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漢混用은 民族주체성·東아시아共生·近代學術을 위한 礎石
이데올로기批評家, 김정강
한자는 最古·最大의 문자
중국의 신석기 시대는 1만2천년경 전으로부터 B.C. 2천년경까지이다. B.C. 5천년경에서 B.C. 3천년경까지 仰韶(양샤오)채도문화, B.C. 3천년경에서 B.C. 2천2백년경까지 龍山(룽샨)흑도문화가 계속되었다. 1959년, 룽샨문화에 이은 二理頭(얼리토우)문화의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二理頭문화는 청동기문화로 고대 노예제사회를 표징하고 있다. 二理頭문화는 夏왕조의 기반으로 추정된다. 二理頭유적지에서 나온 大口尊(대구존, 입구가 넓은 술그릇)에서는 문자로 추정되는 井, 勿, … 등의 부호가 발견되었다. 1899년, 중국 하남성 安陽縣(안양현)에 위치한 殷의 수도였던 殷墟(은허)에서 殷王들이 占卜(점복)에 썻던 龜甲(귀갑)과 獸骨(수골)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 중국의 고대문자 즉 甲骨文字(갑골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보다 앞서 발견된 은대 銅器(동기)들에는 기호에 가까운 고대문자로 쓰여진 銘文(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殷은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에 있었던 나라인데 그때에 이미 이와 같이 한자가 발달되어 있었다. 漢字의 문자제정에 참여한 인원수와 시간은 세계 최고·최대이다.
중국대륙의 方言을 통합하는 한자
夏왕조가 실재했느냐를 놓고 종래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仰韶(양샤오) 및 龍山(룽샨)문화에 이어, 1959년 二里頭(얼리토우)문화유적이 발굴됨으로써, 고대노예제사회에 입각한 夏왕조의 실재에 대한 고고학적 뒷받침이 명확해 졌다. 漢민족은 스스로를 夏華族(하화족)이라고도 칭하는데, 이 하화족은 夏·殷(=商)·周 3종족의 통합에 淵源(연원)을 두고 있다. 夏족은 황하 유역 즉 하남성 서부, 산서성 남부, 하북·산동·호북성의 일부에서 활동했다. 商(=은)족은 산동과 하북 남부에 있다가 하남 지역으로 내려와 夏족을 덮쳐 殷왕조를 세웠다. 周족은 섬서, 감숙 일대에 있다가 商왕조를 무력 전복하고 周왕조를 세웠다. 이와같이 漢민족은 그 발생 초기부터 언어가 다른 여러 종족이 통합되어 형성된 데다가, 이 夏華族이 광대한 대륙의 수많은 종족을 정복하고 정복당하며 동화되어 왔으므로 잡다한 이질적 요소가 漢어에 흘러 들어왔다. 그리하여 수많은 方言(방언)이 생겨났다. 이렇게하여 생긴 方言 상호간에는 통역이 없으면 서로 알아 듣지 못한다. 고대에도「左傳(좌전)」에 의하면 춘추시대 황하 동쪽의 晋나라와 서쪽의 秦나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孟子(맹자)」에 의하면 북방의 齊나라와 남방의 楚나라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중국의 방언들은 한국의 사투리처럼 억양이 다소 다르다는 정도가 아니라 외국어처럼 완전히 통하지 않는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방대한 중국 대륙의 거주자들을 하나로 묶어 오늘의 중화민족으로 결속시켜 낸 것은 한자이다. 광활한 대륙에 분산해 살면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중국인들은 口語(구어)는 통하지 않지만 漢字에 의한 筆談(필담)으로는 대륙 어디에 가도 의사가 소통된다. 그래서 지식인의 이데올로기가 같아지고 지식인을 매개로하여 민중의 공동체 의식이 통일되는 것이다. 또한 한자가 언어를 바로잡아 언어의 분화를 막고 언어의 공통성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한자가 없었다면 광할한 중국대륙은 유럽처럼 수십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수십개의 국가로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漢민족도 언어와 문자가 완전히 다른 수십개의 민족으로 분화되었을 것이다. 한반도 면적의 약 50배에 이르는 광대한 중국대륙에서 漢字는 漢민족의 통합성을 가능케 하는 공통문자임과 동시에, 사실상의 공통언어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한자는 東아시아의 共通國字
