢’이란 당시 가장 ‘우러러보는’ 이름을 못 쓰고 있다가 제 8대에 가서야 “漢나라”라는 國號를 썼고, 그 이전은 ‘馬韓’이었다고 한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의 문제는 “‘韓’은 우리 나라인 반면 ‘漢’은 中國이라”는 잘 못된 생각이 지금 한국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漢字는 漢나라의 글자일 터이니까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생각이다. 그러나 ‘漢’이란 글자는 ‘中國’이라는 뜻으로 독점될 수가 없다.
仁濟大學校 碩座敎授인 淸凡 陳泰夏 박사가 밝힌바 “漢字는 東夷族이 창제한 것”이라는 연구가 中國의 공적 신문 『人民日報』에 실린 것은 1998년이었다. 『人民日報』는 발행부수는 막대하나 페이지 수는 8바닥 정도 밖에 안 돼서, 중요한 기사만을 골라 싣는 中國정부의 공식간행물이고 보면, 거기에서 이 기사를 정식으로 다뤘다는 것은 그들이 殷나라 이전부터 漢字는, 가장 역사가 긴 우리 東夷族이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東夷는 뿌리이다”
우선 우리 민족이 동방 모든 민족의 ‘뿌리’여서 정신문명의 역사도 가장 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後漢書』에서는 “東夷 柢也”라하여 우리 東夷族이 아시아 여러 족속들의 뿌리임을 이야기하고 있고, 러시아 말로 高麗族을 ‘카레이스끼’라고 부르는 데 ‘카라숙’ 문화가 알타이에서 발달해서 그 단어 자체 뿌리(카렌니)와 그루터기(카래쇽)와 무관하지 않으니 『後漢書』의 “東夷 柢也”라는 구절과 같은 내용이어서 그 옛날 東西로 20,000리, 그리고 남북으로 50,000리(당시 1리는 360步로 100미-터 정도)에 뻗쳐 있었다는 단군 땅에서는 모두가 “東夷族이 이 땅의 뿌리였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자타가 공인했던바 ‘뿌리’인 東夷族은 人智가 먼저 발달 했으니 漢字(東方文字: 또는 一晴 成世永 呼稱 日月國(배달)古文, 또는 尖字), 다시 말해 동방 象形文字의 사용도 여타 지역보다는 빨랐다. 즉 배달古文인 尖字로 출발해서 ‘漢’시대와 ‘唐’시대에 篆書와 楷書가 만들어지면서 오늘날의 漢字가 된 것으로, 말하자면 始祖인 ‘尖字, 또는 東方文字’가 이들로 해서 가려져 버린 것이다. (一晴 私稿 III, p36)
읽지도 않고 大王의 의도를 왜곡하지 말아야
‘訓民正音’의 경우 그 원문(漢字)을 몇 번 읽으면 “專用하라”는 뜻은 전혀 아니었음이 쉽게 드러나는 데, 이를 中國으로부터의 ‘문자 독립’, 그리고 ‘漢字배척’으로 과잉 해석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일제강점 이후의 한국의 제반 사정, 특히 光復 이후의 정치적 상황에 무관치 않을 것이다.
특히 작금에 들어서서 일부 ‘옛 것 배척, 및 잘살았던 계급비난’ 풍조를 이용하고 싶은 계층이 사람들의 ‘漢나라 것이니까 남의 것’이라는 착각을 이용하고, “改革” 등 느낌 좋은 단어를 앞세워 과거와의 단절을 꾀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革新’을 내걸은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世代間 단절을 강행해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訓民正音 제정이 된 후 조선조에서 그리고 현대의 초엽까지도 國事나 정신문화활동 등 대부분의 중요문안 들은 漢字/漢文으로 작성돼 왔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원래 ‘Royal court’를 뜻하는 ‘朝廷’이 ‘朝鮮의 王廷’에서 유래됐던 것이고, 무척 복잡할 수 있는 ‘王의 行政업무를, 그리고 공부하고 道를 닦는 사람들의 思惟활동’을 漢字/漢文이란 강력한 무기가 긴 세월을 꾸준히 도와왔던 것이다.
즉 원래 ‘漢字/漢文’이라는 것이 당시 생업에 급급해서 글을 가까이 못 했을 대륙 백성들을 위한 것이 될 수는 없었고, 朝廷과 朝臣 들이 일상 활용하고 있었던 동방 여러 나라의 王政文化였던 것이다.
