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 鳳 榮
光復 후 意外의 部面에서 名分을 찾는 人士들이 있어 國家와 民族에게 말로는 다 形言할 수 없는 巨大한 損失을 招來케 했으니 그것은 즉, 한글專用, 특히 敎育에서의 한글專用이다. 우리 자신이 創製한 한글을 專用하자는 主張은 名分이 선다. 그러나 이것을 敎育에 實踐함으로써 民族이 받은 苦痛과 損失은 너무도 컸다. 이로써 볼 때 名分論 같은 것은 一顧의 價値가 없게 되었다.
우리의 現用 國語에서 볼 때 漢字없이 어떻게 國語敎育을 하겠다는 것인지 그러한 생각이 腦裏에 떠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不可思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一時的인 衝動으로 短期間에 그쳤다면 혹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寬容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不條理가 28년이라는 긴 歲月을 계속해왔는데도 是正할 氣味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理解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할 수밖에 없다.
2千年 이전의 옛날로 돌아간다면 한글만으로도 日常生活에 不便이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한글만으로 敎育할 수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文化民族으로 自處해왔고, 또 今後 더 한층 文化發展에 힘써야 할 이때인데 어떻게 해서 敎育效果가 거의 없다시피 되는 한글專用敎育을 계속하고 있겠는가 말이다.
各級學校에 入學하는 者의 數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文盲者의 數가 正比例해서 늘어나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지금 우리의 敎育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初·中·高의 各級學校 卒業豫定者가 모두 試驗準備에만 熱中하고 있어서 그 弊害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弊害를 방지하기 위하여 國家考試니 中學無試驗制度니 體力章制度니 하는 등 여러 가지 方法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副作用을 隨伴하고 있다. 또한 入試不正도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다.
그 原因이 어디 있는가는 조금만 머리를 식혀 가지고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어찌해서 그 原因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가. 그 解答은 簡單하고도 明瞭하다. 즉 初·中·高校가 다 같이 完結敎育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國民學校만 나와도 社會의 어느 구석에 쓸 수가 있고, 또 才能이 있는 者라면 自習으로 大學까지도 入學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中學도 그렇고 高等學校도 마찬가지로 學校를 卒業함으로써 그 學力만으로 社會 어느 部面에서도 일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 형편에 있는가 하면 國民學校만 卒業한 者는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고, 中學卒業者 역시 그 學力만으로는 事務職을 담당할 수가 없다. 高等學校 卒業者에게는 多少 門이 열려 있게 되어 있다. 그러한 關係로 누구나 學校敎育을 받으려고 할 때는 반드시 大學을 目標로 한다.
그렇게 되고 보니 大學 이외의 各級學校 高學年生은 入試準備에 努力할 수밖에 없다. 國民 전체가 大學敎育을 받게 된다면 民族的 榮譽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必要 없는 일일 뿐 아니라 國家에 有害한 일이다. 國民 모두가 16년이란 긴 歲月을 교육에 보낸다는 것은 결코 有益한 일이 될 수 없다. 그것도 經濟的 餘裕가 있다면 모를 일인데 都市에서 薄俸을 받는 者나 農村에서 겨우 秋收가 數十石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 子女를 大學에 보내려고 하니 一家의 經濟는 破綻될 수밖에 없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子女敎育費 때문에 家計가 곤궁해진다고 하면 이 사실은 一家族의 문제에만 局限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각 個人의 經濟問題를 넘어서 國家經濟의 발전을 沮害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아무런 效果나 利得이 없이 國民 전체가 必要 이상의 敎育費를 매년 幾百億원씩 지출한다고 하면 이것이 國家的 損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弊害가 國民學校에서 漢字를 敎育함으로써 除去될 수 있다는 事實에 왜 盲目인가.
漢字는 즉 國語이고 知識이고 道德이다.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 무슨 敎育을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國民學校에서 2,000字 가량의 漢字를 가르친다는 것은 極히 쉬운 일이다. 1·2·3學年의 國語時間마다 漢字 한 字씩을 가르치고 4·5·6學年의 國語時間마다 漢字 두 字씩을 가르친다고 하면 6년간에 2,000字 정도의 漢字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國民學校에서 漢字를 가르쳐야 한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사람의 身體發育은 대체로 20歲가 되어야 완성된다고 하지만 眼力만은 10歲前後에 최고로 발달된다. 그러므로 視覺에 힘 입는 바 큰 漢字習得은 生理學上으로 보아 10歲前後가 제일 좋다고 할 것이다.