고대 韓氏朝鮮(한씨조선, 箕子朝鮮)시대 8조 法禁(법금) 중 3개조가 漢書地理志燕條(한서지리지연조)에 전하는데, 『相殺, 以當時償殺, 相傷, 以穀償, 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錢五十萬(살인자는 즉시 죽이고, 상해자는 곡식으로 변상하며, 도적질한 자는 남자는 종으로 삼고 여자는 여종으로 삼으나 용서받으려는 자는 50만전을 내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贖錢(속전) 50만이라는 화폐 단위에서 漢문화의 영향이 나타난다. 한씨조선을 멸망시키고 衛滿朝鮮(위만조선)을 건국한 衛滿은 燕人(연인)이었다. 위만이 千여인을 거느리고 歸附(귀부)하자 한씨조선의 準왕이 博士(박사)로 삼고 西界(서계) 백리의 땅을 封해 준 것으로 보아, 위만은 풍부한 교양을 가진 자였을 것이다. 그 교양과 언어는 漢식이었을 수 밖에 없다. 漢武帝(한우띠)는 B.C. 108년 衛滿조선을 멸망시키고 漢四郡(한사군)을 설치했다. 한씨조선, 위만조선 등의 고조선과 한사군 시대에 한자는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이때 반도 남부의 三韓(삼한)까지도 한자가 유입되었다.
고대 일본은 중국 남방의 六朝文化(육조문화)와 접촉하였으므로 이로부터 한자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는데, 遣隋使(견수사)나 유학승도 한자와 漢語를 배워왔다. 이때 유입된 한자의 발음은 六朝音이었는데 이것을 일본에서는 吳音(오음)이라고 부른다. 7∼8세기에는 遣唐使(견당사), 유학승에의해서 한자가 유입되었는데 이때 유입된 한자의 발음은 唐朝(당조)의 長安音(장안음)이었다. 이때는 漢문화의 중심이 남방의 六朝에서 북방의 唐朝로 옮겨갔던 것이다. 이 장안음으로 발음하는 일본 한자음을 漢音(한음)이라 부른다. 그후 宋·元·明에 왕래하던 승려들에 의하여 일본에 전래된 한자어의 音을 唐宋音이라고 한다. 한반도의 백제를 거쳐서 전래된 것도 있다. 백제의 王仁(왕인)박사에 의한 일본에의 한자 전래는 日本書紀(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이라는 국명은 越南(월남)의 베트남語 音讀(음독)이다. 베트남은 B.C. 112년 漢武帝에 의해 정복된 후부터 A.D. 939년 독립왕조를 수립할 때까지 중국의 예속하에 있었다. 939년 독립후 11세기 초 李朝(리조)에는 과거제도를 도입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베트남은 유사이래 한자를 文語(문어)로 사용해 왔고, 베트남어 낱말의 60%가 베트남 한자음으로 발음되는 한자어이다. 베트남 한자음은 마스페로에 의하면 10세기 唐대 長安 방언에 기초한 북방 독서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한자는 중국의 漢민족이 발명하였으나 유사이래 2천년 이상에 걸쳐서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의 주변으로 전파하여 토착화하였으며 東아시아의 共通國字(공통국자)로 되었다.
森羅萬象·一切唯心을 빠짐 없이 표현할 수 있는 文字
한자는 單字(단자) 한 글자 한 글자가 뜻을 완성하는 문자이면서, 2자 또는 3·4자를 합성하여 단어를 형성한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뜻을 완성하고 있는 한자의 單字를 2자 또는 3·4자씩 합성시켜 뜻이 다른 단어를 만들어 간다고 하면, 그 상호조합에 의하여 창출되는 단어의 集合數(집합수)는 무한이다. 이와같이 고유의 의미를 가진 임의의 單字를 조합하여 무한수의 단어를 만들어 내면, 이 무한수의 造語(조어)에는 모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므로, 객관의 森羅萬象(삼라만상)과 주관의 一切唯心(일체유심)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표음문자만을 사용하는 언어에서는 새로운 현상이나 새로운 思惟(사유)를 발견하거나 창출할 때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일정한 소리단어로서 그 현상을 이름지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表意文字(표의문자)인 한자의 경우에는 각각의 단자가 이미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필요한 單字들을 결합하기만 하면 대체로 쉽게 새로운 현상이나 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한자의 表意性은 새로운 단어의 창출을 쉽게할 뿐만 아니라 表意性과 동시에 象形性(상형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독서의 속도를 빠르게 하며 의미의 전달을 명확하게 한다. 독서시 國漢混用(국한혼용)일 경우 한자 단어는 그 상형성으로 인하여 머리에 쉽게 각인되고, 조사로 사용되는 한글은 스쳐지나도 되므로 독서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능율적이다. 자막이 나오는 영화감상의 경우 國漢混用시는 한자만 읽으면서 한글 이음말은 건너 뛰어도 영화감상에 지장이 없다.