이러한 緣由를 생각하면 漢字를 위시해서 여러 상형문자 들이 “東夷 柢也”라고 불리는 바 東夷族의 여러 朝廷에서 많이 쓰였던 사정에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朝廷의 고위간부’의 수는 전체 백성의 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中國의 인구의 대부분이 글자를 몰랐을 100년, 200년 전 상황을 감안해서라도 漢字를 中國의 독점물로 볼 수가 없고, 오히려 漢字圈의 모든 나라 상류계급의 공유문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균관은 물론 四學, 鄕校, 書院, 그리고 科擧준비를 위해서라도 朝鮮朝시대 전국 방방곡곡에 깔려 있던 書堂의 수, 그리고 日本 江戶時代의 寺小屋의 수에 비견할만한 방대한 교육조직이란 대륙, 나아가서는 全世界的으로도 없었던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이 당시 세계에 유례가 없는 조선과 일본의 規模 큰 교육투자였던 것이다.(일찍이 고구려 17대 [小獸林王(?~384)이 大學 設立을 敎示:AD271)
이제 과학기술시대를 맞이해서 新制 과학기술용 단어들을 일본이 먼저 나서서 대량 제정하고, 中國이 이들 新語를 즐겨 활용하고 있는 사정으로 봐서도 ‘漢나라 것이니까 남의 것’이라는 單純論理로, 자랑스런 우리의 왕정문화인 漢字/漢文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漢字활용으로 글자요소個數를 늘려 국어의 정보能力을 키워야...
申叔舟가 王命을 받아 集賢殿 사람들과 상의하고 중요부분은 “主上殿下”의 “宸斷”을 받아가면서 ‘4聲 91韻 23母’를 확정한 ‘東國正韻’의 서문/序文을 읽어봐도 絶對 ‘남의 글에 관한’연구라는 입장이 아니고, 그 序文에서
“‘同人, 同方’이라도 地勢에따라 ‘風氣’가 다르고 호흡이 달라 東南은 齒唇을 그리고 西北은 頰喉를 많이 쓴다”
는 것을 그는 지적하면서 ‘東方’音이 中國호흡과 달라서 ‘華音’과는 ‘같지 않다’(대등한 입장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우리가 잘못 배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언어가 그들의 音韻과 상이한 그 차이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고 ‘東音’과 ‘華音’으로 대등하게 竝立시키고 있는 데 이 대등한 입장을 버리려 하는 것은 8·15 광복 이후의 정치상황으로 해서인 것이다.
역시 왕명을 받아 만든 丁若鏞(1762~1836)의 『御定奎章全韻』에서도 “加之諺註”해 가면서 “分析之皆依璜正音”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諺文’으로 註를 달아 정확성을 끌어올리면서 ‘華音’과 ‘東音’을 對等하게 ‘正音’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성들의 말(俚語 : colloquial) 표기문제에 관하여 사람들이 ‘諺文’이라고 하면 貶下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소한 세종대왕 시대 여러 典籍에서는 ‘諺文’을 천시하는 느낌은 전혀 없고 ‘諺文’과 ‘漢文’을 대등하게 우리의 語文으로 다뤘다.
仁祖의 三田渡 降伏 件(1636년)이후 거의 淸國의 隸屬國이 되어 있던 당시의 狀況 下에서도, 이 『御定奎章全韻』 서문에서 보듯이 당당히 ‘正音’행세를 했던 우리의 漢字이다. 오늘날에 와서 (‘漢字’는 ‘漢나라의 글자, 따라서 남의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漢字 漢文을 中國의 것으로 獻納하려 한다면, 그것은 조상이 우리를 위해서 수호한 精神的 文化的 영토를 후손들의 착각으로 해서 포기하고 넘겨주는 일이 될 것이다.
즉 후손들의 錯覺으로 공동소유지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東北工程’ 이 지난 역사터전에 대한 무리스런 침공행위라면, 작금의 한국인들의 ‘漢字 밀어내기’는 문화영역으로부터의 자진후퇴에 해당되는 愚行인 것으로 이러한 용인될 수 없는 일이 후손의 ‘勉學게으름’과 ‘漢’이라는 글자의 ‘字義해석 잘못’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 나라 모든 분야가 전폭적인 발달을 하고 있어서, 영어알파벳을 섞건, 漢字혼용을 하건 아무튼 우리의 언어가 강력하고 정확한 도구로 도약해야 할 시기에 ‘漢字’라는 ‘등뼈 및 寸鐵’문화의 영토를 포기하고 자진 후퇴하는 꼴이지만 情報理論은 Alphabet, 또는 漢字 等 使用文字 記號數가 많을수록 그 언어의 정보능력(entropy)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동북아 漢字圈에서 ‘衣食住, 또는 사랑, 미움, 싸움 등 太古 때부터 변함이 없는 생활언어’ 범위를 넘어선 모든 知的활동에서 漢字 및 漢字系 단어를 뺄 수가 없다.
