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世界化, 어떻게 가능한가?-沈 在 箕
― ‘한글 世界化’의 幻想과 現實 ―
沈 在 箕
서울대학교 名譽敎授 / 本聯合會 理事
요즈음 韓國語가 世界化의 물결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氣를 펴고 있다. 韓國의 産業이 世界 여러 나라에서 힘을 쓰고, 韓國의 문화(주로 영화 및 무대 공연예술)가 이웃나라에서 人氣를 끌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말한다. “韓國語가 세계에 퍼져 나가는 것은, 韓國語가 우수한 言語, 아름다운 말이어서가 아니라 한국 사람의 經濟的․文化的 활동이 활발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것을 한국어의 優秀性으로 착각하지 말라.”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韓國語의 인기에 맞물려 우리 글자인 ‘한글’도 덩달아 世界化의 대열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렇듯 ‘한글의 世界化’를 꿈꾸게 된 데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누구나 한국 사람이면 固有文字 ‘한글’에 대해 말할 수 없는 自矜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왜 그처럼 氣勢堂堂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한국 사람이라면 ‘한글’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音聲文字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이유, 곧 自矜心과 믿음을 根據로 해서 文字가 없는 작은 나라에 한글을 보급하는 運動을 벌이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검토해 보기로 하자.
한글이 우수한 音聲文字라고 하는 데에는 異論의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 世界의 많은 言語學者․文字學者 들이 異口同聲으로 한글을 찬양하였다. 母音과 子音이 분리되어 있다. 子音은 발성기관을 근거로 形象化하였고 母音은 하늘․땅․사람을 象徵하는 ‘․ㅡ․ㅣ’와 그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字母는 子音․母音․子音의 순으로 음절을 구성하고 그 음절이 네모반듯한 사각형 안에 조화롭게 結合된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언어학자들은 한글을 音節型 音素文字라고 부르며 그 體系的이고 組織的인 構造와 字形의 結合方式에 대하여 입을 모아 찬양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文字도 한글의 이러한 體系性․組織性․論理性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 한글로 이 세상에서 표현하지 못할 소리가 없다고까지 하지 않는가! 잠시 鄭麟趾의 「訓民正音序」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癸亥年(1443년) 겨울에 우리 임금님께서 正音 28자를 創制하시고 그 보기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이시며 그것을 訓民正音이라 이름하였으니, 이 訓民正音은 형상을 본떴는데 그 글자 모양은 옛날의 篆字와 비슷하다. 사람의 말소리에 근거하였으되 글자의 音은 七調에 어울리고, 天地人의 뜻과 陰陽의 奧妙함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스물 여덟 글자를 가지고도 돌리고 바꾸어 씀이 무궁한데, 그러면서도 간결하고 요령이 있으며 精巧하고도 능통하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 한나절이 끝나지 않아 깨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이제 이 訓民正音으로 소송사건을 처리하면 情狀을 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字韻에서는 淸濁을 능히 구분할 수 있고, 音樂․노래에서는 律呂를 모두 고르게 나타나게 되니, 그 쓰이는 바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고 활용하는 데마다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니, 비록 바람소리, 학의 울음, 닭의 울음,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다 제대로 적을 수 있다.
이러한 글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한글은 이 세상의 어떤 말도 표기할 수 있는 萬能의 文字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물론 우리 韓國 사람들은 한글로 우리말을 적으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때에 적을 수 없는 말소리 때문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慣習과 寬容이 빚어내는 받아들임이지 言語 사실의 참모습은 아니다. 한 가지 例만 들어 보자. 標準語의 영역에 들어가는 중부 방언에서 ‘아기를 업다[負]’와 ‘돈이 없다[無]’는 똑같이 ‘업다, 없다’로 ‘어’를 쓰지만 그 두 개는 서로 다른 발음이다.