한국어에 있어서의 論理語와 感性語
언어는 思惟(사유)의 도구이다. 언어 없이는 인간의 사유는 불가능하다. 또한 정밀한 사유작업과 그 전달을 위해서는 論理語(논리어)와 感性語(감성어)가 필수적이다. 감성의 세계는 원초적 공동체에 같이 속한 사람들만이 가장 깊이 공유할 수 있는 세계이므로, 韓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자는 누구나 한국어를 한글로 전달받을 때 가장 절실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韓민족 아닌 다른 어느 민족이라도 어머니의 품에서 배우기 시작한 모국어에 의해서만 스스로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을 소리로 표현하는 고유의 表音文字(표음문자)야 말로 각민족에게는 최고의 감성어인 것이다.
그러나 논리를 표현하는 論理語는 다르다. 정확한 논리어의 生成(생성)은 지적 연마의 장구한 역사적 축적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더욱이나 근대적 논리어는 과학과 학문의 근대적 비약의 결과로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 근대적 논리어를 산출한 민족사회가 근대국가로 진입한 후에야 창출될 수 있는 것이다. 인류사상 가장 긴 동안 가장 많은 大衆數(대중수)에 의하여 精緻(정치)하고 방대하게 발전된 한자·한문은, 東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한 일본에 의하여 근대 논리어로 제련되었다. 예건대 哲學(철학), 經濟學(경제학) 등과 같은 단어가 그렇고, 電氣(전기), 細胞(세포), 甲殼類(갑각류)와 같은 용어가 그렇고, 심지어는 演說(연설)과 같은 보통말도 영어의 「Speech」를 일본의 福澤諭吉(후쿠자와 유기치)가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일정한 언어권에서 언어는 상호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준다. 한자를 共通國字(공통국자)로 상용하는 東아시아 언어권에서 이웃한 일본어가 한국어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일본이 먼저 근대화하여 서양의 학술·기술 용어를 한국보다 먼저 수입·번역함에 따라 한국이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사대주의도 모방주의도 아니며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서구 해양에서 선진 문명이 전래되어 오므로 일본이 선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과거 오랜 기간 동안 대륙으로부터 선진 문명이 전래되어 왔을 때에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선진 문명도 전해졌고, 백제의 王仁(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가 일본에 한자를 전해 주었다고 日本書紀(일본서기)가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 한국어에는 일본어 뿐만 아니라 중국어도 많이 混入(혼입)되어 있으며, 한국은 문자생활에서 중국 문자인 한자를 도입했으므로 중국식 언어의 혼입량은 일본식 용어의 그것에 비길 바 없이 많다. 漢字 용어가 韓國語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0%에 이르거니와, 외견상 순수 韓國語인 것 같은 용어도 실상은 漢字와 함께 유래한 中國語인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한국인 대다수는 「자지」나, 「보지」와 같은 원초적 신체어가 순수한 韓國語인 줄 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語源(어원)이 순수한 중국어이다. 「자지」는 중국어의 鳥子(쟈오즈)이고, 「보지」는 중국어의 八子(바즈)이다. 어원의 유래를 상고하면 鳥子는 象形的(상형적) 묘사이며, 八子는 다리 사이에 있는 모양을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
한자 없으면 西歐 학술용어 번역 불가능
西歐語(서구어)를 보면, 표음문자라고 하나 전문용어의 경우 단어 하나 하나가 라틴어에 본원을 둔 기초 단어의 결합에 의하여 만들어지므로써 사실상의 表意性(표의성)도 띄고 있다. 몇 개를 먼저 예로 들어 보자.