漢字를 처음 學習할 때는 理解力이 그리 必要치 않다. 무슨 字 무슨 字하고 글자 뜻과 字形만 알면 되는 것이므로 雜多한 생각이 없고 頭腦가 단순한 幼年時節에 學習하는 것이 가장 效果的이다.
또 사람의 知能은 幼年時節 즉, 國民學校 때에 啓發하는 것이 제일 좋다. 漢字를 앎으로써 國語를 알 수 있고, 國語를 앎으로써 知能이 啓發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1973년 8월 13일자 新聞에 韓國行動科學硏究所에서 全國國民學校 6學年生 8,800명의 學力調査를 實施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에 의하면 이들은 國民學校 卒業者라면 最小限 이 정도는 알아야 하겠다고 設定한 必須敎育目標에 未達된다고 한다. 科目別로 敎育目標達成率을 볼 때 國語 50, 算數 47, 社生은 45, 自然은 38이었다. 이에 앞서 國民學校 卒業者 중에는 精神薄弱兒 또는 低能兒가 많아서 別途敎育을 시켜야 하겠다는 말이 新聞에 報道된 바 있다.
이것이 무엇을 意味하는 것인가 하면 國民學校 교육이 兒童들의 知能啓發과 學科習得에 큰 效果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實證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思考와 言語는 不可分의 關係가 있다. 國語를 앎으로써 思考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인데 漢字를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國語敎育이 거의 없다시피 되었고, 따라서 理智的인 思考가 있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數年來로 20歲 이상 靑年이 아무런 이유 없이 다만 自身의 어떠한 不平不滿만으로 多數한 人命을 殺害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이들도 최소한 國民學校는 마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데 어찌하여 그러한 大量殺人行爲를 했을까 하는 疑問이 없을 수 없다.
분명한 事實 하나는 이들에게는 理性도 없었고 道義도 없었다는 것이다. 國民學校를 나왔지만 理性도 찾지 못했고 道義가 무엇인지도 전혀 몰랐다는 결과가 된다.
지금과 같은 한글專用의 國語敎育으로는 理性이니 道義니 하는 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感情이란 것은 敎育이 없다고 해도 있게 마련이니 그렇게 놀랄 만한 殺人行爲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하나 말해두어야 할 것은 國民敎育이 얼마나 重要한 일이고, 또 國民學校에서 가르쳐야 할 中心課目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國民學校는 國民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道義와 學問을 가르치는 곳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義務敎育이고 無償敎育이다. 國民된 사람은 貧富를 莫論하고 이 國家的 敎育惠澤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國民學校 敎育이 아무 쓸모 없는 敎育이 되고 보면 經濟力이 不足해서 子女를 上級學校에 보낼 수 없는 사람은 국가적인 敎育惠澤을 받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永久히 文字와 學問의 世界에 접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不公平한 일이겠는가. 貧富로 인한 差別이 이에까지 미친다는 것은 너무도 苛酷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事態를 避하기 위해서는 國民敎育의 重點을 國語敎育에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國民學校만 卒業해도 讀書를 할 수 있고, 讀書가 可能함으로써 上級學校 卒業者와 同等 또는 그 以上의 學識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그 知識만으로도 事務職을 擔當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可能한 일인가 또는 不可能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國民學校 卒業者가 讀書를 할 수 없고 自己의 意思를 文字化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것은 敎育의 잘못이지 民族才質의 不足 때문은 아니다.
日政 때 書堂에서 漢文을 학습하다가 4년제 普通學校를 나온 사람은 國文과 日文書籍을 볼 수 있었고 社會 각 分野에서 일할 수 있었다. 6년제의 國民學校를 나온 사람이 어떻게 되어서 國文書籍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단 말인가.
日政 때 普通學校 卒業者가 國文書籍과 日文書籍을 다 讀破할 수 있는데 比한다면 오늘날은 그 半의 努力으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오늘날은 日語敎育이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國民學校 卒業者가 讀書할 수 없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理由는 至極히 明瞭하다.