‘어린이[幼兒]’와 ‘어른[成年]’의 경우도 똑같이 ‘어’자를 쓰지만 그것들은 같은 발음이 아니다. ‘없다’와 ‘어른’의 ‘어’는 차라리 ‘으’에 가까운 발음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韓國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한글 표기의 不完全性을 문제삼지 않는다. 문제삼지 않는다 하여 한글이 모든 발음을 완전하게 표기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발음도 표기할 수 있는 文字, 곧 萬能의 文字는 존재하지 않는다. 萬能에 가장 가까운 문자가 있다면 그것은 音聲學者들이 고안해 낸 國際音聲記號(International Phonetic Signs)일 것이다. 만일에 한글로 문자 없는 나라의 말을 적어 내라고 한다면 한글을 ‘國際音聲記號’처럼 쓰자고 하는 것이 될 터인데, 이때에 이미 한글의 限界는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國際音聲記號는 子音이 27개, 半母音 3개, 母音이 19개인데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발음은 單子音 19개 單母音 10개 고작 29개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도 어떤 언어는 이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충분할 때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완전한, 아니 완전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현존하는 세계의 다른 나라 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이미 그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것은 1980년대에 시작된 ‘外來語表記法’이다. 우리말 語文規定의 하나인 이 ‘外來語表記法’은 현존하는 外來語를 한글로 표기하는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外來語는 國語의 現用 24字母만으로 적는다.
② 外來語의 1音韻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적는다.
③ 받침에는 ㄱㄴㄹㅁㅂㅅㅇ만을 쓴다.
④ 破裂音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⑤ 이미 굳어진 外來語는 慣用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用例는 따로 정한다.
여기에서 外來語라고 하는 것은 모든 外國語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세계가 하나의 큰 마을로 움직이는 이 地球村 구석구석에서, 온 세상이 알아야 할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사건은 六何原則에 따라 地球村 곳곳에 뉴스로 전달된다. 이때에 그 지역의 언어로 사람 이름, 땅 이름, 事件의 이름이 소개된다. 固有名詞를 주축으로 하는 이러한 낱말은 우리 나라 모든 言論 媒體에 한글로 표기되어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이러한 사태에 대비하여 ‘政府․言論 外來語審議委員會’가 구성되어 수시로 새로운 외래어를 한글로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를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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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때에 ‘外來語’라는 말은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言語를 한글로 表記할 때를 上程하여 붙인 用語이다. 따라서 이 ‘外來語’라는 말은 곧 모든 外國語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에, 이 ‘外來語表記法’은 전 세계의 모든 言語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표기하고자 하는 일차적인 實驗이라고 할 수 있다. 이 實驗은 위에 적은 바와 같이 다섯 가지의 원칙을 내걸고 있다. 이 原則은 바꾸어 말하면 일종의 ‘制約條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制約條件은 표기해야 할 外國語와 한글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말은 또 바꾸어 보면 양쪽에 모두 불만족스러운 점을 감수하자는 暗黙的 約束이다. 이러한 約束이 필요한 이유는 어떤 言語도 ‘한글’로 완벽하게, 滿足할 만한 수준으로 표기하는 것이 사실상 不可能하다는 뜻을 감추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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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外來語表記法에 의해 한글로 표기되는 언어는 2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英語․獨逸語․프랑스어․에스파냐어․이탈리아어․日本語․中國語․폴란드어․체코어․세르보크로아트어․루마니아어․헝가리어․스웨덴어․노르웨이어․덴마크어 등) 그러나 실제로 그때그때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심의 대상이 되는 언어는 그 20여개 언어 밖에 있는 경우가 있으므로, ‘政府․言論外來語審議委員會’는 事案이 발생할 때마다 熟議에 熟議를 거듭하여 합리적인 한글 표기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면 이제 이 外來語表記法에 의해 영어가 어떻게 표기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열 개의 항목이 마련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몇 개의 용례만을 살피는 것으로 하겠다.