feedback(피드백)은 전기공학에서 出力(출력)된 정보를 다시 한 번 入力(입력) 방향으로 되돌려 주어서 재출력을 조절함으로써 시스팀의 전류 평형을 유지시키는 기술인데, feed(영양 공급)와 back(還流)의 합성이므로 軌還(궤환)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 기술을 가리키는 묘사능력이 原語(원어) 「feedback」보다 한자 번역 「軌還(궤환)」이 더 우수하다는 것이다. homeostasis(호메오스타시스)는 의학 용어인데, home(가정)과 stasis(안정 상태)의 결합이므로 恒常性(항상성)이다. Materialism은 唯心論(유심론)과 대립되는 철학이론으로, 세계의 본질은 물질이며 정신은 이차적이고, 물질로서의 세계는 시간적·공간적으로 영원하고 무한하며, 神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사물이 인간의 의식 밖에서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철학의 이념체계다. 한자로 唯物論(유물론)이라 번역한다. Spiritualism은 세계는 본원적인 정신의 現象化(현상화)이거나 단순한 환영에 불과하며, 따라서 눈앞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설이다. 唯心論(유심론)이라고 번역한다. Modernization은 前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한자로 近代化(근대화)라고 번역한다. 한글 전용으로 이런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이 모든 서구의 학술용어는 造語力(조어력)이 풍부한 한자로는, 번역이 용이할 뿐만아니라 오히려 번역된 한자 용어가 서구 용어보다 더 정확히 물질 및 정신의 현상을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현 어휘 상태에서는 순수한 한글 전용으로는 번역이 불가능하다. 억지로 한글 전용 번역을 하려면 새로운 한글 용어를 만들어야 하는데, 용어의 창작과 전파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걸려서 한글 전용식 용어를 창작·전파한다고 하드라도, 그 결과는 東아시아의 학문·기술계에서의 고립과 폐쇄로 인한 退行(퇴행)을 초래할 뿐이다.
좌파와 외세가 추진한 漢字廢棄
西勢東漸(서세동점)의 시기에 西歐 침략 세력과 아시아 左派는 각각 다른 목적에서 漢字 말살을 책동하게 되었다. 중국 좌파의 급진 사상가 魯迅(루쉰)이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할 것』이라고 까지 극언한 것은 그의 좌파적 전통단절 사상에 기인한다. 중국에서 左派 문화혁명을 추구하였던 毛澤東(마오저둥)이 한자 사용을 폐기하고 알파벳을 응용한 표음문자로 대치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으나 簡字化(간자화)로 낙착되었는데,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던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漢字 폐기 책동이 성공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의 베트남인은 베트남 최다수 종교인 불교의 사원에 가도 거기에 쓰인 한자 현판도 읽지 못하며, 선조들이 지은 아름다운 詩歌(시가)나 불경, 유학의 고전도 읽지 못한다. 심지어는 호치민=胡志明, 시에트리쾅=釋智光, 리인탕=連勝과 같은 동포·지도자 이름의 뜻도 모른다. 봉건 중국의 위성국 중 중국의 과거제도를 도입하고 「小中華(소중화)」를 자처하였던 나라가 越南(베트남)과 朝鮮(조선) 두나라이다. 1882년 프랑스 식민주의 군대가 하노이를 점령하고 베트남의 식민화에 착수하고나자, 프랑스는 베트남 지식인의 전통사상을 뿌리 뽑고 베트남을 中國의 영향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당시 베트남 지배계급을 제외한 대부분의 베트남인이 문맹임을 기화로, 누구나 쉽게 깨칠 수 있는 문자를 쓰게 한다고 이간·선동하여 漢字 폐기·알파벳 전용에 나서서 이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으로 서구화했음에도 불구하고, 日本語의 정확한 사용과 전통의 계승을 위하여서는 한자의 사용이 불가결함을 깊이 자각하고 漢字와 가나를 혼용하는 일관된 문자정책을 취하여 왔다. 假名(가나)가 문자로서 불완전하기 때문에 일본이 「가나」와 한자를 혼용한다는 견해는 어리석은 것이다. 