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한글 大學生의 독서력
1) 書店(서점)대신 막걸리집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은 못 되지만 한국 대학생은 독서를 하지 않기로 세계 제일이라고 한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는 갑자기 많은 대학이 생겼고, 그 대학들의 주변에는 당연한 일로, 상당수의 서점도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4․19를 고비로 하여 대학가의 서점수는 해마다 감소되다가, 현재는 거의 완전히 서점이 없는 대학가가 되었다. 그리고 서점 대신 여자대학의 주변에는 몇십개의 양장점들이 있고, 남자대학의 주변에는 수많은 막걸리집이 흥취를 돋우고 있다.
작년(1970년) 가을 「讀書週間(독서주간)」의 조사에 의하면, 서울대학교 圖書館(도서관)에는 藏書(장서)가 63만여 권이 있는데, 이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은 전학생의 2%에 불과하고, 그 중에서도 장서를 이용하는 학생은 그 2%의 또 몇 %라고 한다. 대학생이 서점에 가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이 책을 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책을 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을 그냥 빌려주는 도서관에도 가지 않는다. 그들이 책도 사지 않고, 도서관에도 가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학이라 하는 것은 학문의 전당이요, 文明의 산실이다. 또 학문과 書冊(서책)이 불가분의 일체라면, 「대학생과 讀書」 또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事理는 이러한데, 그들은 왜 그렇게도 철저히 독서를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實相(실상)은, 그들은 독서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요, 독서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들은 독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할 수 없다는 말인가.
「한글 大學生」이라는 말이 잘 표현하고 있듯이 그들은 한글 밖에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대학에서 접하는 書冊, 즉, 哲學, 藝術, 科學, 政治, 經濟, 社會, 醫學, 法學 등의 학술에 관한 서책은 그 전부가 漢字와 漢字語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독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또 외국어도 능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외국 서적도 읽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한국 대학생의 외국어 실력은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의 대학생에 비하여 同一을 論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다. 한국인의 發音能力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보통의 會話 정도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에서 쓰이는 고등개념의 어휘는 그 참뜻을 이해하기가 極難(극난)하다. 왜 그런가,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외국어를 가르치는데, 그것을 국어로 번역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은 외국어를 그들이 가진 국어능력 정도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의 외국어 실력은 어느 한계를 가면 정지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필자의 의견으로는, 한글주의를 앞으로 계속 강행한다면, 외국어를 국어로 번역하여 가르칠 것이 아니요, 필리핀이나 인도에서와 같이 직접 외국어로 가르치는 것이 교육효과를 거둘 수 있고, 또 외국어에 의해서라도 그들을 文盲(문맹)으로부터 구출 할 수 있을 것이다.
2) 性能力 없는 新郞
결론하면, 한국 대학생은 과거 25년간의 한글 교육에 의하여 국어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독서능력이 없는 것이다. 「독서능력이 없는 대학생」이라는 말은 「性能力이 없는 新郞(신랑)」이라는 말과 같이 하나의 「넌센스」요 비극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書冊을 외면하고 학문을 등지게 되었고, 그 필연적 결과로 소수의 총명하고 自覺하여 노력하는 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이나라 대학생은, 한글주의자가 말하는 바, 조상의 얼을 되살리고, 주체의식을 드높인다는 그 애국적이고 고매하고 원대한 사상과는 정반대의 방향-히피 類似(유사)의 족속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상이 「한글專用 敎育」 25년의 총결산이다.
3) 迷信(미신)의 祭物(제물)이 된 한국 대학생
우리나라 교육현실의 이와 같은 엄중한 사실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에 그 證據(증거)를 또 하나 든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재작년(1969년) 정부에서 法官(법관) 채용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응시자격은 법과대학 4년 졸업자와 同 3년 수료자이고, 채용 예정인원은 80명이었다. 여기에 應試(응시)한 법관 지망자수는 3천2백명이었고, 시험 결과 합격한 자의 수는 20명이었다.
이 결과에 당황한 당국은 그 이듬해(1970년) 객관식 出題(출제)로 하고, 커트라인이 없는 성적순위로 80명을 뽑겠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방침과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필자는 그 후 다시 알아볼 흥미를 잃었다).
이상의 사실을 분석하면, 3만2천명 대 20명이니까, 1백60 대 1의 비율이 된다. 즉, 1백60명 중 쓸 만한 것은 단 1명이고 나머지 1백59명은 다 못 쓸 것들이라는 말이다. 한 개의 法科大學에서 한 回(회) 졸업생을 1백명으로 친다면 그 중 0.6명이 겨우 쓸 것이고 나머지 99.4명이 못 쓸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小數(소수)로 分割(분할)할 수 없으니까, 두 개 대학 한 回 졸업생을 합친 2백명 중에 법관이 될 만한 자는 1명꼴로 산출이 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나머지 1백99명은 어디가 쓸 것인가, 세상에 장사치고는 막 되어먹은 놈의 장사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위의 應試者는 하나도 빠짐없이 15~16년을 공부한 청년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다면 교육자나 학부모는 그 원인에 대하여 좀 생각하여 볼 필요는 없겠는가.
또 하나 희한한 일은 시험 결과에 대한 당국자의 태도다. 적어도 法官이라면, 국민의 생명․재산의 死活得失(사활득실)을 판가름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者다. 그 法官을 採用(채용)하는 데 있어, 연필을 굴려 가지고 하는 O, X 시험에 의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이야기가 아닌가. 선醫員(의원)이 사람 죽인다는 말이 있다. 제 나라 말로 된 제 나라 新聞(신문) 한 장 똑바로 읽을 수 없는 법관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것이요, 法官(법관)이 정히 없으면 재판소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 국민의 피해를 보다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16년간의 공부를 하고도 제 나라 말로 된 제 나라 신문 한 장 똑바로 읽을 수 없다는 현상은 과거의 인류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요, 현재에 있어서도 지구 표면 어느 곳에 가 물어 보아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실로,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수백만 한국 청소년들은, 다만 몇 사람 한글주의자의 無知와 偏見(편견)과 迷信(미신)과 私利(사리)의 祭物(제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이 제물이 된 줄도 모르고, 배우고서도 글을 모르는 답답한 삶을 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文明社會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또 있어본 일도 없다.
國語에 대한 重大한 誤解 - 吳之湖
-韓國兒童의 思考能力 低下現象과 그 原因에 대한 考察- 中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3057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