우리 나라 6~70넌 전인 8․15 광복기만해도 정부수립과 憲法改正 등 중요한 일을 맡아왔던 어른들과 식자들은 서신과 서류 등 웬만한 일은 漢文(中國의 白話, 또는 지금의 中國語와 다른)으로 쓸 줄 알았던 것인데, 이제 ‘通念의 無知’가 그러한 강력한 언어를 남의 것으로 믿게 하고 있는 것이다.
元나라가 처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體力으로부터 武力에 이르기까지 월등히 强했던 그들은 스키타이 이래 유라시아 大陸의 맹주였던 무장 유목민 국가의 입장에서 우리 나라 백성들을 ‘땅에 붙어 곡식 길러먹고 命을 잇고 있는 짐승’의 일종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네들에게 생사여탈권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어서, 그들의 행동은 우리 눈으로는 심히 야만된 것이었다.
그러나 칭기스汗, 쿠빌라이汗 軍隊가 유럽 땅에까지 판도를 넓혀가고, 따라서 그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行政기구와 節次가 복잡해져서 (우리 東夷에 가까운 ‘西戎’인) Uighur族 書記들의 知的 文化的 능력의 덕으로 자기네들의 戰果를 기록하고, 기타 ‘행정’의 능력을 갖추어 가게 됐던 것은 여러 뜻에 있어서 大元帝國의 ‘왕정문화’에의 開眼 절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文化開眼이란 ‘大帝國에 걸맞는 行政制度 확립’이라는 불가피한 일을 인정하게 된 것으로 지금 시점에서 그들이 法典 ‘至正條格’의 마지막 한 권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 나라 뿐이라는 것이 들어 나고 있다. 그 法典은 우리 나라에서 고려조, 그 다음 조선조에까지 그 법의 根本精神에 남아 있었다고 하니 우리 고려조 선비들의 영향을 보게 되는 것이다. 元나라의 日本침공도 적극 나서서 했던 우리 조상들이고 보면 元나라가 멸망하고 明나라가 또 지나간 그 다음의 朝鮮朝에서까지 그 법전의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면 至正條格의 제정을 우리 나라 선비들이 했을 가능성은 큰 것이다.
大元帝國은 高麗 學者들의 학문의 가치를 認定해서 그 일을 맡겼던 것이라면 이는 역시 高麗선비 들의 漢文(中國의 白話, 또는 中國語와 다른)을 통한 行政能力으로 해서인 것이다. 이와 같이 큰 일을 위해서는 日常用보다 더 강력한 언어가 필요했다. (18세기까지도 영어가 충분히 강력하지 못해 Isaac Newton이 그의 역작 ‘Principia’를 母國語인 영어로 쓰지 못하고, 더 강력한 언어인 라틴어로 썼던 사실을 참고할 것)
중국은 백성 口語를 기록하는데 漢字를 썼다
文盲者가 10억명을 넘나들고 (글자, 즉 漢字와는 祖上대대 관련이 없었던) 지난날의 中國의 語文이 역사전체를 통해 漢字문화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 언어에는 ‘白話’로 나타나는 바 ‘非漢字’요소가 많아, 글자 모르는 10억言衆이 생활을 영위하며 쓰는 口語의 도도한 흐름으로 계속 変質해 가는 것을 漢字로 기록을 해가면서 그 변화를 다소 견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의 口話인 중국어와 王政의 行政語인 漢文과의 괴리는 점점 심해서 결국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이, 漢字를 잘 해독하는 사람에게도 추리하기에는 힘든 언어가 돼버린 것이다.
즉 中國語를 위해서 ‘漢字에 의한 口語표기’란 그 옛날 우리 나라에서도 시도했던 薛聰의 ‘이두’와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경우는 다시 왕정문화인 漢文으로 돌아온 것에 반해서, 그들은 음을 따 붙이(借音)되 가능하면 뜻이 가까운 漢字를 골라 할당하는 노력을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TV를 통한 전체 言衆의 교육이 가능해져서 민중의 口語가 따로 놀 일은 없어 보이는 대도 中國이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즉 그 옛날 漢字가 口話의 변질속도를 다소 견제하기는 했으나 그 口話(白話위주)는 본질에 있어서 漢字와 ‘찰떡궁합’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감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漢字로 借音해서 얻은 中國地名이 뜻에 있어서 무리한 경우가 많고 그다지 聖스럽고 아름다운 것이 못되고 ‘漢字宗主國(?)’으로서의 有利点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에 (中國古今地名大辭典 참조)비해서, 新羅 이후에 역점을 들여 飜案, 또는 借音해서 쓴 한국의 地名表記가 오히려 제대로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신령스런 일, 그리고 성스럽고 하늘과 연관시킨 地名은 우리가 월등히 많다.