일본의 가나는 五十音圖(고쥬온도)만 알면 모든 일본어를 표기할 수 있고, 인쇄체(가다가나)와 활자체(히라가나)까지 구비하고 있고, 알파벳은 글자와 발음이 완전한 일치를 보지 못하므로 학습과정에서는 별도의 발음기호를 필요로 하는데 가나는 글자와 발음이 일치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가나가 알파벳보다 오히려 우수한 문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차대전 후 점령군을 앞세운 미국이 「漢字 폐기·가나 전용」을 문자정책으로 시행하려하자, 한자를 잃어버림으로써 전통과 단절되어 민족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 한 일본은, 당시 절대권력이었던 미국과 맞서 漢字를 지키기 위하여「가나 불완전론」을 전술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자주성을 지키는데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일본은 자기네 고유의 문자를 지금도 「眞名(신나, 진짜문자=漢字)」에 대한 「假名(가나, 가짜문자)」라고 부르고 있다. 한자를 「眞名(신나)」로 보는 이유는 傳統(전통)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라틴化 포기와 簡字化
張庚(장껑)은 1934년, 『한자는 죽은 글자, 文言文(문언문)의 글자, 봉건의 글자』라고 했고, 魯迅(루쉰)도 『漢字不亡, 中國必亡(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반드시 중국이 망한다)』이라면서, 『한자와 대중은 세불양립이다… 대중어의 보급은 라틴화 뿐이다』라고 했다. 1964년 郭沫 (꿔머뤄)는 인민일보와의 회견에서, 『한자는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영원히 보존된다』, 『어디에서』 『박물관에서』라고 했다. 셋 다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左派 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한자를 익히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로 보았지만, 중국 봉건(=전통) 사상을 축적·전달하는 도구로 보고 傳統 사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漢字를 폐기하고, 중국 문자를 라틴(=알파벳)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51년 毛澤東(마오저둥)은 『文字必須改革, 要走世界文字共同的 音方向(문자는 반드시 개혁해야 하며, 세계문자 공동의 표음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라고 했다. 이 방침에 따라 중국은 한자폐기의 방향을 ①한자의 簡化(간화) ②한어의 병음화 ③보통화 보급으로 정하게 된었다. 보통화라는 용어를 공식화하면서 張奚若(장시뤄)교육부장은 1955년 제1차전국문화개혁위원회에서 『普通話(보통화)의 普는 보편성(universality)을 뜻하고 通은 모두의 공동소유(common possession)를 뜻하는 것이지, 결코 평범(ordinariness)이나 통상적 습관(usual habits)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하여 普通話는 보편성을 갖는 중국 무산계급의 공동어라고 규정하면서, 표음화의 필연성을 주장하고 있다. 당시 중국이 궁극적 목표로 삼았던 것은 表意(표의) 한자를 소멸시키고 순수 표음 문자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를 音化(병음화)라고 했다.
결국 1952년 중국문자개혁위원회가 발족되어 한자개혁 작업에 들어가, 1955년 異體字(이체자)를 정리하여 1천53자를 폐지하고, 1956년 「漢字簡化方案(한자간화방안)」을 발표하고, 1964년에는 「簡化字總表(간화자총표)」를 발표했다. 1957·8년에는 「漢字 音方案(한자병음방안)」을 확정했다. 1977년 「簡化字總表」 중에서 불필요하다고 간추려진 137자를 다시 폐지하여, 폐지된 한자의 총량은 1955년의 1천53자에서 1천190자로 늘었다. 1964년의 「簡化字總表」는 1986년 조정됐다. 조정된 「簡化字總表」에 수록된 簡字 총 자수는 2천235자이다. 중국 좌파가 목적으로 했던 한자폐기와 중국문자의 라틴화는 중국민중의 저항에 부딪쳐 制動(제동)된 결과 簡字化로 낙착되고 끝났거니와, 만일 라틴화 노선이 관철되어 중국이 한자를 완전히 폐기하고 베트남처럼 알파벳 사용 국가로 되어버렸다면 東아시아 문화에는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이 초래될 뻔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東아시아 문화의 뿌리인 중국 고전문화의 초토화다.