日政 때 普通學校 卒業者는 漢字를 多少나마 알았고 오늘날의 國民學校 卒業者는 그것이 全無하다는 사실 하나가 그와 같은 중대한 結果를 招來케 한 것이다. 이와 같은 事態를 目睹하면서도 한글만이 우리 國文이고 漢字는 外國文字이니 무엇이니 해서 國民學校에서 漢字 가르치는 것을 反對하는 것은 이 國家 이 民族을 어디로 끌고 가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國家가 있은 然後에 國文 있는 것이다. 그 國家가 衰亡함으로써 그 國文마저 없어진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漢字 없이 國語敎育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 바이지만 百步를 讓步해서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한글專用敎育의 경우 數十年의 時日을 國語敎育에 들인다고 해도 國語의 完全解得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國民學校에서 漢字敎育을 倂行한다고 하면 6년으로 足할 것이다.
한글專用敎育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生活用語만을 國語로 생각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文化도 모르고 敎育의 目標도 모르는 것이다. 生活用語만을 國語로 생각한다면 敎育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敎育이란 것은 學問을 알게 하는 데 그 目標가 있는 것이지 生活用語를 알려 주는 것을 目的으로 할 수는 없다.
學問用語와 漢字는 不可分의 관계에 있다. 한글만으로 學問用의 國語를 가르친다는 것은 돌로 나무를 자르려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한글專用으로 인한 被敎育者인 兒童의 困苦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漢字敎育이라는 쉽고도 확실한 방법을 버리고 子女들을 극도로 괴롭히고 時間도 費用도 많이 드는 한글專用敎育을 하고 있는 것일까. 筆者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 한번 試驗해 보면 곧 判明될 것이다.
모든 일을 科學的으로 해결해야 할 오늘에 있어 試驗은 한번도 해보지 않고 數個人의 宗敎的 信念만에 의해서 國家政策 중 最上位에 두어야 할 敎育政策을 이처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나라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國民學校에서 試驗해 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成人의 경우 4, 5개월이란 短期間의 試驗으로도 그 결과가 判明될 것이다. 약 2,000字의 漢字를 알면 약 5∼6萬의 漢字單語를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5∼6萬의 漢字單語를 알 수 있게 된다면 현재 우리 社會에 通用되고 있는 각종 文書와 專門書籍이 아닌 一般書冊을 理解 讀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쉽고도 효과적이겠는가.
그런데 한글主義者들은 國民學校에서 試驗的으로 漢字敎育을 해보자는 데 決死反對했다. 國家에서 올바른 敎育政策을 樹立하기 위하여 試驗해 보자는 것을 어찌하여 반대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表面上의 이유는 이러한 듯하다. "漢字는 外國文字인데 義務敎育인 國民學校에서 어떻게 外國文字를 가르치겠는가. 中學에서는 外國語인 英語를 가르치고 있으니 漢文을 가르치는 것쯤은 無妨하다"고 하는 모양이다.
이것은 너무나 矛盾된 論理다. 漢字가 外國文字라고 한다면 우리 國語의 半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漢字語는 무엇인가 말이다. 만약 漢字語를 外國語라고 한다면 國民學校에서는 國語敎育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 機會에 첨가해서 말해두어야 할 것은 한글이 우리 文字임은 물론이지만 漢字 역시 우리 文字란 것이다. 우리는 表音·表意 兩種의 文字를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文字를 倂用하는 우리는 表音 또는 表意 一種만의 文字를 使用하는 國民보다는 文化的으로 또는 實用上에서 퍽 有利한 입장에 있다. 文化나 實用으로 보아 그 어느 하나도 버릴 수는 없다. 이것을 人體에 比한다면 하나는 骨이요 하나는 肉이다. 骨이 없어도 肉身을 保存할 수 없고 肉이 없어도 肉身을 保存할 수 없다. 어떻게 그 하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한글專用이 名分上 옳다고 해서 이것을 敎育에까지 實踐하려고 한다는 것은 自殺行爲밖에 될 것이 없다.
우리가 表音·表意 兩種文字를 倂用할 수 있게 된 것은 皇天이 주신 큰 福이다. 狹小한 半島에서 살면서 周圍에 있는 여러 强大國에게 끊임없이 侵略을 받고 있는 民族이니 文化的으로나마 發展해 보라고 해서 皇天이 내려 주신 福인데 이 福을 拒否함으로써 받게 될 것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兩種文字를 갖게 된 것은 世宗大王이 한글을 創製한 후부터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倂用하게 된 것은 19世紀末부터이므로 光復當時까지는 不過 半世紀이고 오늘날까지 計算해서 70餘年밖에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짧은 期間이지만 國漢文倂用은 틀이 잡혔고 國漢文倂用의 出版物이 많이 刊行되었다.