cat(캣) act(액트) sickness(시크니스)
lobster(로브스터) thrill(스릴) jazz(재즈)
flash(플래시) chat(차트) film(필름)
team(팀) yellow(옐로) headlight(헤드라이트)
위의 낱말을 놓고, 만일에 영어의 原語民 話者(英國 사람)와 韓國 사람이 나란히 英語를 말하고 한글을 읽는다면 그 차이가 얼마나 클 것인가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언어가 한글로 옮겨 적히는 데에는 限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차이를 극복하며 일상의 言語生活을 큰 불편 없이 영위한다. ‘버스bus’라고 쓴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뻐스’와 비슷한 발음을 하며, 심지어 ‘좋은 소나무’라는 뜻의 ‘파인 파인 fine pine’을 보고도 빙긋이 웃으며 ‘화인 파인’ 비슷한 발음으로 응수한다. 이것은 물론 英語와 한글을 모두 다 잘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떤 이는 의문을 품을 것이다. 한글 字母에 존재하지 않는 ‘f, v, th’ 같은 글자와 그 발음을 위하여 한글 字母를 開發하면 돼지 않는가 하고.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단계에 이르면 그것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이 아니므로, 엄격하게 말하여 ‘한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한글이 한글다워야 한다면 그것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24자의 한글을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근자에 廣告 效果를 생각하며 아래 아()를 쓰는 사례, ‘ 소중한 당신’ 같은 것이 늘고 있고 실제로 濟州道 방언을 표기하려면 그것이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행위는 우리의 어문 규범을 고치지 않는 한 분명히 바른 글 쓰기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한글 世界化를 위한 개괄적인 청사진
여기까지 論議를 진행하였으니 이제 文字 없는 民族․社會에 한글을 傳授하는 한글의 世界化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한글이 얼마간 불만족스런 文字體系이긴 하지만(물론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 불만족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나라 音韻體系에 안 맞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傳授하여 文字 없는 民族․社會가 文字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그것을 차분히 단계별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앞에서도 論議한 바와 같이 이미 ‘外來語表記法’에 의해 한글의 外國語 表記 사례가 체계적으로 검토되고 발전되어 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外來語表記法을 더욱 확충시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言語, 적어도 UN에 가입된 200여 개의 나라의 言語를 모두 표기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外來語表記法의 확충작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작업을 통하여 한글로 生面不知의 言語를 표기하는 다양한 방법과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질 것이다. 현재 20여 개 나라의 言語를 표기하는 방법만으로는 갈 길이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다. 訓民正音의 創制原理와 方法에 따라 새로운 字母를 개발한다면 한글이 萬能의 國際音聲記號로 탈바꿈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둘째, 적어도 세상에서 행세하는 言語 몇 십 개쯤은 한글로 표기했을 때, 그런 대로 불편 없이 쓸 수 있는 확증이 섰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다음 단계는 실제로 한글로 表記해야 할 無文字 民族의 言語를 선별하는 일이다. 그러한 言語가 中央아시아 어느 峽谷에 있을 수도 있고, 南太平洋의 어느 섬일 수도 있으며, 혹은 아메리카 인디언 혹은 아프리카 어느 구석의 작은 部族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中國 궁벽한 奧地에 사는 어느 少數民族일 수도 있다. 그러한 대상이 구체적으로 떠올랐다고 하자.