國漢混用해야 민족주체성 지킬 수 있다
석기시대에 한반도에 들어와서 정착한 부족으로 구성된 三韓에서 토착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이 신라이고, 만주로부터 流移(유이)해 온 부족이 한반도의 先住(선주) 마한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건국한 정복국가가 백제이다. 고구려·백제의 지배계급은 역사시대 이후에 만주로부터 내려 온 뿌리가 같은 정복집단이었다. 고대 민족을 구분하는 결정적 표징인 무덤형식이 고구려·백제는 「積石塚(적석총)」이고, 신라는 이와는 판이한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다. 고구려·백제의 고분에서는 신라와는 달리 금관도 출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라와 고구려·백제 사이에는 언어도 달랐을 것이다. 따라서 金庾信(김유신)이 「三韓一統(삼한일통, 記삼국사기)」을 맹세했을 때의「三韓」은, 김유신이 당시 고구려 백제가 「强占(강점)」하고 있다고 간주했던 마한·진한·변한의 옛 강토이었다. 신라에 의하여 삼국통일이 완성되므로써 오늘의 韓민족이 창출되었지만, 신라의 원뿌리, 韓민족의 원뿌리는 三韓이다. 韓민족은 삼한시대에 한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한국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시가인 鄕歌(향가)나 韓민족의 뿌리를 밝혀주는 最古의 통사인 三國史記(삼국사기), 三國遺事(삼국유사)도 모두 한자로 쓰여져 있다. 시가는 민족의 정서를 표현하며 通史(통사)는 민족국가의 정통성을 합리화하는 것이므로, 鄕歌·三國史記·三國遺事는 民族이데올로기의 원점이다. 그러므로 한자를 잊어버리면 우리 韓민족은 民族이데올로기의 원점을 잊어버린다. 민족의 전통과 단절되면, 민족 주체성도 상실한다. 4세기 말 면적 3백만㎢ 인구 2백만의 고구려와 면적 8만㎢ 인구 1백만 이상의 백제를 멸하고, 면적 3만㎢ 인구 3십만에 불과했던 소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도 三韓의 전통에 기초한 신라 공동체의 전통성, 단일성, 주체성에 기인한다.
한자폐기로 내닿던 東아시아 좌파도 이제는 한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한자를 폐기하고 표음화·라틴화하는 것을 이상으로 내걸었던 중국 좌파는 표음화·라틴화의 공허함을 깨닿고 簡字化(간자화)로 종결했다. 북한은 정권 성립 직후인 1949년 한자교육을 전면폐지했다가, 1966년 『남조선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는 金日成의 교시에 따라 1968년부터 한자교육이 재개됐고, 중학 1학년(=초등 5학년)부터 고등중학(=고등학교)까지 1천5백자를 가르치고, 대학까지 3천자를 가르친다. 1997. 4월 평양에서 발행된 「문화어 학습」은 『학생들이 한자어의 뜻을 모르고 방탕하게(되는대로 마구)쓰는 현상이 있다…한자 교원들은 말을 바르게 쓰는 기풍을 세우기 위해 한자를 깊이 있게 잘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여, 漢字를 폐기하면 조선어 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음을 자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민족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국문전용 정책이 관철되어야 한다(2000. 8. 11. 北京, 「한국어 학술 토론회」에서 北측)』며,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국문(=한글)전용」을 고집하고 있다.
韓민족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하여 생겨 났다. 삼국통일의 주도세력, 따라서 韓민족 형성의 근간인 신라는 三韓을 원뿌리로 한다. 삼한 시대 이래 한자는 國字(국자)였다. 그러므로 國漢混用(국한혼용)해야 민족 주체성을 바로 세울 수 있고, 漢字를 상용하는 東아시아권에서 미아가 되지 않고 공생할 수 있다.
한자교육은 初等學校에서 부터
서구에서는 초등학교로부터 대학교 졸업시까지 라틴어나 그리스어의 학습을 위하여 평균 4천6백6십시간의 수업을 받는데 비하여, 의사가 그 전문지식을 얻기 위하여 3천3백6십시간, 법관의 사법시험까지는 3천3백4십시간을 소모할 뿐이라고 한다. 서구문화의 뿌리로서 우리의 漢文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라틴어에 대한 서구인들의 학습노력은 이와 같이 철저하다.