文化的 基礎가 國漢文倂用으로 築造되어 앞으로는 한층 더 발전이 期待되는 이때에 이것을 破壞하려는 理由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한글專用論者들은 이 문화적 土臺를 허물어 버리고 새로 한글文化를 創造해 보자는 野心을 갖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로 하나의 妄想에 不過한 것이다. 그 이유 또한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 國語의 半數 이상이 漢字語이고 특히 學術用語는 7∼8割이 漢字語이기 때문이다. 우리 國語를 한글만으로 표기할 수 있도록 改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破壞는 쉽지만 建設은 어려운 것이다.
한글文化의 創造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百步千步를 讓步해서 그것이 혹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南北分斷 등 여러 가지로 多事多難한 이때에 잘 築造해 놓은 文化的 土臺를 허물어 버림으로써 惹起될 여러 가지 혼란을 무엇으로 막겠는가.
或者는 말하리라. 北韓도 지금 한글文化를 創造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어째서 못하는가 하고.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속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民族도 없고 文化도 傳統도 다 否認하는 者들이다. 共産主義만이 唯一의 目標이기 때문에 主義宣傳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파괴하는 者들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들과 같은 行動을 취하겠는가.
또 한가지 말해둘 것이 있다. 그것은 漢字文化圈에 있던 나라가 漢字를 버리고 表音文字를 사용한 예다. 數年前의 일인데 쿠알라룸푸르大學의 敎授 한 사람이 東南 아시아 여러 나라를 巡訪하고 우리 나라에 와서 "自己가 巡訪한 여러 나라 중에 越南의 文化가 最下位에 있는데, 이것은 漢字使用國이었던 越南이 漢字를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글專用論者들은 이 사실마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니 참으로 寒心한 일이다. 또한 우리는 2千年 以來로 漢字를 써왔다. 이 동안 여러 가지 記錄이 거의 다 漢字로 되어 있다. 이러한 漢字를 外國文字라고 해서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外國語와 같게 보려고 하니 그렇게 될 경우, 漢字에 隨伴된 모든 文物制度를 어떻게 處理하자는 것일까. 결국 현재 以前의 모든 文化를 一掃하자는 말이 되겠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남을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 세계에는 英國民이 아니면서도 英語를 國語로 사용하는 국민이 許多하게 있다. 이들이 새롭고 편리한 國文·國語를 발명해서 쓴다고 해도 그들의 文化는 白紙가 될 것이고 따라서 言語生活은 痲痺될 것이다.
우리가 漢字를 버릴 경우 英語常用國民이 英語를 버린 것과 같은 결과를 招來케 될 것은 明若觀火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 있지만 한글專用 敎育論者들이 國民學校에서 試驗的으로라도 漢字敎育을 해 보자는 데 반대하는 진정한 이유는 이러한 데 있지 않은가 한다.
즉 國民學校에서 漢字敎育을 하게 된다면 國語敎育上 또는 知能啓發上 나아가서는 敎育全般에 亘하여 오늘날과는 比較할 수 없을 정도의 優秀性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20餘年間 한글專用敎育을 행함으로써 國家民族에게 重且大한 損失을 招來한 過誤(정확하게 말한다면 罪惡)가 白日下에 폭로될 것을 두려워서일 것이다. 물론 그들 個人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중대한 過誤가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의 常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個人에 관한 問題다. 몇몇 個人의 名譽를 損傷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國家民族의 중대한 損失을 이 이상 더 계속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國民學校에서 漢字를 가르침으로써 敎育上에 일어나는 凶惡犯罪와 不道德行爲를 어느 정도 減少시킬 수 있다면 國家民族을 위하여 얼마나 多幸한 일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각 家庭의 敎育費負擔이 輕減되어 生活安定에 도움이 되고 따라서 國家經濟의 發展에 有助하리란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信仰이란 것은 때로는 잘못된 길로 들어가기 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類似宗敎集團 중에는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犯罪를 태연하게 행하는 者가 있는 것이다. 한글專用論者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世人들은 그들을 한글信仰者로 보고 있다.
어찌하여 그들을 信仰者로 보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理論이 통하지 않고 또한 그들은 科學的인 방법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信仰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個人이 信仰한다는 범위를 벗어나 國家政策이 이 信仰을 따라간다는 것은 危險千萬한 일이다.