例를 들어 한국 땅에 ‘天安’을 爲始해서 ‘鎭安, 咸安, 朱安, 泰安, 廣安’ 등 ‘安’字 돌림이 많은 것도 백성의 안녕을 최대관심사로 여겼던 우리 왕조들의 통치이념을 감안할 때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우리 지명은 漢字의 뜻이 뚜렷
새벽 장독대에 井華水 떠 놓고 七星(辰)님께 비는 경우도 元來 우리 나라 조상이 銀河水(漢水)를 섬기는 데에서 생긴 것으로 그 은하수를 나타내는 ‘漢’자는 우리 민족에 優先權이 있는 것이다. 漢字의 始原인 東夷族의 東方文字(또는 一晴 成世永선생의 ‘배달 尖字’)로 漢字를 시작했을 때의 ‘漢’이라는 글자의 뜻은 ‘銀河水와 같은 큰 물’이었기 때문에 ‘韓나라’가 지금의 한반도로 옮겨왔을 때에도 그 중앙에 있는 큰 가람을 쉽게 ‘漢水’라 불렀고 그 땅을 ‘漢陽’, 그리고 漢水 남북의 一部 朝鮮 땅을 각각 ‘北漢’과 ‘南漢’으로 호칭했던 것이다.(例, 正宗 朝 紀錄, ‘南漢志’ 南漢守禦使 徐命膺)
따라서 한국의 代表 가람의 이름은 ‘漢江’이고, 그 이남 땅은 ‘南漢’이며 漢江 以北 땅은 마땅히 ‘北漢’이고 漢江을 내려다보는 산들이 北漢山과 南漢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옛 이름이 ‘아리수’인 한국의 중앙을 흐르는 ‘漢江’이라는 固有名을 ‘韓江’으로 바꾸자는 일부 사람들의 움직임은 ‘착각해서 항복하는’ 또 하나의 文明戰線의 후퇴인 것이다. 海東繹史에 ‘漢水’以南에 辰國과 韓國을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고, 그 무렵부터 ‘서울’의 옛 이름에는 漢忽, 漢州, 漢陽, 漢城 등이 있는(“국어를 바르게 이해하자” 都守熙 指摘)데 ‘馬邊에 干’을 단(또는 ‘駻’에서 날 日 자를 뺀) 글자인 ‘성 간’은 못 찾아도 이제와서 제물에 ‘漢’자를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山水가 주는 한국의 透明渴求 기질
원래 'ary-'라는 어간은 아리안語系(Avesta, Sanskrit)로 ‘고묘하게 맞추다’라는 뜻 이외에 '맑다, 순수하다‘는 뜻이어서 ‘아리’수나 ‘아리’랑(‘郞’이란 Royal bodyguard, 나아가서는 'fair lads')이란 다 깨끗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宋나라 사람들이 “東方에 가서 금강산을 보고 죽고 싶다"했던 것도 대륙에는 없던 ‘물과 풍광의 투명성과 맑음’으로 해서였던 것이고 ‘漢江이름’이 우리 민족 이동에 따라 옮긴 것과 같이, 요동 요서지방에서 ‘압록강이란 맑고 푸른’ 이름이 옮겨다닌 것도 같은 사정으로, 정신면이나 풍광의 ‘투명성과 無缺渴求’는 이 민족의 특질인 것이다.
서울 시청 옆 덕수궁의 대문 이름이 ‘大安門’이었던 것을 高宗 때 ‘大漢門’으로 바꿨을 때에도 그 뒤에는 위에서 소개한 ‘皆依 璜正韻之舊’로 두 漢字體系가 兩國에 대등하게 있으면서, “우리가 원래 ‘汗’이고 ‘漢’이다”라는 精神이 潛在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조상이 中國의 역대 여러 제국의 무력에 노출되면서도 빼앗기지 않았던 漢字/漢文이란 긴 문화역사의 결실을 후손들의 勉學부족이나 게으름, 그리고 특히 世代 間에 알력을 조성/증폭해서 이용하는 정치세력의 흉계로 해서 이제 와서 우리가 정신유산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나라 言語의 深奧度는 사회와 前시대로부터의 積德
일찍이 “아가 다르고 야가 다르다”는 한국어의 저 깊은 속에서 두 어 世代, 즉 60년 쯤 지나야 자기가 쓰고 있는 語文의 진정한 ‘울림’을 깨닫게 되는 것인데 광복 후 제 나라 말을 간신히 되찾게 된 반면, 오늘날의 新학문의 홍수와 같은 급속 발달에 노출되어보지도 못한 한국의 광복과정에서 ‘漢字는 남의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의 씨가 뿌려졌고, 지금은 ‘英語만능’의 폭풍에 시달리는 속에서 이제 우리語文 심층구조의 골조(漢字)를 파괴하는 ‘이념狂症’의 창궐을 뚫고, 우리 국어를 지킨다는 것은 한국知性에게 주어진 ‘東西南北공정’방어의 至上과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