유학의 대표적인 고전인 論語(논어)의 총 글자수는 대략 1만자인데, 字種(자종)은 1천5백자 정도이다. 일본에서 상용한자로 쓰고 있는 것이 1천9백45자이다. 대학 이전의 교육과정에서 상용한자 2천자만 습득케 하면, 국어 능력이 배가되고 민족의 고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
한자가 東아시아의 국제공통문자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서구의 국제공통문자인 알파벳과는 다르다. 알파벳은 표음기호일 뿐이므로 알파벳을 안다고 해도 어느 특정 서구 나라의 국어를 독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자를 알면 東아시아 각국의 典籍(전적)을 독파할 수 있다. 또한 필담으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고, 한자를 알면 東아시아 각국의 口語(구어)도 쉽게 습득할 수 있다. 반면 한자를 모르면 東아시아 각국의 언어 습득이 불가능하다. 즉 상용한자만 습득하면 東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의사소통이 될 뿐만 아니라 활자·시청각 매체를 통하여 지적 생산물을 공유할 수있다.
1948. 10. 9일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倂用(병용)할 수 있다』고 했으나, 실제 어문생활에서는 국한혼용이 시행되어 왔는데, 1970년부터 朴正熙정권이 한글전용 정책을 급진적으로 강화하면서 초등학교의 한자교육이 사라지고 중고교 국어 교과서에서 한자를 괄호에 넣는 國漢倂用體(국한병용체)로 되었고 한자 교육은 중학부터 한문 과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1995년부터 漢文이 환경, 컴퓨터와 같이 선택과목화 됨으로써 서서히 소멸되고 있는 추세이다. 한반도에 근대 국가를 창출한 朴正熙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글전용을 정권적 차원에서 강행한 것은 朴正熙의 지울 수 없는 큰 과오이다. 이 결과 한자 독서능력이 없는 「漢盲(한맹)」이 양산됐다.
한글도 배우기 쉽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글 자모 28자를 외워도 한글을 읽고 쓸 수는 없다. 자모가 조립된 개별 글자 전부를 일일이 습득해야 讀·書가 가능하다. 인쇄소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글활자는 1,725자(특별한 글자까지 포함시키면 3,500자)인데, 이것을 다 외워야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다. 한글이 우수한 글자임은 말 할 필요도 없으나, 「한글 국수주의」에 빠져서는 않된다. 東아시아권에서 우리 韓민족만 표음문자를 가진 것도 아니다. 일본은 한글이 창제되기 훨씬 전부터 「가나」를 사용해 왔다. 일천여년 전에 간행된 萬葉集에 4천여수의 和歌(시)가 수록되어 있고 그 후의 源氏物語(겐지 이야기)와 平家物語(헤이가 이야기)에도 가나와 한자를 혼용했다. 일본의 가나는 9세기로부터 10세기에 걸쳐서 발생·발전해 갔는데, 신라의 口訣(구결)이 가나의 뿌리라는 說도 있다. 신라의 구결은 불경 등 중국에서 전래한 漢籍(한적)을 신라어로 읽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한자의 토로 쓰였는데 한자의 획을 줄이거나 한자의 일부 부수 만으로 표기하면서, 그 音만을 따서 발음한 것이다. 가나의 형성 원리와 같다. 신라의 구결이 일본에 전하여진 것은 8세기에 원효의 저술을 통해서 였다. 지금도 사찰에서는 구결이 쓰이고 있지만, 한글 창제 이전에는 널리 쓰였다. 한글 창제의 발상도 구결에서 나왔을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배워야 국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초·중·고교의 교과서를 진도에 맞추어 국한병기·국한혼용으로 짜 나가야 한다. 초등 1천자, 중등 5백자, 고등 5백자씩 연습하여 총 2천자를 알면 되는데, 학습 후의 효용도를 고려하면 노력에 비해 이익이 훨씬 많은 것이다. 신문·잡지와 전문서적은 필수 한자를 노출시키고, 과도기적으로 괄호 안에 한글로 토를 달아 漢字의 이해와 학습을 쉽도록 해 주자. 뜻있는 문인이 있다면 시와 소설을 국한혼용으로 저술하여 한국적 정서의 새롭고 높은 경지를 개척해 주기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