한글專用論者들도 敎育에 관한 限 그 信仰을 國策에 實現시킬 慾心을 버려야 할 것이다. 참으로 國家民族을 사랑한다고 하면 지금 이 시간에라도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國家政策의 가장 중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敎育政策이 正道를 밟게 하는 데 협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國家民族에게 贖罪를 바라는 唯一한 방법일 것이다.
(어문연구 창간호. 1973년 가을)
劉鳳榮(1897∼1985)
1945∼1971 朝鮮日報 校正部長, 編輯部長, 論說委員, 主筆, 副社長.
1966. 4. 白山學會 創立, 副會長에 被選. 1972 同會長
1969. 7. 韓國語文敎育硏究會 副會長에 被選
1971. 5. 第8代 國會議員 當選
1972. 4. 財團法人 民族文化推進會 理事長에 被選, 1982年까지 재임
1980. 顯正會 理事
< 解 說 >
甲午更張(1894)에서 文章語를 그때까지의 漢文에서 國文으로 바꾸도록 闡明한 이래 우리의 文章語는 漢字, 漢字語句가 너무 많은 比率을 차지했던 이른바 開化期文體에서 出發해서 점차 보다 合理的이고 近代的인 文體로 發展되어 왔고, 1920∼30年代에 이르면 우리의 文章語는 거의 近代的이며 바람직한 것으로 完成되었다.
그것은 漢字語는 漢字로 적으며 입말에 될수록 가깝도록 言文一致된 文體였다. 이 近代的인 文章語로서 敎科書나 學術書籍이나 文學書나 新聞, 雜誌들의 文章이 쓰여졌으며, 그리고 中等學校, 아니 初等學校 敎育만 받은 사람들도 이들 文章을 읽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國語文章語에 만족하였었다.
그런데 歷史에서는 흔히 나라의 運命을 그르치는 者들이 得勢하여 일어나는 일이 있는 것이라, 나치스가 일어나듯이, 파시스트가 일어나듯이, 볼셰비키가 일어나듯이, 크메르루주가 일어나듯이, 1945년 祖國 光復이 되면서 이 國語文章語를 破壞하려는 者들이 勢力을 얻어 일어났으니, 곧 한글專用主義者들이었다.
그들의 中心勢力은 한글학회의 會員들이었는데 日帝下에서 그들이 우리말 글의 정리를 하는 데에 從事하였다는 것을 빌미로 日本統治者가 물러가고 잠시 主人이 없는 세상에서 이들은 새 나라의 國語國字問題를 決定하는 데에 크게 發言權을 行事하고, 文敎의 權柄을 잡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우리 國家 民族을 위해서 不幸한 일은 이들이 우리 國家 民族을 亡國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잘못된 信念으로 뭉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든 나치스 以下 惡의 勢力들은 國家權力을 잡아서 國家 民族을 잘못된 데로 이끌었지만 이들 한글專用主義者들은 社會體制, 國家政治에 못지 않게 重要한, 敎育·文化·學術의 바탕이 되는 國語文章語를 잘못된 것으로 망침으로써 流毒하였다.
그들은 외워대기를 漢字는 배우기 힘들며, 漢字는 中國의 文字이며, 漢字는 지난날 우리 나라를 衰滅로 이끈 文字이기 때문에 漢字를 우리 文章語에서 몰아내어 버려야 한다 하고, 그 漢字抹殺의 實踐으로서 한글專用法案을 國會에서 通過시키고 敎科書에서 漢字를 없애버리며 學校敎育에서 漢字를 가르치는 길을 막아 버렸던 것이다.
이들 한글專用主義者들이 기를 쓰고 하려는 일은 歷史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었다. 한글專用主義者들은 흔히 한글專用을 反對하고 漢字를 쓰자는 사람들을 두고 歷史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고 非難하지만 이 말은 바로 한글專用論者들을 위해서 쓸 말이었다. 왜냐하면 歷史의 時間을 40∼50年 뒤로 돌려서 그 當時의 周時經이란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을 메고 나와 옳은 方向으로 굴러가고 있는 우리의 文章語를 그 "잘못된 생각"의 方向으로 어거지를 틀어 놓은 것이 한글專用者들의 한 짓이기 때문이다.
한글專用論은 일찌감치 開化期初에 周時經 등에 의해서 形成되었다. 그 때 한글專用論을 主張하는 根據로 됐던 것은 대개 다음 서너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같이 잘못된 것이었다.