셋째, 우리는 그 대상 언어의 專門家를 養成해야 한다. 對象 言語에 대한 아무런 知識도 없이 그 言語를 표기하는 작업을 着手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언어의 專門家를 양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잘나가는 힘센 언어를 공부하여 새로운 文物을 익히고 출셋길을 달리려는 사람은 있어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言語를 공부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이런 것은 장기적인 國策事業으로 獎學金과 生活補助金을 지급하며 여러 해에 걸쳐 養成해야 할 것이다. 이 때에 정부에서는 분명히 그 대상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우리 나라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는가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韓國語의 世界化 차원에서 그 지역과의 긴밀한 交流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넷째, 이 모든 것이 만족할 만한 단계로 성숙하였을 때, 그 때에 우리는 여전히 시간을 벌며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저들에게 우리말을 적는 한글이 참 좋지 않으냐, 이것으로 당신네 말도 적으면 어떻겠느냐?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곧 문화적 침략이요, 새로운 文字植民主義의 진출이다. 우리는 그냥 기다려야 한다. 저들이 스스로 “그동안 한국과의 經濟的․社會的․文化的 접촉을 통하여 우리 民族이 참으로 얻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을 적기 위해 한글을 빌릴 수는 없을까요?” 이렇게 말할 때까지 우리는 그저 저들에게 저들 民族의 文化와 社會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착한 친구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때쯤이면 이미 한글로 그 言語를 能熟하게 표기하는 기술이 開發된 이후일 것이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한글의 世界化를 위한 개괄적인 청사진은 이 정도에서 멈추기로 하자. 말이 쉽지 이 네 단계의 文化事業은 1, 20년으로 成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肯定的인 측면보다는 否定的인 측면이 더 많이 드러나는 일이다. 그래도 한글의 세계화가 우리의 과제라면, 그것은 언제나 韓國語의 世界化의 얼마간 성숙한 뒤에, 다시 말하여 韓國語가 世界의 5대 公用語쯤으로나 발전한다면, 그러한 發展을 기다려, 그 발전의 그림자로 한글이 세계 속에 퍼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생각할 問題가 아닌가 싶다.
筆者는 얼마 전 한글의 世界化를 꿈꾸는 어떤 이의 新聞 칼럼을 보고 다음과 같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의 結論을 대신하여 그 일부를 다시 옮겨 본다.
어느 신문에 다음과 같은 칼럼이 실렸다.
누구나 하루아침이면 다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아침글자’라고도 불리는 한글은 21세기 情報通信 時代를 맞이해서 全 世界人이 共通으로 사용하는 文字가 되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小數種族의 無文字 언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려운 文字를 쓰는 중국어나 힌디어, 태국어, 아랍어 등을 포함한 世界의 모든 言語들을 表記하는 文字로서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담에 자라서 대통령이 될 거야. 세계를 움직이는 대통령이 될 거야.” 이렇게 豪言壯談하는, 열 살 안팎의 어린이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나의 文字가 다른 民族이나 國家에 전파되는 文化現象에 얼마나 많은 政治․經濟․社會的 제반 여건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는가? 서로 다른 言語와 文化를 가진 두 社會集團이 하나의 文字를 주고받는 관계가 되려면 얼마만큼 親密度를 유지하며, 共同體 意識을 형성해야 되는가를 고려해 보았는가? 文字 移動의 事例를 지금까지의 世界 歷史에서 면밀히 검토해 보았는가? 아마도 거기에는 반드시 侵略과 掠奪, 支配와 屈從이 어우러진 帝國主義의 화약냄새, 植民主義의 匕首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文字의 전수를 자동차 수출쯤으로 아는가? 나는 그 글을 쓰신 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보시오. 태평양 한 구석 외딴 섬에 인구 3만 명쯤의 無文字 種族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자, 그들은 아마 美國의 保護領쯤 되겠지요. 이미 알파벳을 쓰고 있고요. 그러한 그들에게 ‘한글’을 자기네 문자로 채택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은 그들에게 文字 외에 무엇을 더 주시겠소? 그들의 言語․文化․傳統에 대해 얼마만큼의 愛情이 있소? 그들과 未來의 運命을 같이할 韓國 사람이 3천 명, 아니 300 명만 있다면 그 때에는 한글을 들고 같이 살자고 찾아갈 수 있을 것이오.”
만일에 한글의 世界化가 新帝國主義的 發想이라는 오해를 벗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植民地를 경험한 韓國의 民族主義가 작용한 식민주의 콤플렉스의 幻想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民族的 自尊心과 實利에 바탕을 둔 冷嚴한 國際 現實로 볼 때 갈 길이 아득하게 멀어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