우선 當時 우리 人民의 絶對多數가 文盲이었는데 그런 狀況에서 文章語는 마땅히 한글專用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1945年 光復 무렵 우리 나라 人口의 80%가 文盲이었다는 統計가 있으니 그보다 40∼50年 前인 開化期 때야 거의 全人民이 文盲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根據는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中等學校 敎育課程까지 義務敎育이 되어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百年大計인 國語文章語의 결정에 當時의 一時的인 狀況에 根據를 두었다는 것 그 自體가 誤謬를 犯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한글專用論 形成에는 當時 우리 나라에 와 있던 宣敎師를 비롯한 西洋人들의 意見이 反映되었다. 西洋人 宣敎師들은 基督敎 宣敎를 위해서 聖經을 純한글文으로 飜譯하였으며, 그들은 朝鮮人들에게 알파벳이나 한글이나 다 한가지 單音文字이니 西洋語의 文章이 알파벳만으로 적히듯이 國文도 純한글文體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勸하였다.
또 西洋人들은 朝鮮사람들이 한글 같은 좋은 文字를 두고 漢文을 崇尙함은 어리석은 일이니 漢文, 漢字를 내버리고 한글만으로 文字生活을 할 것임을 慫慂(종용)하였다.
周時經은 西洋人들과 가까이 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우러러 보이는 西洋人들의 勸告에 그가 크게 影響을 받았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따져 보면 西洋人 宣敎師들이 聖經을 純한글文으로 飜譯한 것은 그들의 宣敎對象이 거의 文盲이었기 때문에 取한 措置였으니 이 根據는 첫 번째의 根據와 條件이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글이 알파벳과 같은 單音文字이라든가, 그러기에 國文도 西洋語의 文字法을 본받을 것이라든가 하는 따위 主張은 모두 理論的으로 따져 볼 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 그 論證을 펼 겨를이 없는데 마침 本誌 2001년 5월號(통권22호)의 申昌淳 「한글學者의 그릇된 한글 認識과 한글專用論」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讀者는 그 글을 통해 위 論證의 내용을 보시기 바란다.
셋째로 周時經 등은 '漢字'. '漢文', '漢字語' 세 가지의 各其 判異한 槪念을 본간 못하고 混同하고 있었으며, 또 이들의 國語文章語와 關聯해서의 近代的 意義도 옳게 認識하지 못하고 있었다. 問題對象에 대한 이러한 迷惑과 認識不足에서 한글專用 같은 잘못된 생각이 자아내어졌던 것이다.
우선 위 세 가지에서 漢文은 甲午更張에서 이미 우리의 文章語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闡明되었거니와 그러나 當時만 해도 그들 周圍에는 아직도 漢文이 健在했으므로 그들은 文章語 決定에 있어 漢文의 重壓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말하자면 이미 問題될 것이 없게 된 것을 아직 存在하는 것으로 錯覺하고 問題삼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漢文의 어려움을 漢字의 어려움과 混同하여 漢字의 배우기 어려움을 誇張 擴大하고 漢字廢止를 외워 댔던 것이다.
한편 그들은 앞으로 펼쳐질 近代社會에서 '漢字語'가 매우 重要한 役割을 擔當하게 되는데 대해서는 전혀 認識이 缺如되어 있었다. 近代國語文章語 樹立을 생각함에 있어 最優先으로 考慮해야 할 것이 漢字語의 意義에 대한 認識이어야겠는데 그것이 缺如되어 있었으니 그들 머리에서 나온 한글專用論이 옳을 까닭이 없었다.
漢字語는 漢字를 前提해서 成立된다. 漢字語가 近代社會에서 重要한 구실을 이루어야 한다면 漢字의 必要는 따라서 絶對的인 것이다. 그 重要한 漢字를 없앤다, 못 배우게 한다는 것이 한글專用論이고 보니 그 미련하고 不合理하고 모자라는 생각에는 기가 막힐 뿐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폴 포트 등 狂人들이 權力을 잡고 國家·民族을 不幸과 滅亡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歷史가 있었듯이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나라의 운명을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일이 바야흐로 우리 나라에서 한글專用者들에 의해서 저질러 지고 있다.
한글專用主義者들이 나라와 겨레에 끼친 罪過는 위에 든 歷史의 狂人들에 결코 못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언젠가는 저들 狂人들에게 내려진 바와 같은 峻嚴한 歷史的 民族的 斷罪가 한글專用主義者들에게도 내려져야 할 것이지만, 歷史를 이렇게 正當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우리 國民이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가리고 그른 것을 바로잡아 가는 智慧와 勇氣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